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물, 이라는 단어가 있죠?”
쿄타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물.
평범해야할 테이블 게임에, 어느 순간부터 오컬트라는 요소가 들어가고.
그리고 기적과 같은 이야기가 펼쳐지기 시작하면서.
소이 ‘능력’이라고 가진 작사들을 두고 칭하는 말.
평소, 어딘가 얼빠지고, 어딘가 둔하더라도, 탁자에만 앉으면 그들은 흡사 악마와 같은 능력으로, 상대를 철저하게 유린한다. 그게 마물이다.
“다른 곳에서도 이와 비슷한 말들이 있어요. 우린 마물이라는 호칭대신 이렇게 칭했어요. ‘신의 아이(神童)’라고.”
쿄타로는 다 식어가는 커피를 마시며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유키토는, 바로 그 신의 아이들중 한명이었죠.”
“스가군. 오늘 만날 뵐 분은, 아주 유명하고 나이가 많은 기사분이니까. 예의를 잘 지켜야해.”
“응!”
아키라는 오늘 아침 만나서부터, 지금까지 몇 번이나 소년에게 주의를 줬다. 심지어 운전중인 지금까지도. 그가 이렇게 소년에게 주의를 주는 이유는 지금 보러가는 사람이 그 ‘나카무라’ 7단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단수가 높고, 원로급 되는 기사들이 그를 평하기를 윗사람에게 잘하고 싹싹한 사람.
그보다 단수가 낮고, 젊은 기사들이 그를 평하기를 오만하며, 실력보다는 처신으로 이 바닥에 버티는 사람.
이러한 평가를 봐서 알 듯, 아랫사람들에게 그리 좋은 선배는 아닌지라 후배들과의 사이는 나빴다.
특히 히카루와는 최악에 가까웠다.
히카루의 성격은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직선적이라고 할수 있다. 해야 할 말은 해야 하고, 부당한 요구에는 부당하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그 성격을 보며 화끈하다고 좋아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유통성이라던가 사회성이 전혀 없는 성격이었다. 특히 바둑 사회는 연차 사회이다. 실력뿐만 아니라 경력이 곧 그들의 계급이었다. 그런 사회에서 히카루의 성격은 환영받기 힘들었다.
더군다나 히카루의 출신이 불분명하다는 점이 문제였다. 분명 히카루의 솜씨는 확실하지만, 아무도 그가 어디서 바둑을 배웠고, 누구의 제자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부모마져도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향간에는 이미 은퇴한 프로기사라던가, 도박을 전문으로 하는 도박바둑사에게 전수 받았다던가, 수많은 떡밥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어쨌든 누구에게 사사 받고, 누구의 문하인지도 중요하게 여기는 나카무라 7단의 입장에서는 히카루는 말그대로 천출이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것처럼 보였고, 실제로 다른 기사들에게도 그런식으로 말했다.
이 소리를 들은 히카루는 비웃으며 자신만큼 전통 명문도 없을 거라고 말했지만, 어디까지나 다들 푸념정도로 듣고 넘겨 버렸다. 어쨌든 이런 이유로 나카무라 7단과 히카루의 관계는 최악에 가깝다. 그 히카루의 제자인 스가 쿄타로를 나카무라 가에 데려가는건 조금 위험할지 모르지만, 기회가 너무 좋았다.
지금껏 쿄타로는 바둑의 상대는 자신과 히카루였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바둑은 지도 바둑이었으며, 그가 두는 바둑도 어느 정도는 히카루와 아키라가 유도한 수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즉 쿄타로는 또래의 아이와 승부란 걸 해본 적이 없다.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두고, 자신의 판단에서만 이뤄지는 치열한 승부. 그 승부를 통해 쿄타로도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이다. 그 첫 승부의 상대가 바로 그 신동 나카무라 유키토다. 신동을 첫 상대로 두는게 조금 걱정이 되긴 하지만, 잘만 풀린다면 유키토는 쿄타로의 성장에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게 차로 얼마간 달리고 난뒤, 그들은 나카무라 가에 도착할수 있었다.
