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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 나이츠 - 창공의 기사단


Sortie 002 - 노블레스 오블리주 Part 4


  4
  푸르른 바다가 마치 보석 사파이어의 푸른색과 비슷하다고 생겨 이름 붙혀진 사파이어 섬은, 거대한 오스트 대양과 서부 해안선을 맞닿고 있는 에르데 제국의 전진기지이자 국경 방위를 위한 요충지였다. 북쪽의 칼라사 지방이 가장 서쪽으로 돌출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곳은 연안이나 간신히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하게 꽝꽝 얼어붙은 불모지라서 전략 요충지라고는 할 수 없다. 반면 저위도의 따뜻한 기후에 위치한, 이곳 사파이어 섬은 4계절 내내 사용할 수 있는, 거대한 오스트 대양의 오아시스와도 같은 요충지 중의 요충지다. 위도가 낮아 낮에는 섭씨 30도 까지도 올라가는 곳이지만, 밤에는 매우 쌀쌀하다. 그리고, 드넓은 대양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거세다. 덕분에 나는 절대 입을일이 없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황실 근위 기사단 외투를 껴입고 있었다. 왼팔만 소매에 넣고, 오른쪽 어깨를 외투로 감싸는 특이한 방식의 이 외투는 은근히 따뜻했지만, 이렇게 바람이 부는 날에 한쪽 소매가 비어 있어 펄럭이는게 신경 쓰인다. 무슨, 팔 없는 장애인이나 상이 군인 ​같​잖​아​.​.​.​.​.​.​.​.​
  보름달만 휘엉청 떠있는 이런 늦은 시각에 내가 나와 있는 이유는 따로 묻지 않아도 되겠지? 내가 여기 있는건 아까 에리카 대위의 말이 신경 쓰이기 때문이다. 절대, 절대, 절대로 사냐 공주의 사생활이나 옛날 얘기가 궁금해서 그런게 아니야. ​정​말​이​다​.​(​.​.​.​)​
  휘이잉, 하고 바람이 부는 소리만 들려온다. 여기 나온지 고작 15분도 안된 것 같은데, 벌써 몸은 덜덜덜 떨리고 있고, 손은 얼음장 같이 찬 물에 담근 것 마냥 아무런 느낌도 안온다. 아니, 만져보면 조금 따끔한 느낌은 나는군. 분명 아까 밤에 산책을 한다고 했는데, 왜 이렇게 안나오는거야?라고 생각이 들던 차에, 뒤에서 탁탁, 발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나온건가? 고개를 돌려 뒤를 보자, 밤 바람에 단발의 푸른 머리가 휘날렸다. 사냐 공주는 마치 귀신을 본 것 처럼 그자리에 우뚝 멈춰서더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렇게 얼어 있었다.
  왜 그러냐?
  ​"​저​기​.​.​.​.​.​.​.​.​"​
  사냐 공주가 나를 향해 앞으로 한발 내딪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허공으로 올라가는 오른손. 이거, 아까 한번 겪었던 상황인 것 같은데, 또 당할 수야 없지! 허공에 올라간 사냐 공주의 창백한 오른손이 점점 내 얼굴을 향해 다가오자, 나는 두 팔로 얼굴을 가리면서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는 눈만 내놓은 채, 그 다음 일격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웬걸. 사냐 공주는 아까처럼 내 뺨을 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손을 거두고 있었다.
  ​"​미​.​.​.​.​.​.​미​안​해​요​.​"​
  "에?"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사과였다. 질책이나 힐난이 아닌, 사과. 그동안 감정 없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던 이 사냐 공주의 입에서, 사과가 나왔다.
  "미안해요, 창민경...... 전부 내..... ​잘​못​이​에​요​.​.​.​.​.​.​.​"​
  "무슨..... 말이야?"
  살짝 고개를 숙인 사냐 공주는 한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차디찬 바닷바람이 서너차례 우리를 치고 지나갔을 때야, 사냐 공주는 고개를 들었다.
  "제가 누구인지 알고 있나요?"
  그건 알고 있다. 제 8황녀, 에르데의 사냐 공주.
  "맞아요. 저는...... 황실의 일원이에요. 그래서 저에게는 귀족으로서, 황족으로서, 국민들의 생명을 지켜야할 의무가 있어요."
