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헤르만(Herman) - 5
3시 30분. 남녀는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웨이트리스에게 메뉴판을 돌려준 뒤 꽃병을 사이에 두고 각자 다른 일을 했다. 아네모네가 타블렛을 들여다보는 동안 한센은 멍한 얼굴로 자신의 스쿠터를 바라보았다. 스쿠터의 앞뒤로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지나갔지만, 한센은 그들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할 게 생각나지 않으니 그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아네모네를 끌고 온 곳은 제1중앙시장. 다양한 계층의 고객이 찾아오는 일종의 명소였다. 스쿠터로 10분밖에 안 걸리는 이곳은 귀족과 평민들이 거리낌 없이 어울리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장소다. 그래서인지 오늘은 신분을 막론하고 날씨 좋은 주말을 만끽하기 위해 놀러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후덕한 귀부인과 고고한 영애, 자수성가한 부르주아의 일가, 한 푼 벌어보려고 찾아온 거지들까지도 모두 볼거리에 포함되었다.
너무 북적여서 식사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어떻게든 빈자리를 찾아내서 앉았다. 시장의 중심부인 ‘카이저린플라츠(Kaiserinplatz)’에 온 것 자체가 실수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네모네를 화나게 만든 이상, 입을 막기 위해선 어떤 짓이든 해야 한다고 한센은 생각했다.
멍하니 있던 것도 사실 얼마가 깨질까 속으로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빠가 한 말이 사실이었어요.”
맞은편에서 아네모네가 말을 걸어왔다. 알 수 없는 한숨을 내쉬며 기기의 전원을 껐다. 무슨 일이냐는 듯 한센이 바라보자 그녀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고개를 저었다.
“계약서의 내용 중에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어요. 모순은 기본에, 허점은 대놓고 드러나 있고요. 귀족들의 관례라 해도 이건 너무 쓸데없는 것 같아요.”
“깊이 생각할 필요 없다니까? ‘마음대로 하세요’라는 말을 돌려서 표현한 거라고 보면 돼.”
한센의 태도는 여전히 가벼웠다. 답답함에 분노를 표출해봤자 해결되는 일 없이 허공에 바스라지기만 할 뿐이었다. 이 일에 대한 그의 반응은 거의 체념에 가까웠다. ‘그 사람’의 의도를 알아내는데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단, 지금 있는 기회를 자기에게 최대한 이익이 오도록 적절히 활용하는 게 더 현명했다. 한센도 한때 의문을 갖긴 했지만, 이제는 스폰서의 의도가 자기와 같다는, 일방적인 전제까지 설정해둘 정도로 정신적인 여유가 생겼다.
시간이 지나면 너도 순응하겠지, 라고 생각하며 한센은 테이블 옆에 놓인 가판대에서 신문을 하나 집어 들었다.
사회면은 여전히 ‘검은 마도병기’라는 존재로 소란스러웠다.
“암기에만 치중하다 보니까 이렇게 된 것 같아요. 각 조항의 사실관계를 자세히 따지지 않은 게 이런 일로 발전할 줄이야. 슬슬 노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뜻일까요.”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아직 한참 젊은 주제에.”
피식 웃으며 한센은 신문지에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겨우 20살 산 거 가지고 노화 타령하기는. 한탄을 내뱉을 때 가끔씩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 매력적인 여동생이다. 큰 안경을 쓰고 있는데다 체격까지 작아서, 누구도 성인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어려 보였다.
메르겔이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넘겼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커져버리고 말았다.
“계속 웃으면 이 집에서 제일 비싼 걸 시켜버릴 거에요!”
발끈한 표정으로 아네모네가 협박을 가해왔다. 타블렛을 멋대로 쓴 대가로 한센이 밥값을 내는 것이니, 지갑 털리기 싫으면 우습게 받아들이지 말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외모나 체형 덕에 지금 아네모네의 모습은 투정을 부리는 아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알았다, 알았어. 장난도 마음대로 못 치게 하네.”
