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rtie 023.5 - 크리스마스 특별 단편 - 토피도 쥬스! Part 1
** 본편은 7월 초의 Sortie 023의 내용과는 멀~리 떨어져 있으며, 본편에 아직 등장하지 않은 등장인물들 몇몇이 나옵니다.
1
에르데 제국은 종교가 없다. 아니, 정확하게는 국교가 없다. 개개인이 믿는 종교는 자유이지만, 1200년 전의 ‘위대한 분리 (Great Schism)’ 이후, 종교와 정치는 갈라섰고, 그 세력과 위상과 권력과 재력 또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래서 에르데 제국에는 국교가 없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귀족층들도 종교와는 관계 없는 삶을 산다. 그래서 나도 우리 필그림들의 종교 행사일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깜빡 잊어버리고 있었다.
나탈리가 내게 선물을 건내기 전까지는.
“뭐야, 나탈리? 다른 애들 몰래 만나자는건?”
“창민아, 너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
오늘? 글쎄…….? 오늘 무슨 날인가? 아, 설마……? 그럴리는 없겠지만….. 설마 그건 아니겠지. 아무리 내가 날짜 감각이 없다고 해도 그런걸 까먹지는 않았을테니까.
“……너 생일?”
“아니거든. 설마, 내 생일도 모르는건 아니겠지?”
설마 내가 나탈리 네 생일을 까먹겠냐…… 대독 전승일이잖….. 아, 지금 12월이지.
“미안.”
“알면 됐고, 12월에 뭐 중요한 날 있지 않아?”
“그래?”
그런가? 언제부터 그랬지? 음……. 아?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지만, 이건 틀림 없어!
“너 혹시…… 그날이지?”
“응! 맞아! 기억하고 있었네?”
“그럼. 어떻게 잊을 수 있어. 네 그날을.”
나탈리가 한달에 한번 신경질적으로 변하는 그날을 잊는다는건 내게 미친짓과 동의어다. 아무리 내게 있어서는 한없이 물러지는 나탈리라고 해도 그 기간만큼은 무시무시하게 변하니까.
“헤에~ 그럼 내 것도 준비 했어?”
“네 것?”
그날인데 왜 내가 네 것을 준비하는건데? 아니, 애시당초 ‘내 것’이 뭔데?
“응? 잠깐, 너….. 안다며?”
“아니, 네가 말한건 네가 한달에 한번씩 소녀에서 마녀로 변하는 그……?!!”
“시시시시시끄러!”
짝! 쓰라린 감촉과 슬픔이 동시에 밀려온다. 화끈거리는 볼은 얼얼하고, 내 눈 앞에 서서 양 손을 허리에 올린채 노려보는 나탈리는 좀 무섭다.
……나탈리는 평소에는 헤헤거리면서 물러터져보일지 몰라도, 또 화나면 무서운 아이 입니다…….
“수…숙녀 앞에서 그런 부끄러운 말을 서슴없이 하는 바보가 어디에 있어?!”
“미….미안…….”
아무래도 너랑은 너무 오래 있다보니까 여자인 것을 까먹는다니까. 나탈리가 여자라고? 푸훗. 나탈리가 귀엽고 깜찍하고 착하다는건 인정하지만, 내게 있어서는 칭얼대는 여동생,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렇겠지? 아마?
그건 그렇고, 나탈리의 생일도, 나탈리의 ‘그 날(…)’도 아니라면…… 도데체 뭔데?
“하아……”
내 어리둥절한 표정에 나탈리가 이마를 짚고 깊은 한숨을 쉰다. 그렇게 심각하고 중요한 일인가? 아직도 영문을 몰라 헤메는 내 앞으로 나탈리가 손을 내밀었다.
“자!”
손 위에 놓여져 있는건 붉은색 포장지로 싸여지고 초록색 리본이 묶여 있는 작은 상자. 음…… 웬지 모르게 익숙한데 말이지…….? 아, 설마…….
