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rtie 003 - 페룸 독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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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사냐 공주와 그 말을 주고 받은지 한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OS-207 해역의 전투날 전투기를 통채로 단단한 사파이어만의 활주로에 처박아버린 나는 에르데 제국과의 협조를 위해 파견나온 군수 지원 참모 대위에게 지독한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아, 물론 PK 73이 비싼 전투기라는건 알지만, 그날은 어쩔 수 없었다니까. 어찌되었건 나에게 새 전투기를 내어줄 수 밖에 없었던 군수 참모의 분노 어린 시선을 무시하고, 나는 한달동안 사파이어섬에 머물면서 부기사단장으로서의 직무를 다했다. 그러니까 뭐, 훈련을 감독한다거나 그런거 있잖아. 계기 비행부터 시작해서 야간 비행 훈련, 저고도 비행 훈련, 급강하 폭격 훈련 뿐만 아니라 항공 전술 훈련과 에르데 제국 해군과의 합동 훈련도 여러번 했다. 사냐 공주는 후소 제국과의 주 전장이 육지가 아닌 해상이 될 것이라고 말하며 나에게 후소 제국의 함대가 남하할 때를 대비한 해군과의 합동 요격 계획을 짜게 만들었는데, 그건 그거대로 무진장 귀찮고 골치 아팠다. 그동안 육상기지에서의 운용 훈련만을 받은 나와 나탈리에게 항공모함에서 이착륙 훈련까지 시키다니! 그동안 150소티를 넘게 출격해보고 착륙해본 나조차도 항공모함에 착함할 때 여러번 처박을 뻔 했다. 와이어에 후크를 걸지 못하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고 아예 각도를 잘못잡아서 항공모함 함체에 들이 박거나 갑판에 들이박을 뻔도 했으니까. 아아, 당연히 실제로 일어난 일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이렇게 말하고 있지도 않겠지.
그렇게 계속된 고된 훈련 속에서도 전쟁은 계속 되었다. 여기는 지금이 전시라는 것을 믿지 않을 정도로 평화롭지만, 일선 상황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나도 어디까지나 라디오로만 들은 것이지만, 후소 제국군은 전쟁 수행을 위해 유전과 고무, 나무, 철광 등이 산재해 있는 인디치나 반도의 자원지대를 점령했다고 한다. 그 와중에 중간에 놓여있던 에르데 제국의 식민지 미나스 제도도 넘어간건 당연하고. 미나스 제도에 고립된 3만여명의 식민지 치안군과 에르데 제국 육군은 최후까지 저항하다가 결국 전투 3개월만에 식량과 식수의 부족으로 항복했다. 미나스 제도에 배치된 항공 기사단 2개의 주력 전투기가 기령이 10년도 넘은 구식 EU-23 와일드 버펄로라는걸 생각해보면 꽤나 오래 버틴샘이지. 그렇게 후소 제국은 사파이어만 폭격으로 잠자고 있다가 한방 얻어맞은 에르데 제국에게 계속 펀치를 날리면서 견제를 하고, 동시에 이시라 대륙의 거대한 대륙 국가, 치노 제국의 남부 해안선과 동부 해안선을 야금야금 갉아 먹으면서 북진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들려오는 각종 약탈과 방화, 살인과 학살 소식은 우리 모두를 놀라게 했다. 치노 제국의 남부주에서 가장 큰 도시인 남경에서 군과 민간인을 포함 30만을 학살했다는 소식은 에르데 제국의 수뇌부와 일선 부대를 공분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니, 오히려 사파이어만의 기습 폭격 이후 후소 제국에게 이를 갈고 있던 에르데 제국인들에게 복수의 불을 지펴주었다. 거기다 미나스 제도의 포로들을 300km나 아무런 식량이나 휴식, 식수의 제공도 없이 걷게 만든 '죽음의 행진'도 그 복수의 불길에 기름을 끼얹었고. 몇주 전까지만 해도 우리 필그림들에게 향해 있던 적대적인 시선과 분노가 전부 후소 제국에게 돌려진건 딱히 설명을 하지 않아도 알고 있겠지? 오히려 몇몇 제국민들은 아예 필그림의 홈 아일랜드를 에르데 제국의 13번째 자치주로 편입시켜 완전한 운명 공동체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할 정도니 말 다했다. 그런 우호적인 분위기는 필그림 수뇌부가 과거 지구에서 가져온 몇 안되는 핵심 기술들과 신무기들을 제공하면서 더더욱 달아올랐다. 신형 장거리 폭격기의 설계도를 넘겨준다거나, 대구경 88mm 고사포를 넘겨준다거나, 우리 PK 73의 20mm 기관포의 강력한 펀치력의 핵심인 스플린터탄의 생산 라인까지 이전해줘 에르데 제국은 사파이어만 이후 계속해서 제기되던 대규모 군비 확장을 추진할 수 있었다. 매일매일 수백대의 장갑차와 수백대의 전차, 수백대의 전투기와 폭격기가 생산되어 일선에 배치되어 있던 구식 전투기들을 대체하였다. 덕분에 사냐 공주와 에리카 대위, 그리고 유나 중위도 그동안 타고 다니던 구식 EU-34 아처피시 전투기 대신 필그림에서 전해준 최신 기술들이 왕창 들어간 최신형 단좌 단발 수냉식 전투기 EU-37 고스호크 전투기를 인수했다. 확실히 내가 봐도 공랭식 엔진 덕분에 기수에 거대한 라디얼을 장착한 PK 73보다는 수냉식 엔진 덕분에 날렵해보이는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는 EU-37이 더 탐나기는 하지만........ 이녀석, 장갑이 PK 73보다 한참 얇다. 아무리 예뻐도 20mm 탄환에 구멍이 숭숭 뚫리는 양철 깡통인데, 뭐하러 타? 참고로 이거, 자위하는거 아니다. 정말이다. 나탈리랑 나도 PK 73의 신형 개수형인 PK 73G1형을 받았다고. 터보 차져에서 한단계 업그레이드 된 신형 슈퍼 터보 차져와 블레이드만 2m가 약간 넘어가는 신형 프로펠러, 캐노피의 출입구에 추가로 설치된 방탄 유리와 신형 AN/PRC-470 장거리 무전기를 장착해서 전보다 고공에서 더더욱 빨라졌고, 최소 속력도 시속 625km에서 시속 680km로 늘어났다. 또한 신형 장거리 무전기 덕분에 반경 10km에서 동일 주파수선대를 사용하는 아군과 교신이 가능하고. 아마 망망대해에서 펼쳐지는 해전에서는 무척 요긴하게 쓰이겠지.
