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rtie 005 - 종족 차별 Part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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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평화로운 세상이다. 활주로가 내려다보이는 푸른 언덕 위에 앉아 있는 나는 차가운 저녁바람을 맞으면서 바다를 향해있는 활주로와 그 너머의 빅토리아 항을 바라보았다. 여기 온지 2주가 넘었지만, 이곳에서 보는 전망은 정말 멋지다. 특히 내 전투기의 정비를 직접한 다음에 여기서 바람을 쐬면서 쉬는 것은 지금이 전시라는 것을 까먹게 할 정도로 기분이 좋다. 정말, 이러고 있으면 사우는 것이 덧 없이 느껴진다니까.
[치직…..민아? 들려? 오버.]
나탈리의 목소리가 무전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나는 옆에 놓여있는 휴대용 무전기를 집어들고 송신 버튼을 누른 채 입을 열었다.
“들리는데. 무슨 일이야, 오버.”
[지금 어..치직…있어? 오버.]
“뒷동산.”
[빨리 내려와. 지금 후소 제…..칙.. 격기가 접근 중이래.]
잠시라도 쉬지를 못하는군. 불과 4시간 전에도 빅토리아 항으로 접근하는 적의 뇌격기 편대를 요격했는데, 겨우 정비를 끝내고, 무장을 만재하고, 대충 밥을 먹는 사이에 또 쳐들어오다니, 좀 너무하잖아?
애애앵~
귀를 따끔하게 하는 고음이 차가운 저녁 하늘을 찢었다. 보랏빛으로 물들어진 채 점차 어둑어둑 해지고 있는 저녁 하늘을 바라보던 나는 시선을 거두고 바로 격납고로 뛰어갔다. 이미 기지 방송실에서는 정찰 정보를 확성기로 전파하고 있었고, 지상기지 인원들은 자신들이 맡은 방공 구역으로 달려가 대공포 위의 위장망을 걷어내고 급탄을 시작했다.
[40여기로 추정되는 후소 제국의 베티 폭격기 편대가 북북서에서 포착! 전 기사단은 적 편대가 목표에 도착하기 전에 전부 요격하라!]
이놈들의 최종 목표가 어디인지는 알려주지 않았지만, 그런건 이미 짐작하고 있다. 벌써 이짓을 2주나 하고 있는데, 그정도도 눈치채지 못하면 곤란하지. 적이 노리는 것은 바로 빅토리아 시티의 내항이다. 그곳에 기항하고 있는 브리타니아 빅토리아 함대 소속의 주력함들을 노리고 날아오는 것이다. 간간히 빅토리아 시티 근교의 공업지대를 폭격하기도 하지만, 특이하게도 후소 제국군은 지원부대를 무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사파이어섬에서도 그랬고. 그러니까……
잠깐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샜군.
격납고 앞으로 달려간 나는 5분전까지도 내가 직접 달라붙어 정비를 하고 있던 내 애기 류미스, PK 73의 날개위로 올라탔다. 차가운 금속제 외피의 감촉이 손바닥에 전해짐과 동시에 나는 이미 조종석 안쪽으로 몸을 집어넣고 있었다. 내 옆에 주기된 나탈리의 PK 73은 이미 엔진을 돌리면서 캐노피를 닫고 있었다. 간단한 이륙 절차를 거친 다음 나는 엔진에 시동을 걸고, 낙하산과 자위용 무장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좌석에 설치된 안전벨트로 몸을 단단하게 고정 시켰다. 엔진의 구동축이 돌아가면서 힘차게 3개의 프로펠러 블레이드를 회전시켰고, 익숙한 저음의 진동과 함께 속도계의 바늘이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했다.
[다들 준비 되었나요?]
사냐 공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냐 공주와 에리카 대위는 이미 출격 준비를 다 마쳤는지 엔진을 강하게 돌리면서 브레이크를 걸고 있었고, 유나 중위는 점점 속도를 올리고 있었다. 속도계의 바늘이 최저 이륙속도에서 조금 아래에 못미쳤을 때, 나는 사냐 공주에게 준비가 끝났다고 답신을 보냈고, 그걸 신호로 우리 44 항공 기사단 소속의 전투기 5기 전기가 활주로를 박차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주익 파일런에 장착한 55발 들이 30mm 기관포 2문 때문에 조금 무겁고 둔중해진 PK 73의 바퀴가 활주로에서 떨어지자마자, 사냐 공주는 기수를 높게 쳐든 채 고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적 폭격기대는 방위 3-5-0에서 오고 있다. 현재거리, 25km. 적 폭격기들의 빅토리아 시티 폭격은 반드시 저지해야 한다!]
