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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 나이츠 - 창공의 기사단


Sortie 002 - 노블레스 오블리주 Part 3


  3
  부우웅, 하는 엔진의 진동 소리. 1200마력의 강력한 공랭식 엔진은 나와 류미스를 무려 시속 600km라는 빠른 속력으로 날게 해주었다. 우리가 전파한 필그림식, 그러니까 지구식 전술교리를 받은 에르데 제국 공군의 순항 속도는 시속 560km. 맞다. 지금 우리는 순항 속도보다 40km나 빨리 가고 있다. 아무리 연료를 만재했고, 드롭 탱크까지 달았다고 해도, 우리 PK 73의 항속거리는 1000km를 넘어가지 않는다. 그런 상태에서 그런 고속드로 가는 것은 여차하면 연료가 완전히 떨어질 수도 있다는 거다. 그런데 왜 이렇게 빨리 가냐고? 그건 우연하게도, 정말 우연하게도 무전 수신 감도를 높히기 위해 주파수 다이얼을 돌리던 나탈리가 서쪽으로 돌아가려는 후소 제국의 순양함을 늦추기 위해 투입한 구축함 전대 2척중 한척이 격침되고 한척이 반격탄에 맞고 중파되어버린 것 때문이었다. 하필 초탄으로 얻어 맞은 곳이 영 좋지 않은 기관실이라서 잠시 항행이 중단되어버린 사이, 차탄에 얻어맞아 침몰한 구축함 '가이우스'의 구조를 위해 기동하던 구축함 '해머'도 무전탑에 얻어맞았는지 8인치 주포를 2발 맞았다는 무전을 마지막으로 교신이 끊겼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은 사냐 공주는 굉장히 흥분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속도를 높히라고 명령했고. 물론 동체 내에 커다란 연료탱크를 담은 덕분에 항속거리가 1200km 가까이 나오는 에르데 제국 공군의 주력 전투기 EU-34 아처피쉬를 모는 사냐 공주나 에리카 대위, 유나 중위는 상관이 없겠지만, 연료 상황에 신경써야 하는 PK 73을 모는 나나 나탈리는 당연히 반대했다. 세사람이 대꾸도 없이 앞서 가버리자 바로 스로틀 레버를 쭉 올려야 했지만. 덕분에 지금 우리는 벌써 연료를 10%정도 사용해버렸다. 300L라는 증가 연료탱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창민아]
  "응?"
  나탈리가 나를 불렀다. 무슨 일이지? 아직 더 가야 할텐데.
  [나중에 새 기종 나오면, 항속거리가 긴걸로 받자.]
  ​.​.​.​.​.​.​.​그​래​.​.​.​.​.​.​.​.​ 비행하는 도중에 일일히 연료계 바늘 보면서 피말리는 연료 관리 하는 것도 은근히 신경 쓰이는군. 하지만 어쩌랴, PK 73은 방공 전투기인걸. 비상시 해군용으로도 쓸 수 있도록 랜딩기어도 단단하고 주익도 접을 수 있고 내염 처리도 되어 있지만 방공 전투기는 방공 전투기다. 애시당초 긴 항속거리 자체를 필요로 하지 않으니까.
  [잡담금지. 전파 침묵.]
  그리고 뒤이어 날아오는 에리카 대위의 짧은 무전. 어차피 감청의 위협도 별로 ​없​을​텐​데​.​.​.​.​.​.​.​.​.​ 뭐, 전장이라는 상황에서는 그 만약도 조심해야 하는건가?
 
  그렇게 전파침묵 상태로 20분을 더 비행하자 수평선 너머에서 회색 연기 기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른쪽으로 20도 정도 기울어진 저 연기 기둥은 틀림없이 에르데 제국 구축함에서 나오는 것이겠지. 전파 침묵이라서 말은 못했지만, 아마 지금쯤이면 다들 봤을 것이다. 사냐 공주를 슬쩍 바라보자, 그녀는 연기 기둥을 보았는지 심각한 얼굴을 하고 정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나를 슬쩍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전파 침묵 해제합니다. 목표 발견. 혹시 모를 적 항공 세력에 대비하세요.]
  회색 연기는 점점 가까워졌다. 시속 600km로 4000피트 상공에서 날고 있던 우리는 나의 건의로 6000피트까지 상승했다. 덕분에 속력이 시속 540km까지 줄었지만, 이따가 급강하를 해야 하니, 어차피 큰 상관은 없다. 급강하 하면서 잃어버린 속력을 되찾을테니까.
