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rtie 002 - 노블레스 오블리주 Part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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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렇게 ‘에르데 제국 황실 직속 제 44 항공 기사단’이 창설 되었다. 말이 기사단이지 정원은 나와 나탈리, 사냐 공주와 지난번의 그 에리카 대위, 그리고 어제 만나지 못한 1명, 다 합쳐서 5명 뿐이었다. 겨우 5명. 물론 정비대와 황실 헌병대 등등 기타 지원부대를 합치면 대략 1개 대대 규모를 살짝 상회하지만, 생각해보자. 공군, 뭐, 여기서는 항공 기사단이지만, 의 주요 전투병력이 조종사인데, 부대의 전투기 가동률이 100%라고 가정해도 출격 가능한 전투기가 5기라니, 그게 ‘기사단’이야? 기사단도 아니고, 그냥 일반적인 편대 수준이잖아? 우리 필그림의 16기 편제와는 달리 전통적으로 소수 정예를 선호하는 에르데 제국의 항공 기사단의 정원이 12기라고 생각해 봤을 때, 이건 심각한 전력 부족 문제다. 부기사단장으로서 사냐 공주에게 항의를 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그저 '각 주의 에이스들이 차출될 것'이라는 대답 뿐이었다.
거기다 숫자만 적은 것도 문제가 많은데, 부대원들간의 사이도 그리 좋지 않았다. 나는 리히트들에게 그렇게 큰 불만이 있는건 아니지만, 나탈리의 경우 에르데 항공 기사들, 특히 사냐 공주에게 엄청난 적개심을 드러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양쪽 끼리 서로 좋은 감정만이 있는건 아니지. 홈 아일랜드 정착 이후 자꾸 우리가 설정한 방공 식별선을 넘어와서 밤이나 낮이나 긴급 출격을 시키도록 한게 이녀석들인데. 뭐, 저쪽에서도 자신들의 영토였던 홈 아일랜드를 무력을 뺏은 우리 필그림들을 그렇게 좋게 보는 것도 아니고. 여하튼 서로에게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게 서로를 믿지 못하고, 싫어하는 상황에서, 이런 일도 있었다.
“창민아~ 식사시간인데, 밥먹으러 가야지?”
졸업식날 박살난 내 옛 기체 대신 새로 수령한 신품 PK 73 전투기의 첫 정비를 마친 나에게 나탈리가 찾아왔다.
“어? 새로 받은거야?”
“아? 응. 예쁘지 않아? 방금 도장 했는데.”
격납고 안은 페인트 냄새로 진동했다. 윙팁은 낮은 채도의 붉은 색으로 칠하고 주익과 동채는 저채도의 회색과 어두운 남색으로 칠해진 류미스는 정말 예뻤다. 특히 PK 73 전투기 특유의 날씬한 바디 라인을 따라 그려진 노란색 옆줄이. 내가 나탈리를 돌아보자 나탈리는 불만인지 양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나를 바라봤다.
“치이……. 너무 기계만 예뻐해주는거 아니야?”
피식. 나탈리, 볼 때마나 느끼는 거지만 넌 그럴 때 귀엽다니까? 나는 검지손가락으로 그대로 나탈리의 오른쪽 볼을 눌렀다. 뒤이어 뿌우, 하는 소리와 함께 바람이 빠졌다.
“지금까지 몰랐던 것도 아니잖아?”
“너무해……..”
“가자. 밥먹으러.”
리히트들의 음식은 우리 필그림들과 전혀, 100% 다르다. 우리의 주식이 밀과 쌀 같은 곡식이라면, 리히트들의 주식은 바로 카미야 열배와 파따따다. 카미야가 뭐냐고? 대략 우리 지구의 무화과 비슷한 과일이라고 해둘까? 파따따는 우리 세계의 감자와 비슷한 덩이 줄기로 전분 처럼 가루를 내어 먹는다. 그리고 리히트들은 곡식으로 물의 대용품인 비어스를 만들어서 마신다. 맛은 대충…… 맥주와 비슷하다고 해두자. 좀더 쌉싸름 하고 쓴 맛이 강하지만. 아, 이들은 절대 고기를 먹지 않는다. 고기를 먹는 것은 노예들이나 하는 짓이랬나? 어쨌건, 오늘의 점심 메뉴는……. 파따따 파스텔 – 우리 세계의 팬케이크 비슷한 음식이다. 그 위에 마펠 시럽을 뿌려 먹으면……. 달달하다 – 과 카미야, 그리고 비어스군. 파스텔은 마펠 시럽이랑 같이 먹으면 꽤나 달달해서 맛있다. 너무 많이 뿌리면 너무 달아서 먹기가 힘들어지지만, 적당히 뿌려주면 맛있다. 단걸 좋아하는 나에게 파스텔은 정말 대환영이다.