흥분한 목소리의 통제관의 목소리가 무전으로 퍼졌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조금 질책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제 공습을 미처 요격하지 못한 것 때문에 신경이 조금 곤두세워져 있는 것 같지만, 생각해보면 그건 우리 잘못이 아니잖아?! 우리는 분명 호위기 처리하고 적 폭격기도 4대나 떨궜다고?! 나중에는 결국 탄약이 부족해서 착륙해야 하기는 했지만, 그건 우리 탓이 아니란 말이다. 왜 다들 우리에게만 뭐라고 하는거야?
[창민경, 뭐라고 꿍시렁대지 말고 편대나 이루세요.]
“…….알았어.”
사냐 공주는 내가 조용히 입으로 꿍얼거리던 것을 알아 들었는지 나를 따로 불러서 얘기했다. 젠장, 도둑이야? 무슨 귀가 그렇게 밝아?
[창민경!]
네이 네이. 사냐 공주의 질책에 나는 조용히 조종간을 움직여 한 꼭지점이 없는 다이아몬드에 붙었다. 그리고는 조금씩 페달을 움직여 편대와 평행하게 기수를 조정했다. 야간전투리가면 레이더가 달려있겠지만, 내 PK 73은 그런거 없다. 류미스에게 그런 괴상한 것을 씌울 수 있을리가 없고, 거기다가 일단 지급받을 수 있는 레이더가 없으니까. 보급품으로 받는건 기껏해봐야 항공 기사단 1개 분량인데, 그건 전부 야간 항공 기사단으로 가니까, 나에게 떨어지는건 없다. 쳇. 하나 달면은 확실히 편할텐데.
[편대 편성, 완료했습니다.]
……내가 아무말도 하지 않자 에리카 대위가 사냐 공주에게 보고했다. 원래 저거 내가 해야하는 것 같은데…… 뭐, 상관 없나.
[다이아몬드로 비행합니다. 편대, 고도를 고정하세요.]
[다른 기사단 놈들은 이제야 출격하는 것 같은데요?]
유나 중위의 목소리였다. 무전망을 조금 돌려 편대망에서 작전망으로 변경하자 시끄러운 수십가지의 다른 무선이 내 귀로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먼저 이륙하기 위해 관제탑에 이륙을 중구난방으로 신청해대는 기사들의 요청에 관제탑은 그들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참, 굼벵이들아, 느리다고 느려. 우리한테만 폭격기 격추 못한다고 뭐라고 하지 말고 너희나 빨리 출격하란 말이야! 물론 이건 소리 없는 비명이다. 왜냐하면…….
[단장님, 유나 입니다.]
[뭔가요, 유나경?]
[적 폭격기대가 육안 관측 되었습니다. 1시 방향, 추정 거리는 대충 2500m입니다.]
유나 중위의 말과 함께 가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오른쪽에서 날고 있는 유나 중위와 그 오른쪽에서 편대의 우측을 맡고 있는 에리카 대위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대충 저녁 하늘에서 노란색 빛이 번뜩이는 것이 보였다. 하늘에서 번뜩이는 것이라면…….. 분명 답은 하나밖에 안나온다. 적이다.
“나도 확인했다.”
[나도.]
나와 나탈리도 확인하자, 사냐 공주는 그대로 기수를 돌려 폭격기대를 향했다. 방어기총좌가 꽤 붙어 있는 후소 제국의 폭격기, G4M들의 방어사격을 피하기 위해서는 뒤쪽으로 다가는건 좋지 않다. 물론 나도 6시 방향이 가장 쏘기 좋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하지만, 그건 적들도 안다. 바보가 아닌 이상은. 그래서 우리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조금 다른 공격방법을 내놓았다. 바로 고도를 높혀서 폭격기의 기수방향, 즉 고고도에서 폭격기의 12시 방향에서 공격하는 것이다. 맞다. 이거, 과거 우리 세계의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이 연합군 요격을 위해 자주 썼던, 12 o’clock High다. 내가 제시한 방법이라는거,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다들 눈치정도는 챘겠지?
