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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 나이츠 - 창공의 기사단


Sortie 007 - 에도 상공 30초 Part 2


  3
 
  우리 일행이 행군을 멈춘 것은 해가 거의 다 진, 오후 8시 30분 경이었다. 부상 때문에 진지 구축에 참여하지 못한 나는 대신 부상병들과 경상자들을 통솔해 중간에 우리가 잘만한 간단한 텐트 정도를 치게 만들었다. 마이너 중령은 폭격기 항공 기사들을 동원해 임시 숙영지 근처에 방어용 참호 몇개를 구축한 다음, 소수의 인원을 이끌고 주변 정찰을 나갔다. 덕분에 선임 장교가 된 나는 아일린 공주의 부축을 받아 후소 제국군의 습격에 대비해 부사관들과 사병들을 참호에 배치하기 시작했다. 왜 나냐고? 아일린 공주는 소령 계급을 달고는 있지만, 후방 근무만 했기 때문에 이런 일에는 거의 무지하다고 볼 수 있고, 결정적으로 도움이 안된다.
  “왜 참호를 파야 해나요?”
  이게 내가 아일린 공주에게 개인호 하나를 파두라고 말했을 때 돌아온 대답이다………..
  “예?”
  “소녀는 이해할 수 없답니다. 왜 참호를 파야 하나요? 차라리 이런 쓸데 없는거에 힘을 빼지 말고 그냥 소녀와  대화를 하는게 더욱 생산적인 것 같은데요.”
  ……… 에르데 항공 기사들도 꽤나 당황하거 어이없는지 이쪽을 처다보면서 입을 쩍 벌리고 있다. 하긴, 나 같아도 당황 하겠지. 도데체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거야? 이런, 열 받았더니 또 다리가 욱신욱신 아파오는군.
  “저기, 공주님.”
  “네, 부르셨나요?”
  나는 참호를 파다 말고 아일린 공주를 불렀다. 그러자 아일린 공주가 나를 내려다봤다. 착한 일을 해서 칭찬을 들은 다음 무슨 간식이 나올지 기다리는 강아지 처럼 초롱초롱한 눈빛을 한 채. 분명 내가 좋은 대답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런거 없다. 내 인내심도 한계가 있다고.
  “이제 제발 철 좀 들죠.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공주인데.”
  “……….”
  아일린 공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참호에서 나왔다. 그리고는 무거운 다리를 끌면서 다른 참호로 향하기 시작했다.
  “많이 아파요?”
  “….에?”
  어느새 나에게 쪼르르 다가온 아일린 공주는 나를 앉혀 놓고 있었다. 이봐요,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당신? 내가 미처 제지하기도 전에, 아일린 공주는 내 상처로 손을 가져가서 붕대를 풀고 있었다.
  “소녀가 폐를 끼쳤나보군요. 미안해요. 소녀의 작은 사죄의 뜻으로 상처라도 봐드릴게요.”
  “아니, 그럴 필요 없……..”
  늦었다. 이미 아일린 공주의 손은 붕대를 풀고 있었다. 아까부터 욱신거리던 곳에 고통이 더더욱 가중되었고, 혈관을 압박하고 있던 붕대가 느슨해졌을 때, 그동안 몰려있던 피가 한번에 움직였다. 대충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파편에 맞아 뻥 뚫려있는 구멍에서, 또다시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나는 아무렇게나 대충 정리된 붕대를 잽싸게 집어 상처에 대고 눌렀지만, 이미 피는 사방으로 뿌려져 있었다. 추운 벌판에 닿은 내 피가 김을 내면서 식어갔고, 일부는 새하얀 아일린 공주의 얼굴에 팍 튀었다. 아일린 공주는 순간,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지 자신의 얼굴에 튄 피에 천천히 그 손을 갖다 대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얼굴에 묻은 뜨뜻미지근하고 끈적끈적하고 기분 나뿐 액체가 무엇인지 두 눈으로 확인했을 때, 그녀의 입이 자동적으로 벌어지면서 높은 고음이 흘러나왔다.
  ​“​꺄​아​아​아​아​아​악​!​”​
  공포, 절망, 그리고 혐오의 감정이 담긴 비명이었다. 단순히 놀랐을 때의 그 비명과는 느낌이 다른, 섬뜩한 비명이었다. 비명소리가 내 등골을 한번 훑고 지나가며 온몸을 전율시켰을 때, 아일린 공주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천천히 일어난 다음……… 계속해서 비명만 질렀다.
  “꺄아아아아악!”
  정작 아픈건 난데 말이지.
  “꺄아아악!”
  그녀의 비명은 끝을 몰랐다. 장장 10분동안이나 이어진 비명은 에르데 항공 기사들이 갖고온 식수로 얼굴을 씻어내고도 계속되었다. 그녀가 진정된건 마이너 중령이 돌아왔을 때, 비명을 지르고 있는 그녀의 뺨을 강하게 때렸을 때였다. 귀족이 황족의 뺨을 때리다니, 평소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만약 저 비명소리를 후소 제국군이 듣기라도 했다면, 그래서 우리의 위치를 알아내리가도 한다면, 운이 나쁘면 전멸을 당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래서 마이너 중령은 엄청나게 화를 내면서 아일린 공주와 나를 혼냈다.
  나는 피해자인데, 왜 혼난건지 모르겠지만.
  “공주님! 해도해도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귀하신 몸께서 이렇게 체통조차 지키지 못한다면, 저희들도 공주님의 신변이나 체면을 존중해야할 의무가 없다는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자네, 내가 일부러 공주마마를 자네에 붙혔는데, 자네는 사람 하나 통제도 못하는건가? 자네, 정말 기사가 맡기나 한건가?”
  내가 여기 애 보러 왔냐? 하지만 마이너 중령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기에 나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마이너 중령은 그러고도 한참동안 나와 아일린 공주에게 화를 내고는 후소 제국군의 내습에 대비해야 한다며 병력들을 전부 전투 배치 시켰다. 다들 나와 아일린 공주에게 할 말이 많은 것 같지만, 마이너 중령의 눈치를 보고 각자 배정된 참호로 들어갔다.
 
  어째, 다리에 총탄을 맞은 것 부터 시작해서, 오늘 정말 운수 없는 날이다.
 
  3
  "미치겠군. 제발 부탁인데, 처신 좀 잘하게나. 알았나?"
