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및 문화 콘텐츠 사이트 삼천세계

스카이 나이츠 - 창공의 기사단


Sortie 019 - 자만과 방심, 그리고 전멸 Part 4


  5
  후퇴하는 후소 제국 중순양함들을 뒤로 한 채, 우리는 에르데 제국 수병들을 구조하는 일에만 전념했다. 무전망은 침묵했고, 그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간간히 알리크론과 캐롤, 그리고 딥블루에서 구조 상황을 단편적으로 전달할 뿐이었다. 우리 기사단원 7명은 그대로 대오를 짠 채 초계를 시작했다. 물론 이쪽도 아무런 대화 없이, 조용하게. 그렇게 시간을 보내길 몇시간 째 하늘에 동이 터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 블랙캣 전투기들이 배가 고프다고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스카이 리더다. 전기, 연료 상태 보고하도록."
  침묵을 깨고 내가 말문을 열었지만 대답하는 사람은 나탈리 뿐이었다. 나참, 다들 왜그래?
  [나야. 남은 연료량 8%.]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는 무전망. 이봐들, 좀 협조 좀 하라고!
  [......우리 때문에 죽었는데요.]
  누가?
  [저들은 우리 때문에 죽은거에요, 창민경.]
  누가, 수병들이?
  [예..... 그들은 살기 위해 싸웠는데..... 정작 공주인 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하​아​.​.​.​.​.​.​"​
  한숨이 절로 나오는군. 또다, 사냐 공주의 저 노블레스 오블리주 병. 사회적 지위와 책임이 있는자가 솔선수범하는건 좋지만, 이건 아니잖아? 애시당초, 이번 해전에서 수상 경계를 맡은건 저쪽이라고! 우리가 잘못한게 아니라 저쪽이 방심하다가 눈뜨고 코 베인거야. 공주로서 자신의 국민들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는 사냐 공주의 마음을 모르는건 아니지만서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건, 그렇게 전쟁터에서 그렇게 생각하면 다음 싸움에서는 싸울 수가 없다.
  ​[​하​지​만​.​.​.​.​.​.​]​
  "조용. 어젯밤의 경계 책임은 저쪽에 있었고, 그래서 우리가 모든 책임을 저야할 필요도 없어."
  ​[​하​지​만​.​.​.​.​.​.​]​
  "더군다나 저쪽은 전사한거야. 네 말대로 자신들의 조국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가 명예롭게 죽은거라고. 네가 여기서 그렇게 자기 비하하고 슬퍼하고 운다고 해서 저들이 다시 살아돌아오는게 아니잖아."
  솔직한 말로, 나는 그렇게 울고, 자기 비하하고, 슬퍼하고, 오열해서 저들이 돌아올 수 있다면 당장에라도 그렇게 하고 싶다. 문제는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것이지만.
  "저들을 위해 복수하고 싶어? 그러면 살아남아. 그래야 복수할 기회가 있지 않겠어?"
  [......]
  "자, 다시 한번 물어본다. 전 편대, 연료 잔량 보고해.]
  이번에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살짝 울먹이는 사냐 공주의 목소리를 필두로, 에리카 대위, 유나 중위, 그리고 경화와 지경이까지. 그들의 연료 잔량을 들으면서 나는 살짝 내것도 체크 해보았다. 연료 잔량은 4%. 내게 제일 없군.
  "내가 제일 없네. 4% 남았다. 먼저 착함하겠다."
  [알았어. 이번에는 동체 착륙하지나 말고.]
  ​.​.​.​.​.​.​나​탈​리​,​ 아픈 기억 건드리지 말고.
 
