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rtie 002 - 노블레스 오블리주 Part 1
1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고 뒤이어 중후한 목소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시간이 되었습니다. 준비를 서둘러주시지요."
"예. 잠....시만.....요....."
이 가죽 장화, 정말 발에 안맞네. 뭐가 이렇게 쓸데 없이 불편한거야?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은, 아니, 정확하게 말하지면 입으려고 하고 있는 옷은 바로 3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는 에르데 제국의 근위 기사단 복장이다. 붉게 물든 테두리의 검은 상의를 감싸고 있는 새하얀 벨트. 무릎까지 오는 갈색 가죽 장화를 어두운 남색 바지. 거기다 금색 실로 수놓인 오른쪽 어깨의 에르데 제국 문양까지. 조금 꽉 끼기는 하지만 그럭저럭 고풍스러운 멋이 나는 제복이었다.
"우으.....불편해........ 뭐야, 너는 완전 폼나잖아."
탈의실에서 나왔는지 나를 본 나탈리가 말했다. 뒤를 돌아보니 나탈리는 내 제복과는 조금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상의가 조금 길어서 마치 쇼트 스커트처럼 되어 있고, 하의 대신 스타킹을 신고 있다는 것만 빼고는 똑같지만 말이야. 다리에 달라붙는 스타킹은 그렇지 않아도 늘신한 나탈리를 더욱 예쁘게 보이게 해주었다. 정말 잘 어울리긴 하는군. 아까 그 늙은 집사가 왜 남성용 제복을 극구 말렸는지 알겠다. 대신 나탈리는 여군용 제복이 불편한지 자꾸 옷을 만지작 만지작 거리면서 툴툴거렸다.
"너무해. 왜 너는 남군 제복인데 나는 여군 제복인거야? 이거 불편하다고."
"그렇다고 내가 여군 제복을 입을 수는 없잖아."
"하지만 이건 불공평하단 말이야. 왜 나는 스커트고 너는 바지냐고!"
얼굴을 찡그리며 나탈리가 떼를 썼다. 나참, 평소에는 어른 같은데 왜 꼭 이렇게 둘만 있으면 꼬마애가 되어버리는거야...... 나탈리....... 덕분에 나는 내가 별로 하기 싫어하는 말을 해야만 했다.
"너도 잘 어울리는데 뭘."
사탕발림 같지만 우울한 나탈리의 얼굴이 펴지는걸로 만족하자. 속이 메스꺼워지는군....... 많이 컸네, 나. 이런 말도 할 줄 알고.
"전혀. 바지가 없으니까 엄청 불편한걸."
아 맞다. 나탈리는 치마보다 바지를 더 좋아했지.
"어쩔 수 없잖아. 이게 이쪽의 문화인걸. 아까도 대사께서 이쪽의 문화를 잘 따르라고 철저히 얘기했잖아, 기억 안나?"
"너무해, 너무해, 너무해!"
나더러 어떻게 하라고, 나탈리........ 그리고 그렇게 크게 소리를 지르면 어떻게? 여긴 황궁이라고, 황궁!
끼익, 하고 문이 열리고 검은색 베레모를 쓴 근위병 하나가 들어왔다.
"시간이 되었습니다. 따라와 주십시오."
아, 그러고 보니 우리, 에르데 제국 황제를 만나러 온거였다.
그날, 그러니까 졸업식 날, 우리 필그림들의 보금자리인 홈 아일랜드에 찾아온 사냐 공주가 '폭탄 선언'을 한 뒤, 우리는 바로 수송기를 타고 우리 홈 아일랜드와 에르데 제국의 영토를 갈라놓는 홈 해협을 건너 에르데 제국 본토로 들어갔다. 우리가 바로 에르데 제국과의 동맹을 상징하는 '아이콘'이라나 뭐라나? 덕분에 나 말고도 나탈리, 해군 사관학교 졸업생, 육군 사관학교 졸업생 몇명도 같이. 산보다는 평야가 많은 에르데 제국의 특성상 제국 영토 내에는 철도가 매우 잘 발달되어 있다. 덕분에 우리는 에르데 제국의 황제가 직접 보내준 황제 전용 열차를 타고 편안하게 갈 수 있었다. 물론 처음 24시간만. 기차를 3일이나 타고 있으니 좀이 엄청 쑤시는군. 우리 일행 6명은 다른 리히트들로 부터 떨어진 다른 객차를 탄 덕분에 넓게 쓸 수 있었지만, 3일이나 비행을 못하니까 엄청 답답해진다.