  ​"​.​.​.​.​.​.​시​정​하​겠​습​니​다​.​"​
  나를 한참 혼낸 마이너 중령은 나에게 임시 숙영지의 지휘권을 맡기고 다시 한번 주변 정찰을 나갔다. 아일린 공주는 혼나서 임시 숙영지 중앙의 텐트 안에 틀이박혀 있는 덕분에, 최선임 장교가 된 나는 마이너 중령의 2차 정찰대가 돌아올 때까지 기지를 방어하게 되었다. 아일린 공주도 이제는 제발 정신을 차렸겠지. 아까 피가 한번 뿜어져나온 덕분에 상황이 더욱 악화된 다리는 의무병이 주사해준 모르핀 덕분에 통증은 더 이상 느끼지 않았다. 단지 움직일 때 조금 뻑뻑한 느낌이 들 뿐. 아까까지 모르핀을 맞지 않은 이유는 내가 마약을 싫어해서이지만, 아일린 공주 덕분에 통증이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어서 어쩔 수 없이 맞아야 했다. 조금 기분이 이상하긴 하지만, 최소한 아프지는 않으니까, 뭐 됐나?
 
  톡톡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아일린 공주다. 혼나고 나서 한참 울었는지 눈가는 벌겋게 달아올라있고, 초록빛 눈동자 주변은 시뻘겋다. 동정심이 약간 일지만, 다 자업자득. 나는 일부러 차가운 태도로 그녀에게 말했다.
  "왜요."
  흠칫, 놀란다. 설마 내가 아까 그 일을 겪고도 하하호호하면서 기쁘게 맞아줄 것으로 기대한건 아니겠지? 내가 성인군자냐? 아니, 성인군자여도 멀쩡히 잘 아물고 있던 상처를 그렇게 덧내지는 않겠다만.
  ​"​아​니​.​.​.​.​.​.​.​저​기​.​.​.​.​.​.​.​"​
  "할말 있어요?"
  ​"​.​.​.​.​.​.​.​.​예​"​
  "뭔데요"
  ​"​.​.​.​.​.​.​.​.​.​.​.​.​.​"​
  이쯤 적당히 하는게 좋지 않을까, 싶었다. 아일린 공주는 완전히 내 기세에 압도당했는지 덜덜 떨면서, 나를 바라보지도 못한채 그저 눈만 힐끗힐끗 올려다보고 있었다.
  "미안해요."
  "괜찮아요. 하지만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세요. 피도 못보면서 왜 그런 일을 하고 그래요."
  피를 못보면 건드리지를 말란 말이다. 이 머리에 피도 안마른 눈치 없는 공주야,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톡 건드리기만 해도 울 것 같은 표정이니까. 나는 아일린 공주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플래티늄 블론드색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손바닥에 닿았고, 차가운 밤공기에 식어버린 내 손에 그녀의 머리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기운이 전달 되었다. 그녀는 내 행동에 안심이 되었는지 몸을 떠는것을 멈출 수 있었다.
  ​"​미​안​해​요​.​.​.​.​.​.​.​"​
  "사과 했으면 됐어요."
  "미안해요, 창민경. 하지만 소녀는 그저 창민경에 대해서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에?"
  이건 또 뭔소리야. 왜 나에 대해서 이렇게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은건데? 사냐 공주 때도 그랬고, 스토왈트 소령이나 나탈리는 내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있고. 이제는 눈치 없는 꼬마 공주까지 합세냐? 공주, 조종사, 상급자, 그 다음은 누군데? 전차장? 순양함 함장?
  "소녀는 궁금했어요. 어떻게 당신이 사냐 녀석의 마음을 살 수 있었는지."
  ​"​.​.​.​.​.​.​.​.​.​.​"​
  굉장히 사냐 공주를 의식하는군.
  "소녀와 사냐 녀석은 어렸을 때 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어요. 소녀는 항상 사냐 녀석을 이기려고 했지만, 항상 졌죠. 달리기를 해도, 그림을 그려도, 자수를 떠도, 요리를 해도, 전부. 그래서 소녀는 항상 슬펐어요. 왜 사냐를 이기지 못할까, 소녀가 못하는게 뭘까."
  ​"​.​.​.​.​.​.​.​.​.​"​
  무슨 경쟁을 하고 살아온거야?
  ​"​.​.​.​.​.​.​.​.​.​.​"​
  "나중에 알게된 것이지만, 소녀는 사냐를 절대 이길 수 없었어요. 소녀와는 달리, 사냐는 가장 궂은 일을 도맡아했으니까요. 나중에 군에 입대하게 되었을 때 편하고 좋은 후방 보직에 넣어주려는 아바마마와 싸워 일선 항공 기사로 갔을 때도, 처음부터 장교로 임관할 수 있는데도 사관학교 부터 거쳐 정식 코스를 밟았을 때도, 사냐 녀석은 힘든 일만 하려고 했으니까요."
  ​"​저​기​.​.​.​.​.​.​.​"​
  "저희가 사춘기를 끝내고, 혼사 얘기가 나오자, 사냐는 결사반대 했어요. 자신은 누구도 믿을 수 없고, 사랑할 수 없다고 하면서, 아바마마와 싸웠죠. 소녀는 그때 그날을 잘 기억하고 있어요."
  나라도 기억하겠군. 꽤나 충격적인 내용이잖아.
  "그런 사냐의 마음을 사로잡은 당신이 도데체 누구인지 궁금해서, 소녀는 그래서 당신에게 호기심을 갖게 되었던거에요. 단지, 그게 ​궁​금​해​서​.​.​.​.​.​.​.​"​
  일단 뭔소리인지는 대충 알겠지만 말이다, 조금 정도가 지나쳤다는 점은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다. 나는 솔직하게 말하자면 좀더 물어보고 싶었다. 그게 무슨말인지, 사냐 공주가 어땠는지 그런것들 말이다. 내가 궁금하다는게 아니라, 상급자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군생활이 편해져서 그렇다. 절대 내가 사적으로 궁금하다는게 아니다. 아무리 내가 항공 기사단의 작전권과 인사권을 쥐고 있다고 해도, 기사단장은 사냐 공주니까, 내가 그 권한들을 마구 휘두를 수는 없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기사단을 끌어가기 위해서는, 알아야만 한다. 이거, 절대 변명은 ​아​니​다​.​.​.​.​.​.​.​.​.​ 갑자기 사냐 공주의 얼굴이 보고 싶어 지는 이유는 뭘까, 젠장. 지금까지는 별 자각 없었는데, 그래도 떨어지니까 조금 그립다. 하지만 내 복잡한 심정은 아는지 모르는지, 내 옷깃을 붙잡고, 비장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소녀는 말이지요, 사냐를 꼭 이길거에요."
  어떻게?
  "소녀도 사냐를 꼭 이겨볼거에요. 반드시. 그게 훌륭한 군인이 되어 나라를 지키든, 외교관이 되어 우리 제국의 명성을 드높이든 무엇이든지 간에요. 뭐, 당신을 사냐에게서 빼앗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일 것 같기도 하네요."
