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스크램블 에그
[1] 주먹밥
[2] 돼지고기 감자조림
[3] 라면
[4] 연어회
[5] 꽁치구이
[6] 캣 푸드
[7] 선박용 비스킷
[8] 미끼
[9] 돈가스 덮밥
[10] 별사탕
[11] 무화과 타르트
[후기]
1. 주먹밥 (2)
흐릿한 안개 사이로 녹색 현등(舷燈)이 깜박인다. 전부와 선미 아래 방향에 달린 백등(白燈)을 보아하니, 닻을 내리고 잠시 배를 쉬게 하는 모양이었다. 마스트 수직선상에 홍등(紅燈)이 보이지 않으니 좌초되지는 않은 모양이었지만, 그 외에 어로나 수중 작업에 임한다는 등화도 일절 없었다. 공해상에서 홀로 닻을 내린 채 뭘 하는 거람.
“묘박 중인 선박입니다.”
내가 그렇게 답하자 선주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포도 달려있지 않고 크기만 요란한 걸 보아하니 분명 무언가를 수송하는 수송함이렷다. 음, 위장 무늬가 그려져 있어서 군함인 줄 알았는데 다행이군.”
다행이긴 뭐가 다행이야, 군함 맞아.
속으로 선주를 비아냥거리며 툴툴거렸다.
포와 미사일이 가득 실린 순양함이나 구축함 같은 싸움배만 군함은 아니다. 그러한 싸움배들이 온전히 전투에 임할 수 있도록 돕는 지원함도 있다. 지원함에는 정보 수집함, 군수 지원함 등등이 있는데 저 선박의 실루엣은 어쩐지 군수 지원함을 닮았다. 수평 보급을 할 때 쓰는 윈치 드럼(Winch Drum)이나 램 탠셔너(Ram Tensioner), 킹 포스트(King Post) 따위가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흔히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양의 함정임은 틀림없었다. 일단 날렵한 형태의 일반 군함과는 달리 텀블 홈 모양의 선형이었다. 게다가 최근 고안된 텀블 홈 방식의 군함들이 주갑판을 좁게 하여 기동성을 살린 데에 반해, 저 배는 20세기 초의 프랑스 전함처럼 주갑판도 넓었다. 저래서야 최대 속력이 20노트는 나올까 싶다.
…뭐, 군수 지원함의 주갑판이 조막만 해도 문제겠지만.
그런데 어째서 군수 지원함이 호위도 없이 단독으로 항해하는 거지? 보통의 군수 지원함이라면 석유나 군수 물자를 가득 실고 있기 때문에 적의 표적이 되기 쉽다. 그래서 군수 지원함의 작전에는 두 세척의 호위 함정을 붙여야 하는데, 이 주위에는 어떠한 함정의 현등도 보이지 않았다. 경계가 얼마나 무방비한지 미끼선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수송선이라면 역시 값나가는 것들이 실려 있겠지? 크크.”
허나 선주는 물욕에 눈이 멀었는지 함정을 탐욕스럽게 바라보며 혀를 날름거렸다. 혹자라면 이렇게 작은 새우잡이 배가 저 큰 군함을 어찌 제압하겠냐고 혀를 차겠지만, 사실 이 새우잡이 배는 대함(對艦) 무기 몇 가지를 교묘하게 숨기고 있다. 선미에 쌓인 어구들 틈에는 조잡하게 개조한 어뢰 발사관과 기관포가 달려 있었고, 선창 아래의 그물 밑에는 소총도 몇 자루 있었다. 물론 실제 군함이나 경비정에 비하면 이런 경무장은 장난감 수준이었지만 기습적으로 해적질하기엔 충분했다. 특히 이 배에 실려 있는 어뢰는 경 어뢰면서도 이천 톤에 가까운 무진함을 일격에 침몰시킨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갖고 있으니, 군수 지원함 한 척을 항행 불능 상태로 만드는 건 일도 아니리라.
“시각 신호 보내봐.”
