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開花 : 꽃을 피우다)
도대체 어디서 말이 새어 나간걸까. 아니면 릴리안 학생 중에 정보를 캐는 귀재와 정보를 조합해 사실을 추론하는 천재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그 피해만은 명백했다.
꼬르륵.
스미레코는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점심 시간이 이제 이십분쯤 지났는데, 왜 아직도 식사가 들어오지 않느냐고 칼처럼 항의하는 배가 야속했다.
네 머리는, 클래스 메이트는 물론 선배들에게까지 도망가느라 도시락을 챙길 정신도 없었단 말이다. 너무 투정 부리지 마. 라고 진지하게 생각해도 위장은 항의의 울림을 낼 뿐이다.
“하아.”
방금 전 교실로, 정확히는 스미레코를 향해 몰려왔던 사람들의 ‘정말 네가 마리아제에서 환영회에 참가하기로 했느냐’, ‘환영회에서 하는건 뭐냐’ 등등의 질문 공세를 생각하자 머리가 지끈거린다. 사실 입막음을 당한 적은 없지만, 상급생들도 모르는 것으로 봐서는 ‘윗 분’들이 입을 열지 않은건 명백하니 자신이 말할 수도 없는 노릇.
질문중에, ‘유미코님이 왜 빠졌느냐’, ‘왜 유미코님의 대역이 너냐’ 같은 2학년의 결원에 대한 것은 들리지 않았다. 제일 민감한 부분 - 2학년의 차기 학생회 후보 중 한명이 춤에서 빠진다는 것은 노출이 안된 모양이었다. 불행중 다행인가.
“···이러고 있으니, 엄청 궁상 맞네···.”
스미레코는 본관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나무 뒤쪽에 무릎을 모으고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워낙 키가 작은 지라 걸어다니기만 해도 눈에 띈다는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기에 숨으려면 이렇게 철저히 있어야 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나. 한번 도망쳤으니, 예의가 있다면 계속 그렇게 적극적으로 물어 오지는 않겠지만. ‘나한테만 알려주면 안되나요?’ 식의 치근덕거림은 아마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와, 정말 있다.”
“예? 우와아.”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들킨건가 싶어 깜짝 놀랐지만, 곧 둘다 친숙한 목소리란걸 깨달았다.
“스즈란님! 그리고··· 노조미양?”
“평안하세요, 스미레코양. 들었어요. 교실에서 도망칠 정도로 몰려 들었다며요? 하하하.”
스즈란은 재밌다는 듯이 웃으며 엉거주춤 일어난 스미레코의 어깨를 툭툭 쳤다. 노조미는 웃을일이 아니었다며 쓴웃음을 짓고는 스미레코에게 익숙한 보따리를 내밀었다.
“도시락이에요. 이것도 잊고 도망가실 정도로 급했다고 생각해서 가져왔는데···.”
“아··· 고마워요.”
“다행이네요. 혹시 교실로 돌아오면 어쩌나 했어요. 같이 먹어도 될까요?”
기꺼이 동의한 스미레코는 근처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스즈란은 이미 먹고 왔다며 자리만 함께 했다.
“어쨌건, 미안해요.”
갑자기 정중하게 사과하는 스즈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자, 스즈란은 멋쩍은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실은 내가 말 실수로, 스미레코양이 참가 한다는 말을 해 버렸어요.”
“···스즈란님이 셨습니까···.”
하긴 그런 말을 무심코라도 흘릴 사람은, 스즈란님이나 아키하님 정도밖에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히나타님은 소문을 물으러 가면 오히려 속을 읽혀 버릴 것 같은 사람이고, 츠바키님은 물어 보는 사람을 물어 뜯어 버릴 인상이고. 나머지 유미코님이나 사이코님도 입이 무거운 사람인 듯 하니.
“너무 무섭게 노려보면 싫어~.”
미안해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태연하게 웃어 보이는 이 성격은···. 스미레코는 제풀에 한숨을 내 쉬었다. 자신이 실수로 이런 상황을 만들었다면, 틀림없이 정색을 하고 사과하며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할텐데.