  이건 좀 확실히 하고 넘어가자. 누가 누구를 뺏어? 내가 사냐 공주의 소유물이라도 되는거냐? 응?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우리는 아무 관계 아닙니다."
  "그런말 하기에는 조금 늦지 않았나요? 사냐 녀석, 당신에게 꽤나 빠져있는 것 같던데. 뭔가 작업이라도 잘 걸었나보죠?"
  푸훗. 작업은 무슨 작업. 내가 작업을 걸면 그 사람들은 바로 눈치챈다. 웬지 모르게 기분이 나빠지면서 나에게 연민을 느끼니까. 그런데 결론적으로 그렇게 해서 나한테 관심을 가진 여자는 한명도 없잖아? 아마 안될거야 ​아​마​.​.​.​.​.​.​.​.​
  "후훗. 어쨌든, 소녀는 이제부터 시작해볼거에요. 소녀는 결심했어요. 사냐를 이기기로. 이번 작전을 성공시키면, 그 목표에 좀더 가까워질 수 있겠죠."
  이번 작전은 이미 반은 성공했다. 나머지 반은 내가 갖고 있는 카메라 필름들만 에르데 제국으로 다시 가져가면 되는 것 뿐이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전장에서 지휘관으로서 명령을 내리면서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사냐 공주의 공적과, 작전에 참가해서 민폐만 끼치고 다니는 아일린 공주의 공적, 과연 어느게 더 크고 가치 있을까?
  ​"​저​기​.​.​.​.​.​.​.​.​"​
  "이창민 대위? 공주님? 잘됐군요. 보고 드릴게 있습니다."
  아쉽게도 - 뭐가 아쉬운건지는 모르겠지만 - 어느새 정찰에서 돌아온 마이너 중령이 우리를 불렀다. 남들이 있는데서 할 이야기도 아니기에, 나는 말을 담아두고 마이너 중령에게 경례를 하면서 몸을 돌렸다. 기회가 있으면 나중에 하게 되겠지. 일단 시작한다고 했으니까, 한번 기다려보자.
  "결과는요?"
  "후소 제국 육군의 단대호 미상 1개 연대급 부대가 앞쪽에 포진해있다. 아무래도 우리 폭격기의 잔해에서 추적해온 것 같네. 다행히 기갑병력은 보이지 않지만, 보병들만해도 꽤나 숫자가 많네."
  "탈출은 가능합니까?"
  "아니."
  마이너 중령은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탈출하려다가 꼬리가 붙잡혀 전멸당할 수 있네. 아까 고지대에서 간신히 우리의 위치를 전달하기는 했지만, 시간이 걸리겠지. 차라리 참호에서 버티면서 여기서 루스 제국군의 증원을 기다리는게 나을 것 같네."
  70명으로 1개 대대급 병력의 공격을 막을 수 있을까? 그것도 이쪽은 기관총이나 박격포 같은 중화기는 한문도 없는데.
  "대위, 우리 무장 상태는 점검 했나?"
  "예. 33명의 기사가 반자동소총을, 32명은 기관단총을 소지하고 있습니다. 각자 자위용 무기로 세이버를 소지하고 있고요. 일부 장교들은 9mm 권총도 소지하고 있습니다."
  "놈들을 근접전으로 끌어들여야하니까, 자네는 부상병들과 함께 후방에서 사격 지원만 하게."
  "알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제대로 뛸 수조차 없는게 지금 내 상태다 괜히 제일 앞에서 어정쩡거리다가 백병전에 휘말리느니, 차라리 소총으로 지원 사격이나 하는게 낫다. 이 야밤에 뭔가 쏠게 보인다면 말이지.
  "지금 즉시 공주님을 모시고 3번 참호로 가게."
 
  마이너 중령이 70여명의 기사들을 배치시켰을 때, 우리는 근처에서 들려오는 후소 제국군의 행진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우리는 언덕을 배후에 두고 반원형으로 파놓은 3개의 참호에 들어가 농성을 준비했다. 제일 앞에 있는 1번 참호에는 기관단총을 들고 있는 기사들과 검술이 뛰어난 기사들 42명이 배치되어 백병전을 준비하고 있고, 그 뒤에 있는 2번 참호에는 사격술이 뛰어난 기사 13명이 소총을 들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제 3열에는 나를 포함한 부상병들과 아일린 공주, 그리고 장거리 사격이 뛰어난 기사, 다 합쳐서 10명이 배치되었다. 이정도면, 최소한 나와 아일린 공주는 불리할 경우 도망칠 수 있다는 일종의 배려로 느껴질 정도로, 마이너 중령은 병력을 배치해놓았다. 나는 참호 벽에 기댄 채 사파이어섬에서 보급받은 필그림제 7.62mm 자동소총에 8발들이 클립을 끼워넣었다.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탄창이 삽입되었고, 그대로 노리쇠를 뒤로 당겨 한발을 장전하자 철컥, 소리가 났다. 후소 제국군이나 에르데 제국이나 반자동 소총이 주력 소총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내 자동소총은 확실히 우세한 화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최소한 조준하다 말고 장전을 위해서 노리쇠를 후퇴시키지 않아도 되니까. 그렇게 참호 벽에 기댄 나는 횃불과 탐조등을 밝힌채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호수 제국군을 볼 수 있었다. 참호가 얕게 파인 덕분에 쏘기 편하군.
  "아아! 드디어 시작인가요! 소녀, 드디어 직접 전투에 참전하게 되는 것이군요! 소녀는 너무나 기쁘답니다, 창민경!"