선주는 내가 포로 신분임을 잊었는지, 태연히 발광 신호를 주문했다. 내가 저 배에 구조 신호라도 보내면 어쩌려고 이렇게 함부로 신호 장비를 맡기는 걸까? 하지만 잠시 생각해보니 섣불리 구조 신호를 보낼 수는 없었다. 선주가 모스 부호를 읽지 못한다 해도, 그쪽에서 쓸데없는 반응을 보이며 다가온다면 의심을 살테니까. 일단 시키는 대로 하자. 나는 12인치 신호등 앞에 서서 머릿속으로 천천히 모스 부호를 되새겼다.
그러니까… 영문 알파벳으로 보내면 되나?
<무언가 도와 드릴 일이라도 있나요?>
나는 손잡이를 잡아당겨 느릿느릿한 속도로 발광 신호를 보냈다. 국제 해상 법규는 잘 모르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공손한 질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착각이었는지 대답은 대뜸 날아왔다. 그것도 1.5초 당 1부호라는 배려심 없는 속도로.
“에구구, 급하기도 해라.”
나는 허둥대며 발광 신호를 부랴부랴 해독해 보았다.
<…그냥 입 쳐 다물고 가던 길 가시지. 지 마누라 XX도 못 찾을 X같은 XX들이 오지랖만 넓어요.>
엄청난 게 수신되어 버렸다!
그대로 말해줘도 될까? 되는 걸까?
“피… 필요 없으니 그냥 가랍니다.”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황급히 변명했다. 모략을 꾸미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솔직히 말했다가 선주의 기분이 상하기라도 하면 뭔 불똥이 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뭐? 뭔가 긴 전문이 날아왔잖아? 그것뿐일 리가 있어?”
“그, 그걸 리가요.”
하지만 선주는 내가 무언가를 숨긴다고 생각했는지 가슴팍을 걷어차며 욕설을 했다.
“이 쥐새끼 같은 놈이 무슨 꿍꿍이야? 내 직접 상선 검색 망에 연결해봐야겠다. 거짓이면 네 목숨은 없을 줄 알아!”
내가 바닥을 구르는 사이 선주는 상검망의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더니 수화기에 대고 항행 불능 선박 흉내를 내며 상대의 접근을 유도했다.
“미확인 선박, 미확인 선박. 여기는 귀 함으로부터 0-8-5 방향으로 3마일 거리에 위치한 어선 ‘치카이’다. 해무가 심하여 방위를 잃었으니 예인을 부탁한다.”
하지만 상검망 스피커는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설마 상검망 설치가 안 된 함정은 아니겠지? 선주가 무미건조하게 같은 방송을 두어 차례 반복했을 무렵―
<우물우물…. 에헴.>
무언가를 씹어 넘기는 소리와 함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여자…?”
의외라고 할까, 상검망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여성의 음색이었다. 물론 여성 항해사나 여성 선장이 아예 없지는 않지만, 격리된 공간에서 오랫동안 고된 일을 해야 하는 선상 생활은 아직까지도 남성의 전유물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만난 함정의 상검망 당직자가 여자라는 사실은 꽤 의외였다.
하지만 다음에 들려 온 그 여성의 대답은 더욱 의외였다.
<길을 잃었으면 성가시게 굴지 말고 죽 직진이나 하시지?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앞으로 나아가다보면 온 세상 항구들을 다 만날 수 있을게다.>
“우와….”
예의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불손한 응답. 만일 이 배가 진짜 항행 불능 선박이었다면 상대를 국제 법에 의거하여 신고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물론 이쪽은 멀쩡한 해적선이었지만.
선주는 상대의 성별과 태도에 적잖이 당황했는지 한동안 벙 쪄 있다가, 곧 골을 내며 수화기에 대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매우 무례한 반응이로군! 어이, 거기 당직자. 선주의 국적이 뭐야? 그 불손한 통신 태도부터 해난 구조에 대한 무성의까지…! 당장 국제 해양 경찰에 신고하겠다!”
경찰에 신고하면 가장 먼저 잡혀가는 건 넌데요, 이 인신매매범아.