그또한 유명 기사답게, 거대한 일본식 저택에 살고 있었는데, 이런 저택은 TV나 고궁밖에 본적 없던 쿄타로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떡 하고 벌리고 있었다. 대문이 열리고, 집에서 일하는 듯한 가정부의 뒤를 따라 천천히 정원을 걷는다.
마치 대문 밖과 내부가 다른 세상인 듯, 고요하고 평온한 세상. 어디선가 흘러내리는 시냇물 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쿄타로는 여기저기를 살펴보다, 이윽고 한곳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정원에 심어진 거대한 복숭아 나무, 분홍빛 꽃이 활짝 핀 그 아래에, 쿄타로 또래만한 한 아이가 서 있었다.
그 아이는 화사한 벚꽃빛 기모노를 입고 있었다.
등까지 내려온 긴 흑발이 바람에 살짝 흩날리며 드러난 얼굴은, 쿄타로가 순간 흠칫 놀랄 만큼 예쁜 얼굴이었다. 얼굴선이 가늘고,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닌듯한 하얀 피부는 흡사 이 세상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줬다. 마치 금방이라도 사라질것만 같은 덧없어 보인다.
짙은 검은 눈동자는 복숭아 꽃을 보고 있는 듯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을 보고 있는 듯 싶었다. 언젠가, 아카리가 이런 이야기를 해준적이 있었다. 저 하늘 어딘가에는 복숭아 나무들로만 이뤄진 무릉도원이 있는데, 그곳에는 수많은 선녀들이 살고 있다고. 저 아이는 그 선녀들 중 하나 인걸까?
“스가군?”
“에?”
멍하니 그 아이를 쳐다보고 있던 소년을 청년이 부른다. 방금까지 같이 걸어오던 소년이 갑자기 안 따라오자, 아키라가 데리러 온 듯 싶었다.
“뭘 보고 있는거니?”
“그러니까, 저기-.”
“저기? 복숭아 나무 말이니?”
쿄타로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지만, 아키라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쿄타로가 다시 그쪽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어느새 그곳에 있던 아이가 사라진체 거대한 복숭아 나무만 존재하고 있었다.
“어, 방금전까지-.”
“스가 군, 사람을 기다리게 하는건 좋은 일이 아니야. 자, 가자. 나카무라 프로께서 기다리실테니.”
이번에는 쿄타로의 손까지 꼭 잡으며 앞으로 이끌고 갔다. 쿄타로는 마치 귀신에 홀린 느낌이었다. 그렇게 아키라의 손을 붙잡고, 쿄타로는 현관에 도달했다. 그리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가자, 남성용 기모노를 입은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
축 늘어진 턱살과, 툭 튀어나온 광대뼈가 인상적인 남자였다. 쿄타로는 언젠가 본 동화속에서 심술쟁이 영감이 떠올랐다.
“안녕하세요. 나카무라 프로.”
“오오, 이거야 미래의 혼인보께서 여기까지 오시다니, 가문의 영광이 따로없구만. 그래, 도우야 명인께서는 잘 지내신가?”
그는 마치 호인처럼 하하하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아키라에게 물었다. 아키라는 약간의 쓴 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예, 아버님께서는 여전히 잘 지내고 계십니다. 여기에 오기전에도 아버님께서 자신의 안부도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아, 그래? 그러한가. 하하하. 이거, 손님을 너무 밖에다 내세웠군. 안으로 들어오게.”
여전히 히카루에게는 관심도 주지 않은체 아키라에게 말하자, 그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돌려 쿄타로를 쳐다보았다.
“가자, 스가군.”
“....”
고개를 끄덕이며 쿄타로는 아키라의 뒤를 쫓아 나카무라 가에 들어섰다. 나카무라의 뒤를 따라 둘이 도착한곳은 거대한 다다미 방이었다. 거실만큼이나 넓은 방 한가운데는 바둑판이 놓여 있었다.
“자자, 이리 앉게. 유키토는 곧 올테니까.”
“아, 저기 나카무라 프로. 저기, 유키토군에게 지도하기 앞서 한가지 부탁 드릴게 있습니다.”
“응? 자네가? 자네 부탁이라면 뭐든지 들어줘야지. 그래, 뭔가.”