이런식으로 하루하루 신형기 훈련을 받던 우리들, 44 항공 기사단의 단원들 사이도 그럭저럭 좋아지기 시작했다. 이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2
기초 훈련을 막 끝낸 초보 조종사든, 실전에도 여러번 참여한 베테랑이든, 모두들 굉장히 조심해지는 때가 있다. 바로 야간 비행이다. 어두컴컴한 하늘을, 아무런 도움도 없이 순전히 나침반과 지도로 위치를 찾아야 하니까. 그래서 야간 비행에는 더더욱 스트레스가 심하다. 물론, 나라고 예외가 있는건 아니지만. 당연히 에르데 제국 공군 사령부도 그걸 알고 있었고, 사파이어섬에 주둔하고 있는 모든 항공 기사단 - 그래봤자 해군 기사단 3개하고 사파이어 섬의 방어를 책임진 35 항공 기사단 '블루 쉴드', 그리고 우리 44 항공 기사단 뿐이지만 - 에게 야간 비행 조종사는 늦잠을 허락해주었다. 덕분에 나는 오랜만의 늦잠을 즐기면서 9시까지 잘 수 있었다. 전시에 9시 기상이다! 나 같은 경우는 새벽 4시에 돌아온 초계였지만, 그래도 힘들고 위험한건 마찬가지니까, 나에게는 좋은거지. 9시까지 자고 일어난 나는 뜨겁게 데운 물로 피로를 푼 뒤, 아침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내려갔다. 어차피 먹는 음식은 또 파스텔이지만, 최소한 굶어 죽을 수는 없으니까. 나중에 혹시 필그림 사령부에서 군수품을 지원해주겠다고 하면 바로 밥이랑 김치랑 고기랑 신청해야지......... 왜 내가 무슨 초식동물도 아니고, 풀만 먹고 사는거야.
우리에게 숙소로 배정된 석조 건물에서 나와 돌계단을 내려가면 바로 식당이 나온다. 옛날 이곳에 있었다는 교회 건물을 재활용한 식당은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들과 벽화들이 그려져 있어서 여기서 뭘 먹으면 느낌이 꽤나 좋다. 상상해보라. 10m가 높은 천장에 벽화들이 그려져 있고, 스테인드글래스를 통과한 햇빛이 수만가지의 색을 뿌리는 장관을 볼 수 있으니까. 최소한 한달째 먹고 있는 맛없는 파따따의 텁텁한 맛은 잊을 수 있다. 100년도 더 지난 오크나무로 만들어진 거대한 나무문을 열고 들어갔다. 식당 내에서는 구수한 파따따 굽는 냄새와 비어스 특유의 톡 쏘는 냄새가 진동했다. 그런데…… 왜 다들 나를 저런 눈으로 처다보는거지? 내가 식당에 들어감과 동시에 수백명의 리히트들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다들 밥도 안먹고 누군가를 둘러싸고 있었던 것 같은데……. 도데체 무슨 일이야? 그 궁금증은 뒤이어 수백명의 포위를 돌파하고 나온 나탈리가 내 뒤에 숨으면서 풀렸다.
“차….창민아…….”
나탈리는 당황한 표정을 지은 채 내 어깨 뒤에 숨었다. 오른쪽 어깨에 놓여진 그녀의 손에서 무언가 차갑고 묵직한게 느껴졌다. 마치 권총처럼…… 아니, 권총이잖아?!
“나…나탈리? 권총은 왜 꺼낸거야?”
“어쩔 수 없는걸! 다들 나를 죽이려들잖아.”
그러고 보니 다들 손에 권총이나 소총, 아니면 세이버를 들고 있군. 지금 뭐하는 짓거리들이야, 갑자기? 이런건 우리가 처음 왔을 때나 하라고. 나는 나탈리와 나를 둘러싸고 있는 리히트들을 향해 한발짝 앞으로 나갔다. 역시나, 사냐 공주 덕분에 받은 부기사단장이라는 직위가 이럴때는 정말 잘 통한다. 나탈리는 사실상 기사단의 막내라서 이렇게 막 대할 수 있지만, 나는 부기사단장이잖아. 아무런 무장도 없이 내가 한발짝 앞으로 나가자 다들 한발짝 뒤로 물러섰다. 손에 쥔 무기들도 나탈리를 향할 때 보다는 많이 내려갔군.
“다들…….”
나는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아무런 감정조차 없는 듯한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다들, 지금 뭐하는 겁니까?”
“부기사단장님이야말로, 지금 상황을 설명해주십시오.”
유나 중위의 목소리다. 뒤이어 인파를 헤치고 앞으로 나온 유나가 기사도를 뽑아들고 내 목에 갖다 대었다. 벌써 두번째군, 이거. 차가운 칼날이 내 머리 바로 아래서 번뜩였다. 평소에는 찬란해보이던 스테인드글라스를 투과한 다양한 색상의 햇빛에 비치니 더더욱. 하지만 그것 보다도, 난 지금 상황을 이해 할 수 없다고. 도데체 뭘 설명하라는거야?
“부기사단장님의 그 잘난 필그림들께서, 우리 제국과의 동맹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단말입니다.”
뭔 소리야?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 짓지 마십시오. 부기사단장님은 무려 필그림 군사 고문이지 않습니까?”
“이봐요, 유나 중위……..”
“차…창민아? 목에서……”
따끔한 느낌과 함께 목에서 무언가 뜨뜻한 엑체가 흘러내린다. 유나 중위의 기병도는 아직 내 목에 닿아 있었고, 그걸 무시하고 앞으로 한발짝 나간 나는 목에서 전해져오는 따끔한 느낌을 느껴야 했다. 젠장, 피가 나나 보군. 유나 중위 얼굴에 살짝 당황한 기색이 보이자, 나는 일단 피는 잊고 그 기세를 몰아가기로 했다.
“저는 지난 한달동안 이곳, 사파이어 섬에서 여러분과 함께 훈련을 받았습니다. 본국에서 연락을 받기는 커녕 여기 막 도착했을 때 다시 수령한 새 전투기가 제가 받은 보급의 전부고요. 여기 나탈리 소위도 그렇습니다.”
다들 얼굴에 살짝 당황한 표정이 떠오른다. 물론 유나 중위는 그 무서운 기세를 다시 살려 나에게 소리를 질렀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당신들 필그림들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난 믿어달라고 한적은 없는데. 단지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걸 믿…..어 달라고 했군. 물론 저쪽은 우리를 믿지 못하겠지. 유나 중위의 고향이 홈 아일랜드라는 걸 기사단 서류철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그래서 더더욱 고향을 파괴한 우리에게 적대적일거다. 하지만 말이야, 30년도 지난 그 일의 책임을 우리에게 묻는건 좀 너무한거 아니야
“평화롭게 잘 살고 있던 우리들을 힘으로 쫒아내고 죽인게 누구인데 우리가 당신들을…..!”
“무슨 일입니까?”
마치 모세의 기적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인파가 순식간에 좌우로 갈라지며 부동자세를 취했다. 들고 있던 권총과 소총과 기병도들을은 미쳐 집어넣지 못했지만. 내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던 유나 중위도 칼을 거두고는 부동자세를 취했다. 그제서야 나는 나탈리가 건네준 손수건으로 목에서 흐르는 피를 닦을 수 있었다. 나탈리가 걱정하면서 지혈 하려고 하지만, 설마 이정도로 죽겠어? 그러니까 상처에다가 침바르지마.
“지금 제가 보는건 도데체 어떤 상황이지요? 최선임으로서 이 행위를 막았어야할 유나 중위?”
“필그림 배신자들에게 도데체 어째서 우리 제국과의 동맹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우리 제국의 대사를 모욕적으로 쫒아냈는지 추궁하고 있었습니다, 공주 마마.”
