11. 푸른 눈에 담긴 세상 (1)
햇볕이 쏟아져내렸다.
초록빛 산은 누군가 정성들여 깎아놓은 듯한 계단 모양이었다. 산 정상의 유적과 마주하려면 방문객은 자잘한 계단을 한참동안 올라야 했다. 옛날 원주민들이 돌을 날라 웅장하게 다져놓은 건물들은 이백 년 전 무너져 주춧돌밖에 남지 않았다. 인간이 무너뜨린 잿빛 폐허를 제 집처럼 가로지르는 소년이 있었다.
머리칼은 근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원주민 아이들처럼 검었지만 피부는 희었다. 짧게 자른 머리카락 아래, 흰 목덜미에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혀 보석처럼 반짝였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피부는 아무리 햇빛을 쬐어도 그을리지 않고 희었다.
곱게 자란 이들은 채 반도 오르지도 못할 만큼 가파른 계단을 가볍게 뛰어올라 한참이나 유적을 헤치고 달린 소년은 이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방울처럼 큰 눈에 반가움이 서렸다.
"코코!"
그 곳에 한 남자가 있었다.
탁한 검은색 머리카락을 공주처럼 곱게 길러 한 가닥으로 묶었다. 어디가 시작인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문양을 수놓은 커다란 천을 휘휘 감아 걸치고, 색색의 돌을 꿴 귀걸이와 목걸이와 팔찌를 수십 개나 몸에 달고 있었다. 피부에도 붉고 푸르고 흰 물감으로 무늬를 그려놓아 차마 눈 둘 곳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화려했다.
그런 그의 외양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눈이었다. 잘 숙성시킨 포도주 같은 자줏빛 홍채가 소년을 담았다.
"어서 와라, 지안(Gian)."
코코라는 이름은 남자의 외양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둘 모두 개의치 않았다. 소년은 남자를 들이받듯 달려가 안겼다.
"코코는 오늘도 제단에서 노네? 무슨 생각해?"
남자가 앉아있는 곳은 넓적한 돌판이었다. 한 때 화려한 문양을 새겨 덮어놓았던 천장이 사라졌으므로 제단은 고스란히 햇볕에 노출되었다.
"슬슬 출출하다는 생각?"
제단 위에서 꿈틀거리던 팔다리, 비명, 눈물, 쫄깃한 심장. 몰려오는 맛난 기억들. 생각만 해도 입에 침이 고인다는 듯 남자가 웃어보였다.
"안 그래도 노체 아저씨가 그러는데 곧 외지인이 엄청 몰려올 거래!"
"이런 벽지(僻地)까지 무슨 일로?"
한 때는 찬란한 왕도였으나 금붙이는 모두 약탈당하고 남은 것은 풀 사이에 묻힌 돌 뿐 아닌가. 산 밑은 간간이 명맥을 이어나가는 원주민들과 본국에서 쫓겨와 정착한 이들이 섞여 한가로웠다. 항구와는 거리가 있어 외지인을 찾기 힘들었다. 간혹 호기심 많은 탐험가나 한량들이 관광을 한답시고 몰려오곤 했지만 그 수는 결코 많지 않았다. 유적 안내로 수입을 기대하기 어려운 입장이었으므로, 근방 마을 사람들은 양을 치고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꾸려나갔다.
자줏빛 눈에 의아함이 서리기 무섭게 지안은 소리 높여 떠들었다.
"신의 가르침을 전하러 온대. 선교사인가봐!"
"오호."
남자는 김이 샜다는 표를 내지 않고 웃었다.
이런 벽지에도 물론 교회가 있었다. 선교사니 신부니 목사니 하는 자들은 마치 바글거리는 쥐처럼 다투며 세를 불려나갔다. 남자는 산 위에 앉아 무료하게 그들을 내려다보곤 했다. 사라진 마법과 오색의 물거품처럼 꺼져든 영광. 쇠락하여 힘이 남지 않은 남자로서는 간혹 찾아오는 지안을 상대하여 이야기를 듣는 것만이 유일한 소일거리였다.