그렇다. 지금 이 열차에 타고 있는건 우리 뿐만이 아니다. 우리 일행은 나와 나탈리를 포함 6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부 '동맹국 에르데의 군사 고문 및 동맹 과시'라는 이유로 이 자리에 있는 것이었다. 출발하기 전에 들었던 '필그림과 인류를 대표하는 귀관들의 무공을 빈다'라는 에이센 페룸 원수와 아이제하우저 중장, 그리고 필그림 최고 사령부 참모진들의 훈시가 생각 나는군.
"우와! 여기 사과 샴페인도 있어! 창민아, 나 이거 먹어도 되는거야?"
나탈리는 이번 열차 여행을 나름 즐기고 있는 것 같다. 황제가 쓰던 열차라서 그런지 시설 하나는 정말 좋으니까 그렇게 놀랄만한 일은 아니지만. 이 시대 기술력에 냉장고에서 시원한 샴페인을 마실 수 있다니, 꽤나 놀랍군. 그런데 저 귀한 샴페인을 그냥 마셔도 되나?
"캬아! 완전 시원하고 잘 넘어가네!"
이미 늦은 것 같다. 나탈리, 이미 병 따서 열심히 마시고 있어....... 그런데 너 술 마셔도 되는거냐?
"맛있어, 맛있어~"
"이봐, 프로필라인 소위. 귀관은 에이센 페룸 원수 각하의 훈시를 뭘로 들은건가? 지금 우리는 여기 놀러온게 아니라 동맹국의 군사 원조를 위해서 온거다."
안되는거 같다. 방금 이 말의 주인공은 바로 해군 사관학교 차석 졸업생인 막스 팔랑크스 소위다. 두번째 세계대전에 이어 벌어진 '마지막 대전쟁'에서 잃어버렸던 함대 원형진을 복원하여 철통 같은 대공 원형진 '아이언 스피어'를 구상해낸 장본인이자 우리 에르데 제국 군사 원조단의 대표다. 갸름한 턱과 금발의 머리카락, 그리고 튀어나올듯 한 두개의 눈에서 뿜어져나오는 포스는 보는 사람을 말 그대로 주눅들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었다. 지금 나도 모르게 다리를 떨고 있으니까.
"당장 술은 내려 놓도록."
맞아 나탈리. 낮술은 좀 심하잖아? 지켜보는 3자인 내가 무서우니까.
"에에~ 이렇게 맛있는데?"
그리고 나탈리는 간단하게 거절해버렸다. 취해서 얼굴이 새빨개진 채 방글방글 웃고 있는 나탈리가 귀여워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전시다. 거기다 우리는 필그림의 대표라고.
"프로필라인 소위!"
"이봐, 플랑크스 소위, 상관 없지 않아? 홈 아일랜드도 아닌데 좀 봐줘도 되잖아."
"쿠스토스 소위! 도데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그렇게 술을 마시고 헤롱거리는 나탈리를 편들어주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바흐쳐 쿠스토스 소위였다. 숫적 열세의 아군을 재정비해 적에게 기동방어로 대타격을 선사하는 특기를 갖고 있는 쿠스토스 소위는 언제나 활기차고 천진난만해서 붙혀진 별명, 이른바 '꼬마펭귄'에 걸맞게 방글방글 웃으면서 나탈리를 감싸주었다. 아니, 아예 어디서 꺼냈는지 종이컵을 가져와서 한잔 하는군.
"소위, 지금 우리는........"
