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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12. 시작을 알리는 소리 (11)


 다시 눈물이 꽃망울처럼 부풀어올라 그렁거렸다. 눈을 보고 싶은데, 눈물에 가려서 보이질 않았다. 그 말이 버팀목이라도 된 듯 아롈은 말을 멈추고 숨을 헐떡였다. 손가락으로 눈물을 아무리 훔쳐도 눈물이 계속 흘러나왔다. 아롈은 한 번 울 때 많이 울었다. 어렸을 때 울지 못하고 쌓아놓은 눈물을 지금이라도 흘리려는 것처럼. 

 "우습지요."

 "전혀요."

 "동생이 죽었는데, 제가 놓친 것부터 생각이 나는 겁니다. 다 포기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가지 못 하는 길이니 미련은 없다고 여겨놓고선. 로렌에서 살 거라고, 세시안과 행복하게 살면 그만이라고 여겼는데." 

 "알아요."

 사실은 모른다. 어떤 심정인지 짐작할 뿐이었다. 한 자루 검 같은 자존심이 무너져 꽃잎점을 친 후의 꽃대처럼 처참했다.  

 "내가 선택한 주제에. 더 중요한 약속이 있으니까, 나는 다시는 쓰지 않기로 했으니까, 그런 건데. 그랬으면 다시 뒤돌아보면 안 되는데, 동생이 죽었다고 하니까, 천박하게, 그 자리가 이제 다시 내 것이라도 될 것처럼."

 -제가 선택한 겁니다.

 가장 약해보이던 순간조차 꼿꼿하던 자존심이 박살나 눈물이라는 이름으로 바닥에 흩뿌려졌다. 

 세시안은 죄책감에 잡아먹힐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무너질 때가 아니었다. 끌어안고 같이 우는 일이야말로 무책임의 극치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기댈 수 있게, 그는 꼿꼿이 서 있어야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때 칼로, 그랬으면? 어차피 죽을 거, 그랬으면, 이런 생각만 계속 뱅글뱅글 도는데, 욱."

 아롈은 정말로 헛구역질을 하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세시안은 따라서 앉아서는 어깨를 쓸어내렸다. 아까 전부 토해서 나오는 것은 없었다. 아롈은 몇 번 구역질을 하더니 고개를 그대로 떨궜다. 카페트 위로 흐트러진 금발이 절망의 파편처럼 반짝였다. 마음을 평평하게 고르듯 몇 번 어깨가 오르내렸다.

 물기를 꾹 짜낸 듯한 목소리가 어둠을 울렸다.

 "아무리 후회해도 되돌릴 방법은 없겠지요. 미하일은."

 죽었으니까. 

 -누가 죽였을까요?

 차라리 범인이라도 존재한다면 언젠가 복수할 수 있다. 그러나 병이라면, 그저 신의 뜻이라면, 대체 인간은 무엇을 원망하고 매달려야 한단 말인가? 

 그는 차가운 뺨에 손을 얹었다. 생각을 따라 움직여 미궁의 한복판으로 들어가려고 애썼다. 다행히 그는 어느 정도 이런 일에는 익숙했다. 막막함이라는 가시덤불을 헤치고 한가운데에 들어갔다. 투명한 수정처럼 결백하여 스스로를 계속 깎아내리는 영혼이 자신이 너무 추하다며 눈물흘리고 있었다.

 금강석은 금강석으로 다듬는다. 아무리 깎아내려도 그의 눈에는 티끌 하나 없이 휘황하기만 했다. 

 "저는 아렐르를 사랑해요."

 강하고, 성실하고, 책임감 강하고, 의연하고, 자존심 강하고, 긍지 높고.

 처음 반한 순간부터 보였던 장점들은, 이 년 넘게 살을 붙이고 살아온 지금 잘게 세분화되어 보였다. 단점이었던 부분도 덧칠되고 장점이었던 부분은 더욱 도드라져, 그야말로 천 가지나 만 가지 쯤의 아름다운 말을 골라서 속삭여줄 수 있었다. 