- 그래도 스즈란님이 얄밉지는 않았다. 나는 도저히 이렇게는 못해. 사람이란, 각자 이런 차이가 있구나, 하고 새삼 느꼈다.
노조미와 먹는 점심 식사는 꽤나 즐거웠다. 스즈란은 노조미의 강력한 희망과, 스미레코의 지지를 받아 둘이 식사를 하는 옆에서 계속 산백합회의 사람들에 대해 아는 이야기를 해 주었고, 둘은 스즈란의 말에 휘말려 웃기 바빴다.
“너, 너무해요. 설마 정말로 그런-.”
“아니야. 정말이라니까. 츠바키님이 안색을 딱- 굳히니 마리아님이라기 보다는 실로 명왕. 그 얼굴로 ‘말처럼 들리는데 뜻은 안들리는 군요. 시끄러우니 잠시만 조용해 주시겠습니까?’ 라고 말하자, 그 후배 얼굴이 글쎄.”
“바로 이런 얼굴이 되었을걸.”
아. 하고 1학년 두 사람은 동시에 납득했다. 저런 공포와 경악에 질린 얼굴이었을 거야.
스즈란은 방금 자신의 어깨에 걸쳐진 손이 귀신의 것처럼 하얀 것을 보고는, 그 손 만큼이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채로 잔뜩 굳어서 돌아 보았다.
“츠··· 츠바키님···.”
“요 몇일 사이에 벌써 두 번째군. 이렇게 되면 내가 지옥귀라기 보다는 스즈란양이 수다쟁이가 아닌지 의심이 되는데?”
그렇게 말하며 츠바키는 세 사람이 둘러 앉은 의자의 옆에 천천히 걸터 앉았다.
“저쪽 분은?‘
“펴, 평안하세요. 부회장님. 스미레코양과 동급생인 노조미라고 합니다.”
고등부부터 다니기 시작한 스미레코와는 달리, 정통파 릴리안 학생인 노조미는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잘 아는지 잔뜩 긴장했다.
“그런가. 잘 부탁해요.”
작게 미소지으며 말한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자면,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하는 인사로는 합격점은 아니겠지만 평소 츠바키의 이미지와는 꽤나 상반되는 모습인지라 인사를 받은 노조미는 물론 다른 두 사람도 조금 놀랐다.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안주삼아 즐거워 하고 있는 후배들을 발견한 것 치곤 신기하게 좋지.”
“-윽.”
스즈란은 난처하네요, 하하하. 라고 웃으며 물러 났다.
“하지만 들으면 너희들도 ‘이런 제길!’ 이라며 납득할걸?”
그 창백하고 아름다운 입가에 심술과 장난이 뭉쳐 있는 미소가 떠올랐다. 저렇게 거친 말을 쓰면서도 천박해 보이지 않는게 이 사람에게 신이 내린 재능인 걸까. 라고 잠시 망상한다.
“도대체 무슨···.”
“이토록 훌륭한 행실을 보이고 있는 후배들을 만났으니, 후배들이 부끄러워서 선배가 해 줄일을 대신 해 줄거라 믿을 뿐이야.”
자. 라면서 막 도시락통의 뚜껑을 닫는 스미레코와 스즈란의 사이로 두터운 종이 뭉치를 던졌다.
둘이 의아해 하며 들어보자, 대부분이 백지였다.
“이게··· 도대체 뭔가요?”
“히나타 선생님의 숙제. ‘교내에 학생회 용의 건물을 지을만한 장소들과 의견을 적을 것’ 이라더군.”
학생회 건물? 분명히 학생회는 지금 동아리 용의 부실 하나를 학생회실로 쓰고 있었다. 한번 밖에는 간 적이 없지만 상당히 좁아서, 회의를 하기에는 장소가 조금 작은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건물을 하나 지어 버리다니. 과연 아가씨 학교네- 라며 조금 기가 막혔다.
“와아, 드디어 짓는 거군요?”
“기부금과 예산이 꽤 모였다더군. 아마··· 잘은 모르겠지만 아키하가 집에 알아본 바로는 교실 반 정도의 크기로 2층 목조 건물을 지을 수 있을 정도. 라던가.”