나는 속으로 선주를 비아냥거리며 두 사람의 말싸움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둘의 대화는 말싸움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긴장감이 없었다. 선주가 끊임없이 고성을 지르며 항의를 하는데도 상대는 계속 무언가를 먹으면서 건성으로 답하고 있었다.
<우적, 우적…. 우물우물, 쩝. 아, 고마워. 트리샤. 거기 빵 좀 줄래? 근데… 방금 뭐라고 했지?>
선주는 그 무성의함에 결국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는지 심한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 빌어먹을 창녀가! 너 지금 대체 뭐 하는 거야?”
과연, 노골적인 욕설은 효과가 있었는지 상대방은 잠시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10초 정도 지났을까, 여성은 굉장히 딱딱한 투로 한 단어를 짧게 읊조렸다.
<…밥.>
“뭐?”
<밥 먹는다고, 밥! 하아… 저 멍청한 뱃놈은 시간 개념도 없나. 지금 점심시간이잖아! 식사 시간이니까 소란스럽게 굴지 말고 기다려! 삐익-.>
상대가 일방적으로 통신망을 끄자 새된 기계음과 함께 한동안 함교에 정적이 흘렀다. 철저하게 일방적으로 농락당했음을 깨달은 선주는 광분하며 물건을 집어던졌다.
“저 태도는 뭐야?! 빌어먹을 창녀들이 바다에 나와서 대뜸 한다는 소리가, 뭐? 멍청한 뱃놈? 으아악! 시발! 우라질! 열이 뻗쳐서 진정이 안 되는군! 내 저 년을 잡아서 유린한 다음 사창가에 팔아먹지 않고서는 잠을 못 자겠어! 갑판장! 당장 발사관에 어뢰를 장전하고 저 배를 조준해!”
“네, 넷!”
선주의 분노에 찬 눈길을 받고 싶지 않았는지 갑판장과 선원들은 냉큼 선미로 달려가서 어뢰 발사관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나는 딱히 별다른 지시를 받지 못했던 터라 사이드 윙 후미에 앉아, 선주의 눈에 띄지 않게 몸을 숨기고 그 문제의 군수 지원함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 여성은 지금 자신이 도발한 어선의 선주가 이 일대에서 가장 악랄한 해적선의 선주라는 걸 알고나 있을까. …모르겠지. 모르니까 무례하게 굴었겠지. 하지만 나는 어쩐지 지금의 상황에 강렬한 위화감을 느꼈다. 오래전에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그래, 돈 한 푼 없는 해적들이 비싼 어뢰를 들고 무진함을 침몰시켰을 때였다.
해적선이 중무장한 호위함에 무턱대고 접근할 수 있었던 건 ‘어뢰’라는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 군수 지원함도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방금의 도발적인 통신도 일종의 ‘미끼’일 가능성이 높다.
“어뢰 발사관 전 부분 개방! 2번 스톱 볼트 선체변 및 중간변 개방 완료!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명령만 내려주신다면 바로 발사하겠습니다!”
내가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선미에서 갑판장의 상기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주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표적의 위치를 가늠하기 시작했다.
“방위 0-7-0에 3000 야드라…. 딱 좋군! 여기 까지 접근을 허한걸 보면 저년은 역시 우리를 얕보고 있는 모양이야. 흐흐, 아무렴 어때. 이제 그 몸에 직접 우리의 위력을 새겨주면 되는 거지. 좋아, 발사 준비! 3, 2, 1… 쏴!”
퉁!
맥 빠지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어뢰가 발사되었다. 추진체의 힘을 받아 거의 40노트 가까운 속력으로 가속한 어뢰는 입력된 프로그램에 따라 목표물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거리 1500 야드 돌입!”
어뢰가 배에 가까워지는데도 상대 함선은 놀라우리만큼 태연했다. 배를 가속해서 회피 기동을 하기는커녕 아직도 정지 등화를 켜고 무심하게 서 있었다. 나는 분명 상대가 경계를 소홀히 해서 어뢰를 알아차리지 못했으리라 판단했다. 하지만 나는 또 한 번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도하게 되었다.