 "코시카의 옐레나 파블로브나, 엘리엔 필리피느 소피 아델라이드, 내 심장의 주인이자 내 삶의 끝, 그런 당신을 사랑해요."

 대신 그는 이야기했다. 흔들리는 연인에게, 자신의 애정만은 결코 흔들리는 일 없이 여기 있을 거라고. 

 "그러니까, 이래도 사랑할 거냐는 질문은 다시는 하지 않아도 돼요. 저는 항상 아렐르를 사랑할 테니."

 평생 배워온 윤리와 도덕을 통째로 뽑아내어 개목걸이를 채워다 손에 쥐어주는 기분이었다. 동생이 죽은 것을 알고 차라리 내가 먼저 죽일 걸 후회하는 누나가 뭐 어떻단 말인가? 겨우 그런 것을 두고 어떻게 정이 떨어질까? 이래도 사랑할 거냐는 물음 자체가 모욕적으로 느껴진 순간, 세시안은 차가운 머리로 깨달았다.

 스스로가 영원히 이 소녀에게 얽매였음을.

 아롈이 두려워하며 털어놓은 자괴감들은 조금도, 정말 티끌만큼도 실망스럽지 않았으므로. 

 울음이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흑. 으윽."

 같이 추모할까요? 그렇게 물어 손을 내미는 대신,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기다렸다. 굳이 잡아일으키지 않아도 혼자 충분히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세시안."

 흐느끼다가, 잠잠해졌다가 다시 눈물을 닦고는 아롈은 고개를 들었다. 소금기가 달라붙어 허옇게 말라붙은 얼굴이 의연했다.

 "네."

 "추모를 하고 싶은데 같이 있어주겠어요?" 

 "아이의 ​자​형​(​姊​兄​)​으​로​서​,​ 기꺼이요."




 아롈은 벗어던졌던 까마귀 공주의 옷을 다시 걸쳤다.

 명도와 채도를 낮춘 은은한 색감의 옷이 유행했으므로 여름 옷 중에는 검은 옷이 단 한 벌도 없었다. 그렇다고 상복을 입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코시카에서 정식 부고가 오기 전에 아롈이 상복을 입는 건, 황실의 내밀한 소식을 빼내어 공공연히 떠드는 세작(細作)이 있다고 소리치는 것과 다름이 없었으므로. 그나마 검은 옷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저도 갈아입고 올까요?"

 고개를 저었다. 세시안은 여전히 기사의 옷을 걸치고 있었다.

 "자기만족일 뿐입니다."

 다시금 깨끗이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어서 한 갈래로 땋았다. 차림을 갖추지는 못해도 단정하게 보내주고 싶었다. 화병에는 리젤로트가 어젯밤 꽂아두고 간 싱싱한 꽃이 가득했다. 꽃 세 송이를 뽑아내고, 술을 한 잔 따랐다.

 오늘의 달은 그믐달이었다. 초저녁에 저물어 한밤중에는 이미 지고 없는 야속한 달 때문에 밤하늘은 달빛 없이 별들로만 반짝였다. 

 속이 따끔거렸다. 수십 회의 구토로 등근육과 목까지 욱신거렸다. 그래도 허리를 펴고, 턱을 당겼다. 미하일 파블로비치 키옌은 그런 대우를 받으며 전송될 가치가 있는 아이였다.

 창문을 열고, 꽃을 들어 입맞추어 잠시 묵념했다. 

 미하일, 용서해줘. 이것밖에 안 되는 누나를 용서해줘. 