"우리 전쟁도 아닌데 쓸데 없이 우리가 끼어드는거잖아. 항상 행복한 나도 스트레스가 쌓인다고."
"맞아요, 맞아요~ 그러니까 창민도 한잔......."
나....나는 아니......
"이봐, 소위. 군인이 그 나이가 되서도 술도 못하나? 자, 한잔 마시라고!"
그렇게 이런저런 일과 함께 장장 3일이 넘는 기나긴 기차 여행이 끝나서야 우리는 에르데 연합 제국의 중심부, 에르데 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에르데 연합 제국의 수도라는 명칭에 걸맞게 수도는 매우 화려했다. 회색빛의 오래된 고성에 둘러싸인 에르데 제국의 수도 카피탈은 1000년이 넘는 오래된 도시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하고 단정했다. 특이하게도 수도의 일반적인 건물들은 높아봤자 3층을 넘지 않았는데, 그건 바로 황궁보다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없다는 법령 때문이란다. 대략 10층 높이에 해당하는 높은 황궁은 금색으로 번쩍이며 화사한 여름 하늘 아래서 빛나고 있어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한 황궁은 우리 세계의 구 대영제국의 버킹엄 궁전 정도의 모양이었는데, 오히려 에르데 제국 황궁은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의 거대한 타지마할과 비슷하게 생겼다. 새하얀 대리석으로 만든거나, 거대한 돔의 형태나. 내가 여기 그냥 왔다면 우와, 같은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넋을 잃고 관광을 하겠지만 - 내가 여기에 온지 벌써 3년째지만 홈 아일랜드 밖으로 나간적이 없다. 지구에서는 육지를 밟지 못한채 함대에서만 자랐고. - 지금은 별로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왜냐고? 지금 우리가 여기에 있는건 순전히 동맹국 군사 원조단이기 때문이다. 우리 앞의 마차에 타고 있는 사냐 공주가 도데체 무슨 생각을 한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동맹국에서 직접 지정한 군사 고문단원들이란다. 평소 근무 기록과 생활 태도 등을 보고 결정했다는데, 뭔가 거기에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우와! 창민아! 밖에 봐봐, 밖에. 건물이 엄청 크잖아!"
나탈리는 여기서도 나름 즐기고 있다. 나는 살짝 한숨을 내쉬며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는 나탈리를 안으로 끌어당기며 핀잔을 줬다.
"나탈리, 어제 기차에서도 그렇고, 넌 어떻게 그렇게 즐길 수 있냐?"
"에? 창민은 재미 없어? 난 이런거 처음 봐서 정말 멋있고 재미있는데?"
오히려 나를 이해할 수 없다면서 반문하는 나탈리. 이거, 뭐라고 해야하지?
"지금 우리가 여기에 있는 이유는......."
"와아~ 기병대다 기병대! 완전 멋있어!"
나탈리......적어도 내가 말할 때는 좀 들어줘...... 하지만 이미 늦었다. 나탈리는 벌써 우리 마차대의 반대방향으로 말을 타고 있는 기병대원들에게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저런 옷 멋있지 않아?"
"글쎄. 입어보면 불편할껄?"
"설마, 우리가 저런 옷을 입어볼리가 없잖아. 저런 멋있는 옷을!"
그리고 그 설마가 사실이 되었습니다.
