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헤르만(Herman) - 6
식사를 끝내고 나선 할 것이 없었다. 의자에 축 늘어진 한센은 얼음물을 조금씩 마시며, 일주일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분 좋은 포만감을 즐겼다. 그릇을 비우는 동안 기적이라도 일어났는지 광장은 비교적 한산해졌다. 사람들은 여전히 많았지만 숨통이 트일 정도는 되었다.
인파가 약해지니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티끌 없는 하늘에 구름이 흐트러져 있는 건 영화나 소설에서 흔히 써먹는 배경이다. 먹구름이라도 몰려오지 않는 이상, 그런 하늘을 보고 감흥이 있을 리 없다. 높이 솟아올라 마침내 천상(天上)을 침범하게 된 고층 건물들이 오히려 더 볼만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선을 돌리지 않은 이유가 있다면, 이질적인 무언가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엄지손가락보다 작은 그 물체는 놀랍게도 사지를 갖고, 인간형의 몸을 하고 있었다.
창공을 직선으로 비행하던 그것은 방향을 틀어 제1중앙시장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고도를 낮추며 조금씩 가까워져오는 그 인간형의 물체는, ‘마도병기’라 불리는 철제 거인이었다. 청백색의 스러스터(thruster) 불꽃을 꼬리처럼 길게 내뿜으며, 14미터의 육중한 몸체를 뽐내듯 날아오던 철거인은, 지상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습이 겨우 뚜렷하게 보일 높이에서 감속한 직후 다시 상승하며 하나의 나선을 그렸다.
하늘의 이변이 발각됐는지 주변에서 의문이 담긴 술렁임이 들려왔다. 작은 폭발음이 퍼지자 한센은 피식 웃고는, 장난감을 생각 없이 다루는 인간이네, 라고 멋대로 추측했다. 콕핏 안의 파일럿은 자랑하길 좋아하고, 피가 쉽게 끓어오르는 성격의 소유자일 것이다. ‘무기’의 진정한 용도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나 나타나는 일종의 중2병 같은 증상의 환자였다. 그 바보짓이 어디까지 가나 지켜보자 싶어 한센은 마도병기가 날뛰는 하늘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무슨 일이에요?”
방금 전까지 신문을 읽던 아네모네가 말을 걸어왔다. 포만감이 가져다주는 안락함 속에서, 한센은 오른손만으로 폭발음의 근원을 가리켰다. 굳이 말해줄 필요도 없는데다 아네모네 정도는 상황을 몇 초 내에 파악해내고도 남는다. 호의의 표시로 부연 설명만 몇 마디 해주면 끝이었다.
“ISM-07 ‘아르엘’.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쪽에서 테스트 기동중이야. 소속은 높은 확률로 제국 정규군일 테고.”
사제 마도병기의 출격이 제한되고 있는 마당에 제국 정규군 소속이 아니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말없이 하늘만 한동안 바라보던 아네모네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자기 눈앞에 갖다 댔다. 곁눈질로 볼 때 조금 이질적인 형태였기에 한센은 고개를 돌려 아네모네가 무엇을 들고 있는지를 살폈다.
“너, 그건 어디서…….”
아네모네의 손에 쥐어진 것은 귀족들이 쓸 법한 작은 망원경이었다. 검은 바탕에 고급스러운 금박이 박혀 있는 걸 보니 값어치가 꽤나 나갈 것 같았다. 놀랄 것까진 없었지만, 아네모네가 비싼 물건을 쓰고 있다는 게 조금 의외로 다가왔다. 항상 싼 걸 사서 자기 입맛대로 개조해서 갖고 노는 녀석이 아니었던가.
망원경을 내리고 한센과 눈을 맞춘 아네모네는, 분위기를 읽었는지 오빠를 향해 수줍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곳에 오기 전에 오빠가 준 용돈으로 샀어요. 서력 시대 유물의 레플리카(replica)라서 값은 그렇게 안 비싸요.”
“그럼 그렇지. 네가 명품을 쓰는 애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어.”
의미 모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한센이 말했다. 네가 명품을 쓸 일은 절대로 없을 거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았기에 아네모네는 살짝 불쾌해졌지만, 금방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고는 다시 아르엘 관찰에 돌입했다.