“헤에…….. 엇그제도 파스텔, 어제도 파스텔, 오늘도 파스텔이네.”
다만 나탈리에게는 좀 힘든가보다. 하긴 아무래도 카피탈에 도착한 뒤로 그날 저녁의 만찬을 제외하면 계속 파스텔만 먹어댔으니 질릴만도 하지. 특히 나탈리는 채식 주의자도 아닌데. 뭐, 나도 아니긴 아니지만. 사실 이 파따따를 요리하는게 꽤나 난이도가 있어서 우리 세계의 감자와는 달리 여러가지 다양한 요리가 나오기 힘들다. 정확한건 요리와는 100만광년 떨어져 있는 나로서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리 파따따가 요리하기 힘들다고 하지만,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한거 아니야?”
“그럼 안먹으면 됩니다.”
나탈리의 푸념에 누군가 대답했다. 뒤를 돌아보니 얼음장 처럼 차가워 보이는 창백한 얼굴에서 푸른 눈동자가 움직였다. 옷에 달려있는 계급장은……….. 중위?
“고기나 먹고 사는 천민들 주제에 음식 같고 투정도 잘하는군요. 그냥 주는대로 쳐, 실례, 드시지요.”
“이런 똑같은 음식을 매일 먹으니까 너희 리히트들은 두뇌가 굳는거야.”
“나…나탈리…..?”
“소위 주제에 중위한테 대들다니, 이제는 겁대가리도 상실했군요. 여하튼 인간들이란 건 예의라는걸 몰라요.”
결국 내가 직접 나서야겠군.
“아아아아아아아……… 나탈리….”
“왜? 내가 틀린 말 했어?”
“그런 말이 아니라…….”
“그럼 뭐?”
이럴때의 나탈리는 정말 무섭다. 아마 저 눈으로 사람도 죽일 수 있을거야.
“아니, 이……”
뭐라고 해야 하지? 분? 그랬다간 아마 나탈리에게 맞아 죽겠지. 리히트? 아무리 다른 종족이라지만 상관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그럼 뭐라고…… 그냥 본문만 말하자.
“중위야.”
“뭐?”
“일단 상관이라고. 말을 높혀 나탈리.”
“하지만…… 알았어.”
내가 입을 다물자 나탈리도 한발짝 물러섰다. 나탈리를 침묵시킨 나는 그대로 뒤를 돌아 아직도 나탈리를 보며 차가운 미소를 짓고 있는 이 이름 모를 중위를 바라보았다.
“뭔가요, 소위?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요?”
“솔직하게 말해도 됩니까?”
“해보세요.”
“제 친구인 나탈리 프로필라인 소위의 무례한 행동은 사과드립니다.”
이 중위, 꽤나 놀랐다는 표정을 짓는다. 뭐가 그렇게 놀라운거야?
“호오. 인간들이 사과도 할 줄 아는 건가요?”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하지만 중위님의 우리 인간들에 대한 태도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정을 요구하는 바입니다.”
“본관의 태도가 어디에서 잘못 되었다는 것이지요, 소위?”
“몰라서 물으시는 건가요?”
중위의 차가운 눈동자와 눈싸움을 시작했다. 너무나도 차가운 느낌에 등골이 서늘해질 지경이었지만 나는 굴하지 않고 내 눈을 부릅 뜬 채 노려봤다. 아무리 나탈리의 행동이 조금 지나쳤다고 하지만, 그렇게 까지 우리를 힐난할 건 없잖아?
눈싸움은 얼마 있다가 끝났다.
“지금 뭐하는 짓들입니까?”
“고…공주 마마!”