“크리스마스?”
“뭐야~ 엄청 오래걸리네, 알아채는데! 어떻게 12월의 그날을 그….그런 식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거야? 애시당초 12월에 다른 기념일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아니, 그렇다고 해도 말이지……. 요즘 바빴으니까…… 거기다 이런저런 일들이 있어서 너한테 계속 초점을 맞추다 보니까 그렇게 된거라고.”
“그….그래? 계…계속 나를 생각해준거야?”
얼굴이 빨개면서 왠지 말을 흐리는 나탈리……. 뭔지는 모르겠지만 웬지 모르게 횡설수설 변명이 통한 모양이다. 뭐, 나야 다행이지만.
“그런데 웬일이야, 네가 크리스마스를 다 챙기고?”
“피~ 우리 홈아일랜드에 있을 때도 기념일은 다 내가 챙겼잖아? 발렌타인 데이나, 크리스마스나, 새해나. 누가 들으면 내가 이런거 처음하는줄 알겠어?”
아니, 그런 말은 아니고……
“이런 전쟁통에 언제 그런 생각을 했냐, 그 말이지.”
“내가 아무리 바빠서 정신머리가 없어도 창민이 네게 줄 선물 정도는 까먹지 않고 잘 기억하고 있다고? 헤헷!”
……그럴 정신 있으면 그 시간에 정비나 좀 해둬……
달그락
“응?”
“누구 있….는건 아니겠지. 설마.”
뭔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와 나탈리는 간단하게 무시했다. 그냥 야생동물인 줄 알았으니까. 과나카날이라는 섬 자체가 워낙 오지이고, 열대 지방에 위치한 덕분에 온간 희귀종들이 득실거려서 가끔씩 부대 내로 놀러오는건 이제 신기하지도 않다. 가끔씩 침낭에 기어들어오는 놈들 빼고.
뭐, 결론부터 말하자면 신경 썼어야 했다…… 누가 알았냐? 그 작은 무신경이 대재앙을 일으킬줄은 말이야!
……나도 이런건 정말 싫다고!
2
소문이란 참 쉽게 퍼진다. 한사람이 알게 되면 두사람이 되고, 그게 다시 네사람이 되고, 그게 다시 여덟사람이 되고…… 기하급수적으로 퍼지는게 소문이다. 그래서 소문은 초기 주동자를 잡아 단단히 입막음 시켜야지만 그 근원을 단절할 수 있다…..라면 얼마나 좋을까? 나와 나탈리가 같이 있던 숲 안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소문을 걷잡을 수 없이 퍼졌을 정도였다.
그것도 말도 안되는 소문으로.
“창~민~겨엉~”
“창민공?”
“주인님……”
조…좀비냐? 왜들 그렇게 흐느적 거리면서 내게 다가오는건데?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사냐 공주, 아일린 공주, 그리고 테스텔이였다. 왜, 왜, 왜? 뭐? 왜들 그렇게 내 이름을 부르는건데?
“다 들었어요…..창민경……”
뭘?
“소녀를 두고 프로필라이넨 대위와 결혼이라니….... 용서 못해요. 인정 못해요. 그 결혼 무효로 만들어버릴거에요.”
엥?
“주인님…… 저는 역시 그냥 갖고 노는 장난감에 불과했군요…… 아아……. 저는 나탈리 대위님이랑 사이즈도 비슷한데 왜…… 아, 하늘이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는 것입니까?”
얘는 또 뭐래……
……아니 그건 그렇고 지금 뭐라고?
“나탈리랑 나랑 결혼한다고?”
“흥! 시치미 떼지 마세요, 창민경. 이미 그 사건을 목격한 증인이 있으니까요.”
“헤헷. 죄송해요, 스승님. 슬쩍 봐버려서 말이지요?”
하…하나!!!!!! 너…..정말 이러기야?