  아스토리아 옆에서 아스토리아의 수병들을 구조하고 있는 주디케이터의 함미 갑판이 눈에 들어오자 나는 천천히 고도를 낮추며 랜딩기어를 펴고 테일 후크를 내렸다. 피에 젖은 보랏빛 바닷물이 주디케이터의 현측 장갑을 때릴 때마다 경순양함을 개조한 이 작은 항공모함은 철렁거리며 흔들렸고, 그 위에서 착륙을 유도하려는 갑판 위의 엘소는 손에 신호기를 쥔 채 넘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항공모함은 최고 속도로 항주해서 상대속도를 최대한 줄여줘야하겠지만, 일부러 내 직권으로 구조 작업 속행을 지시했다. 당장, 화상으로 심하게 얼굴이 일그러진 채 헤엄칠 힘도 없이 바다에 둥둥 떠있는 아스토리아와 빈센스, 퀸시의 수병들이 사방에 널려있었으니까. 자칫 잘못해서 이들을 구조할 기회를 놓쳐버리는건 사양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44 타격대의 모든 함선들을 분산시켜 침몰하고 있는 에르데 제국 중순양함들의 구조 작업을 지시했고, 대다수의 수병들이 이를 반겼다. 당연하다면 당연한거지. 지금 바다에 빠져있는 이들은 전부 자신의 친구이고 동료이고 전우일테니까. 모두들 내 결정을 반겼고, 몇몇 장교들이 조심스럽게 내놓은 적 잠수함에 의한 기습 공격안도 금세 뭍혔다. 후소 제국 잠수함들이 이곳에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 않은 정보고, 지금 물에 리히트들이 빠져 있다는 것은 확실한 정보니까. 모두들 나의 결정에 찬성하며 바로 구조 작업에 들어갔다. 내가 실수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차마 하지 못한채로 밀이다. 애석하게도, 나는 인간이다. 그리고 우리 인간들의 특징은 바로 실수를 한다는 거지. 나중에 만약 내가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실수를 하나 선택한다면, 지금이 바로 지금 이 함대의 분산 배치를 택할 것이다. 그때는 몰랐었다. 이게 내 인생 최악의 실책일 수도 있었다는 것을 말이야.
  “……응?”
  내가 기수를 낮춘 채 천천히 갑판 후미로 접근하던 순간, 블랙캣의 엔진 앞으로 갑작스럽게 물기둥이 솟아올랐다. 재빨리 조종간을 당기면서 옆으로 틀었지만, 관성이란 물리 법칙을 쉽게 거스를 수는 없었고, 내 블랙캣 전투기는 물보라에 밀려 순식간에 수십 피트 상공 위로 내던져졌다. 착륙시 시야 확보를 위해 열어놓았던 캐노피 사이로 차갑고 짠 바닷물이 밀려들어왔다. 으엑, 엄청 짜잖아. 순식간에 뿌옇게 흐려져버린 고글 너머를 보기 위해 나는 안간힘을 쓰며 흔들리는 블랙캣 전투기를 안정화시켰다. 양손으로 붙잡은 조종간의 떨림이 점차 잦아 들었을 때야 나는 간신히 왼손으로 손수건을 꺼내 고글을 닦을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정신을 차린 내 귀로 온갖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차​차​차​차​창​민​경​!​]​
  [괜찮은거야?!]
  [부기사단장님!]
  [서..선배!]
  ……아니, 왜 당한건 난데 저쪽이 더 난리인거지? 편대망이 순식간에 비명으로 가득찬 덕분에 오히려 더 정신을 차릴 수 없게된 나는 아예 후두 마이크 송신 버튼을 눌렀다. 송신하는 동안은 수신한 내용을 들을 수 없으니까. 당장 조종할 때는 조금 방해가 되겠지만, 지금은 그렇게라도 해놓는게 내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렇게 잠깐의 여유를 얻은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지금 도데체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내야만 하니까. 블랙캣 전투기가 천천히 선회함과 동시에 나는 점점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검은 연기가 함미쪽에서 뿜어져나오고 있었다. 함미의 강철 장갑은 처참한 몰골로 우그러져 있었고, 그 위쪽의 나무 갑판은 사방으로 파편을 날린 채 부서져있었다. 시뻘건 화염이 혀를 낼름거리며 나무 비행 갑판을 태워가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디케이터는 천천히 함미부터 주저앉기 시작했다. 주디케이터를 중심으로 시계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던 나의 옆으로 어느새 나탈리가 다가왔다. 나를 바라본 나탈리는 헬멧을 툭툭 치면서 뭐라고 중얼거렸다. 응? ……아, 무전. 아직도 누르고 있다는 것을 깜박했군.
  [……켜라니까?]
  “미안. 지금이야 손 뗐다.”
  너희들이 워낙 시끄러우니까 어쩔 수가 있어야지.
  “무슨 일이야?”
  [주디케이터 입니다, 부기사단장님.]
  주디케이터의 임시 함장을 맡고있는 부함장이 내게 무전을 보냈다. 이름도, 얼굴도 잘 기억이 안나지만 그의 목소리는 지금 같은 비상상황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침착했다.
  [함미에 어뢰가 명중했습니다. 아무래도 적 잠수함이 근처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알리크론과 딥블루, 캐롤은 구조 작업을 마무리 하고 즉시 복귀하겠다고 했고, 샌드가 화재 진압 작업을 돕고 있지만 보일러실이 피격되어 별로 상황이 좋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애시당초 자력 운행도 이제는 불가능하고 말이지. 후소 제국의 어뢰는 토피도 쥬스 만드는데나 쓸모 있는 에르데 제국의 어뢰에 비하면 날카로운 장창과 같은 존재다. 그런 무시무시한 물건이 함미를 직격했다면, 스크류축도 박살났다고 생각하는게 맞겠지. 거기다 안그래도 좁은 비행 갑판은 더더욱 좁아져버렸다. 지금 저상태로는 착륙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우리는 당장 착륙을 해야만 하고.
  [페이지다. 현장 수습은 내가 할테니 소령은 지금 즉시 해병대가 상륙한 비행장으로 직행하도록.]
  대령님, 거기 활주로 짧아서 착륙이 안될지도 모르겠는데요?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다른 옵션이 전혀 없다. 당장 남아있는 연료도 전혀 없고 말이다.
  [해병대 쪽에는 내가 연락해놓겠다. 별로 연료도 없을테니 지금 가라. 여기는 내가 맡겠다.]
  페이지 대령은 강렬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대령님의 말씀을 들으며 나는 가볍게 알았다고 답신한 다음 지체하지 않고 바로 기수를 과나카날로 돌렸다. 지금은 저 호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낫다. 이제 남은 연료는 3%. 몇분만 지나면 엔진이 꺼져버릴거다. 지금은 살아남는게 중요하다.
 
  살아남아야지만, 계속해서 싸워나갈 수 있을테니까.
 

댓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