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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12. 시작을 알리는 소리 (8)


 보르디의 옐레나 키릴로브나 여제가 꿈을 꾸는 일은 드물었다.

그녀는 항상 일정한 시간에 침대에 들어 숙면에 들곤 했다. 로렌 출신 여제의 잠귀가 얼마나 밝은지 아는 시녀들은 취침시간에는 침실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고, 간혹 꿈이 찾아오는 날에도 악몽은 여제의 근처에 범접하지 못했다. 여제는 오십 년 넘는 생애에 걸쳐 죽은 사람의 환영을 마주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일 따위는 한 번도 겪은 적이 없었다. 

 마르그리트 안이 찾아온 그 날도, 아들의 죽음을 어떻게 발표해야 좋을지 상아말을 들여다보며 골머리를 썩이던 여제는 어둠을 포근한 이불 삼아 갓난아이처럼 잠들어 있었다.

 -내가 이겼어.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제는 누운 채로 고개를 돌렸다. 웬 여자가 입이 찢어질 듯 환하게 웃고 있었다. 새카만 어둠 속인데도 희한할 정도로 모습이 잘 보였다. 촌스러운 갈색 머리카락을 손질도 하지 않은 채 늘어뜨리고, 피부를 한층 검게 보이게 하는 노란색 옷을 걸쳤다. 머리에는 관, 귀에는 귀걸이, 손에는 두 개의 반지, 팔찌와 목걸이. 발루아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마담 라 세르'의 장신구 일곱 점. 삼십 년 전의 거울의 홀에서 막 빠져나온 듯했다.

 여제는 누운 채로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 턱선이 막내딸과 놀랍도록 똑같았다. 

 -마르그리트 안 로를레앙.

 긴장을 풀고 푹 퍼져있는 이성으로도 알 수 있었다. 꿈이로구나. 

 옐레나 키릴로브나, 보르디의 엘리엔 소피 아델라이드는 쉰 살이 넘었다. 죽은 큰아들이 살아있었더라면 아마 서른 살이 되었을 것이다. 마르그리트 안은 그런 여제보다 열 살이 많았다. 그런데 지금 눈 앞의 여자는 삼십 년 전의 거울의 홀에서 막 빠져나온 듯 팽팽한 얼굴이었다. 스물후반에서 서른 쯤일까. 

 -내가, 이겼어! 내가 이겼다고!

 살짝 처진 눈, 금발이 되다 만 갈색 머리카락, 비죽 나온 입술, 얼굴을 뒤덮은 잡티. 뜯어볼수록 생생했다. 여제는 다소 흥미로워졌다. 자신이 저 못난 얼굴을 이토록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단 말인가? 저 미적인 구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자태를? 물론 당시에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던 것 같다. 젊은 치기에 뺨을 갈기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홀을 빠져나왔지. 물론 대강의 얼개는 기억했다. 그만큼 인생에서 중요한 사건이었으므로. 그러나 세월은 가장 훌륭한 지우개였다. 식빵으로 문지른 목탄화처럼 기억은 중요한 부분만 남기고 흐려졌다. 흐려진 부분에는 당연스레 마르그리트 안의 멍청한 얼굴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가, 내가 이겼단 말이야, 이년아. 분하지? 응? 분해 죽겠지?

 마르그리트 안은 손가락질 하며 깔깔거렸다. 카랑카랑한 웃음소리가 메아리쳤다. 여제는 시끄러운 나머지 미간을 찡그리며 결국 몸을 일으켰다. 방금 전까지 몸을 감싸고 있던 어둠이 사르르 흘러내리며 편안한 잠옷이 드러났다. 꿈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잠옷은 이내 화려한 정복으로 바뀌었다. 어깨부터 허리를 가로지르는 붉은 띠, 가슴에는 다이아몬드로 된 별이 반짝였다. 삽시간에 풀어내린 금빛 고수머리가 저들끼리 얽히더니 올린 머리로 바뀌었다. 관까지 갖춘 여제는 자리에서 일어서 마르그리트 안과 눈을 마주쳤다. 

 네 개의 눈은 비슷한 높이에 위치해있었다. 여제가 웃었다. 나이 든 여제의 아름다움은 젊음의 생기를 두른 황후를 압도할 지경이었다. 