그래도 지갑 사정은 좋지 않았기에 한센은 얼른 들뜬 기분을 수습했다. 아네모네도 마찬가지로 화를 가라앉혔지만, 불만이 남아 있는지 투덜거리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나 참. 보안 문제나 계약서 건도 그렇고, 오빠는 자기 일에 너무 무관심한 것 같아요. 매사에 좀 더 진지하게 행동해주셨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나도 할 땐 하는 사람이야. 의미 없는 일엔 신경을 끌 뿐이지.”
그렇게 말하며 한센은 신문 한 장을 넘겼다. 검은 마도병기의 사진이라고 올라와 있는 걸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하지만 실루엣만 잡혔을 뿐, 이게 검은 마도병기인지 제국군의 ‘아르엘’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외형으로라도 판별해보기 위해 신문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거의 코를 파묻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음식 나오는 동안 뭔가 얘기라도 해주세요. 오빠만 아는 미스 힐스레스트에 대한 사실이라던가.”
한센을 가만히 두긴 싫었는지 아네모네가 운을 뗐다. 얼굴을 보여주길 바랐지만, 아쉽게도 신문이 내려오는 일은 없었다.
“특별히 알고 싶은 거라도 있어?”
나지막한 물음에 아네모네는 한숨을 내쉬고는, 테이블 위에 엎드리며 이렇게 말했다.
“오빠가 더 잘 알 거 아니에요. 그 사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 오빠하고만 대화하던걸요. 명색이 스폰서인데, 더러운 비밀 한두 개쯤은 있지 않겠어요?”
“……영화를 너무 많이 봤구나. 뭘 기대하고 있는 거야?”
“기대는 없어요. 오빠 말대로 프로젝트도 끝났으니까, 저도 한 번 아무렇게나 행동해볼까 싶어서.”
“애니(Annie)답지 않은 생각이네.”
부스럭, 하고 신문 한 면이 흔들렸다. 방해물이 사라지자 남녀의 시선이 서로에게 맞춰졌다. 위로를 요구하는 아네모네의 눈빛을 한센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미지수였다.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방금 전의 일이 아네모네를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었다. 스폰서의 약점을 잡는 것으로 일종의 보상을 받으려는 속셈일 것이다.
“의심쩍은 부분이 몇 군데 있긴 하지.”
포기해버린 의문점을 다시 끄집어내는 건 싫었지만, 알아서 갖고 놀라는 뜻으로 일단 한두 개 정도 던져주기로 했다. 강아지를 키우는 것도 아니고, 라고 생각하며 한센은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과는 어떻게 알게 됐더라.
“기사학교 졸업반에 있을 때였지, 아마.”
“네?”
정확히는 1년 전, 기사 후보생으로서 졸업시험을 무사히 넘겼을 때였다. 점수가 상위권이었던 덕에 작위 수여에 대한 걱정은 덜었지만, 졸업 이후의 진로는 확실하게 잡아놓지 못한 상태였다. 졸업생들이 대개 선택하는 기사단 입단이나 제국 정규군 입대는 그다지 매력적인 제안이 아니었다. 목표 그 다음이 보이지 않아서 자주 허무해지거나, 실의에 빠져 지내곤 했다.
그나마 사제 마도병기의 도안을 완성시켰다는 게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만들 돈은 없어도 꿈의 일부가 실현된 것 같아 기분은 좋았다. 다만 혹시나 싶어 군에 제출한 기획서가 너무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기각당했다.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던 결말이었기에 담담하게 기지에서 나온 것으로 기억한다. 한쪽 팔엔 종이 뭉치를, 반대편엔 모친이 심부름시킨 반찬거리를 들고 유유히 집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길 중간에서 양복 입은 거구들을 맞닥뜨릴 때까지, 한센은 돈을 모아서 여행이라도 갈까, 같은 일상적인 고민만 주욱 하고 있었다.