사냐 공주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 사이 에리카 대위는 우리에게 다가와 별일 없었냐고 물었다.
“괜찮으신겁니까?”
“저야, 뭐, 상관은 없지만. 나탈리는 잘 모르겠네요.”
“프로필라인 소위는 괜찮나?”
나탈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속 목에서 피가 나오는 나를 걱정스럽게 처다보았다. 걱정하지 말리니까. 설마 이정도로 죽겠냐고?
“다들, 즉시 자신의 근무 위치로 돌아가세요. 지금 이자리에서 상관이자 에르데 제국의 기사들인 이창민경과 나탈리 프로필라인경에게 하극상을 저지른 여러분 모두는 전부 감봉 3개월에 청합니다.”
사냐 공주의 말에 뒤쪽에서 – 특히 늙은 부사관들 사이에서 – 웅성임이 있었지만, 에리카의 날카로운 눈짓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래도 해산했다. 유나 중위는 사냐 공주의 눈짓으로 남아있었지만.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인파가 모두 사라지자, 사냐 공주와 에리카가 이번엔 우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다면 설명을 좀 해주실까요?”
“그러니까 뭐를?”
“이 페룸 독트린이란 것을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니까.”
그건 그렇고, 페룸이면 우리 필그림 최고 사령관이잖아. 그 인간이 그런짓을 할 사람이 아닌데? ‘모두와의 공존’이라는 모토를 내걸고 군사력 증강 대신 리히트들과의 평화 공존을 추진해온 인간인데? 내가 무슨말인지 못알아듯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에리카 대위는 잠깐 토하는 시늉(…)을 하더니 나에게 뉴스를 하나 건네주었다. 그런데 나탈리랑 사냐 공주, 둘은 왜 뺨에 손을 대고 도리도리(…)를 하고 있는거냐?
“이걸 읽어보시지요. 어제 저녁에 내려온 기관지입니다.”
Blue Sky라고 적혀있는 에르데 제국 공군 기관지다. 날짜는 어제, 그러니까 2월 2일자 신문이군. 호외라고 적혀 있는 신문에는 필그림 최고 사령관 에이센 페룸의 사진과 함께 ‘Perum Doctrine’이라고 적혀 있었다.
“테라는 어둠 저편의 존재가 지배하고 있는, 어두운 행성이다. 그들에게 수십만년동안 천천히 침식당한 리히트들보다, 우리 인류가 더욱 종족 생존에 가깝다. 우리 필그림들은 인류의 희망이다. 따라서 우리는 리히트들의 전쟁 대신, 중립을 지키고 인류의 마지막 희망을 보존하겠…..다…….?”
나는 신문을 읽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나탈리도 이해를 할 수 없는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보다 사회 적응력이 높은 나탈리가 몰랐던 사실이라면, 이건 우리 ‘에르데 제국 고문단’들에게 통보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지금 이게 무슨 말이야?”
“그건 저희 쪽에서 해야할 말인 것 같습니다만.”
“우리도 통보는 커녕 아무런 정보 조차 받지 않았다고. 이건 너무하는거 아니야?”
나는 주변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우리 전쟁도 아닌데, 동맹이라는 이유 하나로 불러놓고 이제와서 아무런 정보는 커녕 언질조차 받지 못한 우리에게 따지다니! 너무한거 아니냐고! 내 서슬퍼런 눈길에 사냐 공주는 그대로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고, 에리카 대위는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저희도 나름 배려한겁니다.”
“대위님, 이것도 대우라고 하는건가요? 우리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울컥한 나탈리가 에리카 대위에게 따지려고 들었다. 하지만 말을 다 잇지 못한 채 에리카 대위가 손을 올리자 그대로 말을 멈췄다. 대위는 내가 들고 있는 신문을 가리키면서 살짝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저희도 나름 배려하는겁니다, 소위. 마저 읽어보시지요.”
페룸 사령관의 독트린 발표 기사 아래에는 에르데 제국의 처사가 담겨 있었다. 황제의 분노 어린 친서가 달린 에르데 제국 신문에는 우리 ‘에르데 제국 군사 고문단’들과 에르데 제국과 합동 훈련을 위해 제국의 영토에 들어선 우리 필그림 전투부대들의 처우도 적혀 있었다. 장비는 전부 몰수. 신병은 억류. 모든 군사 고문단은 해체하며 필그림들은 전부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다는 내용이었다. 필그림 최고 사령부의 배신에 대한 분노어린 에르데 제국의 복수였다. 복수할 대상이 잘못 되었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신문에서 눈을 뗀 나는 아직도 나를 외면 한 채 시선을 피하고 있는 사냐 공주 대신 에리카 대위를 보며 물었다.
“체포하려고?”
“밖에서 헌병대가 들어오려는걸 공주 마마의 직권으로 일단은 막았습니다. 하지만 그게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겠습니다.”
즉, 사냐 공주와 에리카 대위는 자신의 직권을 남용해서라도 우리를 배려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상대는 황제의 칙령. 공주의 명령은 그 아래다. 지금 사파이어섬의 헌병대들도 굉장히 고민하고 있겠군.
아무래도 내 직감이 맞는 것 같다. 헌병 대장이 굉장히 미안하다는 얼굴을 지으면서 에리카 대위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뭐, 대충 결정 난 것 같군. 나탈리는 조금 불공평하다는 물건을 얼굴을 지으면서 투덜거렸지만, 내가 참으라는 뜻에서 머리를 한번 토닥여 주자 금방 입을 다물고 손목을 내밀었다. 나도 뒤이어 손목을 내밀자 헌병대장이 다가와 수갑을 채웠다. 차가운 금속 고리가 손목을 갑갑하게 에워쌌고, 뒤이어 남자 헌병 몇몇이 나에게 다가와 허리에 차고있던 기병도와 내 권총을 가져갔다.
“미안합니다.”
이 헌병대장은 우리에게 정말 미안해하는 것 같다. 하긴, 헌병대는 다른 병과들보다 비교적 우리와 가까이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으니까. 호위라든가 그런 것 말이다.
“잠깐, 공주와 얘기할 수 있을까요?”
“공주마마?”
“…….. 뭔가요?”
사냐 공주가 드디어 나를 돌아보았다. 불신과 미안함이 동시에 섞인 느낌…..의 눈빛 이랄까. 불신은 이해가 가지만 미안함은 왜 그런지……. 솔직하게 이해가 안간다. 공주가 정한 것도 아닌데, 뭐.
“지금 페룸 독트린을 이해하지 못하는건 에르데 제국 뿐만 아니라 우리 필그림들도 마찬가지야.”
“……”
“지금은 냉정하게 생각할 만한 상황은 아닌 것 같지만, 한번 생각해 봐. 직접 가서, 도데체 뭐가 어떻게 된건지 확인하는 것은 어떤지.”
“…….”
“나를 인질로 데려가면, 저쪽에서도 함부로 어떻게 하지는 못할 테니까.”
“……..”
내가 할 말은 그게 다다. 직접 가서 물어 보는 것. 사실 그것 말고 뭐가 있겠는가? 대사관으로 가서 따져? 여기서는 체포된 신세라는걸 잊으면 안된다. 사냐 공주는 살짝 고민이 되는지 망설이는 얼굴을 했다. 뭐, 이제 정하는건 저쪽이니까.
