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그 여간부, 노브라
2화. 그 여간부, 성희롱
후기
1화 그 여간부, 노브라 (2)
“누가 여긴데 어디는 나야?”
차에 들어간 순간부터 끊긴 필름.
푹신하다 못해 안락한 리무진 소파에 앉았다가 그만 잠이 들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디가 여기고 누가 난가?”
흐읍.
기지개해도 꽉 끼는 정장에 답답함이 남는다.
호란은 혀가 꼬이고 몸이 찌뿌둥하니 정신도 차릴 겸 손바닥으로 세게 뺨을 때렸다.
“여기는 어디고 나는 누구냐고 물어야지.”
익숙한 중저음의 목소리.
호란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텅텅 빈 강당. 가운데에 자신이 앉아 있는 의자 하나. 앞에 놓인 테이블 하나. 맞은편에는 검은 장막으로 가려진 무대.
꽤나 작위적인 배치다.
“이 세상은 썩었도다!”
고전적이지만 그만큼 친숙한 일갈.
호란은 아마 천막 뒤에서 나는 소리이리라 짐작했다.
“썩어버린 세상을 뒤엎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데 자네의 힘을 빌려주지 않겠는가?”
아무튼, 술기운에라도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니다.
말 그대로 흑막 뒤에 숨은 남자의 연설에 호란은 아무 말이라도 꺼내서 대답했다.
“어…있잖아요. 아까 제가 펀치머신 갈길 때 오라지게 엿 같은 이 세상에 한 방 날려주겠다고 하기는 했지만요. 그 정도로 원한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의회민주주의도 존중하는데…”
“그래. 실은 우리도 그렇게까지 썩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고…”
천막이 열린다.
그리고 호란은 잠시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생산수단 독점과 상속을 통한 계급 고착화가 문제지.”
뭔지 모를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흑막 뒤에서 나온.
<대부>에서 알 파치노가 세례식 장면 때 속삭이듯이 말하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닳고 닳은 모습의 중년 남이 아니라 그저 한 마리 검은 고양이―이마에 Z자 흉터와 어울리지 않게 거창한 망토가 인상 깊은―였던 것이다.
“야옹아? 니가 말한 거니?”
“야옹이 아니다.”
“세상에나…”
“많이 놀랐나 보군.”
“오락실 주인아저씨가 아니네?”
“…많이 놀랐나 보군.”
검은 고양이는 속이 터진다는 듯 앞발을 들어 이마에 난 흉터를 문질렀다.
“오락실 측에는 내일 내가 배상을 할 테니 걱정 말게.”
“근데 야옹이가 말을 하네? 원래 야옹이가 말을 하는 동물이었나?”
이제야 반전스러워 보이는 연출을 넣은 보람이 있는 반응을 하는군.
검은 고양이는 노골적으로 한숨을 쉬고는 대꾸했다.
“원래 고양이들은 말을 할 수 있어. 단지 자네 인간들 앞에서만 하지 않을 뿐이야.”
“그래요? 걔네들이 뭐라 그러는데요?”
“가르쳐 줄 수 없어. 알게 되면 고양이들이 너 어디로 끌고 가거든.”
“…나 지금 이미 누가 끌고 온 거 아녔어요?”
이 해롱거리는 흐트러진 정장 차림의 처자가 진짜로 취한 거 맞나 검은 고양이는 잠깐 고개를 갸웃했다.
“잡담은 이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검은 고양이는 훌쩍 뛰어올라 테이블 위에 올라섰다.
“우선 내 소개부터 할까. 나는 지구거주외계난민협회 총통인 Z라고 하지.”
“X는 아니고요?”
“Z라니까.”
이 여자는 왜 이름에는 딴죽을 걸면서 외계인이라는 이야기에는 딴죽을 걸지 않니. 총통 Z는 심란했다.
“너는 왜 이름에는 딴죽을 걸면서 외계인이라는 이야기에는 딴죽을 걸지 않니.”
“외계인이에요?”
“그러면 외계난민협회 총통을 지구인이 할까.”
도무지 본론으로 들어가지를 못한다.
“집중. 우리 외계난민협회는 생산수단 독점을 타파하여 계급을 철폐하고 더 나은 지구문명건설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자본의 공유를 위해 다각도로 계획을 입안하던 중 새로운 기획안에서 일반지구인의 협조가 필요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자네의 이력서를 보고서 이렇게 면접을 보고 있는 거지.”
“이력서? 면접?”
