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국 회상 ~Al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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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그게 제 인생에서 경험한 두 번째 큰 반전이었어요.”
그가 제일 처음 겪은 첫 번째 반전은 단순한 백수 형 인 줄 알았던 신도우 히카루가 알고 보니, 국내 바둑계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알려진 탑 프로라는 점이었다.
“더 놀라운 점은 뭔지 아세요?”
쿄타로의 물음에, 키요스미 부원들은 고개를 설래 설래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쿄타로는 지갑 주머니속에 고이 간직한 사진 두장을 꺼내들었다.
한 장은 분홍색 여성용 기모노를 입고있는 흑발의 미소녀와 어린 금발 소년이 찍혀 있는 사진이었다.
“에엑?! 이, 이 아이 나, 남자였어?!”
이 사진을 본 기억이 있던 사키가 깜짝 놀랐다. 어린 시절 쿄타로가 고향에 잠깐 돌아왔을 무렵 도쿄에서 새로 사귄 친구라고 보여줬을때는, 영낙없는 여자 아이라고 생각해서 한참을 우울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남자 아이란다. 사키가 놀랄 만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장은 지금만큼이나 커다랗게 자란 쿄타로와 그보다 머리 하나정도 작은 긴 흑발의 가련한 미소녀가 찍혀 있었다. 그 미소녀는 마치 인형과 같이 무표정한 얼굴로 화사한 여성용 기모노를 입고 있었다.
“.....이 녀석은 2차 성징을 겪고도, 더 예뻐졌다는 점이죠.”
“.....”
순간 키요스미 전원은 할말을 잊어버렸다. 청초, 가련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미소녀가 사실은 남자랜다. 내심 SOA SOA 라고 외쳤지만, 사실이 변할리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여장을...?”
히사의 물음에 쿄타로가 머리를 긁적이었다.
“여장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녀석은 따로 여장을 한건 아니에요. 기모노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님께서 장난기가 많으셔서 입히셨던게, 지금까지 이어진거고. 이 모습도 대국이 아니면 잘 하지 않아요. 일종의 징크스 같은 거에요. 노도카의 에토펜이란거, 부장의 머리끈 같은.”
그 사진을 쳐다보던 쿄타로는 다시 지갑 주머니에 집어 넣으며 말을 이어갔다.
“대화가 샜네요. 그녀석과의 첫 대국은 철저한 제 패배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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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셨습니다.”
“.....”
졌다.
압도적인 패배였다. 대국 내내, 유키토에게 쫓기고 결국 박살났다. 이런 대국은 처음이었다.
지금껏 진적도 많았다. 당연했다. 탑 프로인 히카루나 아키라를 이길만한 실력을 쿄타로가 아직 갖출 리 없었다.
그때는 그래도 그걸 받아들이며 인정할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이건 뭐지?
뭔가 마음속에서 부글 부글 끓어오른다.
같은 또래이다.
같은 나이다.
최선을 다했다. 지금껏 배운 모든걸 다 쏟아 부었다. 그런데도 졌다.
어째서? 어째서?
어....?
‘나, 울고 있어?’
눈가에서 점점 흘러내리고 있는 이건 분명 눈물이었다. 기껏해야 바둑 한판 졌을뿐인데. 어째서?
그렇구나, 나, 지금 분하구나.
분하고, 분하구나. 따질곳도, 외칠곳도 없을만큼 철저하게 져서, 분한거구나.
“히...끅. 히끅....”
점점 목소리에 울음기가 더해져 간다. 눈물이 가득찬 흐릿한 눈동자에 유키토가 잡힌다.
소년은 자신의 울음소리에 힐끔 쳐다보더니, 이내 가치가 없다는 듯 자리에서 자리에서 일어나 도도하게 걸어간다.
이대로 가버린다면.
저대로 가버린다면.
저녀석은 나를 잊고 말거다. 그저 그랬던 상대로. 그건 싫다. 왜냐면, 언젠가, 언젠가는 내가 저녀석을 이길테니까, 그러니까 나를 잊지 말아줬으면 한다. 그래서- 소년은.
“거기서!!!!”
“....?”
무표정한 얼굴로 쿄타로를 쳐다본다. 마치 가치가 없다는 듯 한 표정이다.
“내 이름은, 스가 쿄타로야.”
“당신의 이름같은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만?”
“아니, 너에게는 정식으로 날 소개한적 없으니까.”
그리고는 울먹이는 얼굴을 소매로 박박 닦아냈다. 새빨게진 눈동자로 억지로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나, 신도우 선생님에게 바둑을 배우고 있어. 오늘은 이렇게 졌지만, 이걸로 끝나지 않아. 언젠가, 언젠가는 너를 이길거야!!!”
“.....”
유키토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쿄타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말했다.