  물론, 내가 할 수 있을 때 이야기다. 아까부터 계속, 무엇인가가 나를 옥죄는 듯이 강하게 조종석에 누르고 있었다. 투명한 방탄 캐노피는 언제라도 붉은 손이 튀어나올 것 같이 일렁이고 있고. 아....... 정말 어떻게 ​된​거​야​.​.​.​.​.​.​나​.​.​.​.​.​.​.​.​
  그 저주받은 날에서 도망칠 수는 없는건가?
  [파파가이 02에서 파파가이 00에게! 적 함대 포착. 순양함 1척과 구축함 2척입니다.]
  파파가이 02, 에리카 대위가 말했다. 내가 그 날의 끔찍한 추억을 되살리는 사이, 어느새 후소 순양함대는 우리 바로 아래까지 와있었다. 1척의 순양함과 2척의 구축함, 그리고 그 옆에서 불타고 있는 1척의 구축함 위를 지나갈 때, 나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함미에서 새하얀 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수십개의 짙은 남색의 점들. 후소 제국 해군의 제복이 새하얀 세일러복이니, 저 남색 점들이 바로 에르데 제국 수병들이다.
  [상대는 기껏해봐야 노란 돌대가리들입니다! 모조리 박살내버리세요!]
  [에르데 제국 만세! 빌어먹을 후소 놈들을 죽이자!]
  섬뜩한 구호를 외치면서 2기의 전투기, 사냐 공주와 에리카 대위의 EU-34 전투기가 V자 편대에서 떨어져나갔다. 왼쪽으로 하프 롤을 한 뒤 그대로 기수를 내려 커다란 C를 그리는 사냐 공주와 에리카 대위는 주익에 달려 있던 로켓탄과 동체의 50kg 항공 철갑탄, 그리고 주익의 50 칼리버 기관총 4정을 난사하면서 후소 제국 순양함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도 저녀석의 함종을 파악하지 못했군.
  5개의 주포탑에 달린 3문의 8인치 주포, 2개의 2연장 부포탑의 40mm 대공포, 그리고 다수의 노천 대공포들과 2개의 증기식 캐터펄트라. 그렇다면 론도니움 군축 조약을 깬 후소 제국이 경순양함인 척 하고 중순양함으로 건조했다는 모가미급이다. 응. 틀림없어. 함체 중앙에 장착된 4연장 어뢰 발사관이 보이는걸.
  경순양함으로 계획된 중순양함인지라, 후소 순양함의 장갑은 그리 두껍지 않았다. 사냐 공주와 에리카 대위,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유나 중위의 기총소사에 주포탑 바벳에 구멍이 숭숭 뚫리고 갑판위에 포방패도 없이 설치된 노천 대공포대 조작원들이 피를 뿌리면서 죽어가는게 보였다. 갈색의 나무 갑판이 새빨갛게 물들었을 때, 3기의 EU-34 아처 피쉬 전투기는 공격 코스에서 이탈한 채 고도를 높이고 있었다. 후우....... 이제 내 차례인가?
  [창민아]
  나탈리가 불렀다.
  "응? 왜?"
  [괜찮겠어?]
  글쎄. 괜찮을지 안괜찮을지 전혀 모르겠다. 나는 대답하지 않은 채 그대로 전투기를 반바퀴 빙글 돌린 다음 조종간을 강하게 당겼다. 수평선을 향하던 기수가 숙여져 어느새 철제 십자 기계식 조준기의 정 가운데에 후소 제국의 순양함이 들어왔다. 조준기에 장착된 망원 렌즈에 확대된 후소 순양함은 후소 제국 수병들이 갑판에서 무엇을 하는지 조차 알 수 있을 정도로 잘 보여주었다. 수직으로 순양함을 향해 낙하하는 내 PK 73이 점점 가속을 붙혔고, 속도는 어느새 시속 600km에 도달해 있었다. 내 스로틀 레버는 고작 50%대에 머물러 있는데! 십자선에 들어온 순양함을 향해 발포를 하려는 순간
  나는
  보았다.
  선미에서 공포에 질린 채 오들오들 떨고 있는 에르데 제국의 수병들을.
  그리고 마치 짐승들을 몰아 넣듯 함미로 그들을 밀어내는 후소 제국의 수병들을.
  베레모를 쓴 수병 하나가 짙은 남색의 에르데 수병을 붙잡고는 머리에 권총을 들이대며 나에게 뭐라고 외치는 것까지.
  그리고.