익숙한 앳된 소녀 목소리와 함께 나를 노려보던 눈에서 살기가 거둬지고 이 성질 나쁜 중위는 허리를 빳빳하게 세우면서 오른손 손날을 이마에 갔다 대었다. 얼굴에 써인거 다 보여. 낭패라고 씌여 있는거.
“플린트 자작, 지금 뭐하는 짓입니까?”
자작? 귀족이라고? 이 성질 나쁜 여자가?
“버릇없는 건방진 인간들이 대 에르데의 문화에 토를 달고 있길래 잠깐 정정해주고 있었습니다.”
“제가 본건 조금 다릅니다만……. 다시는 그렇게 하지 말아주십시오.”
“하지만……..”
“우리가 이해해야 합니다, 자작.”
저 말이 무슨 뜻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웬지 기분이 나쁘다. 마치 하위 계층들을 이해해 준다는 듯한 태도. 어쨌든 성질 나쁜 자작 중위는 그 말로 충분했는지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차렷 자세를 유지했다.
“이미 이렇게 된 이상, 평범한 소개는 좀 힘들겠네요…….. 뭐, 인사하세요. 이쪽은 에르데 제국 항공 기사단 에이스 중의 하나인 플린트의 유나 자작입니다. 유나, 이쪽은 자작께서 새로 배치된 제 44 항공 기사단의 부단장인 필그림 항공 기사 이창민 소위 입니다. 계급은 이창민 경이 낮지만, 부기사단장이니 유나 자작도 말을 조심하세요. 나탈리 소위와는 서로 소개가 끝난 것 같으니 넘어가겠습니다.”
뭐 이런 식으로, 여기 사람들은 우리를 매우 싫어한다. 사파이어 섬에서 왔다는 에리카 대위도 그렇고, 모두 우리에게 적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사냐 공주 정도나 직접적인 적대감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우리를 불편해하는 얼굴이 뚜렷하게 보이는게 대부분이니, 대충 이 사람들, 아니, 리히트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 수 있겠지. 제 44 항공 기사단 내에서는 나탈리와 내가 소위로 가장 계급이 낮다. 그나마 나는 부기사단장이라는 방패가 있지만, 그런 것 조차도 없는 나탈리는 그녀 특유의 잘못 된 것을 고치려는 성격 때문에 더더욱 쪼인트로 갈굼을 당했다. 하루는 비행 훈련이 끝나고 내 숙소에 와서 힘드니까 돌아가자고 내 앞에서 펑펑 울었을 정도니까. 훈련 중에 다리가 부러져서 피가 흐르는데도 헤헤 웃으면서 머리만 긁적였던 그 나탈리가 말이다. 나도 힘든건 마찬가지라서 내가 할 수 있는건 우는 나탈리를 울음이 그칠 때 까지 안아주고 달래는 것 뿐이었지만. 너무 힘들긴 힘들더라. 24시간 내내 자신들에게 살의와 적의가 담긴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과 지내보라고. 신경 쇠약은 예약이고 언제 미쳐버릴지 모르겠다니까. 요즘은 아예 권총에 실탄까지 재서 다닌다고.
그렇게 신경 쓰이는 일들도 어느새 일주일이 지나자 비교적 적응할만 해졌다. 물론 나나 나탈리를 바라보는 부대원들, 그러니까 다른 리히트 기사들이나 정비대원들, 헌병대들의 시선이 나아진 것은 아니지만. 뭐, 일단 서로 다른 문화 때문에 충돌 했다고 생각하자. 아무래도 그편이 내 정신 건강에 이로울 것 같다. 그 일주일 동안 우리는 여러 차례 각종 통합 전술 훈련을 실시했다. 뭐, 핑거팁 포메이션이라던지 다이아몬드라던지, 그런거 있잖아. 겨우 5기 뿐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한번 두번 훈련 같이 하다보면 언젠가는 최소한 적대적인 시선은 거두겠지. 언젠가는. 부기사단장으로서 위쪽에서 가해오는 싸늘한 사냐 공주의 압박과 아래에서 죽일듯이 노려보는 에리카 대위와 유나 중위의 시선, 그리고 자꾸 다른 사람들과, 특히 사냐 공주와 사소한 충동을 일으키는 나탈리를 상대해야 하니…….. 정말 죽을 맛이로군.