아키라는 살짝 머뭇거리다가 힐끔 쿄타로를 쳐다보다 결심 한 듯 입을 열었다.
“쟤 옆에 있는 아이는 스가 쿄타로군이라고 합니다. 스가군 인사드려.”
“아, 그러니까. 스, 스가 쿄타로입니다... 자, 잘부탁드립니다.”
왠지 모르게 주눅이 잔뜩 든 쿄타로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그에게 꾸벅 인사했다. 나카무라는 그동안 시선을 주지 않던 쿄타로에게 시선을 줬다.
스가 쿄타로. 실물을 본건 처음이지만 알고 있다. 그 신도우 놈이 건방지게 들인 내 제자. 그놈과 아키라가 친하다는 건 바둑계에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아마 그런 연유로 쿄타로도 아키라와 꽤 친밀한 것 같다. 그러니 자신에게 전화까지 해, 쿄타로를 유키토의 지도바둑에 대려와도 되냐고 부탁을 했겠지.
사실 그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아키라 뒤에는 도우야 명인이 존재한다. 지금 일본 바둑계를 은퇴한 상태라지만, 일본 최강이라는 호칭까지 사라진건 아니다. 그리고 예부터 도우야 가문은 바둑의 명가로 유명했다. 그 도우야 가문의 후계자의 부탁을 거절하는건 힘든 일이었다.
“이 아이도 유키토군과 같은 나이인데, 아직까지 또래 아이와 바둑을 둬본적이 없어서요. 부족하지만, 유키토군과 대국을 할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호오, 우리 유키토와 말인가?”
그는 쿄타로를 위에서 아래로 훑어봤다. 그 건방진 놈의 제자. 얼마나 대단한 놈인지 모르지만 아무리 봐도 유키토를 이길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뭐니뭐니 해도, 나카무라 유키토는 동세대의 모든 아이들중 천재중에 천재라고 할 수 있다.
히쭉-.
그는 웃음을 지었다. 뭔가 끈적 끈적한 웃음이었다.
“좋지. 우리 유키토도 또래의 친구가 없었으니까. 아마 좋은 친구가 되겠군. 스가군.”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드르르륵-.
문이 열리면서 벚꽃빛 기모노를 입은 미소녀가 들어왔다. 그 아이의 등장에 순간 쿄타로는 숨을 들어마셨다. 마치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닌 것 같은 가냘픈 아이. 아까 복숭아 나무 밑에 있던 아이였다.
“유키토 이리로, 인사드려라.”
“저는 나카무라 유키토라고 합니다. 고명하신 도우야 프로를 이렇게 뵈어 영광이옵니다.”
얼굴만큼이나, 고운 목소리로 그 아이는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로 말한다. 잠시 그 아이를 쳐다보던, 아키라는 익숙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아아, 반가워 유키토군. 나는 도우야 아키라라고 해. 그냥 도우야 씨라고 하면 될거야.”
청년의 말에 그 아이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걸로 대답을 대신 했다.
“그럼, 나카무라 프로, 유키토군의 지도대국을 시작하겠습니다.”
“아, 잠깐.”
살짝 제지한 뒤, 나카무라는 유키토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유키토. 저기 네 앞에 있는 아이는 스가 쿄타로군 이라고 신도우 군의 제자란다. 마침 너랑 동갑이기도 하니, 지도가 끝난다면, 한번 둬보렴. ‘진심’으로 말이지.”
“......”
유키토는 투명한 눈동자로 나카무라를 쳐다보더니,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었다.
지도 대국이 시작하자, 나카무라는 밖으로 나가고, 거대한 방안에는 세 사람만이 남았다.
아키라의 지도는 순조로웠고, 이윽고 자연스럽게 쿄타로와 유키토의 첫 대국이 시작되었다.
백은 유키토.
흑은 쿄타로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자마자, 쿄타로가 유키토에게 한 말은 이거였다.
“저기, 있잖아.”
“뭐죠?”
“너, 여자애....?”
여성용 기모노에, 누구보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그 아이는 분명 미소녀일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동안 표정 변화가 없던 유키토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저는 남자입니다.”
“에엑?!”
쿄타로는 깜짝 놀란 얼굴로 소년을 쳐다보았다.