  그리고
  그대로 방아쇠를 당겨버리는 후소 제국 수병의 얼굴까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항공기용 K-11C 기계식 조준기의 달린 망원 렌즈는 쓸데없이 고성능이었다. 이렇게,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을 보게 만들 정도로. 순식간에 선미 갑판은 피바다가 되었다. 내가 점점 다가갈수록, 후소 제국 수병들은 칼과 총으로 닥치는대로 에르데 제국 수병들을 찌르고 배고 쏘며 학살했다. 하지만 나는, 그때, 그날처럼 될까봐 무서워서,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다 떨어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타타탁
  둔탁한 충격과 함께 나는 오른쪽 주익을 뚫고 나오는 노란 궤적의 예광탄들을 볼 수 있었다. 어느새 내 고도계는 상공 100피트를 가리키고 있었고, 주변은 대공포에서 쏘아대는 대공포탄의 폭발로 회색 꽃밭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나는 나를 부르는 나탈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 정신 차려!]
  "포로들은? 에르데 수병들은?"
  그 와중에서 내가 가장 알고 싶었던건 포로로 잡혔던 에르데 제국의 수병들 뿐이지만.
  [후소 놈들이 네 전투기에 대공포로 쏘고 있을 때 다들 바다로 탈출했어. 몇몇은 갑판에서 살해당한 ​모​양​이​지​만​.​.​.​.​.​.​.​.​ 그게 중요한게 아니야! 네 뒤에, 후소 전투기가 따라 붙었다고!]
  아참, 깜박했다. 이 빌어먹을 후소 순양함은 2기의 수상기를 탑재할 수 있다는 것을. 본격적인 전투기보다 느리고 기동성이 떨어지는 수상기들이지만, 그렇다고 꼬리를 잡혔을 때 마냥 안심하고 있을 상대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나는 지금 제대로 조종을 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고, 전투기도 그리 멀쩡한 상태가 아니니 말이다. 너덜거리는 주익 외피 내부의 전선들이 여기서도 보이는군. 포물선 궤도를 그리며 날아오는 노란색 예광탄 궤적을 피해, 나는 이리저리 조종간을 움직였다. 기동성이 훨씬 좋은 내 PK 73이 떨쳐 수상기 둘을 떨쳐 냈을 때, 언제 다가왔는지 하늘에서 유나 중위와 사냐 공주가 기관포탄을 발사하면서 수상기들에게 수직으로 내리 꽂혔고, 뒤이어 수상기들은 그냥 불타는 하늘의 재가 된 채 바다로 추락했다. 후소 제국의 순양함도 항로를 틀어 서쪽으로 항해하고 있고, 그리고 ​나​는​.​.​.​.​.​.​.​.​.​
  "연료탱크에 맞았는지 연료가 별로 없다. 기지로 귀환하겠다."
 
  그리고 기지까지 어떻게 돌아왔다.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가 출격한 동부 해안가의 리건 맨션은 아니고 바로 우리가 작전한 OS-207 해역에서 200km 북쪽에 있는 ​사​파​이​어​섬​이​었​지​만​.​ 중간에 연료가 거의 떨어졌는데도 어떻게 거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지만, 아까 그 일 때문에 정신이 없었던 나는 랜딩기어를 내리지 않은 채 그대로 동체착륙을 해버렸다. 동체 하부에서는 불꽃 스파크가 팍팍 튀기고, 알루미늄제 프로펠러는 보기 흉할 정도로 헝클어진 채 사방으로 금속 파편을 뿌려댔다. 고무 패딩을 깐 활주로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굳이 얘기 하지 않아도 알겠지? 물론 그런건 지금 내게 중요한게 아니었다. 내 눈 앞에 있는 캐노피의 방탄유리에는 아까 죽었던 에르데 제국의 수병들의 피가 묻어 있는 것만 같았다. 언제라도 툭 튀어나와 내 목을 조를지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이 가만히, 조종간을 쥔 채 가만히 앉아있을 수 밖에 없었다. 주변이 굉장히 따뜻하다못해 뜨겁지만, 내 등에서는 오히려 식은 땀이 나고 있었다. 추웠다. 온 몸이 오들오들 떨린다. 추운 겨울날 눈폭풍이 몰아칠때, 아무런 옷도 입지 않고 그 중간에 서있는 것 처럼 춥다. 이건 분명, 절대 지워지지 않을, 그날 내 캐노피에 묻은 피 때문일거다. 분명히.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어디에선가 찬 공기가 확 들어왔다. 그리고는 무엇인가 내 멱살을 잡더니 그대로 조종석에서 끌어내었다. 내 눈 앞에서 어른거리는 것은 얼굴이 피범벅이 된 사냐 공주였다. 가만, 그러고 보니 어디에선가 많이 봤다고 생각했던 얼굴이다. 설마, 설마, 네가.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것입니까?!"