그러던 날, 일이 터져 버렸다.
수요일 오전, 나는 아침식사와 아침 체력 단련으로 5km 달리기를 마치고 방에서 뒹굴거리고 있었다. 바늘방석과도 같은 자리가 바로 부기사단장 – 위에서 눌리고 아래서 치고 올라오니까 – 이라는 자리지만, 딱 두개 좋은 점이 있는데, 첫번째가 바로 급료가 일반 기사단윈의 2배나 되는 64 라이히스룬트라는 것이다. 내 급료는 내가 감당하기 벅찰 정도로 많이 나와서 나탈리가 지난번에 한소리 했지. 64 라이히스룬트는 우리 필그림 달러로 환산 했을 때 대략 320 필그림 달러 정도 되니까, 꽤나 많이 나오는거다. 한 두달만 모아도 중형 승용차 한대는 사겠군. 아니, 그전에 면허를 따야 하나? 아, 아직 부기사단장 된지 한달도 안됐는데 어떻게 월급을 받았냐고? 월말에 지급하는 필그림의 월급 시스템과는 달리 제국에서는 월초 선불로 결제한다.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돈이라도 많이 받아서 최소한 편히 살라는 배려라나 뭐라나? 뭐, 많이 받는게 불만은 아니니까.
부기사단장의 두번째 좋은 점은 자유도다. 나탈리는 인간이라는 점과 계급이 가장 낮다는 사실 때문에 자꾸 각종 잡일 – 뭘 나른다거나 청소한다던가 요리를 한다던가 – 에 동원되지만, 나는 부기사단장이라서 그러지 않아도 되었다. 나탈리가 불쌍해서 몇번 도와주기는 했지만 그때마다 사냐 공주가 불러내 나에게 제국 공군의 교범 및 전술 수업을 한다고 하는 바람에 많이 도와주지 못했다. 그럴 때 마다 나탈리가 도가 넘은 – 멱살을 잡으려 한다던지 깨무려고 한다던지…….. – 도발과 견제 때문에 피곤해지는건 나라는거, 굳이 설명 안해도 되겠지? 특히 일대일 수업 도중 사냐 공주에게 쓸데없이 부담가는 말을 들어버려서 나탈리와 사냐 공주의 사이를 조절하는게 더 힘들다. 무슨 말이냐고? 굳이 몰라도 된다…….. 알았어, 말하면 되잖아, 말하면. 사냐 공주는 나한테 이런말을 했다.
“창민경.”
“예?”
“경의 실력은 우리 에르데 제국에서도 잘 알고 있고, 그 명성은 제국 곳곳에 퍼져 있습니다. 경이 지난 번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고 있지만, 그런건 잊고 우리 제국민들을 위해 경의 실력을 다시 한번 발휘해 주시오.”
이런 말을 들으니 내가 부담이 올 수 밖에 없지! 상상을 해봐라. 상관에게, 그것도 일국의 공주에게 그런 말을 들으면 부담이 안가겠냐고.
그런데 생각해보면 말이지, 난 사냐 공주에게 그때 그 일(…)에 대해서 한번도 말한 적이 없다. 그런 내색도 하지 않았고. 지난번에 황제의 보검 하사식 때도, 잠깐 머뭇거리기만 했을 뿐, 말한 적은 없다. 뭐, 공주가 그냥 넘겨 짚은거라고 생각하자.
잠깐 이야기가 딴데로 샜군.
어쨌건, 나는 내방에서 열심히 뒹굴거리면서 이번에 새로 수령한 PK 73의 모형을 보면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나탈리는 어디갔냐고? 활주로 청소 중이다. 투덜거리면서 고무판이 깔린 활주로에 물을 흠뻑 적신 대걸레를 밀고 있군. 도와줘야 하나? 해야겠지. 나를 가장 많이 도와주고 돌봐주는 친한 친구니까. 기사복을 챙겨 입고 부기사단장 완장을 찬 다음 문을 열었을 때, 웬 작은 소녀가 하나 있었다. 누구냐, 너?
“이창민 부기사단장 각하, 맞으신가요?”
내가 살면서 각하라는 호칭을 들을 줄이야. 웬지 나이가 엄청 먹은 것 처럼 들리는데. 보통 각하라는 호칭을 받을 나이가 되면 60에서 70대가 되니까, 나와는 인연이 먼 호칭이다. 그리고 난 그 소리를 들어 버렸다.