쿄타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물.
평범해야할 테이블 게임에, 어느 순간부터 오컬트라는 요소가 들어가고.
그리고 기적과 같은 이야기가 펼쳐지기 시작하면서.
소이 ‘능력’이라고 가진 작사들을 두고 칭하는 말.
평소, 어딘가 얼빠지고, 어딘가 둔하더라도, 탁자에만 앉으면 그들은 흡사 악마와 같은 능력으로, 상대를 철저하게 유린한다. 그게 마물이다.
“다른 곳에서도 이와 비슷한 말들이 있어요. 우린 마물이라는 호칭대신 이렇게 칭했어요. ‘신의 아이(神童)’라고.”
쿄타로는 다 식어가는 커피를 마시며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유키토는, 바로 그 신의 아이들중 한명이었죠.”
제6국 회상 ~Alone~
“스가군. 오늘 만날 뵐 분은, 아주 유명하고 나이가 많은 기사분이니까. 예의를 잘 지켜야해.”
“응!”
아키라는 오늘 아침 만나서부터, 지금까지 몇 번이나 소년에게 주의를 줬다. 심지어 운전중인 지금까지도. 그가 이렇게 소년에게 주의를 주는 이유는 지금 보러가는 사람이 그 ‘나카무라’ 7단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단수가 높고, 원로급 되는 기사들이 그를 평하기를 윗사람에게 잘하고 싹싹한 사람.
그보다 단수가 낮고, 젊은 기사들이 그를 평하기를 오만하며, 실력보다는 처신으로 이 바닥에 버티는 사람.
이러한 평가를 봐서 알 듯, 아랫사람들에게 그리 좋은 선배는 아닌지라 후배들과의 사이는 나빴다.
특히 히카루와는 최악에 가까웠다.
히카루의 성격은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직선적이라고 할수 있다. 해야 할 말은 해야 하고, 부당한 요구에는 부당하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그 성격을 보며 화끈하다고 좋아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유통성이라던가 사회성이 전혀 없는 성격이었다. 특히 바둑 사회는 연차 사회이다. 실력뿐만 아니라 경력이 곧 그들의 계급이었다. 그런 사회에서 히카루의 성격은 환영받기 힘들었다.
더군다나 히카루의 출신이 불분명하다는 점이 문제였다. 분명 히카루의 솜씨는 확실하지만, 아무도 그가 어디서 바둑을 배웠고, 누구의 제자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부모마져도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향간에는 이미 은퇴한 프로기사라던가, 도박을 전문으로 하는 도박바둑사에게 전수 받았다던가, 수많은 떡밥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어쨌든 누구에게 사사 받고, 누구의 문하인지도 중요하게 여기는 나카무라 7단의 입장에서는 히카루는 말그대로 천출이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것처럼 보였고, 실제로 다른 기사들에게도 그런식으로 말했다.
이 소리를 들은 히카루는 비웃으며 자신만큼 전통 명문도 없을 거라고 말했지만, 어디까지나 다들 푸념정도로 듣고 넘겨 버렸다. 어쨌든 이런 이유로 나카무라 7단과 히카루의 관계는 최악에 가깝다. 그 히카루의 제자인 스가 쿄타로를 나카무라 가에 데려가는건 조금 위험할지 모르지만, 기회가 너무 좋았다.
지금껏 쿄타로는 바둑의 상대는 자신과 히카루였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바둑은 지도 바둑이었으며, 그가 두는 바둑도 어느 정도는 히카루와 아키라가 유도한 수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즉 쿄타로는 또래의 아이와 승부란 걸 해본 적이 없다.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두고, 자신의 판단에서만 이뤄지는 치열한 승부. 그 승부를 통해 쿄타로도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이다. 그 첫 승부의 상대가 바로 그 신동 나카무라 유키토다. 신동을 첫 상대로 두는게 조금 걱정이 되긴 하지만, 잘만 풀린다면 유키토는 쿄타로의 성장에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게 차로 얼마간 달리고 난뒤, 그들은 나카무라 가에 도착할수 있었다.