교실 반칸이라. 작구나. 하지만 생각해 보면 2층이라니, 창고와 회의실로 쓴다면 현재의 작은 부실보다야 비교가 안될 정도로 넓은 것일 듯하다.
“설마, 이걸 저희가 하라는···.”
“어차피 내가 써도, 결국은 모두가 모여 회의를 할테니 누가 하든 상관 없잖아?”
심술궂은 미소를 짓는다. 저건 궤변이잖아,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선배의 과거 이야기를 하던 사람과 그 이야기를 들으며 웃던 사람은 이미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스미레코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생각을 정리했다.
실은, 기뻤다. 본격적으로 학생회의 일을 돕는 다는 것도 좋았고, 그 일을 맡긴 것이 츠바키님이란 것도 좋았다. 자신을 지명해 일을 맡긴다는 점에서 신뢰 받는 듯한, ‘그저 아는 사이’ 이상으로 인정 받은 듯한 기분이 들어 행복했다.
“-저, 위치 제한 같은건 없나요?”
“없어.”
“교사로부터 너무 가까우면, 공사할 때 소음이 나던가 할텐데.”
“그래서 공사는 방학 중에 한다더군.”
하긴 학교에 공사를 할 때는 그게 상식이지. 에-또, 다른게···.
츠바키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스미레코를 보고 쿡쿡거리며 웃었다.
“너무 심각하게 할 필요는 없어, 꼬맹이양. 우리나 우리 후배들이 들락거리기 편한 위치에 세우기만 하면 되니까.”
“···예에···.”
그렇게 열 낸 것처럼 보였나. 부끄러워서 고개를 푹 숙였다.
- 어?
츠바키님이 일어나서, ‘그럼 내일 방과후까지 부탁해’ 라고 말하고 멀어져 간다. 그 전에- 머리에 손의 감촉이-
“···좋겠네요, ‘꼬맹이양’.”
“예?”
“릴리안 학원에서 제일 무서운 선배님께 귀여움 받다니 무서운게 없겠어요.”
츠바키님의 것보다 좀더 농도가 짙은, 놀리는 얼굴을 한 스즈란님이 날 보며 웃고 있다.
- 착각이 아니었구나. 자신의 머리를 만지작 거려준 것.
홀린 듯, 멀어져 가는 가냘프고도 당당한 등을 보았다. 마리아제까지 앞으로, 나흘-. 하지만 벌써부터 춤추고 싶은 기분이었다.
행복한 시간은 쏜살같이 흐른다.
나흘동안, 고등부는 물론 대학교 부지내든 어디든, 교내를 샅샅이 흝어 보려는 기세의 나를 스즈란님이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잡아 멈춰서는 ‘고등부 교사 주변만 조사할 것’이라고 제한했다. 생각해보면 회의때마다 십분씩 가서 모여야 하는 곳에 지어서야 말이 안되겠지. 결국 고등부 교사 옆쪽의 공터 구석에 짓는 것이 최선일 듯 하다고 적어 츠바키님께 제출했다.
그러자 웃으며 ‘수고’라고 하며 다시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기분나쁘면 안하겠다’ 고 했지만, 괜찮다고 그만 대답해 버렸다. 부끄러웠지만, 츠바키님이 기분 좋게 웃어 주셨으니 기뻤다.
보고서를 제출하고 나니 순식간에 마리아제, 당일.
“설마 정말로 비밀을 지킬 줄은.”
요 몇일간의 일로, 스미레코와 제법 친해진 노조미가 감탄했다며 고개를 저었다.
“나이가 어린만큼 아무래도 결국은 털어 놓을 줄 알았는데 말이죠.”
“고집이 있으니까요.”
“정말이지, 고집이 센 아이네요.”
노조미양이 악의 없는 농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수 있기에 부담없이 웃을 수 있었다. 불과 이주일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믿지 못한채. 동물원의 짐승 마냥 호기심의 대상이 된 것을 견딜 수 없어 실수하지 않으려 바둥대던 자신이 꿈만 같았다. 이렇게 어깨에 힘이 빠질 수 있었던 것은, 역시 그 사람들을 만나서 일까.