불편한 기사복으로 갈아 입은 우리는 허리에 찬 기병도가 은색 장신구에 부딪혀 울리는 쨍쨍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우리와 비슷한 제복을 입은 근위병을 따라갔다. 이 옷, 입고 움직이니까 생각보다는 편하긴 한데 이 기병도가 무진장 불편하다. 왼쪽에만 무거운 기병도를 찬 덕분에 벨트도 왼쪽으로 기울었고, 덕분에 아예 바지도 오른쪽은 조금 빡빡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설마 매일 이런 옷을 입고 살 것도 아닐 것이고. 저벅저벅, 성큼성큼 걸어가던 나는 슬쩍 내 뒤를 바라보았다. 쿠스토스 소위나 팔랑크스 소위 일행은 보이지 않았다. 나를 따라오는건 나와 비슷하지만 바지 대신 상의가 무릎 위쪽 까지 내려오는 스커트 풍의 여군 제복을 입은 나탈리 뿐이었다. 불편한지 양 볼에 바람을 넣어 잔뜩 화가 나있는 나탈리는 나를 흘깃 보더니 흥, 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나참, 아무리 나탈리 네가 스커트를 싫어하는걸 알고 있어도 내 바지를 줄 수는 없잖아...... 그런 생각도 잠시, 우리는 어느새 금박이 입혀진 커다란 문 앞에 도착했다. 그 옆에는 언제 왔는지 쿠스토스와 팔랑크스 소위 일행이 도착해있었다. 살짝 고개만 숙여 인사하니 저쪽에서도 눈을 찡긋 하거나 고개만 숙여 나에게 인사했다.
"황제 폐하를 알현할 때는 존칭만 사용하며, 그분께서 먼저 말씀하시기 전에는 절대 입을 열면 안됩니다."
근위병의 엄중한 경고와 함께 두꺼운 문이 녹슨 쇠붙이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연회실은 엄청 컸다. 그리스 이오니아식의 대리석 기둥들이 받치고 있는 천장에는 제국의 역사가 벽화로 그려져 있었고, 금과 은, 루비와 사파이어, 에메랄드와 다이아몬드로 장식되어 있는 각종 보검과 왕관, 방패와 수 놓인 깃발들이 화려하게 빛났다.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는 이 넓은 홀을 밝게 비추고도 남을 정도로 빛을 발하고 있었고....... 우리 홈 아일랜드 같으면 상상도 못할 사치다. 아마 이런거 만들 돈으로 전함이나 항공모함 1척은 더 건조했을거야. 아, 운용 병력이 없어서 안되지...... 금색 투구를 쓴 근위병들이 전개된 가운데 우리는 우리를 안내해온 근위대장 - 알고보니 이사람이 황실 근위대장이란다. 난 그냥 근위병인줄 알았지..... - 을 따라 바닥에 깔린 붉은 실크 융단을 밟고 황제가 앉아있는 옥좌로 다가갔다. 붉은 카펫이 깔린 거대한 홀 끝에 앉아있는 자상한 미소의 황제는 우리가 오자 몸소 일어나서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폐하, 홈 아일랜드에서 온 필그림들이 뵙기를 청하나이다."
"허허, 어서들 오시오, 필그림들이어. 고개는 들고."
웬지 모르게 고개가 저절로 숙여지는 포스다. 동작 하나하나가 위엄이 흘러 넘치눈군.
"우리 에르데 제국에 온걸 환영하네. 과거 그대들과 우리 제국민들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 하나, 그건 벌써 몇년도 더 지난 일이 아닌가?"
그러면서 황제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대충 홈 아일랜드에 처음 도착한 필그림들에 대한 이야기라 나도 알고있어서 그렇게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따로 신경 쓰인 것들도 있었고. 황제 뒤에는 8명의 18세기 유럽 귀족 풍의 드레스를 갖춰입은 귀부인들과 나탈리와 비슷한 여군 제복을 갖춰 입은 5명의 여군이 서있었다. 다들 우리를 보며 언짢은, 어떻게 보면 짜증난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에르데 제국민들이 우리를 좋아하지 않는건 알고 있지만, 이건 좀 대놓고 그러는거 아닌가.....?
그리고 그 귀부인들과 여군들 중엔 유난히 낯이 익은 사람이 있었다. 흰색 상의에 장신구가 하나도 없는 검은색 드레스. 졸업식에 참석해서 나를 지목한 사냐 공주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여군은 그때 봤던 - 에리카라고 그랬던가? - 그 레이피어 누님이고. 정말 공주였냐?!
생각이 길었다.