“마….맞는데?”
“사냐 공주마마의 심부름으로 왔습니다. 44 항공 기사단 기사 전원은 지금 즉시 브리핑실로 집결하라는 명령 입니다.”
예정에는 없던 훈련인가? 하고 생각하는 사이, 작은 꼬마는 쪼르르 달려가버렸다. 붉은색 융단이 깔린 복도 어디에도 없이. 무슨 귀신을 보는 것 같군.
복도 끝에 있는 계단을 내려가자 거대한 홀이 나왔다. 바로 우리 기사단의 브리핑룸이다. 쇼파와 커피 테이블이 놓여 있는 이 방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44 항공 기사단 기지인 사냐 공주의 개인 별장인 ‘리건 맨션’에서도 가장 크고 고풍스러운 방이었다. 비슷한 건물을 우리 세계에서 찾으라면...... 북프랑스 해안가의 '몽생미셸'이라는 곳과 닮았다고 해야 하나? 18세기 풍의 석조 건물인 리건 맨션의 원탁 방은 금색 샹들리에와 상아 의자들이 원탁을 둘러싸고 배치되어 있고, 커피 테이블 같은 원탁에는 에르데 제국 전술 지도와 각종 미니 사이즈 항공기들이 놓여 있었다. 훈련 브리핑 때 멏번 봐서 아는건데, 저 미니 전투기들, 전부 옥을 깎아 만든거다! 말 그대로 돈이 많은 황실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짓인거지. 어쨌건 그 큰 브리핑룸에는 고작 의자 5개가 있었는데, 각각의 의자에는 금색 명채로 이름이 씌어져 있었다. 내가 앉는 곳은 사냐 공주와 나탈리 사이에 있는, “이창민 소위”라고 씌여진 의자다. 이미 사냐 공주와 에리카 대위는 와서 앉아 있군.
“불렀어?”
에리카 대위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저 눈빛에는 황실에 대한 예우를 갖추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지만, 난 인간이다, 리히트나 에르데 제국민이 아니라고. 내가 모른체 하고 그대로 자리에 앉자 에리카 대위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며 나에게 말했다.
“이봐요.”
“왜요, 대위?”
“왜 공주마마께 존댓말을 사용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말 했잖아요. 이런 꼬마 녀석에게 존댓말을 쓸 수는 없다고.”
“공주입니다.”
“마음이 어린데 그런게 무슨 소용이 있나요? 그리고 대위, 나는 인간입니다. 우리 세계에서 그런 신분제는 전부 사라진지 오래에요.”
“무슨 그런 말도 안되는 억지를………”
“그만하세요, 에리카. 에리카의 정신 건강만 해칠 뿐이에요.”
“하지만……..”
“창민경도, 자리에 앉으시지요.”
에리카 대위가 마지못해 자리에 앉자, 나도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 나는 아직도 이 사냐 공주를 꼬마로 여기고 있다. 꼬마 맞잖아?
“무슨 일로 부른거야?”
“자세한건 프로필라인경과 유나경이 오면 말하겠지만, 짧게 말하면 아버님과 공군 사령관의 조언이 있었습니다.”
보나마나 프로파간다를 위해 실전에 투입하라는 것이겠지. 그게 우리 부대의 창설 이유니까. 에르데 제국으로서는 프로파간다를 통해 주적인 후소제국에게 경고를 보내고 싶을거다. 우리는 강력한 무기를 갖고 있는 필그림들과 동맹 관계를 맺었다. 빨리 사파이어만의 폭격을 사과하고 보상하라. 보나마나지, 뭐. 내가 짧게 생각을 정리해서 말하자, 사냐는 살짝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곧바로 평소의 차가운 무표정으로 돌아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렇게 되면 이제 내가 들어야할 건 어떤 임무에 투입되냐겠지.
궁금증은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렸다. 나와 사냐 공주, 그리고 에리카 대위 사이에 불편한 적막이 흐른지 대략 10분쯤 지났을 때, 나탈리와 유나가 서로 티격태격 싸우면서 들어왔다. 두사람다 기사복과 머리가 흠뻑 젖어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상태로. 젖은 옷이 몸에 쫙 달라 붙으니가 몸매가 살아나는…..이 아니라, 뭘 한거냐, 너희 둘?