 죽은 사람은 용서할 수 없었다. 아롈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아버지와 시녀들은 요즘도 한 달에 한 번쯤은 꿈에 나왔다. 그럴 때마다 세시안은 아롈을 깨워서 빳빳하게 굳은 몸을 안아주곤 했다. 이제 동생도 꿈에 나오려나. 하지만, 얼굴조차 가물가물 했다. 갓난아기의 얼굴이란 아무리 미형이라 해도 거기서 거기였다. 친탁을 해서 알렉산드르를 닮은 검은 머리에 파란 눈이라는 것 이외에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이걸로 용서해줄래? 

 아롈은 쓰게 웃었다. 동생을 살려두었다고 후회한 대가로 꿈 몇 번은 너무 쌌다. 

 "Славьте Господа, ибо Он благ, ибо вовек милость Его.(주께 감사하라. 주께서는 선하시며 인자하심이 영원하리로다)."

 마른 입술이 갈라져 피가 맺혔다.

 시편 118장은 코시카에서 가장 흔하게 추도식에서 쓰이는 문구였다. 

 아롈은 조부인 이반 3세가 붕어했을 때를 떠올렸다.

 사후 3일, 9일, 그리고 40일.

 관에 누워있는 시신에 무릎을 꿇어 경의를 표하고, 세 송이의 조화를 바치고, 술을 마셔야 하는데. 

 지금은 관도 없고, 꽃은 보들보들한 생화이며, 술도 세시안이 즐기는 브랜디 뿐이었다. 

 "Да скажут ныне боящиеся ​Г​о​с​п​о​д​а​(​주​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아롈은 멈칫했다. 성경이라도 펼쳐놓을 걸 그랬나. 신앙심이 깊지 않은 아롈은 유명한 성경 문구만 간신히 알고 있었다. 

 "оспода: Он благ(그 분은 선하십니다 라고)."

 "Dicant nunc, qui timent Dominum quoniam in saeculum ​m​i​s​e​r​i​c​o​r​d​i​a​ eius(주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일컬어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리로다)."

 나지막한 미성이 머뭇거리는 아롈의 목소리를 자상하게 덮었다. 커다란 손바닥이 아롈의 손을 잡고, 속삭이듯이 시편을 읊어나갔다.

 "De ​t​r​i​b​u​l​a​t​i​o​n​e​ invocavi Dominum et exaudivit me educens in ​l​a​t​i​t​u​d​i​n​e​m​ ​D​o​m​i​n​u​s​(​곤​경​ 속에서 내가 주님을 불렀더니 주님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으로 이끄셨네)."

 성경을 암기는 하지 못해도 들으면 이해할 수 있었다. 피로한 머리는 아주 익숙하게 페란토를 해석하여 캬트 어로 바꾸었다. 아, 그랬지. 저런 내용이었지.

 주님께서 나를 위하시니 나는 두렵지 않네.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주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이시니 나를 미워하는 자들을 나는 내려다보리라. 나를 쓰러뜨리려 그렇게 밀쳤어도 주님께서는 나를 도우셨네. 

 "Deus meus es tu, et ​c​o​n​f​i​t​e​b​o​r​ tibi Deus meus, et exaltabo te(당신은 저의 하느님, 당신을 찬송합니다. 저의 하느님, 당신을 높이 기립니다)."

 스물여덟 줄에 달하는 글을 완벽히 낭독한 세시안은 잠시 멈추어 기다렸다. 방금 전 자신을 잃고 부스러지는 아롈이 스스로를 그러모아 일어서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아롈의 혀가 이끌리듯이 수미상관을 이루는 마지막 구절을 읊었다. 

 "Славьте Господа, ибо Он благ, ибо вовек милость Его."

 고요 속에서 부부는 묵념했다. 비록 정치적인 상황부터 생각한 뒤에야 비는 추모라고 하더라도, 내일 일어나면 다시 그 죽음에 대한 활용법과 대처를 논의해야 하더라도, 지금만큼은 흠없는 진심을 다해 빌었다.

 미하일 파블로비치 키옌. 부디 평온하게 잠들었기를.

 묵념이 끝난 뒤 까마귀 공주는 기사를 끌어안았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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