 -내가 너 따위를 이렇게 잘 기억하고 있었던가? 놀랍네. 

 자연스레 반말이 흘러나왔다. 툴루즈의 아가씨 엘리엔 소피 아델라이드는 블루아의 아가씨 마르그리트 안에게 말을 놓은 적이 없음에도. 

 마르그리트 안의 얼굴이 구겨졌고, 반대로 엘리엔의 입술은 고운 호선을 그렸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존심이 상해서 어이가 없었다.

 가장 영광스러워야 할 결혼식 날 피로연에서 뺨을 얻어맞고 평생을 이 갈며 살아온 마르그리트 안과는 달리, 엘리엔 소피 아델라이드는 그 얼굴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당당한 승리자였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게 믿어왔다. 그런데 미하일이 죽자마자 바로 이런 꿈을 꾸다니. 저런 것을 여태 마음 속 한 구석에 두고 있었을까? 그래서 이런 꿈을 꾸는 걸까? 

 -뭘 그리 쪼개는 거야.

 마르그리트 안이 이를 갈았다. 그녀가 손가락질하는 곳에 아이의 시체가 나타났다. 미하일 파블로비치 키옌. 막내아들이었다. 

 -아들이 죽었는데, 응? 네 년한테는 하나밖에 안 남은 아들이 죽었는데 웃음이 나와?

 여제는 무심한 얼굴로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대소변도 제 뜻대로 가릴 줄 모르던 어린 아들은 며칠을 앓더니 허망하게 숨을 놓아버렸다. 덕분에 골치아프게 되었다. 

 적어도 십 년쯤은 더 살아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여제는 미하일이 훌륭하게 커서 제 편이 될 거라는 순진무구한 기대는 애초에 가지지 않았다. 그 많은 자식을 낳고 키웠지만 흡족하게 자란 것은 단 한 명 뿐, 그나마도 요절하지 않았던가. 뉘를 닮을지 닮지 않을지는 얼굴 말고는 쉽사리 단언할 수 없는 일이다. 못 자라면 다행이고 잘 자라도 문제다. 여제 자신을 닮는다면 틀림없이 '남편을 죽인 어머니'라는 숙청의 명분을 칼자루 삼아 칼을 담금질하리라. 반편이 아롈조차 열네 살에 체사레브나의 위를 쥐더니 제 아비를 내치려하지 않았던가. 명분이란 어느 시대에나 중요한 법이다.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아 이래라 저래라 하는 어미가 꼴보기 싫어지고 달콤한 소리를 지껄이는 신하에게 마음이 가지 않으리라고 어찌 장담할까? 

 그렇다고 아들을 잘 키워서 황위를 물려주고는 순순히 뒷방으로 물러날까? 

 이왕 손에 굴러들어온 황위, 스스로 놓을 생각은 없었다. 처음부터 쥐지 않았으면 모를까 가지게 된 것을 왜 놓아야 한단 말인가? 

 그리하여 십 년을 계획했다. 귀족들간의 알력 싸움을 부추기고, 친 여대공 파를 차근차근 숙청하고, 숙청할 수 없는 주요 군 세력은 전쟁을 일으켜 소모하고, 코시카 내부의 방계 계승권자들에게 걸려들지 아닐지 알 수 없는 덫을 여러 개 놓아 미래를 대비하고, 타국을 협박하고 어르고 달래어 계승권자를 확보하고, 종래에는 로렌에서 빌려온 세력을 없애고 여제 자신에게 충성하는 군을 키우는 것까지. 하루 아침에 만들 수 있는 일은 아니었으나 차근차근 밑그림을 그리고 토대를 쌓던 중에 이 사달이 난 것이다. 

 하여간 명 짧은 것만 제 동기들을 닮아서. 제 아비를 꼭 닮아서 크면 쓸만한 얼굴이 되었을 텐데. 덕분에 골치만 아파졌다. 사흘 내내 고민하던 것들이 와르르 떠올라 머리가 아팠다.

 -네 자식들은 전부 뒈졌어! 뒈졌다고! 울어! 울면서 아무 것도 아니게 된 네 신세를 한탄해! 

 아니, 하나 남긴 했는데. 

 여제는 굳이 '아무 것도 아니게 된 신세'라는 헛소리에 반박하지 않고 꿈을 스쳐지나갔다. 완전히 무시당한 마르그리트 안이 멍청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Auferte a me viam(비켜).