  그리고 우리의 눈치 없고 생각 없는 공주님은 또 망상병이 도지셨다. 아까 그렇게 혼나고도 정신을 못차리는건가? 나참. 푸쉭,하는 소리와 함께 마이너 중령의 손에 쥐여져 있는 신호탄 발사기에서 붉은 플레어가 하늘로 치솟았고 그소리 덕분에 나는 나에게 계속 말을 주저리주저리 내뱉는 아일린 공주를 떨쳐내고 사격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일제히 투척한 수류탄들이 참호를 향해 돌진하는 후소 제국군들의 앞에서 폭발했고, 순식간에 선두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뒤엉켰다. 어둠 속에 숨어있던 기사들은 참호 위로 상체를 내밀고 각자 소총과 기관단총을 발포하기 시작했고, 노란색, 주황색 불빛들이 궤적을 그리면서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후소 제국군의 몸에 그대로 박혔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후소 제국군은 아무런 반격조차 하지 않은채 그저 맹목적으로 돌진만 하고 ​있​었​다​.​.​.​.​.​.​.​.​.​ 아니다. 이녀석들, 숫자로 밀어붙일 심산이다. 후소군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하얀 보름달빛에 총검이 번뜩였다. 그건 백병전 훈련을 받은 나조차도 순간 섬뜩하게 만들 정도로 박력과 예리함이 있었다. 물론, 매일매일 칼을 쓰는 소드 마스터 에르데 기사들이 총검을 본다고 해서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1번 참호의 기사들은 이미 대부분 탄약을 소진한 채 백병전에 대비해 기병도를 꺼내들고 있었고, 2번 참호의 기사들은 침착하게 단발 사격을 하면서 후소 제국군을 하나씩 쓰러뜨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멈춰질 돌격이 아니지만. 다들 탄약을 소진했는지 총성은 점점 잦아들어갔고, 마지막 소총탄이 내 자동소총의 총구를 떠났을 때, 마이너 중령의 기사들과 후소 제국군의 선두가 격돌했다. 무차별적인 돌격으로 1개 대대급 병력은 대략 2개 중대급으로 줄어들어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보다는 많았다. 아무리 에르데 제국의 기사들이 일당백의 용사라도, 이정도 인원이면 밀릴 수 밖에 없다. 물론, 나는 에르데 기사들의 역량을 과소평가하고 있었지만. 우리들중 그 누구도 스파르탄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마이너 중령과 기사들의 분전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마이너 중령과 기사들은 기병도를 휘두르면서 후소 제국군을 베어, 아니, 썰기 시작했고, 빈약한 체격의 후소 제국군은 군도를 휘두르면서 돌격하던 그 기세와는 달리 오히려 역으로 압도당하고 있었다. 기사들의 칼날의 벽에 진격이 가로막힌 후소 제국군들은 굉장히 당황했는지 제대로 된 전투도 하지 못한채 ​일​방​적​으​로​.​.​.​.​.​ 학살, 그래, 학살 당했다. 상황은 생각보다 쉽게 풀리고 있었다.
  "그래요! 모두들, 저 간악하고 무지한 후소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는거에요! 다들 공격하는거에요!"
  아일린 공주는 에르데 기사들의 선전에 더더욱 기가 살았는지 내 옆에 서서 내 팔을 붙잡고 팔짝팔짝 뛰고 있었다. 그때였다.
  ​"​"​반​자​이​~​!​!​!​"​"​
  뒤다. 우리의 뒤다. 재빨리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본 나는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대략 1개 중대급으로 보이는 후소 제국군 100여명의 병력들이 언덕에서 내가 있는 3번 참호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이런 젠장. 나는 옆에 있던 기사를 하나 붙잡아 부상병들을 전부 2번 참호로 이동시키도록 조치한 다음, 예비대의 일종으로 대기하고 있던 2번 참호의 기사13명을 이쪽으로 불렀다. 부상병들도 별로 심한 부상은 없었기 때문에 기다려도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파편상을 입거나 관통상을 당한 사람들을 싸우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젠장, 탄약만 조금만 더 있었다면. 그랬다면 최소한 이렇게 무식하게 싸우지는 않아도 되는데. 하지만 이미 늦은 후회였기에, 나는 생각을 접고 나에게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달려드는 후소 제국군들을 베어넘기면서 전황을 살폈다. 에르데 기사들의 분전으로 우리에게 달려든 적 100여명 중에서 대략 40명 가량이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었지만, 대신 숫적 열세에 밀린 에르데 기사 3명이 총검에 보기 흉하게 찔린 채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아일린 공주는? 이 상황에서 왜 찾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고개를 들어아일린 공주를 찾았다. 찾기는 생각보다 쉬웠다. 피와 살점과 생명이었던 고깃덩어리들이 사방으로 튀는, 이 유혈이 낭자한 가운데에서 혼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채 부들부들 떨고만 있으니까. 지금까지는 용케도 아무도 달려들지 않았지만, 그녀의 운도 다했나보다. 가만히 떨고있는 그녀를 인지해버린 후소군 하나가 그녀에게 달려가 딱딱한 나무 개머리판으로 아일린 공주를 쳤다. 자신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광경에 이미 넋을 빼앗긴 아일린 공주는 당연하게도 대응은 커녕 반응조차 하지 못했고, 하다못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자기가 서있던 참호 안으로 떨어졌다. 이런, 빌어먹을! 나는 온몸에서 뿜어져나오는 힘을 느끼면서 오른쪽 다리로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전에 우리 세계에서 아인슈타인이 그랬던가? 속도가 빠를수록 시간은 느리게 간다고. 나는 내 주변의 모든 것이 마치 슬로우모션처럼 느껴졌다. 베인 상처에서 뿜어져나오는 피와 폭탄 파편들이 여기저기에서 폭발하는 것 까지도, 전부. 신경쓰지 않았고,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나는 정말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앞을 달려, 아일린 공주를 총검으로 찌르기 직전이었던 후소군을 덮쳤다. 아무런 대비를 하지 못하고 있었던 후소군은 그대로 나와 함께 땅에 처박혔다. 젠장, 하필이면 재수없게 다친대를 아래로 떨어지냐? 아까 넣었던 모르핀조차 극복해버리는 엄청난 피로와 통증이 올라왔다. 다리가 또다시 욱신거렸지만, 이번에는 아까와는 달리 다리 상태를 확인하거나 응급 조치를 추가하거나 하지는 못했다. 나와 같이 넘어진 후소 군인은 근처에 떨어져 있던 작은 대검을 주워들고 일어서려고 했다. 물론 그렇게는 안돼지. 나는 허리춤에 손을 뻗었고, 뒤이어 묵직하고 차가운 금속 감촉이 손에 느껴졌다. 그대로 홀스터에서 권총을 뽑은 나는 조준도 하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서로간에 10m도 안되는 거리에서는, 맞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퍽, 소리와 함께 놈의 이마에 붉은 구멍이 뚫렸고, 적갈색의 피가 이마에서 얼굴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간신히 여유를 되찾은 나는 그 옆에 있는 아일린 공주에게 다가갔다. 아니, 여유를 찾은 줄 알았다고 정정하는게 났겠군. 후소 놈들은 계속해서 나에게 몰려들었으니까. 나는 권총을 쏘고 야전삽을 휘두르면서 후소 제국군들을 저지했다. 권총의 총구에서 발사광이 반짝일 때마다 후소 제국군 하나가 쓰러졌고, 권총 사격을 뚫고 들어온 놈들은 왼손에 들고 있던 날카롭게 양날이 갈린 야전삽에 찍혀 그대로 저세상으로 가버렸다. 하지만 애시당초 원거리 사격이면 몰라도 근접전 훈련은 거의 받아보지 못했던 나에게 일대다수의 싸움은 말 그대로 무리였다. 빈틈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마구잡이로 휘두르던 야전삽이 후소 제국군의 접근을 저지했지만, 그렇게 효과적이지도 않았고, 내 체력도 갉아먹고 있었다. 내 3시방향에서 달려들던 후소군 하나를 야전삽으로 찍었을 때, 나는 어깨에서 통증을 느꼈다. 총검은 아니다. 총검이라면 대검의 날이 내 어깨뼈를 부수고 나와야 하니까. 그렇다. 나 지금 총에 맞은거다. 젠장, 두번째 총상이다. 하늘에서도 맞은적이 없었던 내가 이번 작전에서만 2번 ​맞​은​거​다​.​.​.​.​.​.​.​ 젠장, 현실 도피할 때가 아니라. 나는 고개를 돌려 나에게 총을 쏜 후소 군인을 제압했고, 뒤이어 몇명 더 달려드는 놈들을 제압한 나는 간신히 잠깐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나는 권총과 야전삽을 손에 든 채 쓰러져 있는 아일린 공주에게 다가갔다. 아일린 공주의 얼굴은 창백했다. 안그래도 창백했지만, 이제는 핏기마저 없을 정도다. 추운듯이 벌벌 떨면서, 이마에서는 식은 땀까지 흘리면서 충격에 휩사인 아일린 공주는 내가 다가가자 흠칫 놀랬다. 하긴, 피범벅이 된 야전삽을 들고 있는데 누구라도 안놀라겠어.