그들이 왜 찾아왔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정중한 태도로 ‘주군’이 자기를 만나고 싶어 하니, 잠시 따라와주셨으면 한다고 요청해왔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간 곳은 검은색의 고급 리무진 앞. 흰 수염 노인이 죄송하다면서 사과를 하더니 뒷문을 열고 차 안으로 안내했다. 한센은 무력 저항까지 각오할 정도로 긴장해 있었지만, 양복 군단이 모시는 ‘주군’을 보자 마음을 고쳐먹고 말았다. 면사로 얼굴을 가린 ‘주군’은, 예상과는 달리 여자였다.
알리사 힐스레스트(Alisa Hillsrest)라고 했던가. 힐스레스트 가문의 장녀라고 밝힌 그녀는 이어서 밑도 끝도 없이 도안과 기획서를 요구해왔다. 그러면서 이유를 대길 오래 전부터 그의 프로젝트에 관심이 있었고, 이번 기회에 스폰서가 되어주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일단 서류를 넘겨줬더니, 받은 지 10분도 안 돼서 지원을 결정해버렸다. 지원금은 다음달, 지정된 계좌로 올 것이라는 말과 함께 알리사 힐스레스트는 그를 차 밖으로 내보냈다. 멀어져가는 리무진을 바라보며 한센은 저 사람이 지금 장난치는 건가 싶었다. 상황이 너무 정신없이 흘러가서 서류를 돌려받지 못했다는 것을 잊고 있을 정도였다.
가관인 것은 떠나기 전에 자기를 알고 있는지 묻자, 때가 오기 전엔 말해줄 수 없다는 이상한 대답을 했다는 것이다. 그 때 확립된 첫인상은, 말 그대로 ‘의문’과 ‘짜증’이었다.
“머리는 장발에 분홍색. 키는 너하고 비슷했어. 얼굴은 면사 때문에 눈만 볼 수 있었고. 옆엔 검이 있었는데, 쉽게 볼 수 없는 고급 주문작(注文作)이었어. 한눈에 봐도 레어메탈제라는 게 보였지.”
“레어메탈이면…… 마도병기의 장갑에 쓰이는 합금이잖아요.”
“맞아. 검으로 만들면 아주 단단하고 날카로운 명품이 되지만, 단가가 천문학적으로 높아서 공급은 한 자릿수에 머물러 있어. 황제의 하사품으로만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은 ‘임페리얼 소드(Imperial Sword)’……. 슬슬 감이 오지?”
“그, 그러면 미스 힐스레스트는 보통 귀족이 아니라는 건가요?”
엎드린 채로 한센을 주시하던 아네모네는 그 의미를 깨닫자마자 눈을 크게 떴다. 황제의 하사품이라는 건, 그것을 수여받는 대상의 신분이 적어도 상급 귀족 이상은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왜 지금까지 정체를 숨기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설명이 되었다.
아네모네의 반응이 재밌었는지 한센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건 아직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사람이 실수를 저질렀다는 거야. 검 하나로 어떤 인간인지 아주 쉽게 드러났잖아. 자기 자신을 철저히 숨기고 싶었다면, 사회적 위치를 암시하는 요소를 전적으로 배제했어야지. 스스로를 남에게 ‘보여주는’ 것에만 익숙해져 있는 여자야.”
가면을 쓰려면 얼굴 전체를 가려야 하는 법이다. 그 당시의 전개가 너무 빠르긴 했지만, 다행이게도 정신줄은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단순히 머리가 좋아서 상위권의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한 게 아니다. 3급 기사의 작위가 쉽게 주어진다고 생각하면 크나큰 오산이었다.
“검 말고 다른 수상한 점은 없었어요?”
아네모네의 물음에 한센은 신문을 접어 테이블 위에 두고는, 팔짱을 끼며 울타리 너머의 인파(人波)를 바라보았다.