 -뭐?

 여제는 꿈에서 걸어나왔다. 기묘할 정도로 생생하게 기억나는 꿈이었다. 그녀는 잠시 누운 채 익숙한 천장을 바라보다가, 침대에서 내려와 실내화에 발을 밀어넣었다. 모피가 발등을 간질였다. 사박사박 소리를 내며 탁자에 펼쳐놓은 상아말로 다가갔다. 요정 할머니가 남몰래 찾아와 미래에 대한 해답을 알려주는 기적 따위는 없었다. 자기 전 펼쳐놓은 그대로였다. 

 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현실이 묵직하게 어깨를 내리눌렀다.

 미하일이 죽었다. 

 고작 홍역 따위에 죽어버렸다. 워낙 병세가 중해서 반병신이 될 수도 있다며 어의가 더듬더듬 고한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아 숨을 멈춰버렸다. 

 죽으려면 차라리 이 년 전 쯤 일찍 죽을 것이지 왜 이제야 죽는단 말인가? 안 그래도 마녀네 뭐네 하던 성황청이 기세등등해질 것을 생각하니 모든 것이 귀찮아졌다. 게다가 미하일 대공의 생모라는 이유로 침묵하던 늙은이들은 또 어떻고? 일어날 일들이 피곤해서 체사레비치의 죽음은 현재 극비에 부쳐져 있었다. 의사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미하일의 방을 오갔고, 시녀들은 미하일의 이유식을 준비했다. 그러나 짧은 유예에도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날이 추운 코시카라고는 해도 지금은 여름이었다. 만년설로 시체를 둘러싸 부패를 늦추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미하일의 시체가 썩기 전에 그의 훙서(薨逝)를 공표하고 장례를 치러야 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여제는 어둠 속에서 희게 빛나는 상아말들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다가 충동적으로 회랑의 문을 열었다. 딸에게 빼앗은 열쇠를 허공에 찔러넣고 돌리자 문이 나타나 여제를 들여보내주었다. 여제는 관도, 훈장도 없는 잠옷 차림 그대로 회랑에 발을 내디뎠다. 들어온 순간의 초상화가 그려진다는 사실은 그리 신경쓰이지 않았다. 어차피, 이제 회랑에 들어올 수 있는 이는 여제 뿐이었으므로. 

 그녀는 꿀로 빚어 햇살로 막을 입힌 듯한 아름다운 금발을 치렁치렁 풀어내린 채 실내화 차림으로 회랑을 활보하다가 한 초상화를 찾아내었다. 검은 머리가 희어지도록 늙은 남자였다. 새파란 눈을 빛내며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여제는 그제야 제 안에 남아있는 희미한 죄책감의 파편이 어디에서 왔는지 정체를 찾아내었다. 

 -아가. 

 시아버지는 멀리서 시집온 엘리엔에게 많은 힘을 실어주었다. 소피야 황후가 붕어한 이후에는 숫제 안살림을 갖다 맡겼다. 천한 핏줄에게 맘을 빼앗겨 자식부터 본 막내아들과 결혼해준 번듯한 며느리를 몹시 아껴 필요 이상으로 많은 것을 주었다. 

 이반 3세의 손자녀 중 키옌, 키예나 성과 황위 계승권을 동시에 지닌 자는 이제 단 한 명도 남지 않았다. 시아버지의 유언은 그녀의 강인한 영혼에 지워진 무른 마음의 빚이었다. 미하일이 황위에 오르리라고 생각했을 때에는 딸을 팔아치우면서도 조금도 신경쓰이지도 않던 빚이었건만 어쩌면 그 빚이 형상화되어 방금의 그 터무니없는 꿈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신경 쓰였다. 그 같잖은 꿈이 증거 아닌가. 

 여제는 초상화를 잠시 들여다보다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죽은 사람의 초상화에 대고 말을 거는 유치한 짓은 하지 않고, 발걸음을 돌려 침실로 돌아와 상아말 두 개에 가볍게 글씨를 적어넣었다.

 콘스탄틴 대공 : X

 작센 : O

 그리고는 다시는 꿈을 꾸지 않고 마음 편히 잠들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상 항상 너무 잘 읽고 있어요.
좋은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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