그또한 유명 기사답게, 거대한 일본식 저택에 살고 있었는데, 이런 저택은 TV나 고궁밖에 본적 없던 쿄타로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떡 하고 벌리고 있었다. 대문이 열리고, 집에서 일하는 듯한 가정부의 뒤를 따라 천천히 정원을 걷는다.
마치 대문 밖과 내부가 다른 세상인 듯, 고요하고 평온한 세상. 어디선가 흘러내리는 시냇물 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쿄타로는 여기저기를 살펴보다, 이윽고 한곳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정원에 심어진 거대한 복숭아 나무, 분홍빛 꽃이 활짝 핀 그 아래에, 쿄타로 또래만한 한 아이가 서 있었다.
그 아이는 화사한 벚꽃빛 기모노를 입고 있었다.
등까지 내려온 긴 흑발이 바람에 살짝 흩날리며 드러난 얼굴은, 쿄타로가 순간 흠칫 놀랄 만큼 예쁜 얼굴이었다. 얼굴선이 가늘고,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닌듯한 하얀 피부는 흡사 이 세상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줬다. 마치 금방이라도 사라질것만 같은 덧없어 보인다.
짙은 검은 눈동자는 복숭아 꽃을 보고 있는 듯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을 보고 있는 듯 싶었다. 언젠가, 아카리가 이런 이야기를 해준적이 있었다. 저 하늘 어딘가에는 복숭아 나무들로만 이뤄진 무릉도원이 있는데, 그곳에는 수많은 선녀들이 살고 있다고. 저 아이는 그 선녀들 중 하나 인걸까?
“스가군?”
“에?”
멍하니 그 아이를 쳐다보고 있던 소년을 청년이 부른다. 방금까지 같이 걸어오던 소년이 갑자기 안 따라오자, 아키라가 데리러 온 듯 싶었다.
“뭘 보고 있는거니?”
“그러니까, 저기-.”
“저기? 복숭아 나무 말이니?”
쿄타로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지만, 아키라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쿄타로가 다시 그쪽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어느새 그곳에 있던 아이가 사라진체 거대한 복숭아 나무만 존재하고 있었다.
“어, 방금전까지-.”
“스가 군, 사람을 기다리게 하는건 좋은 일이 아니야. 자, 가자. 나카무라 프로께서 기다리실테니.”
이번에는 쿄타로의 손까지 꼭 잡으며 앞으로 이끌고 갔다. 쿄타로는 마치 귀신에 홀린 느낌이었다. 그렇게 아키라의 손을 붙잡고, 쿄타로는 현관에 도달했다. 그리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가자, 남성용 기모노를 입은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
축 늘어진 턱살과, 툭 튀어나온 광대뼈가 인상적인 남자였다. 쿄타로는 언젠가 본 동화속에서 심술쟁이 영감이 떠올랐다.
“안녕하세요. 나카무라 프로.”
“오오, 이거야 미래의 혼인보께서 여기까지 오시다니, 가문의 영광이 따로없구만. 그래, 도우야 명인께서는 잘 지내신가?”
그는 마치 호인처럼 하하하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아키라에게 물었다. 아키라는 약간의 쓴 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예, 아버님께서는 여전히 잘 지내고 계십니다. 여기에 오기전에도 아버님께서 자신의 안부도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아, 그래? 그러한가. 하하하. 이거, 손님을 너무 밖에다 내세웠군. 안으로 들어오게.”
여전히 히카루에게는 관심도 주지 않은체 아키라에게 말하자, 그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돌려 쿄타로를 쳐다보았다.
“가자, 스가군.”
“....”
고개를 끄덕이며 쿄타로는 아키라의 뒤를 쫓아 나카무라 가에 들어섰다. 나카무라의 뒤를 따라 둘이 도착한곳은 거대한 다다미 방이었다. 거실만큼이나 넓은 방 한가운데는 바둑판이 놓여 있었다.
“자자, 이리 앉게. 유키토는 곧 올테니까.”
“아, 저기 나카무라 프로. 저기, 유키토군에게 지도하기 앞서 한가지 부탁 드릴게 있습니다.”
“응? 자네가? 자네 부탁이라면 뭐든지 들어줘야지. 그래, 뭔가.”