“고도 높히고 대형 전개하자.”
[편대, 고도 8000피트로 상승. 상승 직후 대형을 라인 어브레스트로 변경합니다.]
사냐 공주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우리는 바로 기수를 쳐들도 상승했다. 속도계의 바늘이 반시계방향으로 돌기 시작했지만, 아직까지는 엔진 파워로 커버가 가능하니까 그렇게 신경쓸 필요는 없다. 지금 우리가 신경써야 하는 것은 대형을 변경한 다음 공격을 위해 진입하는 코스를 제대로 잡는 것이다. 폭격기들의 방어구획에 잘못 들어갔다가는……. 20mm 기관포들에게 걸레짝 신세가 되어버리겠지. 조종사나 전투기나.
사실 우리가 굳이 폭격기들을 때릴 필요는 없다. 우리의 1차적 목표는 바로 적 호위기의 제거니까. 말하자면 우리는 일종의 미끼 부대다. 우리가 스스로를 미끼로 적기들을 끌어내는 동안, 비교적 늦게 출격한 다른 기사단의 항공 기사들이 폭격기를 요격해내는 방식이다. 하지만, 호위 전투기들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그들의 호위 목표를 공격하는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건 유치원생도 아는 상식이다. 그래서 우리는 적 폭격기대를 쳐야만 한다.
적의 폭격기는 역시나 베티였다. 엔진 두개를 가진 이 쌍발 폭격기는 후소 제국의 주력 중(中)형 폭격기로 최대 속도가 대략 시속 400km를 조금 넘을 정도로, 폭격기 치고는 꽤나 빠른 녀석이다. 거기다 항속거리는 뭐 그렇게 긴지, 이놈들의 기지에서 3000km 떨어진 에르데 해군 수송선단이 뇌격에 걸려 전멸당한 사례도 있을 정도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1주일에 몇십번이나 놀러와서 잠을 설치게 만드는 짜증의 주역이다.
기수의 바로 아래쪽에 적의 폭격기대가 지나가는 것이 보이자, 나는 오른편의 사냐 공주 전투기를 슬쩍 바라보았다. 사냐 공주도 내 시선을 어떻게 의식 했는지 나를 슬쩍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사냐 공주는 무전으로 ‘탤리 호!’를 외치면서 기수를 숙여 강하를 시작했고, 그녀의 뒤를 따라 나와 나탈리, 에리카 대위와 유나 중위도 강하를 시작했다. 폭격기들은 사냐 공주가 선두의 폭격기의 동체에 기관포를 몇발 명중시키고 나서야 우리를 발견했는지 방어기총들을 맹렬히 쏴대면서 저항했지만, 상대위치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던 우리들에게는 그저 최후의 발악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거대한 쌍발 폭격기 사이사이에서 호위를 맡고 있던 호위 전투기들 몇기가 우리를 향해 기수를 틀었지만……. 속도나 고도에서 우리가 우위인데 어쩌라고? 놈들은 우리에게 조준조차 하지 못한채, 폭격기 편대 사이를 뚫고 강하하는 우리를 멍하니 바라봐야 했다. 자, 이제부터는 개별 전투다. 수십기의 편대 사이를 뚫고 내려온 나는 엔진 출력을 최대로 높히면서 기수를 최대한 들었다. 수백톤이 넘는 듯한 엄청난 G가 나를 좌석 시트에서 밀어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선회를 마친 나는 회색 필름이 감겨있던 눈에 다시 색이 돌아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적 폭격기 편대는 아직도 뭉쳐있었지만, 호위 전투기들은 우왕좌왕, 붐 앤 줌 전술을 쓰면서 편대의 위 아래를 관통하는 우리 기사단의 전투기들을 막느라 정신이 없었고, 몇몇 폭격기는 벌써 피탄당했는지 엔진이나 동체에서 연기가 조금씩 나고 있었다. 