약 3분 후, 생각을 대충 정리한 아네모네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이냐고 역으로 묻는 한센에게 망원경을 건네주며 이렇게 말했다.
“별로 볼 것 없는 일반 기종이에요. 도장은 수도 경비대와 비슷한데, 어느 부대 소속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호기심이 생긴 한센은 곧바로 망원경을 들고, 체공(滯空)해 있는 아르엘의 세부를 확인했다. 뼈대를 연상시키는 몸체에 직선 위주로 디자인된 갑주를 덕지덕지 붙인 모습은 역사서에서 본 중세 시대의 중갑보병을 연상시켰다. 머리엔 안테나 역할을 하는 작은 외뿔과 좌우 5개씩, 도합 10개의 아이 센서(eye sensor)가 장착되어 있었고, 다층의 장갑을 두른 몸통의 중앙엔 파일럿이 드나드는 콕핏 해치가 위치해 있었다. 등, 허벅지, 종아리에서 분출되는 푸른 분사염에선 간간이 하얀 빛이 깜빡깜빡 하고 튀어나왔다. 마도병기의 동력원이 되는 베르셴코프 입자(Verschenkov Particle)가 극소량 방출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네모네의 말대로 지극히 평범한 기체였다. 청회색의 도장이 소속을 착각하게 만들고 있을 뿐, 흥미로운 특징은 없었다. 왼쪽 갑주에 그려진 핀업걸(pin-up girl)을 보고 미간을 찌푸린 한센은, 결론이 내려지자마자 망원경을 내리며 천천히 운을 뗐다.
“제국 정규군 제1기동대의 마도병기야. 기지가 황궁 가까이에 있으니, 여기까지 날아오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외관만 보고 알 수 있는 거에요?”
“란제리만 입은 귀족 아가씨를 핀업걸이랍시고 그려 넣는 곳은 거기밖에 없어.”
근거를 한 문장으로 정리한 뒤,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으로 등받이에 상체를 의지했다. 황제의 친위 세력 중 하나로 기능하는 부대가 저 꼴이라니…… 마음속의 무언가가 어긋난 것 같은 기분에 자기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심란해진 이상, ‘문제가 터지면 자기들이 알아서 처신하겠지’, 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수밖에 없었다.
아네모네는 다른 이유로 곤란해하는 것 같았다. 한쪽 팔에 머리를 기댄 그녀의 뺨은 모종의 이유로 양쪽 다 붉어져 있었다. 성인이 되어 ‘알 건 다 아는’ 처지였기에 한센은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지만, 일부러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주제와 상관없는 장난을 쳐봤자 지금 상황에선 시간만 낭비할 뿐이었다.
문득 저 아르엘은 뭣 때문에 기지 밖으로 나왔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두 시간 전쯤에 목격한 수도 경비대의 아르엘 편대처럼 뭔가 특별한 목적이 있을 것이었다. 파일럿 개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기사단과는 달리, 제국 정규군은 엄격한 상하관계와 규율을 지닌 엄연한 한 국가의 군대였다. 한 병사의 독단으로 마도병기가 무단 출격했다면, ‘탈영병’을 체포하기 위한 진압대가 쫓아오는 게 당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이 조용하다는 것은 역시 부대 내부에 어떤 사정이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젠장, 마음 편하게 구경도 못 하다니. 너도 참 짓궂구나, 애니.”
따지고 보면 아네모네가 말을 건 탓에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책망과 장난을 여동생을 부르는 애칭에 반씩 담아 망설임 없이 던져버렸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아네모네는, 양손을 휘휘 내저으며 다급히 자기 자신을 변호하기 시작했다.
“저, 저는 망원경으로 관찰만 했을 뿐이에요. 그게 잘못됐다고는 할 수 없잖아요?”
생사람 잡는다는 듯한 반응이었고, 냉정하게 봤을 때도 사실이었다. 한센은 망원경을 다시 건네며 오해를 풀기 위한 미소를 지었다.
“그냥 장난 한 번 쳐봤어. 뭘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고 그래.”