  "괜찮아요?"
  ​"​.​.​.​.​.​.​.​창​민​경​.​.​.​.​.​.​.​.​"​
  "안다쳤냐고요."
  ​"​.​.​.​.​.​.​.​창​민​경​.​.​.​.​.​.​.​"​
  멀쩡하게 내 이름 잘 부르는거 보니까 괜찮은 것 같다. 정작 내쪽은 괜찮지 않은 것 같지만. 어깨에서 시작된 통증은 오한이 시리게 만들고, 왼쪽 어깨에는 아까부터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이러다가 다시는 비행 못하게 되는건 아니겠지?
  "못해요, 더이상 못해요. 소녀는 더이상 버틸 수가 없어요!"
  전면 철회
  "더이상 무서워서 못하겠어요. 너무 무서워요. 싫어요, ​이​런​거​.​.​.​.​.​.​.​.​"​
  아일린 공주는 덜덜 떨면서도 내게 고함을 질렀다. 이거, 어째....... 이크.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언젠가 내 뒤로 다가온 후소 제국군 하나가 내 머리를 노리고 개머리판을 휘둘렀지만, 미안하다. 난 조종사다. 등뒤는 언제나 주시하도록 훈련받았다고. 아까는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었던 것이지만. 내가 피한다는 것을 미처 계산에 넣지 못했는지 그 후소 군인은 관성에 의해 앞으로 몸이 쏠려버렸고, 나는 그의 등 뒤로 돌아 팔꿈치로 그의 머리를 가격한 다음, 왼손의 야전삽날을 그대로 등에 박아넣었다. 후소 군인의 비명과 함께 등에서 선홍색 피가 사방으로 튀었고, 그중 일부는 아일린 공주에게로 쏟아졌다. 피범벅을 뒤집어쓴 아일린 공주는 그때처럼 패닉 상태에 빠지면서 비명을 질러댔고, 소매로 얼굴을 문지르면서 피를 지워보려고 했지만, 도리어 얼굴 전체에 피를 고루 바르고 말았다.
  "꺄아악!"
  "진정해!"
  나는 얼굴의 피를 닦아주기 위해서 아일린 공주의 손목을 잡았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아일린 공주의 싸늘한 시선과 매몰찬 태도 뿐이었다.
  "손대지 마세요! 더이상 이런건 싫어요. 소녀가 꿈꿔왔던건 이런게 아니란말이에요!"
  "뭐?"
  "싫어요, 싫어요, 싫어요. 소녀는 황제의 딸이에요, 천한 백정이 아니라고요!"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는 군인들을 모독하는 말이었지만, 나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면서 손목을 다시 붙잡았다. 하지만 아일린 공주의 패닉 상태는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심했다. 단순한 PTSD 발작 증세가 아닌, 일종의 분노억제장애랄까. 자신의 믿음이 눈 앞에서 철저하게 깨지는 것을 보고 완전히 이성을 잃은 것 같다. 그녀는 정의를 위해 싸운다고 했지만 말이다.
  애시당초, 전쟁에 정의라는건 없으니까.
 
  ​.​.​.​.​.​.​.​.​사​냐​ 공주에게 정의를 위해 싸우겠다고 한 내가 할말은 아닌 것 같지만.
 
  아일린 공주는 온몸을 비틀면서 내게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내 악력이 더 셌다. 그녀를 가까이 끌어들인 나는 그녀를 정신 차리게 만들기 위해서 전에 마이너 중령이 썼던 충격 요법을 쓰기로 했다. 무슨 말인지, 직접적으로 얘기 안해도 대충 알겠지?
  짝!
  "정신 차려!"
  애한테는 존댓말 필요 없다. 아일린 공주는 내게 한대 맞고서야 대충 이성이 돌아온 듯, 마치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하고 나를 바라봤다.
  "차....."
  "시끄러. 조용히 해. 공주답게 체면을 지키란 말이야. 네말대로 너는 천민이 아니라 공주잖아? 황제의 딸이잖아? 그렇다면 그에 걸맞게 행동하란 말이야. 애처럼 굴지 말고."
  "차......"
  "조용히 하라고 했지!"
  "히끅"
  아일린 공주는 딸꾹질까지 하면서 내 말을 들었다. 하긴, 공주라는 신분상 이렇게 혼나본 적은 없겠지. 그렇기에 더더욱 중요하다.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해놓지 않으면, 이녀석, 군인은 커녕 한 사람으로서도 살아갈 수 없다. 이번 기회에, 이녀석의 정신 세계를 확실히 고쳐놔야한다. 전쟁에 정의란 없다는걸 가르쳐야만 한다.
  "넌 도데체 왜 싸우는거야? 사냐가 부러워서? 그게 다야? 넌 공주잖아. 공주라면 너의 백성들을 지키위해서 싸우란 말이야, 누구를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고, 그만두기는 뭘 그만둬? 그만둘게 뭐가 있어? 네가 시작한게 뭐가 있다고 그만둬? 시작하지도 않고 포기하지 말란 말이야!”
  그말과 함께 나는 몸을 오른쪽으로 틀어 뒤에서 찔러오는 총검을 피했다. 혼내는데 방해하지 마라. 짜증나니까. 다시 한번 야전삽이 차가운 밤공기를 갈랐고, 나를 공격했던 후소 병사는 목이 꺾어진채 바닥에 축 늘어졌다. 거기까지 말한 나는 숨을 헐떡이면서 아일린 공주를 바라보았다. 아일린 공주는 울고 있었다. 마치, 절대 자신의 편이 되어줄 것이라고 믿었던 오빠에게 혼냈을 때처럼.