수백피트에 달하는 고도를 잃어버린 나는 위치 에너지를 잃은 대신 운동에너지를 충분히 얻을 수 있었고, 그 반동으로 엔진의 출력을 줄이면서도 다시 폭격기 편대의 하방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밝은 회색으로 칠해진, 방어 총좌 하나 없는 폭격기의 부드러운 아랫배가 조준경 한가운데 들어왔을 때, 나는 주익에 달려있던 30mm 고폭탄 기관포로 무장을 선택한 다음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투투퉁, 묵직한 진동과 함께 날개 양쪽에서 빛줄기가 커브를 그리면서 날아갔다. 장약량이 작아 초구속도가 느려서 탄도가 곧지 못한게 이 30mm 기관포 포드의 흠이지만, 다른 장점이 있기에 커버가 가능하다. 이녀석, 고폭탄 주제에 화력이 어머어마하다. 그리고 이렇게 하방 방어총좌가 없는 후소 제국 폭겨기들은 탄도가 아무리 곧지 못해도 간단한 계산만 하면 쉽게 맞출 수 있다. 고폭탄 몇발이 폭격기의 아랫배에서 폭발을 일으켰고, 순식간에 폭격기는 검게 그을린 채 연기를 내면서 속도를 잃기 시작했다. 맞다. 격추다. 하지만 나는 그런걸 감상할 새도 없이 바로 조종간을 틀어 다음 목표를 찾아 나섰다. 목표는 많지만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까. 내 다음 목표는 편대 위치를 잃어버린 채 우왕좌왕하면서 당황하고 있는 후소 제국의 호위 전투기였다. 폭격기들을 지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 전투기들을 쫒는 것도 아닌 채 그냥 멀뚱멀뚱 가만히 있는 녀석은 손쉬운 먹잇감이니까. 조용히 놈의 뒤로 돌아간 나는 기수의 13mm 기관포를 선택한 다음 딱 1초간 방아쇠를 지긋이 눌렀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13mm 고폭탄 탄환들은 곧은 탄도로 마치 마법처럼 후소 전투기의 후방를 갈갈이 찢어놓았고, 순식간에 해골과도 같은 금속제 골격만 드러낸 채 호위 전투기는 속도를 잃기 시작했다. 점점 조준간 사이로 빠져나가는 적기에게 나는 기수의 기총을 한번더 쏴주고는, 호위 전투기가 불이 붙은 채 빙글빙글 추락하는 것으로 보고 다시 폭격기 편대로 향하기 시작했다. 언제 왔는지 우리 편대기 4기 뿐만 아니라 다른 항공 기사단과 브리타니아 공군 비행단들도 와서 폭격기를 요격하고 있었다. 거대한 먹잇감을 둔 말벌떼 처럼, 우리는 폭격기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면서 하나하나 사냥을 하기 시작했다. 호위 전투기들이 폭격기를 보호하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숫적 열세에 밀려 몇기 격추해보지도 못한 채 전멸당했다. 하지만, 우리의 이런 분투도 적기의 공습을 막지는 못했다. 그때까지 무려 10여기나 넘게 격추했지만, 결론적으로 에르데 항공 기사단과 브리타니아 비행단이 도착했을 때, 적 폭격기대는 벌써 도시 상공을 가르지르고 있었다. 살아남은 28기의 베티들은 동체 하부의 새하얀 폭탄창을 활짝 열어 제친채 수십발의 폭탄을 무더기로 쏟아냈다. 그리고 눈먼 폭탄들은 적 폭격기대의 목표인 빅토리아 시티의 항구와, 그 옆에서 발전한 민간 거주지역을 무차별적으로 폭격하기 시작했다. 물기둥과 흙기둥이 솟아오르는게 고도 6000피트에서도 보이네.
[한놈도 살려보내지 마라! 전부 떨궈버려!]
무전망에서 격분한 남자의 고함이 들려왔다.
[우리도 추격해요. 다들 편대로 복귀하세요!]
사냐 공주도 말했다. 하지만 나는 바로 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왜냐하면.......
철컥 철컥
다른 전투기들보다 일찍 전투에 나선 덕에 탄환이 모두 떨어져버렸으니까. 아무리 무장 포드까지 장착했다고 해도, 격렬한 공중전 한번이면 20초 분량의 탄환은 금방 써버린다. 금방 썼잖아. 2대나 격추하고.
"저기...... 나 탄환이 없다."
[저도 비었습니다, 단장님]
[저두요.]