“글쎄…… 머리를 굴려봐야 알겠는데.”
옅어진 기억을 다시 더듬어본다. 검이 말해준 사실은, 알리사 힐스레스트가 귀족이라는 것. 정치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이거나, 그런 가문의 자제라는 것. 어떻게든 황제와 확실한 연이 있는 존재라는 것.
그리고…….
“맞아. 가명을 쓰고 있었어.”
“가명이요?”
“귀족 가문의 인명부(人名簿)를 샅샅이 뒤져봤는데, ‘힐스레스트’라는 성의 명문가는 하나도 안 나왔어.”
길이 트이자 그 너머의 기억이 조금씩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알리사 힐스레스트를 처음 만나고 나서 정확히 일주일 후, 그녀의 ‘사용인(使用人)’이라 자처한 메이드가 찾아와 신형기의 도면과, 수필로 쓴 계약서를 내밀었다. 그땐 아네모네와 같이 있었고, 대충 서명을 한 뒤 아네모네에게 조항을 외우게 했다. 임무를 완수했다며 자리에서 일어난 메이드는, 원본 계약서를 회수하지도 않은 채 돌아가버렸다. 이후, 힐스레스트가 약속한 ‘지원금’이 정말 입금되었다.
힐스레스트의 신원을 조사해본 건 그 사이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검에서 힌트를 얻은 한센은 명문가의 구성원이 기록된 인명부를 하나도 빠짐없이 정독했다. 레어메탈로 만들어진 검을 하사받았다면 수도에서도 꽤 유명한 상급 귀족 출신일 테지만, 그녀가 속한 가문, 또는 그녀의 성은 기록에서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즉, 어떤 이유가 있어서 ‘알리사 힐스레스트'라는 가명을 지어냈다는 얘기가 된다.
자신을 알아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일부러 그랬다는 것이, 그 당시에 내린 잠정적인 결론이었다. 배로 돌아온 짜증과 의문은 덤이었다.
“미스 힐스레스트는 가명을 쓰고 있었군요. 사기꾼일 가능성은?”
“0. 지원금을 제대로 챙겨준 걸 봐선 그냥 상급 귀족일 확률이 높아. 말하는 어투나 자세에도 교양이 확실히 깃들어 있었어.”
“신기하네요. 요즘 시대에도 귀족이 교양을 따지다니.”
“그래야 할 정도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뜻이겠지.”
랭 이모에게서 배운 ‘사람 보는 법’을 기억해내며 한센이 말했다. 그녀는 앉을 때 등받이와 거리를 뒀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으며, 말을 할 땐 두 손을 무릎 위에 얹었다. 처음엔 미리 연습해둔 게 아닐까 싶었지만 수차례 더 면담을 나눠보면서 몸에 밴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적어도 사기일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그 잠깐 동안 중요한 것들만 알아내셨네요. 조금만 더 했으면 진실이 보였을 텐데, 왜 도중에 그만 두신 거에요?”
식당 밖으로 나온 웨이터를 보며 아네모네가 물었다. 예상했던 시간보다 빨리 음식이 나왔기에 서둘러 대화를 수습하려는 모양이었다. 몸을 일으키고 머리와 옷을 매만진 뒤, 정갈한 자세로 한센의 대답을 기다렸다.
“죽어라 노력해도 마지막 의문 하나가 안 풀려서 말이지. 짜증이 폭발해서 결국 놓아버렸어.”
알 수 없는 감정이 담긴 눈빛을 하며 한센이 말했다. 아네모네로선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의문이었는데요?”
“그건…….”
한센은 살짝 망설이더니, 이윽고 천천히 운을 뗐다.
“날 도와주려는 진짜 의도가 뭔지, 였어.”
그 직후 웨이터가 도착하는 바람에 대화는 더 이어지지 못했다. 해물 파에야(paella)와 카르보나라 스파게티가 각각 아네모네와 한센의 앞에 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