시간이 되었다. 대기실에서 의상을 갖추고, 무대에 나갈 준비를 해야 하기에 노조미에게 인사를 하고 강당으로 달려갔다. 강당에는 이미 미사를 위해 모여든 사람이 북적이고 있었다. 양해를 구하며 앞쪽 자리로 끼어 들었다.
“스미레코, 여기에요.”
히나타가 사람들의 어깨에도 못 미치는 키의 스미레코를 용캐도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어 불렀다. 미사가 끝나면 곧 준비실로 달려갈 수 있도록, 학생회 임원들은 제일 앞쪽 자리를 특혜로 차지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는 것이 느껴진다. 긴장감에 쭈뼛대며 자리에 앉았다. 유미코의 옆자리였다.
“평안하세요.”
“평안하세요. 오늘 힘내세요.”
“유미코님도요.”
대답하는 유미코님의 콧등과 인중이 붉었다. 곧이어 시작한 미사의 중간에도 조심스럽게 손수건으로 코를 훔치는 모습이 언뜻 보인다. 역시 몸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결론적으로는 스미레코를 준비한 사이코의 안목이 옳았다.
기독교 교도가 아닌 스미레코에게, 평소 미사란 지루한 시간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조금 농담을 곁들이자면, 신부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앞으로의 공연을 축복하는 복된 말씀 같았다. 합창대의 합창는 평소에도 미사 중 유일하게 즐기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꼭 산백합회 공연의 전주곡 같이 흥분되게 느껴진다.
그리고 마침내-
“그럼 다음 순서로, 학생회 임원들의 신입생 환영회가 있습니다. 고등부의 신입생 여러분은 자리에 남아 주십시오.”
신부님과 수녀님들, 그리고 고등부 1학년을 제외한 사람들은 강당에서 나가기 시작했다. 스미레코의 주변에 앉아 있던 사람들도, 재빨리 준비해둔 메다이를 운반하기도 하고, 단상으로 걸어 가기도 한다. 미리 들었던 대로 메다이 증정식이 먼저, 그 다음이 환영 공연. 증정식에서는 스미레코가 할 일은 없었기에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릴리안 고등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또한 고등부부터 릴리안 학원에 오신 분들은, 릴리안 학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단상에 서서 마이크를 잡은 것은 당연히 학생회장인 히나타였다.
200명에 달하는 사람의 앞인데도, 평소와 다를 것없는 미소를 띄고는 부드럽게 말을 이어 나간다. 목소리에 흥분이나 떨림도 없다. 스미레코는 문득 저기에 자신이 서 있었다면- 이라 생각했지만, 곧 마이크를 놓는 탁자의 위로 간신히 고개만 내밀 자신의 키로는 애초에 위엄을 찾기는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조금 좌절했다.
“- 그럼, 기념으로 메다이 증정식을 하겠습니다. 각 반별로 차례로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두근 두근.
줄지어 선 사람들이 앞으로 나간다. 동시에 스미레코도 자리에서 일어나 준비실로 향했다. 메다이 증정은 기념행사인지라, 스미레코는 이 의식 전에 개인적으로 메다이를 받았다. 특례 같은건 아니었다. 그저 스미레코의 반은 뒤쪽 차례인데다 이름도 앞쪽이 아닌지라, 증정식을 정식으로 받고 나면 환영식 준비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준비실로 들어가, 재빨리 바구니를 챙겨 가져가지 좋은 위치에 준비해 둔다. 안에는 잘 뜯어 놓은 장미꽃잎들이 매혹적인 향기를 뿜고 있었다.
이 향기가, 객석까지 전해지면 좋을텐데.
“- 그럼 환영의 뜻으로 학생회에서 조촐하지만 여흥을 준비했습니다. 부족하지만 모쪼록 즐겁게 지켜봐 주세요.”
밖에서 히나카 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산백합회 사람들이 준비실로 우르르 들어왔다. 재빨리 기모노를 걸쳐 입고, 바구니를 든다. 밖에서는 춤과 상관없는 사람들이 마이크가 놓여 있던 교탁을 치우는 등 바삐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츠바키님이 흰색 기모노를 들자, 재빨리 다가가서 옷 시중을 들어 주었다.