[나도.]
그리고 그건 다른 사람들도 별로 다른 상황은 아니었다. 애시당초 생각해보면, 우리는 먼저 싸웠으니까. 사냐 공주는 아쉽다는 듯이 쓰읍하고 한숨을 쉬더니 기수를 돌려 기지로 향했다. 그리고 그 뒤를 우리는 따라갔다.
요격하러 긴급 발진 했던 전투기들이 돌아와서야 들은 사실이지만, 폭격이 끝나고 남아있던 에르데 제국 전투기들이 격추한 폭격기 수는 4기 정도였다. 우리 기사단이 4기, 다른 에르데 제국 기사단 2개 합쳐서 8기, 그리고 브리타니아 제국의 전투비행단의 격추수 5기. 다 합쳐서 고작 13기 밖에 격추하지 못했다. 호위기 20여기는 12기 정도가 격추 당하고, 나머지는 거의 걸레짝이 되었지만, 우리의 목표는 폭격의 저지지 호위 전투기가 아니다. 결국, 이번에도 우리는 폭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덕분에 나는 활주로에 착륙하자마자 쉬거나 내 기체를 정비할 틈도 없이 바로 사령부로 불려가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 부동 자세를 취한 채 에르데 제국 남오스트해 방면 사령관 카스슐란트 공작과 대면하고 있다.
".........."
덥수룩하게 하얀 수염이 난데다가, 나를 죽일 듯한 얼굴로 노려보고 있으니 등골이 절로 섬뜩해지는군.........
"........."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나?"
으아...... 무슨 호랑이도 아니고 목소리에서 초저주파가 나오나? 내 근육에 저주를 건 것 처럼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예?"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나, 대위."
"빅토리아 대륙입니다, 공작 각하."
"아니, 여기는 빅토리아 대륙이 아니야. 여기는, 후소 제국에 맞서 싸워 우리 에르데 제국의 영광을 펼칠 발판이라는 말이다. 알겠나?"
"예?"
"아니, 자네는 아직 몰라. 그렇지 않고서는 오늘 같이 안일하게 전투에 임하지도 않았겠지."
안일하게? 뭐라고? 화가 치민다. 가장 먼저 출격한 것도 우리고, 임무대로 호위 전투기들도 떨궈주고, 편대까지 퍼뜨려줬는데, 격추를 못한건 다른 기사단들이잖아? 왜 우리한테만 뭐라고 그래?
"자네는 지금 오늘의 공습 때문에 우리의 피해가 얼마나 큰 줄은 알고 있나? 벤젠스가 당했어, 벤젠스가! 안그래도 전함이 부족해서 힘들어 죽겠는데 벤젠스가 맞았단 말이야!"
Erde Empire's Ship ESS Vengence, 그러니까 에르데 제국 함선 벤젠스가 당했다고 한다. 솔찍하게 말해서, 아직 함종을 구별 못하는 나는 별일은 아닌줄 알았다. 중순양함이라고 해봐야, 부포 크기인 8인치 포탑이잖아? 아무리 전함이 없어도 그렇지, 이쪽 방면에 돌려진 중순양함만 5척이 넘어가는데. 벤젠스의 포탑은 구식 순양전함의 14인치 주포와 비슷한 파괴력을 가진, 에르데 제국 고유의 10인치 강심철갑탄이라는걸 안건 나중의 이야기다.
"거기다 기지와 항만 시설도 폭격에 당해 지금 엉망이네. 거기다 출격 대기 중이던 전투기 5개까지! 자네의 그 잘난 44 항공 기사단이 지금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겠는가?"
카스슐란트 공작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나에게 삿대질을 했다. 이해가 안가는 바는 아니다. 중요한 전투함 하나가 날아가고, 거기다가 귀중한 전투기도 5기나 날아갔다는 사실이 굉장히 화나겠지. 하지만, 그걸 왜 나한테 따지고 있냐고, 이 양반아.
"귀관이 그 잘난 사냐 공주의 제 1기사일지는 몰라도, 이런 안일한 태도는 용납할 수 없네!"
결국 나는 한소리를 하지 않을래야 할 수가 없었다.
"자네, 지금 내 말을 듣고는 있는건가? 자네들의 행동은 도가 지나치네."