  그리고 그 의무는 아주 잘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의 어느 황족이 이렇게 최일선 부대에서 싸우고 있을까?
  ​"​아​니​에​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해머호의 수병들도 그렇고, 이곳, 사파이어 섬의 기습 폭격때도 그랬고, 저는 그 누구도 구하지 못했어요."
  ​.​.​.​.​.​.​.​.​그​건​ 네 탓이 아니야, 라고 말하고 싶었다. 지금은 우리는 전쟁중이다. 전쟁에서 누군가가 죽고 다치는 것은 정말로 당연한 것이다. 그런걸 감안 하면, 사냐 공주는 그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정말 모든 노력을 다했다고 볼 수 있다. 포로로 잡혀있는 수병들을 구하기 위해 급강하 폭격으로 후소 제국 수병들만 저격하지 않나, 우리를 닥달해서 연료 소비는 신경쓰지 않고 최대한 목적지에 빨리 가도록 종용한다거나. 자신이 할 수 있는 노력은 충분히 다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사냐 공주의 뺨에 한줄기의 눈물이 달빛에 반짝,하고 빛났으니까.
  "우리 국민들을 구하지 못하는 것도 힘들지만요, 그보다 더 ​힘​든​건​.​.​.​.​.​.​.​"​
  더 ​힘​든​건​.​.​.​.​.​.​.​
  "우리 국민들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죽여야 한다는 거에요."
  그렇게 말하면서 사냐 공주는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달빛에 비춰진 창백한 피부는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 사냐 공주의 눈에는 피에 젖은 붉은 색으로 보이겠지.
  "이 손으로 지금까지 죽인 ​사​람​이​.​.​.​.​.​.​.​.​.​ 너무나도 많아요. 귀족으로서 그런 피를 손에 적시는 것은 ​정​말​.​.​.​.​.​.​.​.​.​"​
  죽기 보다도 싫겠지. 고귀한 삶이나 지위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본능적으로 가지는 살인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거부감. 그리고 죄책감. 일반적인 병사들이 전쟁에서 겪는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혹은 PTSD가 이런 거부감과 두려움, 그리고 죄책감 때문에 생긴다. 그건 어쩔수가 없는 인간의 본성이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어쩌랴. 우리는 군인이다. 다른 무고한 사람들을 위해 손에 대신 피를 묻히는 사람들인걸.
  "창민경. 부탁이 있습니다."
  조용히 흐느끼던 사냐 공주가 고개를 들고, 눈물을 글썽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방금전에 울고 있던 여자아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사냐 공주의 태도는 위압감과 무게를 내게 전달했다. 그 태도에,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살짝 숙여버리고 말았다.
  "경께서 몇년전에, 해적선을 격파하고 우리 에르데 제국민들을 살려주신 것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때 경의 용감한 돌격이 없었다면, 저는 그날 죽었겠지요."
  정말 ​맞​았​던​거​냐​.​.​.​.​.​.​.​ 그때 그 꼬마가.
  "숫적으로도 불리하고, 무장도 변변치 않은데도, 경께서는 필사적으로 해적들을 공격해주셨습니다. 물론 불상사도 있었지만,덕분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날의 ​일​이​.​.​.​.​.​.​.​.​ 살이 떨려온다. 그날의 일만 생각하면, 계속 살이 떨린다. 내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발생했던 민간인 학살의 피해자가 바로 눈 앞에 서있다. 그것도 자그마치 나를 용서하면서.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위압감이었다. 떨림이 어느순간 딱 멈추었다. 무언가 차가운 것이 볼에 닿아 있었다. 드라이아이스 처럼 차갑다고 할 수 있는, 창백한 사냐 공주의 손이 내 볼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그리고 그건, 정말 신기하게도 나를 진정시켜 주었다.
  "이해합니다. 용서합니다. 그러니 제발, 그날, 불의를 보고, 정의를 위해 싸운 그날의 창민경으로 돌아와서, 이번엔 우리 에르데 제국을, 아니, 에르데 제국민들을 위해 싸워주세요."
  한방울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냐 공주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그대로 갸름한 턱으로 내려갔다. 눈물 방울은 그대로 체리처럼 붉은 입술에 닿더니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잠시 닫혔던 공주의 입이 다시 열렸다.
  "한번만 더, 싸워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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