  ​“​…​…​.​포​.​.​기​…​.​.​”​
  “아직 안끝났어. 아니, 시작도 안했어. 사냐를 부러워하지만 말고 너도 싸우란말이야.”
  “하지만…….. 시작을 못하겠어요. 무서워요. 아무리 소녀가 직접 노력하려고 해도, 되지 않아요.”
  아일린 공주가 말했다. 힘들다고. 못하겠다고. 시작조차 못할 정도로 무섭다고. 그렇다면, 누군가 앞으로 밀어주기만 하면 된다.
  “내가 밀어줄게.”
  “에?”
  “내가 밀어줄테니까, 내가 도와줄테니까, 시작하기도 전에 포기하지 마.”
 
 
  내가 아일린 공주의 상황을 정리했을 때, 주변 상황도 끝나 있었다. 소드 마스터 집단인 이 에르데 항공기사들은 우리를 공격했던 후소 제국군을 모두 격퇴해버렸다. 이쪽 피해는 17명 전사에 5명 부상. 그중에서 3명은 중상이지만, 이쪽과 저쪽의 전력 차가 몇십배는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거다. 그 2명의 경상 중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중상이겠지만, 당장 전투 수행이 가능하니 마이너 중령이 억지로 경상에 넣은거다. 어깨의 통증 때문에 머리가 빠개질 것 같은데 전투를 수행하라니 웃기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 우리에게는 고양이 손이라도 필요한 상황인데, 어깨 총상이라는 이유로 빠질 수가 없다는게 마이너 중령의 이유였다. 마이너 중령은 기사들을 통제해 후소군의 무기를 노획해 분배한 다음, 후소 제국군의 볼트 액션 소총 하나를 나에게 건네 주었다.
  “감사합니다, 중령님.”
  “감사는 이쪽에서 해야할 것 같군. 공주님을 ​지​켜​줬​으​니​말​이​야​.​”​
  지켜줬다기 보다는 혼내는거 방해 못하게 한거지만. 아일린 공주는 눈이 시뻘겋게 부은 채 나에게서 1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아직도 훌쩍이고 있었다. 나한테 혼난 충격이 좀 컸나보다.
  “그런데 왜 저러시냐?”
  “………….”
  볼에 빨간 손자국이 있고, 얼굴에 피가 튀겨져 있으니 아무래도 궁금하겠지만 그냥 넘어가주세요.
  “현재 상태로는 적의 2차 공격에 우리가 버텨낼 수가 없네. 그러니까 자네는 아일린 공주를 데리고 루스 제국으로 빨리 빠져나가게나.”
  “길도 모르고 방향도 모르는데 그냥 여기서 가라고요?”
  나는 어이가 없었다. 길과 방향을 모른다는 것은 둘째치고, 아일린 공주는 공주다. 무슨 뜻이냐고? 공주의 호위로 겨우 한명 붙이는거, 본사람? 그것도 나는 일반적인 에르데 기사와 달리 검술은 전혀 못하고, 쓸줄 아는 보병용 무장이라고는 9mm 권총 뿐이다. 그것도 탄창은 3개뿐이 남지 않은 권총 말이다. 내 실력은 백발백중이 아니고, 설사 그렇다고 쳐도 내가 최대 상대할 수 있는 후소군은 고작 18명뿐이다. 그리고 마이너 중령의 정찰 결과에 따르면 우리가 상대하는 적은 대략 1개 연대 수준이지. 그리고 우리가 상대한 적은 대대규모고. 자 단순 산수다. 3개 보병 대대로 이루어져 있는 후소 제국군 1개 연대가 1개 대대로 우리를 공격했다가 격퇴 당했다. 그렇다면 이제 몇개 대대가 남았을까요? 답! 2개 대대요! 축하합니다. 상으로 아일린 공주와 도피 기회를 ​드​리​겠​습​니​다​.​.​.​.​.​.​.​.​젠​장​,​ 현실 도피할 때가 아니잖아! 어쨌건, 내 요지는 간단하다. 우리가 만약 여기서 탈출을 했다고 치자. 과연 나와 아일린 공주 단 둘이서, 후소 제국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크리아포스츠까지 당도할 수 있을까? 난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래. 우리야 여기서 전멸당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이번 작전의 중핵인 자네와 아일린 공주는 반드시 살아서 나가야 하네.”
  나는 그제서야 이번 작전의 의의가 프로파간다라는 것을 생각해냈다. 16기와 최정예 조종사 80여명과 공주를 희생하면서까지 반드시 전달해야하는게 바로 이 비디오 테이프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다같이 죽겠다는 미친 말을 하는것도 아니고, 동료를 버리고 갈 수 없다는 영웅주의에 빠진 것도 아니다. 단지, 현실적으로 추격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중령님, 힘들......"
  "동료를 버리고 싶지 않다는 자네의 마음은 알겠네만, 이건 이번 작전의 요지이자, 황제 폐하의 명령일세. 무슨 일이 있어도, 공주님과 자네는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야하네."
  조금 어이없는 오해를 해버린 마이너 중령은 품에서 황제의 붉은 인장이 찍혀있는 누런색 종이를 보여줬다. 에르데 제국 군인에게 가장 중요한, 황제의 명령서에는, 마이너 중령이 얘기한대로, 나와 아일린 공주의 생사를 최우선으로 한다는 명령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나는 탈출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내 목소리는 다른 소리에 묻혔다.
  ""반자이~!""
  "적이다! 내습이다!"
  이름을 모르는 한 기사의 외침과 함께, 반자이라는 돌격 구호를 외치면서 후소제국군의 2차 공격대가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마이너 중령을 포함한 기사들도 기병도를 뽑아들고 반격을 준비했지만, 반자이라는 외침은 반가운 소리에 묻혔다.
  우우우웅-
  피스톤 엔진이 기름을 연소시키면서 내는 중후한 소리. 바로 전투기 소리다. 조명탄을 투하하면서 우리의 위를 날아간 4기의 야간 전투기는 기총소사를 하면서 우리와 300m 떨어져 있던 후소 제국군들 위로 지나갔다. 달빛에 비친 그들의 날개와 동체에는 붉은 별 라운델이 그러져 있었다. 루스 제국의 증원이다! 전투기들이 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수십대의 트럭과 T-26 보병 전차가 우리의 후방에 도착했고, 증원군의 도착으로 전의를 상실한 후소 제국군은 그대로 무너졌다. 정말, 기막힌 우연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증원이었다. 우라!라는 함성과 함께 몰려오는 루스 제국군의 파도가 후소 제국군과 격돌했고, 마치 모래성을 쓸어버리는 파도처럼 후소 제국군을 쓸어버렸다. 잠깐의 여유가 생긴 나는 아직도 먼발치에 떨어져 있는 아일린 공주 옆으로 다가가 훌쩍이고 있는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진정시키기 위해서 한거지, 절대 다른 뜻이 있는게 아니다. 웬지는 모르지만 아일린 공주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있지만.
