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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루벤크렌체(Luvenkrantze) - 2


「그런데…… 정말로 생각 없어? 말 안 할 테니까 조금만 얘기해주면 안 돼?」




 “정 알고 싶으면 신문을 보던지. 거기에 다 나와 있…… 읍…….”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감각에 한센은 급히 입을 막았다. 회전기동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아직 덜 된 탓이다. 전방위 모니터에 비친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있어서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들어 하늘의 한 점을 주시했다.




「신문을 봤자 별 얘기 안 해준다고. 레퍼토리가 같은데 보는 의미가 없잖아. 그리고 정치란은 다 왜곡돼 있어서 재미없어.」




 “그건 언제 적 투정이냐, 대체…….”




 겨우 숨을 내쉰 뒤 한 말이 이거였다. 나선 구간을 완전히 빠져나와서야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13번 체크포인트는 이미 통과한 뒤였고, 이제 14번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머릿속에 잔류한 혼란을 모두 떨쳐냈다.




 그와는 별개로 목소리의 주인에 대한 의심이 커져갔다. 메르겔은 당연히 아니고, 아네모네라 해도 이상한 부분이 많다. 아까부터 나긋나긋한 말투로 친근한 듯 다가오고 있는 게 마음에 걸렸다. 누구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시험 비행이 더 급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목소리도 살짝 변조되어 있었다.




 혹시, 그 녀석이 지금 이곳, 베네치아에 있는 건 아닌지…….




 그런 추측은 곧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그 녀석은 오늘 아르바이트가 있다면서 같이 오지 않았다. 시간을 비워두라고 했건만, 사장과 협상이 잘 안 됐다고 했다. 그래서 이틀간 얼굴도 못 보고 서로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즉, 메르겔 또는 아네모네의 장난이라고 결론내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저편의 말을 듣자, 사고의 연쇄가 완전히 뒤집어졌다. 너무 당혹스러워서 자기도 모르게 에어브레이크를 펼쳤다.




「그러지 말고 조금만 알려줘, 응? 황궁에서 내가 도와준 것도 있잖아. 대신 데이트 한 번 해줄 테니까.」




 성질을 돋우는 애교 섞인 말투에 생각도 없는 ‘데이트’를 언급하는 저 무모함. 역시 그 녀석밖에 떠오르지 않아 한센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어떻게 왔냐. 아유다 루벤크렌체.”




 추궁 같은 질문에서 한센의 심중을 읽은 아유다는 곧바로 음성 변조를 풀었다.




「좀 더 좋은 아르바이트가 생겼거든. 조건이 맞아서 바로 수락했어.」




 “그래서 베네치아로 온 거야?”




「응…… 여기서 하루 동안 일을 해 달래서 말이지.」




 어정쩡한 설명이라는 느낌이 강해서, 한센은 이번엔 인상을 찌푸렸다. 수도에서 베네치아까지의 거리는 국경 하나를 사이에 둘 정도로 멀다. 상식적으로 봤을 때 이런 초장거리 아르바이트가 제국에 존재한다고는 믿기 힘들었다.




 뭔가 꿍꿍이가 있으리라고 짐작하며 얘기를 계속했다.




 “네가 왔다는 걸 메르겔과 애니도 알고 있어?”




「도착하자마자 무전을 보냈어. 베네치아 제국군 기지 쪽.」




 “출발은 언제 했고?”




「오늘 아침.」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센은 눈을 가늘게 떴다.




 “잠깐 메르겔과 얘기 좀 하고 올게.”




 상황이 수상쩍게 돌아간다는 확신 아래 일의 우선순위를 다시 나열했다. 항로를 취소한 뒤 통신 화면을 열기 위해 작게 손짓을 했다. 홀로그램 스크린이 뜨는 속도에 맞춰 모니터에 전개됐던 CG 가이드가 사라져갔다. 딸려오는 아쉬운 감정은 일단 뒤로 물렸다.




「저기, 그래서 그 여자와 했던 말은…….」




 “시끄러. 방해돼.”




 지금 그 일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못 참고 자버린 네 잘못이다, 라고 중얼거리며 검지로 채널을 조정했다. 메르겔의 비밀 회선은 3번으로 배정돼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중앙에 뜬, ‘연결 실패’라는 오류 창.




 자기도 모르게 ‘어?’ 소리가 나왔다. 재차 시도해도 같은 문구의 붉은 윈도우만 떴다. 혹시나 해서 아네모네의 비밀 회선으로 바꿔봤지만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연결음이 중간에서 끊어지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 OD 센서의 레이더로 시선을 옮겼다.