“가죠.”
3
상황은 생각보다 쉽게 풀렸다. 나의 제안이 사냐 공주를 거처 황제에게 전달된 것이 오전 10시 아침 조회 때. 에르데 제국도 필그림들과의 동맹을 쉽게 포기할 수 없기에 협상을 위해 협상단 파견을 조인한 것이 오전 10시 30분. 협상단 인원을 임명하고 그 호위대까지의 임명이 끝내고 협상단이 사파이어 섬에 집결하기 시작한게 그날 오후 1시였다. 협상단장은 사냐 공주로 결정 되었고, 수행원으로는 에리카 대위와 사파이어 섬 헌병대가 결정되었다. 나와 나탈리는 인질로 데려가게 되었고. 호위기는 유나 소위가 맡기로 했다. 그렇게 고작 6시간만에, 에르데 제국은 대 필그림 협상단을 꾸리고 출발 준비까지 완료 시켰다. 지방 분권적인 에르데 제국 치고는 굉장히 빠른 대응이군. 아니, 우리 필그림도 6시간만에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일은 쉽게 하지 못할거야. 어떤 의미로, 대단하다.
우리는 에르데 황실에서 지원해준 4발 여객기 CACH-35기를 타고, 유나 소위의 호위를 받은 채, 몇시간의 비행을 거쳐 필그림 베이스에 착륙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문제가 거기서 터졌다.
“소령님,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에르데 황실 협상단의 CACH-35 수송기가 땅에 닿기 무섭게, 스토왈트 소령이 이끄는 필그림 헌병대가 우리를 맞이했다. 반자동 소총의 총구를 우리에게 들이댄 채로. 험악한 인상을 한, 필그림들 중에서도 170cm 이상의 장신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헌병대들 답게, 그 키에서 나오는 위압감은 꽤나 무서웠다. 우리 인간들보다 평균키가 대략 20cm 작은 리히트들의 표정에 살짝 두려움이 보일 정도니까. 그나마 이들은 공주가 뒤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을 의지삼아, 반자동 소총을 들이대는 필그림 헌병대에게 볼트 액션 소총과 기병도를 겨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인질이라는 역할에 충실하게도 에르데 제국 헌병들에게 붙들려 금속제 총구가 몸에 닿는 신기한 경험도 해봐야 했다. 아까 봤을 때 안전장치를 풀었으니, 이 상태에서 그냥 방아쇠만 당기면 나는 바로 죽게 되는거다.
그런일은 없으면 좋겠지만.
“나탈리와 창민 소위야 말로 지금 뭐하냐? 기껏 온다는게 인질 역이야?”
“일단 무슨 일인지는 들어봐야 할 것 아닙니까? 도데체 무슨 정신으로 그런 슬데 없는 짓을 벌였는지.”
스토왈트 소령은 나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나는 그에 굴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쳤다. 총구가 뒷머리에 맞대고 잇는데, 무엇이 두려우리? 뭐가 두렵긴, 총알이 두렵지(...).
“틀린 말은 아니잖아. 전쟁이라면 우리는 벌써 저쪽에서 실컷 경험 했어. 도데체 우리가 무엇을 위해 여기에서 싸워야 하는 것이지?”
그건 맞는 말이군. 우리는 전쟁이라면 벌써 신물나게 경험했다. 3개의 세계대전이 한 세기, 아니, 100년도 안되는 시간에 연달아 터져나왔으니 말 다했지. 우리 필그림들이 포탈을 넘어 이곳, 테라로 온 것도, 사실 생각해보면 그 끝나지 않는 전쟁의 수렁에서 도망치기 위해서였으니까. 어쩌면 지금 우리가 이러고 있는 이순간에도, 지구의 어딘가에서는 누군가 죽임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필그림 헌병대는 오히려 기가 살아난 듯 조금씩 앞으로 다가왔다. 총구에 바른 기름이 햇빛에 맨들맨들 빛이 났고, 그 기세에 에르데 제국 헌병들은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멈추세요.”
그리고 그 상황을 타파한 것은 사냐 공주였다.
“스토왈트 소령, 저를 기억하시나요?"
"아, 사냐 공주였던가?"
스토왈트 소령님은 사냐 공주 앞에서도 전혀 수그러들거나 그런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기세가 더 살아났으니까.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너 잘 만났다' 라는 표정이었다.
"기억하시네요."
"당연하지. 내가 잊을 수 있을리가 있겠어? 덕분에 안그래도 가뜩이나 인원도 부족한 우리 필그림들로부터, 우리가 힘들게 키워낸 최고의 전문가들만 쏙쏙 빼내간게 누군데."
뭐? 그럼 내가 에르데 제국에 가게 된게 전부 사냐 공주 때문이란 말이야? 놀란 내가 사냐 공주를 돌아보자, 사냐 공주는 말 없이 고개를 돌리면서 내 시선을 피했다. 젠장, 도데체 어떻게 된거야? 거기다가, 필그림 최고 사령부는 그걸 승인한거야? 도데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거야, 이거?
뭐, 일단 그건 나중에 따져야겠다. 지금은 무슨 생각으로 페룸 독트린을 선언했는지, 그걸 알아내는게 먼저니까.
"덕분에 우리들은 홈 아일랜드 방위에도 힘이 부치게 생겼어. 그런데도 뻔뻔하게 잘도 찾아왔네, 공.주."
"할말이 있어서 찾아온것 뿐, 당신과 말싸움을 하려고 온게 아닙니다."
"뭐, 그러시겠지. 그런데 이를 어쩌나, 이 비행장을 지나 사령부 까지 갈 수나 있을 것 같아?"
스토왈트 소령의 말은 말 그대로 협박이었다. 대충 어림잡아도 1개 대대는 되어보이는 필그림 헌병들이 반자동 소총과 기관단총을 든 채 반원형으로 포위하고 있었으니까. 그에 맞서는 에르데 제국 헌병대는 고작 40명도 안되고, 대다수가 의장용 기병도나 차고 있는 상황이었다. 숫적으로도, 무장으로도 밀린다. 에르데 제국 측에서 가장 확실하게 사용할 수 있는 무기는 나를 인질로 사용하는 것이지만, 보다시피 별로 소용이 없다.
설마 나나 나탈리까지 쏴버리는건 아니겠지? 설마. 스토왈트 소령이라면 나탈리는 살려줄거야. 결국 내 몸 관리만 잘하면 된다는 것이군.
"비켜주세요, 소령. 부탁입니다."
"지금은 전시야. 부탁 같은걸 들어줄 정도로 한가하지 않아."
"그렇다면 뚫고 가겠습니다."
"해보던가."
사냐 공주의 말에 대꾸한 스토왈트 소령이 왼손을 올리자, 필그림 헌병들이 소총을 들어 우리에게 겨누었다. 찰칵, 탄알을 약실에 장전하는 소리가 울리고, 모두들 한쪽 눈을 감은 채 우리를 노려보았다. 순간 긴장한 나는 살짝 몸을 움츠렸지만, 사냐 공주는 당당하게,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앞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그에 맞추어, 그녀를 둘러싼 에르데 제국 헌병대가 기병도를 뽑아든 채 사냐 공주를 따라서 앞으로 걸어갔다. 소총을 들고있는 일부 헌병들은 역으로 필그림들을 겨눈채 말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실수인지, 우연인지, 아니면 계획된 것이었던지, 어디에선가 한발의 총성이 울려퍼졌다.