  ​"​끝​났​네​.​.​.​.​.​.​.​.​"​
  그런데 머리가 왜 이렇게 아프지.....? 아까 그것 때문인가? 뭐, 이제 다 끝났으니까 잠깐 쉬어도 될 것 ​같​은​데​.​.​.​.​.​.​.​.​ 나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아일린 공주 옆에 걸터 앉았다. 그리고는 뒤로 드러누웠다. 대륙의 맑은 하늘의 별들과 그 옆에서 흩날리는 아일린 공주의 머리카락을 마지막으로 나는 정신을 잃었다.
 
  4
  작전은 순조롭게 끝이 나고, 우리가 목숨을 걸고 지켰던 비디오 테이프들은 전부 방수 케이스에 담겨 에르데 제국 정부에 성공적으로 전달되었다. 우리는 루스 제국의 협조를 받아 에르데 제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고, 에르데 제국의 대양 전선의 전초기지인 사파이어섬에서 엄청난 환영 인파와 함께 귀환식을 치뤘다. 황제 본인이 직접 나와 나와 아일린 공주, 마이너 중령을 치하하며 둘에게 1계급 특진을 시켜줬으니까. 원래 나도 1계급 특진 예정이었지만, 나의 강력한 거부로 그냥 훈장만 받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왜냐고? 잊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내 상관은 사냐 공주다. 대위인 내가 진급하면 소령, 그렇다면 부대 내 위계 질서가 흔들리게 된다. 지금은 모든 대원들이 사냐 공주를 따르고 있지만, 우리 기사단에도 곧 신입 조종사들이 배속될건데 남자 부기사단장과 여자 기사단장의 계급이 같다면 자칫하다 파벌싸움이 날 수 있다. 사냐 공주를 중령으로 진급시키면 되지 않냐고? 저 소령 계급도 몇달 전에 받은거라 국방성에서 전면 반대한 덕분에 무산되었다. 뭐, 죽지 않고 살아돌아왔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거지. 원래대로라면 귀환한 모든 기사들은 1계급 특진과 1주일 휴가, 훈장이 포상으로 주어질 예정이었지만, 나는 그중에서 훈장만 받게 되었다. 1주일 휴가? 나도 누리고 싶다. 나도 잠깐 휴가 가서 다친 어깨랑 다리 좀 쉬게 하고 싶다고. 그런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복병이 나타났다.
  "미안하네, 대위. 사냐 공주께서 귀관이 없는 동안 귀관을 계속해서 돌려달라고 항의해서 어쩔 수 없네. 공주가 아무리 황후마마의 자식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반은 황제 폐하의 피잖나."
  무슨 말인지 해석하자면, 사냐 공주가 하도 떼쓰는 바람에 나는 휴가조차 반납하고 바로 빅토리아 대륙, 즉 일선으로 돌아가게 되었단 말입니다, 여러분. 하하하하하, 이런 망할. 내 복귀 조치는 사냐 공주가 엄청 갈궜는지 순식간에 이루어져, 훈장 수여식 직후 바로 빅토리아 시티로 가는 신형기 수송함들 및 호위 함대와 함께 그날 밤 출발해야 했다. 아일린 공주에게 뺨 때린 것에 대해 사과조차 하지 못하고 말이다. 뭐, 어차피 황궁으로 바로 떠나서 어쩔 수 없는거지만.
  참고로 내 다리 아직도 아프다. 어깨는 많이 나아졌지만.
 
  중간에 폭풍우를 4번이나 만나 우회해야 했던 우리는 원래 항로라면 1달 남짓 걸릴 항로를 1달 반이나 소모해서 왔다. 이 길고 지루한 항해는 거의 악몽이었다. 다시는 배가 타고싶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뭐 어쨌건, 1달 반이나 지난, 4월 12일 빅토리아 항에 입항한 나는 그곳에서 바로 수송기를 타고 황실 직속 44 항공 기사단이 전개된, 빅토리아 시티에서 북동쪽으로 10km정도 떨어진 우리 비행장으로 나를 마중나온 유나 중위의 호위를 받으며 돌아갔다. 그리고 드디어, 나는 2달이 넘게 보지 못했던 나탈리와 에리카 대위, 그리고 사냐 공주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정말 다들 반갑다.
  "창민경!"
  "수고 했어. 말도 안하고 간건 좀 너무했지만 말이야."
  ​"​수​고​하​셨​습​니​다​.​"​
  이것 참. 오랜만에 만난 사람에게 다들 말 끝에 가시가 돋친 말을 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나마 나탈리와는 달리 사냐 공주는 활짝 웃으면서 나에게 다가와서 다행이다. 나를 보자마자 반가운지 내게 쪼르르 달려오던 사냐 공주는 갑자기 못볼 것을 본 것 처럼 얼굴을 굳히면서 얼어 붙었다. 나 뭐 잘못했나? 얼굴에 뭐 묻었나? 뭐지?
  "대위 이창민, 제국력 1939년 4월 12일, 44 항공 기사단으로 복귀한 것에 대하여 신,고,합니다."
  확실히 뭔가가 잘못되었다. 사냐 공주는 내 복귀 신고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심란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봐봐, 평소와는 다르게 나의 눈조차 맞추지 못하잖아.
  “뭔가, 문제…… 있어?”
  뭔가 걱정된다. 사냐 공주에게 뭔가 문제라도 있는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내 물음에 돌아온 것은 난데 없는 분노였다.
  “창민경, 차렷.”
  “에?”
  “차렷 하시라고요! 차렷!”
  나는 영문도 모른채 차렷 자세를 취했다. 이건 명령만 떨어지면 해야 하는, 거의 조건 반사 수준이라서 어쩔 수 없군. 사냐 공주는 한참을 씩씩대더니 부동자세를 취한 내 앞에 서서 내 바지를 가리켰다. 응? 내 바지?
  “에르데 제국 황실 직속이자 명문 기사단인 제 44 항공 기사단의 부기사단장이자, 나, 사냐 공주의 제 1기사이고, 방금 후소 제국에 우리 에르데 제국을 대표하여 복수를 마치고 온 구국의 영웅이 누구에요?”
  누가 구국의 영웅이야? 나?
  “에?”
  “이창민경, 경을 말하는겁니다! 에르데 제국의 영웅이자 저, 사냐 공주의 제 1기사인 당신이라고요. 그런 영웅이 제복 바지에 붉은 소스를 묻힐 정도로 칠칠지 못하다는 말이에요, 지금?”