“응. 외계인에게 우호적이면서도 우리 조직에 걸맞은 지구인을 찾기 위해서 취업정보 사이트를 장악하고 인터넷상에서 전달되는 이력서를 수집하고 있거든.”
“웅…잠깐만요. 외계인이시라고요?”
도로아미타불.
개인정보가 심각한 수준으로 유용되고 있는 현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깨닫지 못한 채 이미 건 딴죽을 또 거는 호란.
“잘 봐.”
촥.
방금까지 고양이로 보였던 총통 Z의 얼굴은 파열음과 함께 갈라지더니 그 안에서 연분홍빛의, 신선한 내장을 갓 내놓은 듯 보이는 촉수가 다방면으로 뿜어져 나왔다.
“어우야. 술 깨네. 총통님 쌩얼로 다니면 안 되겠네.”
“…미안해.”
총통 Z는 다시 온전한 고양이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뭐가 미안한진 모르겠는데 뭐가 됐든 막 미안해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경멸 어린 눈빛이었다.
“그래서. 외계인이 지구에 난민으로 와있고. 생산수단 독점한 자본가들 목을 다 따버리는데 나더러 도와주라 이거예요?”
“아니. 지구인에게 위해를 가할 일은 없다. 정반대지. 우리 외계난민협회는 지구에 존재하는 정부들 대다수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기술제휴에 힘을 쓰고 있으니까.”
“기술제휴?”
“그래. 지구권에서 상용되려면 몇 천 년은 걸릴 과학기술을 은밀히 전달하고 문명이 발전하도록 돕는 우호적 관계를 맺고 있지. 표창장 보여줄까?”
총통Z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막 사냥감으로 바퀴벌레를 잡아다가 주인에게 자랑하는 고양이의 얼굴을 하고선 공중에 화면을 띄워 호란에게 사진을 하나 보여주었다.
고양이와 대통령이 놀고 있는, 정치선전용으로 쓰면 딱 좋을 느낌의 스냅 샷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지만 아마 무슨 표창을 주거나 했던 때였나 보다.
“하지만요. 내가요. 기술제휴에 뭘 도와요? 차 나르나? 아니면 커피? 무슨 일 시키려고 날 취직시켜줘요?”
“그게…”
“그게…?”
짧은 침묵.
총통 Z는 고양이 특유의 입맛 다시는 표정을 짓고는 무척 어려운 이야기를 꺼낸다는 듯이 그렇잖아도 낮은 목소리를 더 낮게 낮추었다.
“정의의 로봇을 쓰러뜨리는 일.”
“…오?”
호란은 소박하게 감상을 말했다.
“멋진데요?”
“그렇지?”
무척 소박했다.
“걔, 세요?”
“코딱지만큼.”
그것이 시작이었다.
호란이 이 제애 그룹 지하노역장이나 진배없는 악의 조직에 가입하게 된 것은.
♥
“아하하. 아하하하. 코딱지? 코딱지?”
코딱지는 개뿔.
호란은 진지하게 총통Z의 비강구조가 내장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
적어도 전장 120m의 거대로봇을 코딱지만큼 세다고 말하려면 그 코딱지는 얼마나 커야 한단 말인가.
호란은 면접날 총통Z가 언급했던 정의의 로봇에 대한 평을 떠올리며 그 사기꾼 고양이와 눈앞에 마주한 육전기신 노스트라다와 유윈 공주와 국민연금과 어제 처음 사서 신었는데도 굽이 부러졌던 하이힐과 자신의 인생을 비롯한 이것저것을 저주했다.
도트라이저는 계획대로 훌륭하게 변태했다.
하지만 문제는 상대방인 저 노스트라다는 도트라이저따위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는 점이다.
“초온스럽게 생긴 주제에 힘만 무식하게 세가지고선!”
“절 부르신 것입니깐?”
“아니 그게 아니라…쟤, 쟤.”
호란은 심각하게 삐친 표정을 보인 게보그치 오움에게 어색히 한번 웃어주고는 앞을 보았다. 초온스럽게 생긴 주제에 힘만 무식하게 센 로봇이 덤벼들었기 때문이다.
하얀색을 기본 베이스로 분홍색 장갑이 덧붙여진―민망할 정도로 원색적인 컬러에다 여기저기 노란색 장식으로 포인트를 준 저 거대완구와 같은 로봇.
RPG 게임 보이드퀘스트의 보스처럼 도트 그래픽으로 레트로한 맛을 낸 변태수 도트라이저 정도로는 아무리 덧셈뺄셈을 해보아도 어찌 덤벼 볼 계산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펑!