툭, 하고 나탈리가 팔꿈치로 나를 찔렀다. 퍼뜩 제정신이 든 나는 나탈리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오히려 턱짓으로 앞을 가리켰다. 그리고 내 앞에는 황제가 있었다.
"에?"
"경이 바로 이창민 소위인가? 아니 이제는 창민 경이라고 불러야겠군. 기사 작위는 이미 받았을 테니."
"에? 에에..... 맞습니다만....."
아차, 폐하라는 말을 붙이라고 아까 말을 들었는데 깜빡했다! 황제는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지만.
"경의 무공은 우리 에르데 제국에서도 그 명성이 자자하오. 몇년 전에도 우리 제국민들이 해적에게 당할 때 구출해줬다고 들었소."
아...... 그때 그일인가? 다시는 기억하기 싫었는데. 몸에 힘이 빠진다. 머리가 띵 아프다.
"그때 조금 좋지 않은 일이 있었다고는 하나, 그래도 덕분에 다른 사람들이 살 수 있었소. 그 점에 대해선 귀관에게 정말 감사하오."
"감사합니다......폐하....."
"아니오, 감사는 내가 해야할 일이오. 우리 백성을 구해준 은인은 당신이니 말이오."
그렇게 말한 황제는 손짓으로 근위대장을 불렀다. 근위대장이 갖고 온 것은 바로 보석이 박힌 단검이었다. 기껏 해봐야 30cm가 조금 넘을가 말까 한 작은 단검. 물론 손잡이나 칼집에는 상아에 상금된 금박과 함께 수십가지의 보석이 박혀 있지만. 기껏 해봐야 예식 용이겠지, 뭐. 그리고 나는 지금 이걸 받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때 그일. 그날. 나는 누군가 죄없는 사람을 죽였으니까. 내 상태가 어떻든, 황제는 자상하게 웃으며 내게 보검을 내밀었다.
"받으시오, 창민경. 그대는 우리 황실의 단검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오."
손이 떨렸다. 난 저 검을 받을 수 없다. 그날 난 아무런 죄를 짓지 않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는데, 저 검을 받으라고?
"폐하, 저는 검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 말과 함께 황제는 놀랐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고 좌우에 있던 근위병들의 눈이 도끼눈으로 변했다. 저쪽에 그 에리카 누님은 아예 손을 칼집에 가져다댔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그대로 죽일 기세군.
"이유가 무엇인가, 창민경? 경은 이 보검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가?"
"그런게 아닙니다, 폐하."
"그럼 그 이유가 뭔가?"
"저는......"
말해야 하나?
말하기 싫은데.
내가 이 말을 하면, 내 스스로가 버티지 못할 것 같은데.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데.
"죄송합니다, 폐하."
결국 내가 말할 수 있던건 이 말뿐이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잠시간 정적이 흐르고 황제는 다시 자상한 미소로 돌아왔다
"경은 필그림 중에서도 동양쪽에서 온 것 같은데, 우리 에르데 제국에서는 그렇게 호의를 거절하거나 사양할 필요는 없소. 특히 경은 우리 에르데 제국민들의 보호자이기도 하니까 말이오."
뭔가 오해해도 단단히 오해한 모양이군. 단지 내가 동양인이라서, 우리 동양인들 특유의 겸손 문화 때문에 그런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뭐, 어떻게 보면 잘된 일일지도 모르지만.
황제는 나탈리에게도 단검을 하사하고는 우리를 이끌고 만찬장으로 향했다. 에르데 제국 북부식 식사 방식이라는, 이른바 우리 세계의 뷔페 방식으로 세팅된 만찬장은 정말 산해진미가 널려 있었다. 뷔페라는 식사 특성상 양으로 승부하는 것 같으면서도, 황실 만찬이라는 말에 걸맞게 에르데의 12개 주에서 올라온 각종 특산물로 요리된 온갖 신기한 음식들의 맛도 정말 끝내주었다. 홈 아일랜드에서 다이어트 한다고 잘 먹지도 않던 나탈리마저 5접시나 깨끗하게 비울 정도니까. 거기다 황제의 만찬이라는 이유로 각종 와인과 샴페인, 그리고 리히트들이 물처럼 즐겨 마신다는 비어스도 돌아다녔는데, 나는 아예 황제에게 직접 술을 하사받는 영광(?)까지 누릴 수 있었다.