“넌 도데체 뭘 본건데 이런 소문이 나는거야?”
“저는 사실을 그대~로 전했을 뿐이랍니다☆”
말 끝마다 별표 붙이지 말고 이야기하란말이야, 이자식아!!! 어이없는 말에 당황한 나는 그대로 하나 녀석에게 다가가, 두 볼을 잡고 옆으로 쭈욱 늘렸다.
“으갸갸갹?”
“도데체 무슨 소문을 부대내에 내고 다니는거야? 나 네 상관이자 스승이거든? 몸과 마음을 바쳐서 섬기겠다면서?”
“그…그렇게 해드릴까요?”
아니.
“거봐요! 어차피 스승님은 제 몸도, 마음도 거부하잖아요~ 그래서 저는 제가 이 두눈으로 직접 본, 뜨거운 밀회의 현장을 공주 전하들께 그대로 전해드린 것 뿐이랍니다☆ 절대, 절대로 제가 아니라 나탈리 대위님을 선택한게 화가나서 그런게 아니에요?”
“어이, 하나 중위. 내가 본처인거 알았으면 좀 옆으로 빠지지? 너무 나서지 말고?”
“저…언니……”
“언제부터 내게 네 언니야?”
“오늘부터요. 저, 세컨드도 괜찮으니까☆”
“창민이가 공공재야?! 공유하게? 절대, 절~대 안돼!”
뭔가 골치아픈 일이 생기는 것 같다. 특히 이녀석을 만난 다음부터 말이야…… 하나 녀석, 실력은 좋은데 성격은 조금 이상한데로 꼬였단 말이야…… 그때 그냥 받아주지 말고 내칠 걸 그랬어.
그렇게 한참 생각하고 있는 와중에 내 옆으로 다가온 사냐 공주가 쿡쿡, 옆구리를 찔렀다.
“그래서, 창민경 장가가는거에요?”
“안가!”
“그래요, 안가는게 아니라 못가는거겠죠. 절대 못가요. 내가 창민경을 어떻게 키워왔는데요, 이렇게는 뭇주지요, 아무렴.”
너는 또 뭔소리야……
“맞아요. 창민공의 베필이 되려면 이 아일린 정도의 미모와 재력과 권력과 실력은 갖춰야하지 않겠어요? 호홋, 소녀가 아니라면 누가 창민공의 명성에 어울릴 수 있겠어요?”
“언니, 좀 빠지지?”
“흥! 네가 창민공께 한게 뭐가 있다고?”
“난 창민경 직속 부하잖아!”
“너는 일개 기사단원이지만, 나는 창민공 휘하의 기사단장이거든!”
“그래봤자 높은데서 폭탄이나 떨구는 겁쟁이들 주제에!”
“하라는 호위는 안하고 적기들만 격추하려드는 이 전투광들이!”
얘네는 또 뭐래…… 아아…… 정말…… 내가 뭔 죄를 지었다고 지금 이 난리가 펼쳐지는거야……
꾸욱 꾸욱
“주인님~ 저는 이렇게 버려지는건가요~ 두분 신혼여행 갈때 허드렛일이라도 담당할테니 같이 끼워서 가면 안될까요~”
아!!!! 좀!!!! 내 말 좀 들어라, 이 인간들아!
“……저희 인간 아니에요.”
어쨌건, 닥치고 들어.
“”크리스마스요?””
무슨 노리거 한 것 처럼 한목소리로 합창하는 네사람, 그러니까 사냐 공주, 아일린 공주, 하나, 그리고 테스텔. 아무래도 이 넷에게는 조금 생소한 개념이겠지, 종교 기념일이라는 것은. 사실 이제는 종교적이기보다는 자본주의적 성격이 더 강한 것이기는 하지만.
“호오…… 그런 것도 있군요.”
“신기하네요. 그래서 나탈리 대위님이 주인님께 선물을 주신건가요?”