한방에 심신상실 상태가 된 변태수.
“살려, 살려줘!”
전장 120m의 신화시대에나 존재했었을 법한 거인들의 싸움이지만 그 내용은 노스트라다의 변태수에 대한 일방의 린치에 불과하다.
노동여건도 문제다. 유윈 공주는 노스트라다의 조종실에서 편하게 싸움을 하고 있지만 세그니아 해적단 3인은 변태수의 머리 꼭대기에 부실건축으로 대충 설치한 듯이 달려있는 테라스 위에서 조종간을 붙잡고 안간힘을 쓰고 있지 않은가.
더욱이 변태수의 동력원은 생명체의 부정적인 감정을 매개 삼아 에너지가 증폭되는 27세대 동력장치 세지니움. 하지만 노스트라다는 그보다 훨씬 발전된 86세대 동력장치 엘라세지니움을 장착하고 있으니 출력 면에서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코딱지?! 코딱지!! 내가 살아남으면 총통Z 콧구멍에 손을 집어넣고 코딱지와 뇌를 뽑아버릴 테다!”
“다른 한쪽 콧구멍에는 제 주먹을 넣겠습니단!”
“전 입에 넣겠어욘!”
노스트라다의 정대만 3점 슛과 같이 아름다운 곡선의 호를 그리며 날아온 어퍼컷 한 방에 날아가는 도트라이저의 머리 위에서.
세그니아 팜므는. 호란은. 그의 동료들은.
절규했다.
“내가 왜―!!”
♥
“내가 왜요?”
그때도 분명 물어봤다.
면접을 보던 그때 그 순간, 술에 취해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와중에도 호란은 이 핵심적인 질문만은 놓치지 않았다.
총통Z 또한 당시 호란을 외계난민협회에 끌어들이기 위해 성실히 대답하려 애를 썼다.
“왜냐면 그 유윈 공주라는 외계인이 지구에 가지고 온 로봇 육전기신 노스트라다의 동력원이 어마어마한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이지. 그 로봇은 노스트 별을 수호하는 노스트 왕가의 보물이라 그 기술력이 비밀리에 감춰져 있었다. 만약 우리 외계난민협회가 노스트라다에 내장된 엘라세지니움의 일부만이라도 얻으면 지구 인류는 모든 에너지원 고민에서 벗어나 외우주 개척 또한…”
“아니 그런 사소한 문제를 묻는 게 아니라.”
이라크 전쟁을 비롯하여 인류의 오랜 역사 동안 골머리를 썩여 온 석유쟁탈전과 이에서 벗어나 은하계로 나아갈 수 있는 상황을 사소한 문제라 일축하는 호란의 패기에 총통Z는 일종의 감동마저 느꼈다.
“내가 왜. 가 아니라. 왜 내가. 왜 내가 그 로봇이랑 싸워야 하냐고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왜 내가.”
총통Z는 고양이 특유의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면서 눈앞의 이 가시내가 술에 취한 것이 맞는지 잠깐 의심을 해보았다.
“나 같은! 미녀가! 미모를 살리지 않고! 왜? 그죠. 왜 그럴까…왜 나 같은 미모의 소유자가 취직도 못 하고는…말하는 고양이한테 로봇이랑 싸우라는 말을 듣고…미모를 낭비할까…”
맞네. 많이 취했네. 만취했네.
유창하게 뭐라 뭐라 지껄이던 호란은 이내 말끝을 길게 늘인다.
총통Z는 한숨을 내쉬고는 설명을 이었다.
“우선은 지구 측에서는 노스트라다에 손을 대지 못해. 유윈 공주는 정식으로 망명을 신청한 상태고 그 대가로 지구에 위협이 닥쳐올 경우 노스트라다를 몰고 지구인을 돕기로 약조했거든.”
“그리고오…?”
“외계난민협회도 손을 대지 못하지. 노스트 왕가에게 도전장을 내미는 셈이니까.”
“그래서어…?”
“지구정부와 외계난민협회 둘 모두와 연관이 없는 제 3자가 온 은하에 악명 높은 우주해적 세그니아단의 두목 세그니아로 위장한 뒤 지구를 침략하면 지구정부와 외계난민협회 모두 책임 회피를 할 수 있는 게지.”
“그러니까아…?”
“자네가 우주해적 세그니아단의 두목 세그니아로 변장해주었으면 해. 펀치머신의 가죽마저 뚫어버리는 펀치를 가진 자네가.”
<꼐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