“오빠가 하는 말의 9할은 진심이니까 그렇죠.”
망원경을 다시 집어넣은 아네모네가 가볍게 쏘아붙였다. 재미있는 대답에 한센은 쿡쿡 웃으며 비운지 좀 된 그릇에 시선을 옮겼다. 슬슬 계산하고 가야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이 인파를 헤치고 집까지 걸어가야 하는 이상 조금이라도 더 체력을 비축하고 있기로 했다. 이쪽에 압력을 가하고 있는 귀족 아가씨의 무서운 시선은 완전히 무시해버렸다.
컵에 든 물을 반쯤 비우고, 흩어진 흥미를 다시 모아줄 무언가를 찾고 있을 무렵, ‘저기…….’하고 아네모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뒤에서 누군가가 오고 있어요.”
“누구?”
한센은 여동생이 가리킨 방향을 본 뒤, 어깨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그 사람의 목소리가 먼저 도착했다. 어딘가 친숙하게 다가오는 느낌에 한센의 이마가 살짝 치켜 올라갔다.
“여어, 오랜만이다.”
무뚝뚝한 어조에 격식 없는 말투를 우겨넣은 것 같았다.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라고 조용히 중얼거리며 한센은 이쪽으로 다가온 사람과 눈을 맞췄다.
겉모습은 귀족가의 영애였지만 인상은 무사(武士)에 가까웠다. 외관은 전체적으로 깔끔했기에 오히려 더 돋보이는 듯했다. 청색이 감도는 장발을 옆으로 묶어 정리했고, 목 밑으로는 요즘 아가씨들이 입는 개량형 투피스를 입고 있었다. 허리에 검을 찬 것으로 봐선 공무중인 기사인 것으로 보였다.
한센이 기억의 우물을 헤집느라 침묵하고 있자, 아네모네가 일어서서 영애의 인사를 대신 받아주었다.
“오랜만이에요, 기네비어 언니. 졸업하고 나서 1년만이네요.”
“그래, 다시 만나게 돼서 기쁘다. 간단하게 식사나 할까 해서 왔더니 설마 너희들이 여기에 있을 줄이야. 잘 있었는지 안부를 묻고 싶다.”
“일 때문에 조금 바쁘긴 했지만, 건강하게 지내고 있어요. 상회의 일도 잘 풀리고 있고요.”
“그렇군. 나쁜 일이 없어서 다행이다. 그에 비해…….”
나름대로 사근사근했던 기네비어는 한센을 보자마자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 반응을 포착한 한센의 뇌리에 누군가의 모습이 스쳤다. 기억대로라면, 어느 명문가 출신의 자매 중 동생에 해당하는 녀석이었을 것이다. 언니 쪽의 영향을 받아서 과도하게 성실하고 꼼꼼한 성격이 짜증을 유발할 정도였지. 항상 ‘대의명분과 명예’를 외쳤던, 구시대의 귀족적 풍습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친구였다. 아니, 그 전에 친구이긴 했었나?
일단 자리에서 일어난 한센은 친근함을 가장하며 인사를 건넸다. 말을 살짝 길게 늘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말로 1년만이구나. 졸업하고 나서 기사단에 스카우트됐다고 들었는데.”
“언니의 덕이지, 내 능력으로 들어간 건 아니다. 여전히 무신경한 태도를 보니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로군, 한센 헤르만.”
“뭐, 이것저것 하느라 시간이 없지.”
한센은 짧게 대답을 끝냈다. 예의상으로라도 서로 근황을 공유하는 게 맞았지만, 상대가 사무적으로 나오니 대화를 계속할 마음이 사라져버렸다. 설령 근황을 전해도, 스폰서를 구해 마도병기를 만들고 있다는 말은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랬다간 옛날에 있었던 일을 거론하며 비겁하게 왜 생각을 바꿨냐고 따질 게 분명했다.
“기사단에 입단하셨다는 건 좋은 소식이네요. 어디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분위기가 미묘해지기 전에 아네모네가 급히 운을 뗐다. 탈출구가 생기자 한센과 기네비어는 망설임 없이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수도 경비대 산하 제1기사단이다. 아멜리아 언니가 써주신 추천장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었지. 그래도 아직 신입이라서, 지금은 격납고에서 마도병기를 정비하고 있다.”