“내 잘못이 아니야. 저쪽에서 먼저 시작한거라고.”
“제대로 청소 안한건 귀관입니다, 프로필라인 소위!”
“그렇다고 물을 나한테 끼얹을건 없잖아, 이 빌어먹을 중위야!”
“시끄럽군요, 유아 체형 소위. 청소 못한 벌이에요.”
“너가 남말할 처지냐, 이 키 작은 중위야!”
“어이어이, 둘다 진정하고 공주가 얘기하는 말이나 들어. 중요한거야.”
다행인건 아직 두사람은 내가 통제할 수 있다는거지. 둘은 티격태격해도 내가 한마디 하면 입을 다무니까 그나마 내 신경을 덜 긁는다. 물론 나중에 잔소리는 따로 하겠지만. 가장 많이 긁는건 자꾸 나한테 에르데의 신분제를 들먹이는 에리카고.
“그럼.”
사냐 공주가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는 붉은 오크나무로 만들어진 지휘봉을 쥐고 설명을 시작했다.
“이건 공군 총사령관 갈란드경과 아바마마께서 내린 지령입니다.”
이 파트는 아까 내가 추측한 대로, 에르데 제국의 해외 식민지를 차례로 점령하고 공격하는 후소 제국을 견제하고 협박하고 위해 우리 44 항공 기사단의 실제 작전을 공개한다는 내용이었다.
“우리의 첫번째 임무는, 지금 후소 제국 순양함을 추격, 격침하는 것입니다.”
사냐 공주는 OS-207이라고 씌여진 전술 지도를 원탁에 펼쳤다. 에르데 제국의 서부 해안선으로 부터 200km 떨어진 이 해역의 지도 한가운데, 사냐 공주는 붉게 칠해진 모형을 탁, 내려놓았다.
“정보국의 감청 결과, 후소 제국 해군 소속 순양함 1척이 OS-207 해역에 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사파이어 만의 공습으로 함대 주력을 잃어버린 우리에게 이 순양함 하나가 사파이어섬 근처에 있다는 것은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닙니다.”
OS-207 해역은 사파이어 섬에서 고작 남쪽으로 200km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대다수의 전함과 중순양함들이 대파되거나 격침된 지금, 사파이어섬에 남은 해군 전투함은 고작해야 구축함 몇척. 순양함급의 전투함이라면 호위함 세력도 거느리고 있을 테니, 사파이어 섬에 충분히 위협이 가는게 충분하다.
“아직까지 적의 함대 규모나 자세한 함종은 파악되지 못했기 때문에, 사파이어만에서 출항한 우리 구축함이 정찰을 마치고 보고를 올리면 그 즉시 우리 기사단과 사파이어만의 해군 기사단이 출격, 순양함 부대를 요격할 것 입니다.”
잠깐, 그럼 사파이어 섬으로 가는거야? 나나 나탈리의 Pk 73의 항속거리는 600km 정도 밖에 안되는데?
“아닙니다, 창민경. 우리는 여기서 폭장 상태로 출격, 해군 기사단이 어뢰와 폭탄으로 상처 입힌 적 순양함을 폭탄으로 격침시키기만 하면 됩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다 된 밥에 숟가락을 얻는 거군. 뭐, 어려운 대공망 무력화는 해군 기사단에서 해줄테니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만, 웬지 불길한 느낌이 든다. 해적도 아닌 일국의 정규 해군과의 전투라. 정말, 뭐라고 형용해야 할지 모를 불길한 느낌이다.
“현재 해군 기사단이 사파이어섬으로 이동 배치 되고 있으니 우리는 그들의 전개가 끝나는 1300시경, 출격할 것입니다."
현재 시각 12월 21일, 오전 11시 30분. 출격 전까지 대략 1시간 반정도 남으거군.
"출격 전까지 기사단원 여러분은 각자의 전투기를 점검해주세요. 이상, 해산."