“고마워. ···잠깐.”
“예?”
“손이 떨리고 있어.”
츠바키는 그렇게 말하며 바구니를 든 손을 꼭 보듬어 쥐었다.
그제서야,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스미레코는 깨달았다. 이렇게 흥분하고, 긴장하고 있었구나.
- 조금 뜨거운 손의 체온이, 기분 좋았다.
“긴장 풀고 하자, 꼬맹이양.”
“예.”
츠바키는 살짝 웃으며 스미레코의 머리를 두어번 쓰다듬어 주고 걸어 나갔다. 뒤처질세라 그 뒤를 바구니를 들고 따라 나갔다.
조금 소란스러운 강당.
기대감에 부풀어 오른 시선이 따갑게 느껴진다. 특히 신장부터 다른 사람들과는 머리 하나 이상 차이나는 스미레코는 시선의 집중을 받고 있었다.
줄을 지어 걸어나온 일행에서, 유미코는 살짝 빠져 미리 단상의 한쪽 구석에 대기중인 사람들에게 향했다. 협조를 요청한 전통 음악부의 사람들이다. 유미코는 그 앞에서 샤미센을 고쳐 잡고 자세를 편히 잡는다.
“화륜花輪의 춤, 나비가 꽃을 찾아 헤메인다, 사방이 꽃이니 사방이 날 곳이다-.”
유미코의 낭랑한 목소리가 강당의 소란을 일순간에 제압한다. 조금 작은 체구에서 나온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똑 부러지고 큰 목소리.
정적이 강당에 찾아 오자, 동시에 손이 움직이고, 피리 소리와 각종 현이 뜯기는 소리가 그 뒤를 따른다.
-쿵.
‘꽃’의 세명이 일제히 다리를 굴렀다. 그리고 뱅글 회전하며 원을 그린다.
그 뒤를 따라 종종 걸음으로 움직이며, 바구니에서 꽃잎을 한줌 꺼내 허공에.
순식간에 허공에 홍, 백, 황의 꽃잎이 흩날린다. 그 순간 이 공간이, 꿈 속으로 잠겨 버린 것 같았다.
세 꽃의 움직임은, 이 강당안에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 부는 것처럼. 바람에 슬며시 흔들리는 꽃처럼, 허공에서 날리는 장미 꽃잎이 자신의 분신인 것처럼.
세 마리 나비는 그 뒤를 따르며, 자신의 생명이 저 꽃에 있는 것처럼. 꽃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며 그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
-팡.
겉옷만 걸쳐 입어 펄럭이는 기모노가, 세 꽃이 매섭게 회전하자 소리가 날 정도로 격렬하게 펄럭였다. 그만큼 격렬히 춤추고 있다.
츠바키와 스쳐 지나갈 때, 고개를 돌리는 츠바키의 얼굴에서부터 땀방울이 하나 스미레코의 얼굴로 튀었다. 슬쩍 훔쳐보니, 얼굴에 땀이 완연했다. 다른 두 ‘꽃’역은 아직 평온한 얼굴인데.
역시 요즘 들어 몸이 조금 안 좋다고 하셨더니, 체력도 떨어지셨던 걸까.
걱정이 되어 시선을 틈틈이 바라보자, 일순간 눈이 마주쳤다.
- 뭘 하고 있니.
그렇게 혼난 느낌이었다. 땀이 흐르는 얼굴의 가운데에,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가 있다. 그눈동자가 자신을 살짝 쏘아보자 딴 생각을 했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잡념을 떨치듯, 다시 바구니에서 꽃잎을 한줌 꺼내 조금 옆쪽으로 뿌린다.
- 쿵.
다시 발을 구르고, 소매 속에서 세 꽃은 일제히 부채를 꺼냈다.
“꽃이, 만개 하니 나비가 기뻐 나는 구나!”
유미코님의 외침에 이끌리듯 반주가 절정으로 치닫는다.
세 나비는, 꽃잎을 있는 힘껏 한 웅큼 쥐어내 뿌리고. 그대로 다시 한 웅큼을 쥐어, 또 뿌린다.
시야가 가릴 정도로, 격렬히 흩뿌린 꼿 사이로.