"예, 공작 각하. 하지만 공작 각하의 언행도 지나치다고 생각됩니다."
"뭐야?"
이런....... 입 밖으로 내버렸군. 뭐, 이렇게 된 이상 그냥 말 하는 수밖에 없다.
"대위, 지금 제정신인가?"
"제정신입니다, 공작 각하.”
미치겠다. 나 왜이러니?
“저희 44 항공 기사단은 가장 먼저 출격해서, 호위 전투기 9기, 폭격기 4기로 도합 13기나 격추시켰습니다. 1인당 최소 2기는 격추시켰단말입니다. 가장 먼저 출격했고, 가장 많은 전과를 올렸는데 왜 항상 저희에게만 이렇게 홀대하시는지,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대….대위! 지금 항명하는건가?”
“항명이 아닙니다, 공각 각하. 단지, 각하께서 저희에게 대하는 태도를 시정해달라는 것입니다.”
“자네, 지금 뭐하자는건가? 응?”
더이상 듣고 말고 할것도 없군. 늙은 공작은 허연 얼굴이 불그죽죽하게 변할때 까지 소리를 지르고 화를 냈다. 나는 가만히 서있으면서 쏟아져나오는 모든 욕들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린 다음 가볍게 경례를 올리고 뒤를 돌아 방을 나왔다. 물론 공작은 배웅 인사 대신 쌍욕으로 대답했지만.
“자네! 그런식으로 하면 자리는 커녕 목숨을 보전하기도 힘들거야! 배신자 천민 출신 주제에 감히 나에게! 야! 임마!”
공작의 화만 돋운채 끝나버린 형식상의 ‘보고’는 사냐 공주를 만나서도 조금 난처해졌다. 사냐 공주,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기지 날도 추운데 기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참, 자잘한 정은 많다니까. 찬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흐트려놓았지만, 그녀는 굴하지 않고 가만히 기지의 방책에 앉아서 누구를 찾는지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나를 보고 밝게 웃으면서 쪼르르 다가왔다. 분명 신체 연령은 60살이 넘어가는 사냐 공주지만, 이럴때는 정말 일반적인 10대 소녀 같다. 아니, 감성만은 10대 소녀다. 테라의 리히트들은 300년을 넘게 사니까.
“아, 창민경! 조금 늦었네요.”
“응? 으응…… 아니, 뭐. 생각보다 보고할게 많아서.”
나는 그렇게 둘러댔다. 공작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가는 사냐 공주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랐으니까. 그리고 공작의 노기도, 공주 보다는 나에게로 쏠려있었으니까, 굳이 자초지종을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그러니까 이 철 없는 공주야, 제발 올려다보면서 미주알고주알 물어보지 말라고. 나보다 머리 하나 작은 주제에.
“보고할게 뭐가 있어요?”
“아니, 보고보다는, 그러니까, 이번 공습에서의 피해 상황이라던가 작전 평가 같은거…….”
“…….알았어요.”
사냐 공주는 불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물러났다. 다행이다. 잘못 말했다가는 안그래도 에르데 고위 귀족층과 사이가 좋지 않은 사냐 공주와 둘 사이를 더 갈라지게 할 수 있으니까.
“별일 없었어.”
사냐 공주를 놓고 나는 바로 격납고로 들어가 류미스의 정비를 시작했다. 아직 내 전속 정비사, 그러니까 스콰이어가 없기 때문에 내가 직접 해야 한다. 과거 기사들이 자신의 말을 직접 돌보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 사냐 공주가 설명해주었고, 나도 항공기 정비 정도는 할 수 있지만, 귀찮다. 초계 비행하고, 공중전을 치루면서 이리저리 몸을 부딪히고 박고 하다보면 지치게 된다. 그런데 이런 간단한 정비까지 나더러 하라고? 힘들어! 그래서 사냐 공주에게 스콰이어 하나만 달라고 부탁을 했지만 사냐 공주는 이례적으로 거절했다. 에르데 제국의 관례상 스콰이어는 자신이 직접 찾아야 한다나 뭐라나? 덕분에 나는 별로 쉬지도 못하고, 정비를 마치자 마자 다시 출격 대기에 들어가 브리핑실에서 폭격기 요격에 대한 브리핑을 들어야 했다. 아…… 잠은 언제 잘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