탕
귀를 순간적으로 멍~하게 하는 고음은 1초간 우리 모두를 얼어붙게 만들었고, 그리고 뒤이어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서로에게 총을 쏘기 시작했다. 에르데 제국 헌병들은 에리카 대위나 유나 중위 같은 귀족들을 몸으로 보호했지만, 기관단총과 반자동 소총으로 무장한 필그림들의 순간 화력이 더욱 강했다. 겨우 4초만에, 사냐 공주의 주변에서 걷던 헌병들이 우수수 붉은 피를 흘리면서 쓰러졌고, 나도 내 뒷덜미를 잡고 있던 헌병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뒤를 돌았을 때, 나는 제복을 시뻘건 피로 물들이고 있는, 눈조차 감지 못한 채 죽어버린 헌병을 보았다. 비록 내 머리에 총구를 들이대기는 했지만, 뭐랄까, 통쾌하다는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느낀건 분노에 가까웠다. 상황이 어째서 이렇게 돌아가야 하냐는, 그런 의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나에 대한 분노. 그리고 이런 상황을 만든 모두에 대한 분노. 젠장, 도데체 뭐가 어떻게 되는거냐고!
생각할 틈도 없이, 나는 이미 앞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사냐 공주를 몸으로 보호하던 헌병들은 이미 대부분이 쓰러진 채 바닥에 피를 흘리면서 널브러져 있었고, 사냐 공주는 묵묵히 앞으로 걸어가기만 했다. 총알이 빗발치는데도, 고개를 숙이거나, 엄폐물을 찾거나 하지 않고, 그저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정말로, 못말리는 공주님이라니까. 앞으로 뛰쳐나간 나는, 그대로 사냐 공주를 껴안으면서 몸을 비틀었다. 껴안을 때 팔에서 무언가 따끔한게 느껴졌지만, 상관 없겠지. 그 회전력과 함께 나는 공중에서 반바퀴쯤 돌았을 때, 등에서 강렬한 통증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쓰러진 내 위로 사냐 공주의 작은 몸이 털썩 쓰러졌다. 다행히 공주는 다친데가 없어 보이지만, 상황이 엉망이다. 에리카 대위는 이미 바닥에 엎드려 있었고, 유나 중위는 나탈리가 덮쳐서 엎드리게 만들었다. 반항할까봐 아예 권총까지 빼서 던져버리는군. 그리고 40명 가까이 되었던 수행원들은, 단 한명도 살아남지 못하고, 모조리, 전부다,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소령님!"
내 위에서 숨을 헐떡이며 누워있는 사냐 공주를 옆으로 밀치면서 스토왈트 소령을 불렀다. 이건 너무하잖아? 이 사람들이 도데체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렇게 다 죽여버리는 건데?
"지금 뭐하자는 겁니까?"
"소위, 엎드려."
"소령님! 평소에 저희에게 가르치시던 것과는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창민 소위, 엎드려!"
"싫습니다. 소령님께 꼭 따져야겠......."
누군가 말하지 말라고 하면 그건 그만 말하라는 말이다. 나는 그런 중요한 사실을 스토왈트 소령이 단단한 군용 부츠로 내 얼굴을 달려버리기 전까지 잘 알지 못했다. 스토왈트 소령도 알아서 조절하신건지 취약한 목이나 머리가 아닌, 발등으로 가볍게 내 뺨을 차버린 정도이지만, 저건 군화다. 그리고 필그림 군화는 백병전시 살상률을 높이기 위해 아예 군화에 연철을 박아 넣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고? 스토왈트 소령의 부츠에 얻어맞은 나는 그대로 빙그르르 돌아서 땅바닥에 다시 엎어졌다. 젠장, 무진장 아프잖아!
"주임."
"예, 소령님."
"창민 소위를 의무실에 데려가서 진정제 주사하고 감금시켜. 나탈리 소위는 내가 따로 조치할거야. 그리고 공주랑 나머지 귀족들은."
귀족들은?
"모두 영창에 가둬. 보초 배치하고."
4
쏴아 쏴아
이렇게 홈 아일랜드의 짠 바닷바람을 쐬는 것도 오랜만이다. 바닷바람이야, 사파이어 섬에서 밤산책 하면서 많이 쑀지만, 그래도 고향의 바닷바람이 가장 편하다. 그래, 여기, 홈 아일랜드가 내 고향이다. 여기서 태어난건 아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10살 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고향이나 마찬가지이지.
의무대에 끌려갔던 나는 진정제를 맞고 치료를 받은 덕분에 힘없이 12시간을 보내야 했다. 나참, 팔에 총알이 스쳤다고 붕대로 감아버리고 진정제를 먹이는 의사가 어디있냐? 그리고 새벽 2시, 나는 소위라는 직권을 이용해 의무병들을 구슬려 잠깐 밤 산책을 나왔다. 원래라면 안되는 것이지만, 내가 박박 우긴덕에 나올 수 있었다. 뭐, 나온게 중요하지, 과정이 중요하나?
중요한건 지금 내가 홈 아일랜드에 갖혀버린 것이다. 길거리에 널브러져 있는 신문에는 사냐 공주의 얼굴이 대문짝 만하게 실려 있었고, 우리가 타고온 수송기와 유나 중위의 전투기도 모두 압류되었다고 했다. 그런 사실 말고 그다지 특이하다고 할만 한건 없었다. 에르데 제국의 황제가 몇주전 필그림 최고 지휘부에 요청했던 독가스와 핵무기 관련 기술의 인도가 거부되었다는 기사 정도가 좀 특이하나?
신문을 내려놓은 나는 잠깐 바람을 쐬면서 사색에 잠겼다. 결론적으로 내가 도움이 된 건 하나도 없다. 오히려 상황을 악화 시켰으면 악화 시켰지, 결코 나아지게 하지는 않았다. 필그림과 에르데 제국 사이에 몇십년 만에 처음으로 무력 충돌이 일어났고, 거기다 공주와 귀족 2명이 인질로 잡혀버렸다. 이 소식이 에르데 제국에 들어갔다간, 분명 에르데 제국은 전쟁을 선포할거고, 제국에 남아있는 필그림들도 전부 처형 당하겠지.
왠지 착잡하다. 특히, 그날, 후소 제국 중순양함을 공격했던 날 밤 사냐 공주가 나에게 말한게 마음에 걸린다. 귀족의 손에 피를 적시는 것이 죽기보다도 싫지만, 사랑하는 국민들을 위해서 싸울 수 밖에 없다는 그 공주가, 나 때문에 잡혀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 복잡해지는 기분이다. 그리고 웬지, 그날의 얼굴이 신문 기사의 사진과 겹쳐보이는 건 왜일까?
착각하지 마라. 절대 사냐 공주가 좋다거나 그런게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 누군가를 죽이는 것만 배웠던 내가, 그 것을 처음으로 정의를 위해 사용하고 싶은 것 뿐이다.