콰과광!
어뢰가 폭발했다.
…뭐 어뢰는 폭발하라고 만들어 놓은 폭탄이니까 폭발 자체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내가 놀란 것은 배에 닿기도 전에 어뢰가 폭발한 점이었다.
“뭐, 뭐야? ECM인가? 아니, 저거 기만체 발사대 아냐? 방금까지 저런 거 없었잖아?”
선주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쌍안경을 든 채 두리번거리며 상대편 배 현측에 달린 발사대를 가리켰다. 포연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현측 중간에 무언가 새로운 구조물이 튀어나와 있었다. 언뜻 보면 일반 군함의 기만체 발사대와 비슷하기 때문에 선주의 착각도 내심 이해가 갔다. 하지만 그 구조물은 절대 기만체 발사대가 아니었다.
“ATT(Anti-Torpedo Torpedo-요격 어뢰)….”
R-BOC 같은 일반적인 기만체가 발사되면 어뢰는 바로 폭발하는 게 아니라, 궤적을 잃고 헤매다가 자폭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추가 피폭을 막기 위해 기만체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미리 발사한다. 하지만 지금의 경우는 어뢰가 거의 배 근처까지 접근했었고, 어뢰의 항적도 그대로 직진하다가 대뜸 폭발하고 말았다. 그 말인즉슨 어뢰에 직접 타격을 가해 폭파시키는 하드 킬 방식의 대응체계였다는 말이다. 저 배에는 근접 방어용 기관포가 달려있지 않았으므로 그 외에 내가 추측해 볼 수 있는 하드 킬 대응체계는 ATT뿐이었다.
“무슨 놈의 군수 지원함이 ATT야….”
역시 이상했다. ATT는 일반적인 어뢰와는 달리 로켓 추진 기술을 이용하여 ‘발사’될뿐더러, 3D 호밍 및 고주파 소나기술까지 접목된 최신형의 무기다. 순양함 같은 중무장 군함의 방어 체계라면 모를까, 단순한 군수 지원함의 방어용으로 쓰기에는 너무 비싼 무기다.
결국 선주는 어뢰가 불발한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는지, 갑판장을 다그치며 재 발사를 명령했다.
“대체 뭐지? 으음, 아무래도 좋아. 그래. 이번에는 녀석들이 운이 좋았던 게야. 운이 좋았던 게 분명해…. 갑판장! 어뢰 한 발 더 준비….”
그 때였다.
“야, 이― 식사 예절도 없는 새끼들아!”
갑자기 상대편 배에서 욕설이 들려왔다. 이미 자함과 상대편 배의 거리는 꽤 가까워진 터라 우리는 충분히 그 상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흰색 스탠딩 칼라 제복에 사관 정모를 쓴 금발 소녀가 갑판 위에서 메가폰을 잡고 있었다. 그 소녀는 다른 손에 든 신호 깃발로 이쪽을 가리키며 메가폰의 볼륨을 높였다.
“아무리 군인이라고 해도 적에게 총을 갈겨서는 안 되는 시간이 세 번 있는데,”
소녀는 손가락을 꼽으며 천천히 운을 떼었다.
“첫째가… 크리스마스, 둘째가 티 타임… 마지막이….”
그리고 소녀는 숨을 들이키더니 힘껏 소리를 빽 질렀다.
“마지막이 밥 먹는 시간이다!”
“뭐?”
의미 불명의 고성에 선주도 대답할 기력을 잃었는지 입만 딱 벌렸다. 거기까지 말을 마친 소녀는 흠흠, 하고 몇 번의 헛기침을 해서 목을 틔우더니 이상하리만큼 짓궂은 미소를 흘기며 되물었다.
“개도 안 건드린다는 밥 먹을 때에 심기를 건드린 이 개만도 못한 새끼들은 거기에 어울리는 취급을 해 줘야지?”
(꼐속)
<온라인 구매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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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새통 : http://www.booksaetong.co.kr/shop/item.php?it_id=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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