아키라는 살짝 머뭇거리다가 힐끔 쿄타로를 쳐다보다 결심 한 듯 입을 열었다.
“쟤 옆에 있는 아이는 스가 쿄타로군이라고 합니다. 스가군 인사드려.”
“아, 그러니까. 스, 스가 쿄타로입니다... 자, 잘부탁드립니다.”
왠지 모르게 주눅이 잔뜩 든 쿄타로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그에게 꾸벅 인사했다. 나카무라는 그동안 시선을 주지 않던 쿄타로에게 시선을 줬다.
스가 쿄타로. 실물을 본건 처음이지만 알고 있다. 그 신도우 놈이 건방지게 들인 내 제자. 그놈과 아키라가 친하다는 건 바둑계에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아마 그런 연유로 쿄타로도 아키라와 꽤 친밀한 것 같다. 그러니 자신에게 전화까지 해, 쿄타로를 유키토의 지도바둑에 대려와도 되냐고 부탁을 했겠지.
사실 그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아키라 뒤에는 도우야 명인이 존재한다. 지금 일본 바둑계를 은퇴한 상태라지만, 일본 최강이라는 호칭까지 사라진건 아니다. 그리고 예부터 도우야 가문은 바둑의 명가로 유명했다. 그 도우야 가문의 후계자의 부탁을 거절하는건 힘든 일이었다.
“이 아이도 유키토군과 같은 나이인데, 아직까지 또래 아이와 바둑을 둬본적이 없어서요. 부족하지만, 유키토군과 대국을 할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호오, 우리 유키토와 말인가?”
그는 쿄타로를 위에서 아래로 훑어봤다. 그 건방진 놈의 제자. 얼마나 대단한 놈인지 모르지만 아무리 봐도 유키토를 이길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뭐니뭐니 해도, 나카무라 유키토는 동세대의 모든 아이들중 천재중에 천재라고 할 수 있다.
히쭉-.
그는 웃음을 지었다. 뭔가 끈적 끈적한 웃음이었다.
“좋지. 우리 유키토도 또래의 친구가 없었으니까. 아마 좋은 친구가 되겠군. 스가군.”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드르르륵-.
문이 열리면서 벚꽃빛 기모노를 입은 미소녀가 들어왔다. 그 아이의 등장에 순간 쿄타로는 숨을 들어마셨다. 마치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닌 것 같은 가냘픈 아이. 아까 복숭아 나무 밑에 있던 아이였다.
“유키토 이리로, 인사드려라.”
“저는 나카무라 유키토라고 합니다. 고명하신 도우야 프로를 이렇게 뵈어 영광이옵니다.”
얼굴만큼이나, 고운 목소리로 그 아이는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로 말한다. 잠시 그 아이를 쳐다보던, 아키라는 익숙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아아, 반가워 유키토군. 나는 도우야 아키라라고 해. 그냥 도우야 씨라고 하면 될거야.”
청년의 말에 그 아이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걸로 대답을 대신 했다.
“그럼, 나카무라 프로, 유키토군의 지도대국을 시작하겠습니다.”
“아, 잠깐.”
살짝 제지한 뒤, 나카무라는 유키토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유키토. 저기 네 앞에 있는 아이는 스가 쿄타로군 이라고 신도우 군의 제자란다. 마침 너랑 동갑이기도 하니, 지도가 끝난다면, 한번 둬보렴. ‘진심’으로 말이지.”
“......”
유키토는 투명한 눈동자로 나카무라를 쳐다보더니,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었다.
지도 대국이 시작하자, 나카무라는 밖으로 나가고, 거대한 방안에는 세 사람만이 남았다.
아키라의 지도는 순조로웠고, 이윽고 자연스럽게 쿄타로와 유키토의 첫 대국이 시작되었다.
백은 유키토.
흑은 쿄타로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자마자, 쿄타로가 유키토에게 한 말은 이거였다.
“저기, 있잖아.”
“뭐죠?”
“너, 여자애....?”
여성용 기모노에, 누구보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그 아이는 분명 미소녀일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동안 표정 변화가 없던 유키토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저는 남자입니다.”
“에엑?!”
쿄타로는 깜짝 놀란 얼굴로 소년을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