과연 정의가 무엇일지, 존재나 할지는 모르지만, 어쨋건, 사냐 공주는 그날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국민들을 구하지 못하는 것도 힘들지만요, 그보다 더 힘든건....... 우리 국민들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죽여야 한다는 거에요."
"이 손으로 지금까지 죽인 사람이......... 너무나도 많아요. 귀족으로서 그런 피를 손에 적시는 것은 정말........."
내가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그렇게 고민하는 가운데, 어디에선가 아련하게 그날의 대화가 바람을 타고 들려온다.
"창민경. 부탁이 있습니다."
"경께서 몇년전에, 해적선을 격파하고 우리 에르데 제국민들을 살려주신 것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때 경의 용감한 돌격이 없었다면, 저는 그날 죽었겠지요."
"숫적으로도 불리하고, 무장도 변변치 않은데도, 경께서는 필사적으로 해적들을 공격해주셨습니다. 물론 불상사도 있었지만,덕분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해합니다. 용서합니다. 그러니 제발, 그날, 불의를 보고, 정의를 위해 싸운 그날의 창민경으로 돌아와서, 이번엔 우리 에르데 제국을, 아니, 에르데 제국민들을 위해 싸워주세요."
"한번만 더, 싸워주세요."
젠장, 싸워야지, 어떻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질적으로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나탈리를 찾아갔다. 나탈리 녀석은 스토왈트 소령이 빼내준 덕분에 별다른 제제나 처벌을 받지 않았고, 불공평하게도 바로 필그림 공군에 현역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나는 정신과 상담을 받고, 진정제나 투여 받아야 했는데나 말이다!
기분이 조금 상하기는 하지만 달리 방도가 없다. 필그림 신문에서도 봤듯이, 나는 필그림들에게는 적이었다. 나를 인류를 팔아먹고 적국에 붙은 배신자라고 떡하니 소개하는데, 내가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을까? 스토왈트 소령? 또 부츠에 얻어맞고 골로 갈일 있냐........
나탈리를 찾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신문 기사에 나탈리 프로필라인 중위는 과거 학교에서 묶었던 기숙사에 임시로 기거하고 있다고 했으니까. 여기서 학교까지는 그렇게 오래 걸리는 거리도 아니고, 사냐 공주 일행을 구하는 것이 지체할만한 일은 아니라서 나탈리의 기숙사를 향해 바로 출발했다. 나탈리에게 말하는 건 나의 행동 계획을 아는 사람이 한명 늘어난다는 것과 함께, 이것이 발각될 가능성이 더욱 커진다는 위험성도 같이 내포하고 있다. 안그래도 힘든 일에 다른사람을 끌어들이는 일을 그렇게 내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도움을 청할 사람이 나탈리 밖에 없는데, 어떻게 하라고?
그리고 무엇보다, 나탈리는 나를 도와줄거다. 그녀석, 내가 부탁하는건 반드시 도와주거든. 나탈리에게 너 말고는 없다고 말하면, 싫어도 도와줄거고, 그녀석은 남을 도와주는걸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조금 쑥스럽기는 하지만, 그만큼 믿고 의지하는 친구니까.
“싫어.”
그리고 그렇게 믿고 의지하는 친구에게 배신당한 기분은 상상을 초월한다.
“나…나탈리?”
“싫다고.”
어째서? 나탈리 얘가 그럴 애가 아닌데? 오히려 먼저 나서서 나에게 도와주자고 해야 하는 앤데? 설마, 사파이어 섬에서 리히트들이 괴롭혀서 그런건가?
“설마 사파이어 섬에서의 일 때문에 그런거야?”
“그것도 조금 있기는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야.”
“무슨…… 말이야?”
“소령님의 말이 맞아.”
뭐?
“리히트들을 위해 싸울 필요는 없어. 이건 우리 전쟁도 아니야. 이제 전쟁이라면 지긋지긋해. 내가 살인자도 아니고, 매일매일을 누군가 죽이면서 살아가야 하잖아. 그것 때문에 우리가 지구에서 여기로 도망쳐온건데.”
“하지만 나탈리……”
“창민아.”
내가 말을 잇기도 전에 나탈리가 먼저 말을 끊었다. 나탈리의 거절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나는 대꾸조차 하지 못한 채 입만 뻥긋 거렸다.
“이건 리히트들의 전쟁이야. 우리가 피를 흘려야 할 이유도, 필요도 없어.”
그건 아니다. 나탈리, 도데체 네가 왜 이렇게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우리의 전쟁이 아니라고, 그렇게 외면만 하는건 아니야.
“나탈리.”
나탈리가 움찔한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게 깔았나 보다. 내가 들었을 때도 조금 무서운 목소리었으니, 나탈리에게는 조금 무서웠겠군.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나는 나탈리를 쏘아보며 말했다.
“왜 2차대전이 2차대전이 되었지?”
“뭔 소리야?”
“왜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것이 2차대전으로 번져버렸냐고. 왜 3차 대전이 일어나 우리 인류가 멸망했냐고?”
잠깐 숨을 들이쉰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왜 우리가 지구에서 도망쳐 이런 곳에서 이런 고생을 하면서 살고 있냐고? 모두 정의가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싸우고 도움이 필요한 약한 사람들을 외면했기 때문이잖아. 만약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영국과 프랑스가 도왔다면, 사람들이 조금만 양보를 했다면, 정의를 위해서 싸웠다면 여기서 이런 짓을 하고 있지 않아도 되잖아!”
정의라는게 존재하는지는 논외로 치고 말이지.
나탈리는 내가 말하는 동안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나탈리의 얼굴에는 별다른 고민이라던가 어떠한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내 말을 듣고만 있었다. 나탈리, 도데체 어떻게 변한거야….?
“미안.”
그리고 시간이 좀 지났을 때, 나탈리가 나에게 말했다.
“야간 비행이 있어서, 나가봐야 할거 같네.”
나탈리는 나에게 도와준다 만다, 그 어떠한 말도 없이,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버려렸다. 뭐 이렇게 되면 하는 수 없지. 결국 나탈리를 찾아와 10분이 조금 넘는 시간을 낭비한 것 빼고,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이제는 고민하고 누구를 포섭하고 할 것도 없이, 그냥 나 혼자 구출하는 수 밖에.
5
구출작전을 시작하기 앞서, 나는 의무실로 돌아갔다. 만약에라도 나를 찾으러 올지 모르는 사람들이 바로 의무실의 의무병과 대위 계급장을 달고 있는 의무 장교였는데, 일단은 못따라오게 처리해 놓을 필요는 있겠지. 하지만 그런 수고는 내가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의무실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모두들 퇴근한 뒤였기 때문이다. 뭔가 조금 꺼림직 하지만, 큰 상관은 없겠지. 오히려 내 손으로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뭔가 불안하지만 일단 잊자.
…… 무언가 이상하다.
분명 아까 스토왈트 소령은 이렇게 지시했다. 공주 일행이 갖혀있는 영창을 감시 하라고. 소령님이라면 분명 최소한 1개 중대는 빽빽하게 배치를 해놓았을 텐데, 도데체 다들 어디간거지?