  붉은 소스? 분명 새 바지로 갈아 입었을…… 이런! 이거 그날 입었던 바지잖아! 아직 세탁도 못한건데? 설마 그걸 본건가? 사냐 공주의 말에 다들 내 바지에, 정확하게는 내 다리에 시선을 옮겼다. 젠장, 일부러 안들키게 할려고 아무한테도, 심지어 의무병한테도 말 안했는데?
  ​“​창​민​아​…​…​그​거​…​…​설​마​…​…​.​”​
  이런……. 나와 관련된 일, 특히 내 부상이나 건강에 관련된 일이라면 엄청 걱정하는 나탈리가 알아버렸다. 이래서 내가 안 알리려고 했던건데? 내가 이렇게 어쩔줄 모르고 있는 사이 사냐 공주는 그대로 몸을 돌려서 걸어가버렸고, 나탈리와 에리카 대위는 굳어버렸다. 아…..나탈리…… 걱정되는건 알겠지만 그렇다고 눈동자에서 생기가 없어지는건 좀 아니지 않니? 응? …….. 일단 사냐 공주부터 처리하자. 나는 나에게서 고개를 돌린 채 걸어가고 있는 사냐 공주에게 달려갔다. 웬지 모를 야성의 감이 그래야 한다고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그녀에게 달려간 나는 사냐 공주의 팔을 잡아 멈췄지만, 사냐 공주는 끝까지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왜 그…….”
  오른손으로 얼굴을 돌리자 사냐 공주가 왜 나에게서 걸어갔는지 알 수 있었다. 공주를 두명이나 울린 놈은, 아니 울릴 수 있는 놈은 나밖에 없을거니까.
  “너 왜 울어? 왜 그래? 뭔 일 있어?”
  내 물음에 대답조차 하지 못한채 울고만 있던 사냐 공주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치만……..”
  그리고는 말조차 잇지 못한채 사냐 공주는 나에게 와락 안긴 다음 펑펑 울기 시작했다. 서럽게 말이다. 정말 서럽게.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크게 다친데도 없이 살아 돌아와서 다행이에요………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창민경. 다시는 못보게 될까봐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
  “죽을뻔 했잖아요, 창민경. 거긴…….동맥이 흐르는 ​자​리​잖​아​요​…​.​.​만​약​에​…​…​…​.​”​
  더이상 듣고 있다가는 온갖 불길한 얘기가 다 나오겠군. 나는 사냐 공주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녀를 강하게 끌어않았다. 더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나는 지금 여기서 숨을 쉬고 있으니까. 나는 살아있다. 그거면 된거다. 사냐 공주도 더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만 울어. 뚝.”
  나는 가볍게 사냐 공주의 등을 쓸면서 토닥였다. 진정해야지. 쉬……….
  “뚝. 이제는 괜찮으니까.“
  “그래요. 철과 피의 철혈 공주께서 눈물도 보이다니, 대단하네요. 역시나 창민경이에요. 소녀도 놀랍답니다."
  이 지나치게 발랄한 목소리에 소녀라는 일인칭. 아, 이건 더이상 힌트가 없어도 누군지 알 것 같다. 누구긴 누구야, 아일린 공주님이시지. 곁눈질로 살펴보니 에리카 대위와 유나 중위는 고개를 숙이면서 예를 표하고 있고 ​나​탈​리​는​.​.​.​.​.​.​.​.​.​.​.​ 왜 눈동자의 초점이 풀린채 중얼거리는거야? 뭐? 어디서 굴러들온 여자라니! 공주라고 나탈리! 어깨의 황실 견장 안보여? 품에 안겨있던 사냐 공주는 소매로 눈물을 훔친 다음 내 품에서 나와 아일린 공주를 노려봤다. 어째서? 동생 아니야?
  "무슨 일이야, 언니."
  뭐? 언니? 언니라고? 정신 연령은 저쪽이 더 어려보이는데? 아니, 양쪽 다 만만치 않지만 그래도 정신연령은 아일린 공주쪽이 어리고, 외모도 저쪽이 어리다고? 사냐 공주는 아일린 공주를 향해 적대적인 시선을 풀지 않았지만 아일린 공주는 사냐 공주의 시선을 무시한 채 나에게로 바로 다가왔다.
  "창민경이 그날 말했던건 나도 잘 기억하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의 살인적인 시선이 나에게 몰렸지만 나는 일단 무시하기로 했다. 일단 제1전선부터 정리하고 2전선을 ​상​대​하​자​.​.​.​.​.​.​.​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키기 위해 싸우겠어요. 창민경이 말한 것 처럼."
  2전선이 1전선으로 변경될 분위기다.
  "하지만 말이에요, 소녀 같은 연약한 공주의 몸에 손을 댄 대가는 치뤄야죠."
  오케이. 이제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서부전선 문제 있다! 왜 다들 눈동자의 초점을 잃고 기병도에 손을 가져가는거야? 나탈리? 권총 잠금 장치 풀지 마!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시선의 집중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건지 아일린 공주는 사냐 공주가 노려보든 말든, 나탈리가 권총을 손에 쥐든 말든, 에리카 대위가 기병도를 뽑아 들든 말든 신경쓰지 않고 내게 다가와 내 오른쪽 팔에 자신의 팔을 감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몸을 내 팔에 비비면서 말했다. 아, 아무런 느낌도 안난다. 사냐 공주도 절벽인데, 아일린 공주는 사냐 공주보다 외관이 어려보인다. 설명은 이정도면 됐지?
  "그러니까 소녀를 옆에서 잘 보필해줄 것이라고 부탁해요, 창민경. 기사가 자신의 말을 번복할 생각은 아니겠지요?"
  푸훗. 그렇게 인정받고 싶은거냐.
  "잘 결심했어요. 중령님. 앞으로도 좋은 전과를 기대할게요."
  나는 웃으면서 경례를 했다. 아일린 공주도 기분이 좋은지 방긋 웃으면서 나에게 찡긋 윙크를 날렸다. 뭐, 끝이 좋으면 다 잘된 ​것​이​겠​지​.​.​.​.​.​.​.​.​ 취소. 뭐가 별론지 사냐 공주는 그냥 기지 건물 안으로 들어가버렸고, 어느새 내 뒤로 다가온 나탈리는 눈에 초점을 잃은채 손을 내 어깨에 올려놓았다. 아차, 서부 전선 정리가 안끝났구나.
  "자 창민아? 이제 공주의 몸에 손을 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자세한 설명을 해줄래?"
  그건 절대 심오한 뜻이 있는게 아니라 단순히 내가 아일린 공주의 뺨을 때렸다는 말입니다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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