"창민경, 이리 오게시게나."
"폐..폐하?"
"이건 우리 제국민들을 보호해준건에 대한 내 감사의 표시이자, 앞으로 우리 리히트들과 그대들 필그림들의 동맹이 서로를 보호해주기를 바라는 내 소망의 표시요."
라고 말씀하시면서 커다란 - 내 머리도 들어갈 정도로 커다란 - 은 술잔에 노란색 비어스를 콸콸 따르는 황제였다. 별로 거부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라서 일단 마시기는 했지만...... 원래 이런 술마시면 머리가 어질어질 해지는가? 막 기분도 좋아지고 그러네, 음냐~ 아마 나는 황제가 이상한 소리를 하지 않았다면 계속 취한 채 그 기분을 만끽 했을 것 같다.
"그런데 경은 마음에 담아둔 여자가 있는가?"
"콜록.....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황제는 씨익 입꼬리를 올리면서 나에게 에르데 제국의 일부 다처제 문화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리 에르데 제국은 주변국들과의 패권 다툼이 많은 편이라, 남성인구의 소모가 많네. 그래서 대다수의 귀족들은 아내를 여러명을 둠으로서 인구 감소를 최대한 억제하려고 하지."
"예?"
"그대들 인간들은 일부 일처제로 만족하지만, 오히려 인구 증가의 관점에서는 여러명의 아내를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네. 특히 나 같이 황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국가의 결속을 위해 12명이나 되는 아내를 맞아야 하고."
"폐하, 갑자기 그건 왜.....?"
"뭐, 일반 평민에게도 허용이 되는건 아니지만, 황제의 허락이 있다면 상관이 없네. 자네같은 외국인도 그렇고."
그런 말을 갑자기 나한테 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건 그렇고 나탈리, 아까 비어스를 몇잔 마시더니 지금은 아예 침을 질질 흘리면서 내 팔을 껴안고 자고 있다. 나탈리! 정신 차려!
"뭐, 별 뜻은 없네만. 경이 아까 내 딸들을 보고 있길래 묻는 말일세."
"공주님들을 본게 아니라......"
"내가 남자로서 그정도 눈치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말게나, 창민경. 내 딸들이지만 정말 예쁘고 착하고 귀여운 아이들이니까. 누구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도 있나보지?"
"아닙니다, 폐하. 감히 제가 어찌 그런 생각을...."
"그렇게 사양할 것 없네. 경은 명목상 외국인이지만 이미 사냐에게 기사 작위를 받지 않았는가? 에르데 제국 항공기사는 귀족이네. 더군다나 경 정도의 총명함과 용맹함이라면 내 딸을 줘도 아깝지 않고."
글쎄 그런 마음이 없다니까. 어쩐지 연회장에 여자들이 좀 많은거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황제가 그 원흉이었군. 도데체 나랑 공주들이랑 엮어서 어쩌자고?
"폐하, 저는 하늘을 나는 조종사입니다. 폐하의 배려는 감사하지만 이미 하늘과 결혼한 몸이니 재고해주시기 바랍니다."
내 말을 들은 황제는 살짝 아쉽다는 표정 - 어, 떠보려는게 아니라 진심이었어? - 을 짓더니 호탕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내 어깨를 두드리면서 농담이었으니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하고는 그대로 나가버렸다. 내가 뭐 잘못한건 아니겠지....? 나중에 들어온 에르데 제국 국방장관이 우리 일행을 서로에게 소개시키고 부대 배치를 발표하는 것으로 오늘의 만찬은 끝이 났다. 나와 나탈리는 에르데 황실 근위대 직속의 44 항공 기사단의 부기사단장과 기사단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때 나를 데리러 왔던 사냐 공주가, 기사단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