영창 앞을 지키고 있는 병사는 고작 한명, 그것도 의자에 앉아서 쿨쿨 졸고 있었다. 손에 들고 있어야 할 소총은 에르데 제국 항공 기사들의 자위 무장들과 함께 벽에 기대어 놓은 상태고, 영창의 열쇠는 책상위에 턱하니 올려놓은 채로. 인구가 부족하다는 우리 필그림들의 특성상, 필그림 헌병대는 특수 부대 수준의 훈련을 받는다. 그정도로 혹독한 훈련을 받는 이들이, 이렇게 군기가 빠진 채 자고 있을 수가 없는데……… 뭐, 일이 쉬워지니까 다행이지.
살금살금, 나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최대한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벽에 기대어 놓은 소총을 향해 다가갔다. 거리로는 고작 100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나에게는 100km도 넘게 느껴졌다. 뭔 인간이 그렇게 잠을 험하게 자는지, 이 군기 빠진 헌병 녀석은 꼭 1분에 한번씩 몸을 움직였고, 그때마다 나는 몸을 경직시킨 채 가만히 엄폐물 뒤에 숨어 있어야 했다. 그렇게 10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나는 소총을 손에 잡을 수 있었다. 3kg이 조금 넘어가는, 딱딱한 목제 개머리판의 묵직한 질감이 손에 잡히자, 나는 또다시 천천히 자고 있는 헌병을 향해 다가갔다. 이번에도 1분에 한번씩 몸을 뒤척였지만, 이젠 상관 없다. 네녀석만 자는 것에서 기절로 바꿔주면 만사 OK, 아니야? 헌병과 나의 거리가 고작 10cm도 되지 않았을 때, 나는 개머리판을 휘둘러 헌병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둔탁한 느낌, 그리고 이어지는 헉, 소리. 그대로 자다가 기절해버린 헌병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져버렸다. 그리고 나는 녀석을 일으켜 다시 의자에 앉혀놓고, 입에 재갈과 발을 끈으로 묶어버렸다. 혹시라도 깨나서 소리를 지르면 안되니까.
책상위에 있던 열쇠를 잡아 들고, 나는 영창을 향해 다가갔다. 사냐 공주, 에리카 대위, 그리고 유나 중위가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있었고, 다들 나를 헌병으로 착각했는지 인기척을 느끼자 반대로 돌아누워 버렸다. 열쇠로 자물쇠를 열고, 녹슨 철제문을 열고 영창 안으로 들어갔다. 고작 철장 안과 밖의 차이인데, 왜 갑자기 몸이 떨리는지는 모르겠다. 나 왜그러나? 여기 처음 와본것도 아니잖아. 아니, 지금 잡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일단 공주 일행을 일으켜서 여기서 나가야지!
“야.”
조용히 말했다. 정말 나를 헌병으로 아는지 사냐 공주는 몸을 더더욱 웅크렸다. 나참, 구하러 왔는데 조금 너무하는군.
“야. 가야지.”
사냐 공주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간 나는 그대로 사냐 공주를 꾸욱 찔렀다. 그제서야 사냐 공주와 에리카 대위, 유나 중위도 뭔가 다른걸 눈치 챘는지 부스스 일어나기 시작했다.
“차….창민 경?”
“괜찮냐?”
사냐 공주가 놀랐다는 듯이 눈을 번쩍 떴다. 무슨 죽은 귀신을 봤다는 것 처럼.
“겨…경이 여기에는 어떻….게……..”
“어떻게 오기는 걸어서 왔지.”
“하…..하지만……..”
“일단 나가서 얘기하자고. 홈 아일랜드에서 어떻게는 나가야지 앞으로 뭘 하든지 말든지 계획을 세울 것 아니야?”
사냐 공주는 잠깐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옆에 앉아있는 유나 중위와 에리카 대위를 바라보았다. 뭐, 두사람의 의견이야 들을건 없지. 두사람의 주인인, 공주가 동의를 했는데.
“가자.”
벽에 기대어져 있던 무기들을 회수한 우리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바로 비행장으로 달려갔다. 이유는 간단하다. 홈 아일랜드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바로 비행기다. 섬이라는 특성상, 육로로는 불가능하니까. 배를 타고 탈출해도 되기는 하지만, 여기서 에르데 제국 까지 선박으로는 몇일이 걸린다. 그리고 그 전에 필그림 공군 초계망에 우리가 걸려들겠지. 하지만 한가지 사소한 문제가 있다.
"그런데 창민경, 우리는 뭘 타고 갈거에요?"
일단 당장 사용할 수 있는 비행기가 없는 것이다....... 나도 참, 이런 것도 생각하지 않다니, 조금 무모했군. 우리가 여기까지 타고 왔던 수송기를 다시 뺐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수송기는 너무 느리고 둔중하다. 그리고, 그쪽 상황도 그리 좋지는 않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에리카 대위를 우리가 타고 왔던 수송기 쪽으로 보내 정찰을 하게 했다. 내 짐작대로라면, 그 근처에는 꽤나 삼엄한 경비가 서있겠지. 설사 없다고 해도 조금 위험하기는 하지만.
"말씀하신대로, 수송기 부근에는 경계 병력들이 쫙 깔려 있습니다."
조용히 정찰을 마치고 돌아온 에리카 대위가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인 나는 그대로 사냐 공주를 바라보았다.
"창민경, 어쩔 생각이에요?"
"일단 조용히 있어봐."
그렇다면 전투기를 뺏어야 하는데……. 어디에서 하나를 뺏지? 없는 시간을 쪼개가면서 고민을 하던 도중, 03이라고 하얀색 페인트로 크게 씌여진 3번 격납고 입구가 눈에 들어왔다. 03 격납고라면......... 분명 야간 전투기들과 정찰기 격납고였.....지? 좋아.
"저쪽으로 가자. 따라와."
짧게 말한 나는 그대로 몸을 최대한 낮춘 채, 최대한 빨리 고무패드가 깔린 활주로를 지나갔다. 그리고 내 뒤를 따라 살금살금, 3개의 그림자가 활주로를 지나갔다. 03 격납고까지의 거리가 생각보다 가까워서 망정이지, 중간중간에 활주로를 무작위로 비추는 서치 라이트 덕분에 간 떨어질 뻔 했다. 이러다가 수명이 10년은 더 짧아지겠군....... 일단은 여기서 탈출하는 것만 생각하자.
나와 사냐공주, 에리카 대위와 유나 중위는 주변을 살피며 격납고 입구로 다가갔다. 그런데, 젠장,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자물쇠가 걸려 있을 건 뭐야? 격납고의 두 문에는 커다란 자물쇠가 단단히 두 문을 묶고 있었다. 이런, 낭패다!
"잠겼습니다."
"나도 알고 있어."
"내가 한번 풀어 볼까요?"
유나 중위가 앞으로 나섰다.
"중위가? 어떻게 하려고?"
유나 중위는 나에게 대답 대신 허리춤에 달린 짧은 은장도를 꺼내 들었다. 푸른 달빛과 노란빛 서치 라이트에 반짝이는 칼날을 자물쇠에 가져다 댄 유나 중위는 그대로 자물쇠 입구에 단도를 찔러넣었다.
철컥 철컥
“어….라?”