-탁.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세 꽃이 일제히 홍, 백, 황의 부채를 펼치는 소리. 세 송이의 꽃은, 돌며, 손짓하며, 흐르듯 움직여-
마지막 꽃잎이 하늘거리며 무대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고요의 한 가운데.
세 사람은 만개 한 꽃잎처럼, 고요로 그 아름다움을 치장한체 모두의 가슴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리고, 격렬한 박수.
정말로 감동한 듯, 앞줄의 몇 명은 눈가가 반짝이는 것까지 보인다.
“즐겨주셔서 감사합니다.”
히나타님이 읏으며 답사를 했고, 남은 사람들은 뒤쪽으로 퇴장할 준비를 했다.
끝났다-
스미레코는 온 몸에서 기운이 흘러 나가는 듯한, 기분 좋은 탈력감에 휩싸였다. 이렇게 기뻐해 주다니. 틀림없이 모두 감동할 것이란 확신은 있었지만, 아무래도 고전 무용. 이런 열광적인 반응은 조금 의외였다.
뒤쪽으로 걸어 나가려 츠바키님과 발걸음을 맞추고 나가려 할때.
“···아!”
갑자기 츠바키님이 어깨를 감싸 쥐었다. 그 상태로 츠바키 님으로서는 드물게, 뒤쪽의 신입생들을 향해 웃으며 손을 살짝 흔들어 주기까지 한다.
신입생들의 환호성이 들린다. 스미레코는 조금 의아함에 사로잡혀, 그 얼굴을 보고-
- 위험해.
발걸음을 서둘렀다. 츠바키는 아무 말 없이, 그 발걸음에 보조를 맞추어, 조금 끌리듯 걸어 간다.
“하아아-, 다들 수고 하셨습니다.”
“대성공, 대성공. 우리 ‘꼬맹이양’도 정말 너무 귀여워서, 춤을 추다가 말고 껴안고 싶었-.”
“비켜 주세요!!”
웃는 얼굴로 땀을 닦는 사람들을 밀어내고, 이제 비틀대기 시작한 츠바키님을 다급하게 부축했다. 일단 가장 부드러워 보이는, 장막인지 모를 천이 포개진 곳에 츠바키님을 조심스럽게 눕힌다.
그제야 상황을 알아차린 사람들이 다급히 다가왔다. 몸을 뉘이자 드러난 츠바키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 있을뿐더러, 가뜩이나 새하얀 얼굴이 더욱 질려 있었다.
“이, 바보, 어째서!”
씹듯이 말을 뱉어낸 건, 놀랍게도 히나타였다. 욕을 알지도 못한다는 얼굴의 그녀는 무서운 얼굴로 츠바키의 맥을 잡았다.
“···바보라니, 학생회장이 그런말 하면 쓰나.”
“조용히 해!”
맥을 잡고, 몸의 이곳 저곳을 촉진한다.
“단순한 탈진- 같지만, 기가 너무 약해졌어. 나 같은 햇병아리 한의사는 더 이상 알 수 없어.”
히나타는 매섭게 츠바키를 노려보았다. 츠바키는 기운 없는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슬쩍 피했다.
“열심히 하라고 했잖아, 히나타.”
“···죽으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
단순히 몸이 안좋아 무리해서 춤춘 끝에 탈진해 쓰러진 줄 알았는데, 히나타님은 너무 걱정이 되나 보다. 스미레코는 히나타의 새로운 일면을 본 듯해 조금 웃음을 지으려 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보자 등어리에 고드름이 맺히는 기분이 들었다.
- 뭐야, 왜 다들 그렇게 새파랗게 질린 거에요.
“그냥 탈진이- 아닌 거에요?”
“···우리집은 한의학을 해서. 나도 햇병아리는 돼. 내가 알아 낼 수 있는게 탈진이란 것 뿐이야. 하지만 똑같이 춤춘 나나 아키하는 이렇게 멀쩡한데, 불과 일년 전까지 릴리안 고교 검도부 최강이었던 츠바키가 쓰러질 리가 없잖아! 병을 숨기고 있는 거야, 이녀석!”