“흐음, 기사단이군요.”
수도 경비대에도 기사단이 있다는 사실에 아네모네는 의아함을 느꼈다. 제1기동대와 기지를 공유하고 있을 뿐, 그 외엔 제국 정규군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표정에서 그녀의 심리를 읽었는지, 기네비어는 팔짱을 끼며 부연 설명에 들어갔다.
“요즘 ‘검은 마도병기’로 시끄러워서 말이지. 체제 개편의 일환으로 몇 개 신설됐다.”
관심 없는 듯 침묵하고 있던 한센은, ‘검은 마도병기’라는 말이 나오자 곁눈질로 기네비어를 바라보았다. 수도에 인접한 브란덴부르크까지 타깃이 됐으니 체제 개편이니 뭐니 하는 대응책이 나올 법도 했다. 아니, 그건 어젯밤의 일이다. 사건 발생 하루 만에 제도가 바뀌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혼자 생각하려니 안 맞는 부분이 많아서, 결국 포기하고 머릿속을 깨끗이 비웠다. 두 여자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는 게 지금으로선 나을 것 같았다.
그러던 중, 고개를 이쪽으로 돌린 기네비어와 눈이 마주쳤다. 시선을 피하려 했지만 그녀가 말을 거는 게 더 빨랐다.
“듣고 있었나. 그런 자세로 엿듣다니, 악취미로군.”
직설적인 말투에 가슴이 철렁했지만, 한센은 어떻게든 유유자적함을 가장했다. 무슨 뜻이냐고 묻는 듯한 아네모네의 시선은 가볍게 흘려버렸다.
“할 게 없었는데 우연히 귀에 흘러들어온 것뿐이야.”
“그런 것 치고는 반응이 예민했다만. 애니에게 설명을 하고 있을 때, 눈을 잠깐 이쪽으로 돌리지 않았나?”
“쳇, 들켰네.”
귀찮은 여자다, 라고 생각하며 한센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도 거짓말을 할 생각은 없었기에 순순히 인정하긴 했다. 한숨을 내쉬며 기네비어 쪽으로 몸을 돌린 그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허세를 부렸다.
“얻어갈 수 있는 정보가 있을까 싶었는데,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기사단’에 대한 얘기만 늘어놔서 말이야. 수도 경비대도 쓰러트리지 못한 ‘검은 마도병기’의 무용담을 풀어놓을 것 같았는데.”
“검은 마도병기와의 교전기록은 기밀사항으로 분류되어 있다. 내가 말하고 싶다고 해서 말할 수 있는 게 아냐.”
실없는 블러핑(bluffing)임을 알면서도 기네비어는 충실한 대답을 했다. 명예를 중시하는 그녀이니만큼,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선 어떤 도발에도 유연하게 넘어갈 필요가 있었다. 학생 시절부터 조금씩 쌓여온 악감정이 있긴 했지만, 오랜만에 말문이 트인 상황에서 다시 입씨름을 하긴 싫었다. 오히려 화해를 할 수 있으면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너는 기사의 본능을 아직 버리지 못한 모양이구나. ‘사람을 죽이는 짓 같은 건 하기 싫다’면서 마도병기에 손을 떼지 않았나. 그런 주제에 검은 마도병기에 대해서 묻다니, 언동에 모순이 있군.”
쓸데없이 예리한 지적에, 전율이 등을 타고 내려왔다. 한센은 괜히 허세를 부린 자기 자신을 책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확실히 기네비어에게 그런 말을 하긴 했다. 졸업식 때였을까, 회의감에 내질렀다가 뺨을 맞았었지. 그걸 잘도 기억하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며 한센은 자기변호에 나섰다.
“일반인으로서 사회적 이슈에 의문을 갖는 게 뭐가 나쁜데?”
“그게 나쁘다고는 하지 않았다만……. 뭐, 됐다. 할 말이 궁해졌다고 생각해두지.”