그럼 그렇지, 저런 영화 같은데 될리가 없지. 단도 따위에 뚫릴 만한 자물쇠로 격납고 입구를 잠궈 놨다가는 누구나 비행기 들고 도망가게?
“Hey! Whose there!”
그리고 유나 중위가 만든 쇳소리에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필그림 공용어, 그러니까 영어로 거기에 누가 있냐고 외치면서 저쪽에서 다가오고 있는 헌병 한명이 보이자 우리는 일단 격납고 뒤쪽의 으슥한 곳으로 가서 숨었다. 들키면 안되니까, 당연하지. 그대로 숨은 우리는 각자 무장을 꺼내들었다. 허리춤에 찼던, 절대로 쓸 일이 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묵직한 45 구경 자동 권총의 차가운 감촉이 손바닥에 전해졌다. 사냐 공주들은……. 허리 춤에 찼던 기병도를 뽑아 드는군. 그거, 의장용 아니었어?
“부기사단장님께서 권총을 소지하시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의장 및 예식용이라는 용도도 있지만, 실전에서도 쓸 수 있는겁니다.”
에리카 대위가 부연 설명을 했다. 나참, 지금 시대가 무슨 시대인데 아직도 검을 사용하는거야? 뭐, 이런건 나중에 따지고 넘어가고, 일단 지금은 다가오는 헌병을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해보자.
“저기, 어떻게 할 생각이야?”
“침묵시키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에리카 대위가 기병도를 살짝 들어보이면서 대답했다. 오케이, 거기 까지. 그냥 내가 알아서 처리하는 편이 나을 것 같군. 슬쩍 고개만 내밀어 보니 헌병 하나가 좁은 보폭으로 천천히, 하지만 우리 쪽을 조준한 채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권총을 쓰면 소리도 나고, 누군가를, 그것도 동족을 죽인다는 것도 마음에 걸리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헌병은 소총을 겨눈채 우리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다시 건물 그림자 안에 몸을 숨긴 가는 숨을 한번 고르고 권총을 고쳐 잡았다. 손잡이가 아닌, 총구를 잡아 때리기 좋게. 이렇게 하면 최소한 죽지는 않겠지. 아마 그럴꺼야, 응. 하지만 내가 총구를 잡는 순간, 윽, 하는 짧은 신음 소리와 함께 털썩, 무엇인가가 털썩 쓰러졌다. 그리고 뒤이어 우리가 숨어있는 건물 그림자 앞으로 나타난 사람은……..
“지금 뭣들 하고 있는거야? 빨리 나와. 시간이 없다고.”
놀랍게도 나탈리 프로필라이넨 소위, 아니, 이제는 중위로 진급한 나탈리였다!
“에헤헤. 빨리들 나오라니까. 갈 준비는 다 끝났다고.”
나는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이녀석, 분명히 도와주지 않겠다고 했는데, 어째서 마음을 바꾼거지? 뭐 그런건 아무래도 좋다, 지금은. 일단은 우리 눈 앞에서 격납고 열쇠를 흔들고 있는 나탈리의 도움을 받는게 났겠지.
“자. 설마설마 했지만 열쇠도 준비 안하고 도망갈 줄은 몰랐네.”
“…….. 다 알고 있던거냐.”
“아니. 하지만 왠지 너라면 그럴 것 같았어.”
나탈리가 씨익, 미소를 지으면서 나에게 말했다. 젠장, 도데체 평소에 나를 어떻게 보고 있었던 거야?
“프로필라인경! 정말 고맙소. 지난 기간동안 내 국민들이 경에게 대한 태도가 그리 좋지만은 않았을 텐데, 그런 것을 감안하고도 도와주신 경께 감사드리오.”
사냐 공주가 감격한 얼굴을 하면서 나탈리에게 손을 내밀었으나, 돌아온건 차가운 대답이었다.
“착각하지마. 나는 창민이 하자고 해서 하는 것 뿐이니까.”
“나….나탈리…..”
“프…프로필라인경……”
조금 가시가 돋힌 듯한 말투의 나탈리라니…… 평소에 나나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와는 전혀 다르다. 도데체 왜 그러는거지?
“지금은 그런거 고민하는 것 보다 빨리 출발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만, 부기사단장님.”
에리카 대위의 조언에 나는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두사람을 간신히 진정 시키고, 격납고 문을 열어 비행기들을 꺼냈다. 아쉽게도 격납고 안에 있던 비행기는 쌍발 장거리 전투기인 PR 110 한대와 야간 전투기형의 PK 73 뿐이었지만. 뭐, 3인승 쌍발기라도 우겨 타면 4명까지는 들어가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다 탈 수 있어?”
“걱정하지 말고 조종을 맡으세요, 창민경. 이정도는 저희가 알아서 처리 할테니.”
“정말 괜찮겠어?”
만약에라도, 정말 만약에라도 필그림 공군의 추격대가 쫒아오면 우리는 회피 기동도 하지 못하고 격추당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물었다. 하지만 그런걸 생각하고 다른 비행기를 구할 시간이나, 좌석 배치를 변경할만한 10분이라는 시간도 우리는 미처 확보하지 못했다. 언제 알아챘는지, 기지 주변에 서치라이트들이 전부 켜지고 경보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창민, 준비 되었지?]
나탈리의 목소리가 무전기를 통해 들려왔다. 나는 대답 대신 엄지손가락을 치켜 들었다.
[하여튼……..]
“출발 하자. 시간이 없다.”
정말 시간이 없었다. 활주로 저쪽에서 몇대의 장갑차들이 우리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고, 이미 몇몇 대공포들은 위장포를 벗기고 우리를 조준하기 위해 돌리고 있었다. 나는 이륙 준비 절차만 빠르고 간단하게 체크한 다음, 바로 스로틀을 앞으로 쭉 밀었다. 푸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동체 양쪽에 달린 2개의 프로펠러가 돌아가기 시작했고, 추진력을 얻은 PR 110은 천천히 속도를 올리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장갑차에서 하차한 보병들이 우리를 향해 소총사격을 시작했지만, 설마 비행기 장갑이 7.62mm에도 뚫리겠어? 거기다 나탈리의 PK 73-N도 쉽게 이륙했잖아. 상관 없겠…….
파팍
왼쪽 어깨에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옆을 보니 붉은 피가 주르륵 어깨에서 흘러내리고 있었고, 어깨에 난 구멍의 연장선장에는 동체에 뚫린 동전크기 만한 구멍이 있었다. 젠장, 그정도도 못막냐?
[창민경? 맞았나요?]
“걱정하지말고 그쪽이나 조심해. 나는 괜찮으니까.”
어느새 새 PR 110은 속도를 충분히 내고 있었다. 언제라도 뜰 수 있다는 듯이 기수의 랜딩기어가 들석이는 것이 느껴졌다.
“자, 난다.”
그 말과 함께 나는 그대로 스로틀을 당겼다. 부드럽게 붕 뜨는 느낌. 주변에 대공포가 작렬하고 있기는 하지만 전부 우리를 맞추지는 못했다. 천만 다행이도, 간발의 차이로 집중포화를 피해 이륙한 우리는 상공에서 대기하고 있던 나탈리의 전투기와 합류했다.
[사파이어 섬으로 갈꺼지?]
“당연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