“......할수 있으면 해보세요. 하지만 당신이 저에게 다가왔다고 생각한 순간, 저는 이미 한참을 앞서 나가고 있을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잡을수 있다면, 기대해보죠. 스가군.”
그리고 뒤도 안돌아보고 그대로 대국실을 나갔다.
소년은 울음을 터트리며 아키라에게 안겼다.
“우아아아아아앙!! 도우야씨, 도우야씨 저, 저, 많이 가르쳐주세요. 저..저...이기고 싶어요.”
쿄타로를 살며시 안아주며, 아키라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신도우 히카루가 급속도로 성장할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스승뿐만 아니라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라는 라이벌이 있었기 때문에 신도우 히카루는 한순간에 달려올수 있었다.
이 아이에게도 어린 시절의 도우야같은 라이벌이 필요 했다. 그게 바로 나카무라 유키토.
처음에는 유키토와의 대국을 통해 마음이 꺾여 이대로 바둑을 포기하는게 아닐까 라는 고민도 했지만, 자신이 아는 쿄타로는 오히려 고난이 있으면 넘어가려는 아이였다. 실제로도 지금 쿄타로는 유키토에게 도망을 친게 아니라 맞서기로 결심했다.
‘정말, 너는 신도우랑 닮았구나.’
그때 신도우도 이랬지.
이제 이 아이는 강해질거다.
목표가 정해지고, 그 목표를 넘기 위해 어느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을 할테니까.
어떻게 보면 그게 프로 바둑 기사 스가 쿄타로의 첫 시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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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제 나이 11살때의 일이었어요. 그 이후로 저는 정말,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요. 아카리 누나에게 놀러가는것도 잊을 정도로 바둑에 몰두한적도 있어요. 아마 그 무렵이었을 거에요. 지금껏 한번도 제 또래의 아이들을 소개 시켜주지 않던 선생님과 도우야씨가 한명씩 제또래의 아이들을 소개시키기 시작했어요.”
모두 쿄타로보다 먼저 시작하고, 다들 어느 정도 실력을 가진 아이들이었다. 그런 아이들과 바둑을 두면서 쿄타로는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면서 점점 성장 해가고 있었다.
아키라의 연줄로, 유키토와의 승부도 계속 이어졌다.
처음에는 일방적으로 유키토에게 패배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일방적인 패배가 사라져가더니, 가끔씩은 유키토를 이기기도 했다. 처음으로 유키토를 이겼을 때, 쿄타로는 어느 누구보다 즐겁고 기뻤다.
“정말, 즐거웠어요.”
처음으로 알아버린 승리의 맛.
처음으로 알게 된 패배의 아픔.
그리고 자신의 한계를 알게 되었을때의 분함.
그 한계를 뛰어넘었을 때 오게 된 희열.
어느새 쿄타로는 승부를 즐기고 있었다.
“여러분에게 마작은 무슨 의미인가요?”
천천히 쿄타로가 고개를 들며, 그녀들에게 물었다. 그 물음에 순간 그녀들은 뭐가 해야할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쿄타로가 천천히 그녀들을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아마 부장에게 마작은 꿈이겠죠.”
인터하이라는 거대한 꿈.
“소메야 선배에게 마작은 유지려나요?”
좋아하고, 좋아하던 할아버지가 알려준 놀이, 그게 마작이었다.
“유키랑, 노도카는 아마 친구.”
존경한 선배와의 헤어짐.
친한 친구들과의 헤어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마작을 통해서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사키 너에게는 가족이지.”
좋아한 언니와 싸우게 된것도 마작, 그리고 화해가 된 것도 마작.
“여러분들은 그것들을 버팀목 삼아서, 그리고 앞으로 나아갔어요. 어떤 일이 있어도, 여러분들은 그것을 잊지 않았어요. 그건 제가 잘 알아요. 왜냐면 여러분들을 가장 가까운곳에서 지켜본게 바로 저니까요.”
한숨을 쉬듯 그가 말했다.
“그럼 , 저에게는 바둑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녀들에게 묻고 있지만, 그녀들의 답을 기대하는건 아니었다. 마치 자문을 하듯 그는 묻고 있었다.
“.....그때의 저는, 아니 지금의 저도 그 의미를 모르겠어요. 이기는게 너무도 즐거워서, 알아가는게 너무도 즐거워서, 바둑을 시작한 의미따위는 잊어가고 있었어요. 그래도 괜찮았어요. 의미따위 몰라도,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의미를 잃어버린 순간, 자신의 모든것들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것 없는 사상 누각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자신은 결국 한순간에 무너져 이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빛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깜깜한 미궁속에 그대로 갇혀져, 움직이지도 못한체, 그저 앉아만 있었다.
“징조는 그전부터 보였어요. 다만 제가 느끼지 못했을 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