  네가, 그날 피를 뒤집어 쓴 그 꼬마였냐?!
  "당신 때문에, 당신 때문에!"
  짝 소리가 나는 순간, 나는 내 뺨이 얼얼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대로 푸른 하늘이 한바퀴 돌자마자 나는 얼얼하고 뜨거운 볼에 무엇인가 차가운 것이 닿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 나 지금 땅바닥으로 내팽겨쳐진거다. 단단하게 얼어붙은 땅바닥에 머리를 부딛히고 나서야, 나는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흐릿했던 시야가 제대로 돌아오자, 내 앞에는 사냐 공주가, 피범벅은 커녕 특유의 눈꽃처럼 새하얀 피부의 사냐 공주가, 붉게 달아오른 채 눈물을 글썽이며 서있었다. 방금 나를 때린건 그녀인건가보다. 허리에 얹어져 있는 왼손과는 달리 오른 손은 허공에 멈춰져 있으니까. 두 눈을 치켜뜬 채 나를 노려보던 사냐 공주의 눈빛에 나는 움찔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 이게 소꿉 장난으로 보이십니까? 예? 지금 우리는 전쟁중입니다. 황족으로서, 저 빌어먹을 후소 촌놈들을 최대한 많이 죽여버려야 우리 제국민들이 안전해진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당신 때문에!"
  사냐 공주는 헐떡이던 숨을 잠깐 고르고는 나를 매섭게 노려보면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당신 때문에! 우리 수병들만 죽지 않았습니까! 당신 때문에! 당신이, 발포를 해서 순양함의 균형을 깨뜨렸다면, 발포를 해서 그들의 주의를 산만하게 해버렸다면, 아니, 처음에 조금만 더 일찍 도착했다면!"
  "큭"
  사냐 공주가 거칠게 내 옷깃을 잡아 올렸다.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한 채, 나는 그렇게 멱살만 잡힌 채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땅에 닿은 발에 힘을 주지도 못한채, 그렇게 무력하게. 가만히. 마치 그날의 꿈처럼, 나는 제대로 저항도, 숨도 쉴 수 없었다. 하늘이 빙빙 도는 것 같이 보였다.
  ​"​그​들​이​.​.​.​.​.​.​.​죽​지​는​.​.​.​.​.​.​.​않​았​을​ ​텐​데​.​.​.​.​.​.​.​"​
  기어코 눈물을 흘리는 터트리는 사냐 공주. 덕분에 손힘이 약해져 나는 그대로 땅과 헤딩을 해버렸다. 단단한 얼음 바닥의 충격은 내 뇌에게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신호를 계속 보내고 있었지만 내 뇌는 옛날의 잊고 싶은 기억에 사로잡힌 채, 바깥으로 부터의 모든 정보를 차단하고 있었다.
  정말, 용서받을 길은 없는 걸까.
  "당신만 ​아​니​었​다​면​.​.​.​.​.​!​"​
  사냐 공주의 오른손이 높이 올라간다. 언제 빼들었는지 그 손에는 제국 항공 기사용 레이피어가 달려 있었다. 은빛으로 번뜩이는 칼날을 보고도 나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이렇게 하면 죄를 씻을 수 있을까? 이렇게 얌전하게 죽으면?
  아니면 이것도 또 다른 개죽음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내 왼손은 내 자유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미 내려오는 칼날을 막기 위해 올라가고 있었다.
  ​"​잠​깐​.​.​.​.​.​.​.​.​"​
  늦었다. 이미 칼날은 몇 cm 앞에 있다. 저건 1초도 되지 못해서 내 살과 근육을 가르고 뼈를 부슬 것이다. 운이 좋다면 한번에 죽겠지만, 저건 예식용이라서 날도 예리하지 않잖아? 아마 안될거야, 아마.
  하지만 기다리고 기다려도 손 끝에 통증은 오지 않았다. 단지 쨍, 하는 소리만이 울려 퍼질 뿐. 사냐 공주의 레이피어는 또 다른 은빛의 레이피어에 가로막혀, 내 손에서 불과 1cm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은빛 레이피어는 다른 에르데 제국 리히트 항공 기사들과는 달리 중앙에 필그림 소속임을 뜻하는 붉은색 줄이 그어져 있었다. 응? 붉은 줄?
  "프로필라인 소위, 지금 뭘 하는 겁니까?"
  "너야말로 지금 뭐하시는 거냐, 공주님?"