“숨기다니. 이런 얼굴색을 하고 돌아 다니는게 화장품 덕이라고 생각했던 거야?”
“조용히 해! 정말로 이렇게 바보짓을 할 줄은 몰랐어, 나 화났으니까!”
버럭 소리를 지르자 츠바키는 예의 메마른, 기운 없는 미소를 짓고는 눈을 감았다. 히나타는 이를 악물고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는, 분해 못 견디 겠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누구든, 병원에 연락해 줘요. 당장 차를 보내달라고.”
“예.”
사이코가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막 퇴장하던 신입생들이, 교내에서 당당히 뛰고 있는 사이코를 보고 놀라움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온다. 하지만 사이코는 개의치 않고 달려 사라졌다. 재빨리 문을 닫아 시선을 막자, 밀폐된 방안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남았다.
“어째서···.”
누구의 것인지도 구분이 가지 않는, 작은 속삭임이 미약한 한숨에 실려 떨려 나왔다. 구석에서 유미코가, 아주 작게 오열하기 시작한다.
가장 츠바키의 가까이 있던 스미레코는 멍하니 츠바키의 얼굴을 바라 보고 있었다. 그래서 였을 것이다. 유일하게 츠바키가 뭔가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렁거리는 눈물 때문에 흔들리는 입술이 말하는 것은,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 이걸로, 봄은, 끝이네.
이제 겨우 4월이었는데, 스미레코는 이해 할 수 없었다. 할 수 있을 리가 - 없었다.
한참 후, 차가 도착했다.
들것에 실려 가는 츠바키의 주변으로, 어느새 퍼져나간 소문에 끌려 수많은 학생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며 그 모습을 지켜 본다.
따라 가고 싶었지만- 아직 마리아제에 관한 공무가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다.
따라간 것은 스미레코 등의 몇 명. 하지만 그 몇 명도, 병원에서 정밀 검사에 들어갔다는 말만을 듣고 날이 어두워 질 때 쯤엔 돌아와야만 했다.
날마다 문병을 가자. 누군가가 자연스럽게 말했고, 일단 마리아제의 다음날인 토요일의 방과 후 산백합회 일동은 입원했다는 병원으로 찾아갔다.
- 그리고, ‘이미 퇴원 하셨습니다’ 란 간호사의 말과 빈 침대만을 발견했다.
무슨 말이냐, 고 따졌지만 ‘가족 분들의 요청으로 퇴원’ 이란 말 밖에는 들을 수 없었다. 주말을 집에서 쉬고 돌아올까 싶었지만, 월요일이 되어도 기숙사의 방에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화요일.
“- 틀렸어요.”
처음으로 들어보는 의기소침한 히나타의 목소리에, 스미레코의 어깨도 추를 얹은양 축 늘어졌다.
“···담임 선생님도, 이유를 모르십니다. 우편으로 병환을 이유로 당분간 학교를 쉰다는 말만이 전해져 왔다고 합니다.”
“집에 전화를 합시다!”
유미코가 책상을 내려치며 외쳤지만 아키하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내가 했어. - 전화를 받은 사람은 ‘아가씨는 병환이 심해져서 친분이 있는 분의 병원에서 치료 중이십니다’ 란 대답만 반복할 뿐, 그곳이 어디냐 물어도 모르겠다, 아는 사람을 바꿔 달라면 그럴 수는 없다. 란 말 뿐이야.”
“무슨-.”
도대체 왜, 아픈 친구를 만나는 것을 막는 거야. 세상에 그런 이유가 존재 하기나 하는 걸까.
어이 없음을 넘어 분노가 생겨난다. 모두가 같은 생각인 듯, 분위기가 무거워 지고 있었다.
“···무력하네. 하지만 포기는 하지 말지요.”
히나타는 조금 자조적인 말을 마지막으로, 해산을 명령했다. 흩어지는 모두는 한 가지 불길한 느낌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츠바키는, 돌아오지 못 한다. 라고.
스미레코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 그 가장 행복했던 순간, 꽃이 피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꽃은 피는 것이 그 삶의 끝이 아니다. 핀 꽃은 어떻게 되는 건가?
답답한 가슴처럼, 흘러가는 날들은 점점 무더워 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