우리, 그러니까 나와 나탈리가 회의가 끝나고 격납고에 내려갔을 때는 이미 전투기 점검이 한창이었다. 리히트 기사들과 우리는 다른 격납고를 사용하니까, 유나 중위와 에리카 대위는 다른 격납고에 가있고. 딱히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건 그렇고, 나탈리에게 할 말이 있었지.
"나탈리"
"응?"
"너, 나한테 설명해야 하는게 있지 않아?"
나탈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천진난만한 표정에 나는 한숨을 쉴 수 밖에 없었다. 그새 까먹은거냐.....
"유나 중위랑, 뭐하다 늦은거야?"
"아, 그거. 별거 아닌데."
"별일이 아닌데 작전 브리핑에 늦은거야?"
"그 빌어먹을 유아 체형 중위 녀석이 활주로에서 대걸레질 하던 나한테 물 같은걸 끼얹었다고. 그것만 아니었으면 늦지도 않았어."
아까 들은 이야기다. 정말 별일 없었나보군. 정말 별일 아닌 걸로 브리핑에 늦다니, 제정신인거야?
"휴....... 다시는 브리핑에 늦지 마라."
"알았어. 조심할게."
그나마 안심 되는건 내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알았다고 대답하는 나탈리의 천진난만한 성격이지만, 그러면서도 덤벙대는 구석이 있는게 나탈리니까 더더욱 신경이 쓰인다. 조심한다고 했으니 괜찮겠지.
"그건 그렇고, 이번 전투는 꽤 힘들거 같던데?"
나 만큼이나 해적들과의 공중전과 해전을 경험해본 나탈리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나탈리를 슬쩍 바라보았다. 쳇, 눈이 부시는군. 전투기 조종사에게 눈은 생명이나 다름 없는데. 새까만 잠자리눈 처럼 생긴 선글라스를 오른쪽 가슴에 달린 주머니에서 꺼내 쓰며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여기까지 나올 정도면 대략 중순양함인데, 그렇다면 대공 방어 체계도 만만치 않을거 아니야? 그리고 우리 PK 73의 항속거리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으니까, 연료 계산 잘못하면 바다에 퐁당하게 되는 거고."
"그런 말은 그렇게 웃으면서 할게 못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대꾸하면서 나는 최종 점검을 받고 있는 내 PK 73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공냉식 엔진과 터보 차져가 달린 기수 아래쪽에는 커다란 파일런과 함께 300L 들이 투하형 보조 연료 탱크, 일명 드롭 탱크가 달려 있었다. 작은 키의 리히트 정비병들이 엔진 카울링에 장착된 13mm 기관포 2정과 8mm 기총 2정에 벨트로 링크된 총탄들을 넣고 있었고, 다른 정비병들은 주익의 20mm 기관포 2정에 급탄을 하거나 주익 랜딩기어 옆쪽에 장착된 파일런에 50kg 짜리 항공 철갑탄 4개를 달고 있었다. 동체 파일런에 커다란 드롭 탱크와 주익에 철갑탄 4발이라, PK 73 특유의 민첩한 기동은 힘들겠군, 그래.
"그런데, 너는 괜찮겠어?"
나탈리는 반대로 나를 걱정하는 모양이지만.
"뭐가?"
"너 그때 이후로는 잘........"
아, 또 그때 그 일인가? 나탈리, 너도 잘 알잖아. 그날 이후의 내가 어떻게 되었는지.
"........어떻게든 해봐야지."
잘 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겠지만.
"........그래"
전투기의 점검이 끝난 1시간쯤 뒤, 우리는 사냐 공주의 선도와 함께 하나씩 날아 올랐다.
[편대는 V자 대형으로.]
우리 44 항공 기사단 소속 전투기 5기가 V자 모양으로 전개되었다. 사냐 공주는 에리카 대위를 윙맨으로 선택했고, 유나 중위는 원래 솔로로 논다고 하고. 내 윙맨은 당연히......
"나탈리, 잘 따라오고 있는지? 이상"
[창민아, 바로 뒤에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셔. 이상.]
[잡담 금지. 우리는 이제 첫 실전에 투입되는 겁니다. 지금까지의 훈련이 아니니까, 다들 정신 바짝 차리세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잠깐, 가장 중요한 편대 호출 부호를 안 알려줬잖아!
[아참...... 기사단의 콜사인은....... 우리 44 항공 기사단의 콜사인은, 파파가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