"이번에도 과자 줄까? 응?"
"글쎄다."
"어머니는 천을 줬으면 좋겠다셔. 리아나(Liana, Ileana의 애칭)가 요즘 새 옷 갖고 싶다고 조르거든."
이 마을 사람들은 신교도가 오면 구교도가 되고, 구교도가 오면 정교도가 되고, 정교도가 오면 신교도가 되었다. 그리 번갈아 행세하며 야만인과 냉담자를 교화시키려는 자들에게 물자를 얻어내곤 했다.
"있지, 코코."
"말해보아라."
"나, 마을 밖으로 나가고 싶어."
꿈을 담은 눈이 후끈 열기를 머금었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기원이 감칠맛 돌았다.
"엄마는 안 된다고 하시지만, 난 꼭 갈 거야. 파올로 아저씨가 그러는데 열네 살만 되어도 선원으로 써준대. 선원이 되면 온 세상을 다 돌아다닐 수 있다고 했어!"
파올로는 해상전에서 다리가 잘려 은퇴한 선원이었다. 남자는 우아하게 턱을 기울였다. 물론 그 남자는 보살펴 줄 뒷배가 없는 어린 선원들이 어떻게 착취당하고, 학대당하는지, 그러다가 짧은 생을 마감하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았으리라.
"선원으로 일을 하다가 돈을 모아서 상인이 될 거야. 도제로 들어가서 열심히 하겠다고 하면 뽑아주지 않을까? 응? 엄마는 항상 내가 아버지를 닮아서 키가 클 거라고 했어!"
소년은 자랑스레 새파란 눈을 반짝였다. 지안(Gian), 즉 지오반니라는 서부식 이름과 달리 그 눈은 북쪽의 것이었다.
"멋있게 자라서 돈을 모은 다음 배를 살 거야. 배를 사서 증조할아버지를 찾으러 가야지. 배가 다섯 척쯤 있으면 증조할아버지도 날 보고 기뻐하시겠지? 응? 우리 엄마랑 예나도 예뻐해주실까?"
남자는 수백 번도 더 들은 소년의 포부를 지루한 기색 하나 내비치지 않고 음미했다.
"그래. 넌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성의 없게 들릴 수 있는 답변이었지만 소년은 활짝 웃었다.
"그래서 말인데, 나 돈이 필요해."
"오호."
뭉게구름 같던 포부가 조금은 형체를 띠었다.
"여기서 항구까지 꽤 멀잖아. 마차로 열 밤도 더 걸린다는거야! 그러면 마차 삯이 있어야 해. 걸어가면 신발이 죄다 닳아빠질 거거든."
어린아이답게도 마을을 빠져나가 먹을 물과 식량에 대해서는 생각이 닿지 않은 듯했다. 남자는 여기서 항구까지 어린아이의 걸음으로 열 밤보다 훨씬 더 걸린다는 사실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길가다가 총독이 달라고 하면 돈도 쥐여줘야 한댔어!"
무려 '총독'이 대체 왜 어린 사내아이가 가는 길을 막는지는 소년의 머리통을 열어보지 않는 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돈이, 좀 필요한데 말이야. 지금부터 준비해야 된다고 하더라고! 물론 어머니께서 조금씩 주시는 은화도 모으고 있기는 한데, 그래도 부족할 것 같아서...... 아니 엄마가 돈을 적게 주신다는 건 아니야! 그냥 조금 더 많이 갖고 있으면 좋겠다고......."
"무엇 하나 쥐어주고 싶어도 다 쓸리고 빼앗겨 더이상 남은 것이 없다만."
"선교사들은 돈이 있잖아? 여기까지 마차를 타고 왔을 테니까!"
"그래, 알았다."
남자가 웃었다. 뾰족한 송곳니가 언뜻 드러났다.
"돈주머니는 꼭 남겨서 널 주마."
"정말? 고마워!"
소년은 행복에 겨워 남자를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