테스텔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프러포즈 같은거 아니다. 다들 좀 멋대로 착각하지 말라고.”
“에에……”
“특히 하나 너, 자꾸 헛소문 내고 다니면 확 다른 부대로 보내버린다.”
“그…그건 좀 너무한거 아닌가요…….?”
“보내주랴?”
“아…아니에요,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 구할 때도 별 붙이는 이유는 또 뭐야?
“창민경, 그러면 이 크리스마스라는 종교적인 휴일의 관습 중 하나가 선물을 주고 받는다는 건가요?”
“그….그렇지?”
굳이 말하자면 산타가 주는 거겠지만, 아무래도 우리 나이에는 산타를 믿지 않겠지.
“산타? 그건 또 뭐야, 나탈리?”
“아, 산타라고, 빨간 옷을 입은 뚱뚱한 할아버지가 있어. 크리스마스 날 밤에 착한 아이들에게는 선물을 주는 할아버지야.”
“우와, 정말 있는거야?”
“그럼! 내가 여기 와서도 지구에서까지 날아와서 내게 선물을 주셨는걸!”
……그 선물들, 내가 준거라고 말하면 혼나겠군. 교관들 몰래 여군 기숙사 안에 들어가서 선물 놓고 나오는게 쉬운일은 아니었지만…… 보람은 있었지. 나탈리가 ‘필요한데……’라거나 ‘있으면 좋겠다’라고 말한 물건들을 어찌어찌 구해서 선물로 줬으니까.
그런데 나탈리, 너 정말 산타를 아직도 믿고 있었냐?
“그럼 산타는 다 할아버지야?”
“아니! 우리도 산타가 될 수 있는걸. 산타걸 복장을 입으면 되니까.”
야, 잠깐만, 너 지금 무슨 소리를…..?
늦었다. 이미 사냐 공주를 비롯한 네명의 눈가에 불이 켜져버렸어!
“프로필라이넨 대위, 그 산타걸이라는거, 우리도 해볼 수 있을까요?”
“응, 응! 나탈리, 부탁할께! 알려줘!”
“대…대위님! 저도요☆”
“저저저저저저기…… 신분이 상관 없다면 저도……”
……아니, 그러니까 왜? 왠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산타라는 말에 확 불이 붙으셨다.
“창민경에게 선물을 줄 수 있는 권리가 생기니까요!”
“……그런 시시한 이유 같고 죽을동 살동 매달리는거 아니다……”
“시시하다니요! 저희에게는 얼마나 중요한 일이라고요!”
……그런거 필요 없다니까……라는 말을 해봤자 듣지 않는 네사람. 왜 나탈리에게는 받으면서 자기들에게는 받지 않느냐는 논리다. 그리고 그 이유는 간단. 나탈리는 지구인이지만, 너희는 아니잖아?! 거기다 지금은 전시라고? 공주들에 귀족들이 그러고 놀고 있으면 안돼죠!
“그…그럼 귀족이 아닌 저는 상관 없는건가요?”
“아니. 너는 내가 주인님이라며? 주인의 명령으로 금지야!”
“네? 네에? 히잉……”
뭔가 반갑게 달려들다 내 말에 격침되어버린 테스텔. 조금 엄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 선물 한번 주고 받는건 얼마나 번거운 일인지 다들 모른다니까……
“그…그러면! 그러면 오늘 크리스마스니까, 기념으로 다 같이 파티를 하기로 해요!”
“오, 그거 나이스 아이디어! 창민공, 그정도는 괜찮죠?”
“파티☆ 파티☆”
……이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싶어 그냥 허락해버렸다. 저렇게 신나하는 애들을 보고 뭐라고 계속 하기에도 그렇고, 나탈리도 나름 원하는 눈치고. 다른 사람들도 계속된 일상에 지쳐버렸을테니 약간의 변화도 필요할 것 같고.
거듭 얘기하지만, 저거 진작에 말렸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