  나탈리였다. 그날 일을 나와 함께 겪은 나탈리는 나를 이해하는지 본인 스스로도 '예식용도 못되는 무딘 칼'이라고 말했던 레이피어를 꺼내든 채 사냐 공주의 레이피어를 막아내고 있었다.
  "적에게 발포하지 않고, 오히려 그 행동 때문에 애꿎은 병사만 잃게 만든 이창민 경을 벌하려던 참입니다."
  "아무리 창민이 답답하게 행동했다지만, 이건 너무한거 아니야?"
  라고 말하면서 가볍게 사냐 공주의 레이피어를 튕겨내는 나탈리. 두사람은 서로를 죽일듯이 노려보더니 뒤이어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창민이 때문에 그 사람들이 죽었다고 하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그리고 창민이가 발포 안한 덕분에 후소 놈들이 대공사격에 집중해서 에르데 수병들도 도망칠 수 있었고."
  조목조목 따지는 나탈리의 말에 사냐 공주는 아무 말 없이, 얼굴이 빨개진 채로 푸른 수평선만 바라보며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힐끗힐끗 눈동자만 움직여서 나를 바라보는 걸 보니 살짝 안절부절 한 것 같지만. 사냐 공주에게 따질 걸 다 따진 것 같은 나탈리는 그대로 나에게 다가와 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는 자기 얼굴을 내 얼굴 앞까지 가져온 채, 나에게 말을 걸었다.
  "창민아, 괜찮아? 다친데는 없고?"
  ​.​.​.​.​.​.​.​.​젠​장​.​ 이런건 애한테나 쓰는 말이잖아! 나탈리는 얻어맞은 내가 걱정 되었는지 뺨에 손을 갖다대었고, 살짝 창피하고 민망해진 나는 그 손을 뿌리치고 천천히 ​일​어​서​.​.​.​.​.​려​고​ 하다가 휘청댔다. 같이 일어난 나탈리가 아니었으면 그대로 넘어졌겠지. 물론 그걸 그대로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하겠지만.
  "괜찮아. 안잡아도 돼."
  "정말? 안괜찮아보이는데. 너 얼굴이 지금 창백하다고. 손도 얼음장처럼 차갑고."
  나탈리는 내가 정말 걱정되는지 아예 내 한쪽팔을 그녀의 목 뒤로 넘겨 나를 부축해주고 있었다. 그정도로 아예 못 걸을 것은 없었고, 혼자서 걸을 수 있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걱정이 되어서 눈가에 살짝 물기가 어려있는 나탈리의 얼굴을 보고 포기했다. 나탈리는 나를 부축한 채,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에리카 대위와 유나 중위 일행을 향해 다가갔다. 주변으로 리히트들이 쫙 갈라지는걸 보면, 뭔가 무언의 협박이라도 했나보지? 그러고 보니 사냐 공주, 나탈리가 나에게 다가와서 이것 저것 해주는 걸 보고는 그냥 홱 고개를 들려 가버렸다. 어떻하냐? 사과 해야할 것 같은데.
  "나탈리, 잠깐만 기다려줘. 어이, 사냐 공주!"
  나는 사냐 공주를 불렀다. 인파 속에 숨어들어갔지만 부르면 나오겠지. 설마 사람이 부르는데 대놓고 무시하겠어? 하지만 내 기대와는 달리 내 대답에 응한건 사냐 공주가 아닌 에리카 대위였다.
  "지금은, 그냥 가 주시지요."
  "왜? 최소한 내가 왜 그랬는지는 설명은 해야할 것 아니야?"
  "공주마마의 마음도 중요합니다. 지금은 들으실 때가 아닙니다."
  마치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다는 투로 말하는 에리카 대위. 내가 반말을 했다고 토다는 것 없이 바로 말했다. 뭘 알고 있길래 그렇게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는거냐?
  "모든걸 알고 있으니까요."
  "뭐?"
  "공주마마께서는 이곳, 사파이어 섬을 찾으실 때마다 해안가에서 밤산책을 하십니다."
  그런데 어쩌라고, 나더러.
  "일단은 비행 후의 피로도 있는데 조금 머리와 마음을 식히시지요, 부기사단장님."
  처음으로 나를 부기사단장이라고 부르는군. 웬일이냐, 네가? 나는 이 질문을 하지 않았다. 에리카 대위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마음에 걸렸으니까.
  "그분도 공주이십니다."
 
  아, 나중에 알게 된건데, 그 후소 제국 순양함은 우리가 해역을 떠난지 얼마 안되어 들어온 해군 기사단의 폭격을 얻어맞고 격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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