아무렇지도 않게 상대를 쉽게 자극한 기네비어였다. 한센은 곧바로 받아치려 했지만, 그녀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내가 이곳에 왔을 땐 저 마도병기를 보고 있었더군. 망원경까지 쓰면서 말이야. 멋지다, 과감하다 같은 단순한 감상은 내가 아는 너라면 갖지도 않았을 것이다. 저것의 소속이나 성능, 파일럿의 실력을 그 자리에서 분석하고 있었겠지. 내 말이 틀렸나, 한센 헤르만?”
“……그냥 대놓고 말하지 그래? 내가 정말로 마음에 안 든다고.”
자기를 정면으로 노리고 있는 것 같아 일종의 거부감이 생겼다. 풀 네임(full name)을 거론하면서까지 자기를 떠보려는 이유를 궁금해하며, 한센은 호의적이지 않은 눈빛으로 기네비어와 대치했다.
쉽게 화를 내는 건 여전하군, 이라고 조용히 말하며 기네비어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 알려주지. 저 아르엘은 지금 아멜리아 언니가 조종하고 있다. 제국 정규군과 제휴를 맺고 행사용 시험기를 점검하고 있는 것이지. 마도병기에 아직 미련이 있다면, 수도 경비대를 찾아가서 언니와 이야기를 나눠보는 게 어떻겠나?”
“……갈 이유가 없잖아. 군용 마도병기는 이제 지긋지긋해.”
열을 식히려는 듯 한센은 어조를 낮췄다. 속으로는 자기가 봤던 아르엘을 아멜리아 선배가 몰고 있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원래 추측한 대로 오만하고 다혈질인 인간은 아니었지만, 그 누나는 마도병기에 타고 있을 때만큼은 아유다에 버금갈 정도로 난폭해졌다. 황녀의 은혜로 수도 경비대장에 취임했다던데, 지금도 변함없이 활발한 모양이었다.
문득, 커피빈의 역습으로 돌아가는 길에 본 아르엘 편대에도 아멜리아 선배가 있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한센이 말을 맺고 잠시 뒤, 누군가가 거리를 두고 기네비어를 불렀다. 세 사람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고, 기네비어처럼 검을 찬 기사들이 야외 테이블이 모인 곳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동료들인 것 같았는데, 우연히 만난 건지 원래 같이 식사하기로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잠깐 양해를 구한 뒤 기네비어는 몸을 돌려 그들을 맞이했다.
“돌아가자, 애니.”
대화가 깨지자마자 한센은 지갑에서 돈을 꺼냈다. 안절부절못한 표정으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아네모네는, 오빠가 말을 걸자 히익, 하고 놀라며 몸을 튕겼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얼떨떨한 기분으로 기네비어를 바라보았다. 우연의 일치로 기네비어가 그것을 포착했다.
“잠깐.”
한센이 떠나기 전, 기네비어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셔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낸 그녀는 명함 같은 것을 한센에게 내밀며 말을 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네가 다시 기사로 돌아왔으면 한다. 신형 장비의 개발은 검은 마도병기에 대항하기 위함이지만, 시간은 촉박하고 인재의 수는 적다. 옛날 일로 트라우마가 생긴 건 알고 있지만, 혹여나 마음이 바뀌었을 땐 연락해다오.”
“받아두긴 할게. 연락할 일은 없겠지만.”
한센은 마지못해 기네비어의 명함을 받았다. 요즘은 기사단원도 명함을 갖고 다니나 싶었지만 그런 의문은 가볍게 넘어갔다. ‘행사에서 보지’라는 작별의 말을 들으며 한센과 아네모네는 커피빈의 역습으로 향했다. 돈은 빌(bill)지와 함께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인파에 합류하기 직전, 공중에서 두 번째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이번에도 한센은 고개를 들었지만 흥이 식은 얼굴을 한 채 걸음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잠시 이리저리 떠돌던 마도병기는, 마침내 제1기동대가 주둔하고 있는 기지로 방향을 잡고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하며 한센은 걸음을 서둘렀다. 그저 배부른 상태로 기분 좋게 구경하고 있을 뿐이었는데, 기네비어 덕에 분위기를 망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