 엠프리스를 중심으로 북동쪽, 원의 끄트머리에 ‘베네치아 기지’라 명명된 붉은 점이 반짝이고 있었다. 거리는 40킬로미터. 이 정도면 베르셴코프 입자를 이용한 장거리 무선이 가능하다. 하지만 통신 시스템이 고장인지 회선은 오픈, 비밀 상관없이 전부 먹통이었다. 어느 채널로 돌려봐도 오류 창만 뜰 뿐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기지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아유다도 그곳에 있을 테니, 일단 귀환해서 상황을 파악하기로 했다.




 “이상한데, ​재​밍​(​j​a​m​m​i​n​g​)​이​ 걸렸나……?”




 통신 화면을 닫으며 혼잣말을 하고 있을 때, 아유다가 무전을 통해 나직이 운을 뗐다.




「미안하지만 한동안은 통신이 안 될 거야. 주변에 방해파를 쏘고 있거든.」




 “그게 무슨 소리야?”




 고해성사 같은 말에 한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서로 적도 아니고 통신을 방해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다 문득, 이것이 아유다의 아르바이트와 연결돼 있지 않을까 하는 직감이 왔다. 마음 한구석에 불안이 일었다.




「화내지 말고 들어줘. 내가 돈을 받으려면 너랑 싸워야 해. 아니, 싸운다, 보단 모의전이 더 본질에 가까운 표현이겠지만.」




 역시.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시도 때도 없이 귀찮은 일을 만드는구나, 아유다 루벤크렌체. 좋은 말할 때 무슨 아르바이트인지 설명하는 게 좋을 거다.”




 「미안. 일단 화상 모드부터 켜고 얘기하자.」




 다급한 말투로 보아 진심인 모양이었다. 크게 한숨을 내쉬며 한센은 다시 한 번 홀로그램을 켰다. 모니터에 떠오르는 화상은 영락없는 아유다였다. 정말 미안하다는 듯 합장을 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화가 치밀었지만, 사정을 들어보자 싶어 말없이 팔을 꼬며 조종석에 몸을 기댔다.




 넓어진 시야에 아유다의 얼굴 전체가 들어왔다. 손질이 적게 들어간 흑색 단발에 맑게 빛나는 청안, 그를 완성하는 흰 피부는 외국인 같은 느낌이 상당했다. 스무 살이 됐음에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십 대의 이목구비가 그녀를 앳된 미인으로 보이게 했다. 초면의 남자들을 단번에 굴복시키고도 남을 기세의 미모였다. 그 아래로는 거대한 흉부지방이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지만, 관심도 감흥도 없었기에 눈을 다시 위로 올렸다.




 너무 활달해서 남자애 같다는 소리도 듣는 녀석이지만, 아유다의 정수(精髓)는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 선천적인 감각에 있었다. 한센의 반응을 예감했는지 아유다는 사과와 함께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 모습이 꼭 죄를 지은 강아지 같아 보여서 한센은 한순간 무슨 말을 해야 될지 알 수 없었다.




 “언제부터 신호를 가로채고 있었는지 설명 좀 해주실까.”




 홍수처럼 밀려드는 생각을 정리한 뒤 한센은 첫마디를 내뱉었다. 아유다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지만 어떻게든 말은 했다.




「사실은 시험 비행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곳에 있었어. 이 구역의 통신을 일시적으로 봉쇄하는 사전 작업을 하고 있었다고나 할까. 베네치아 기지에 양해를 구하고 방해파를 쏘는 장치를 몇 개 뿌려뒀어.」




 한센의 한쪽 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베네치아 기지에 연락이 갔다면 메르겔과 아네모네에게도 분명 소식이 전해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왜 아유다에게 이런 일을 시켰는지 알아내는 게 최우선이었다.




 “누가 사주했어? 네가 온 걸 보니 내가 아는 사람 같은데.”




 돈 모으기를 좋아하는 아유다의 성격상 이런 일을 거절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특히 의뢰자가 그녀와 친분이 있다면 가능성은 더더욱 커진다. 하지만 배후의 이름을 댈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아유다는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회피했다.




「그건…… 일이 끝날 때까진 말 못 해. 지금은 불가피한 사정이 생겼다는 것만 알고 있어줘.」




 “아, 그렇게 나오시겠다?”




 말꼬리가 미묘하게 틀어 올라가자 아유다는 살짝 긴장한 반응을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그녀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이 훤히 드러났다. 이 상황에서 추궁을 계속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는 판단이 섰다. 그 판단은 침묵이라는 형태로 표현되었다.




 다른 질문으로 대화를 돌렸다.




 “현재 네 위치는?”




「아직 알려줄 순 없지만, 마도병기 안에 있는 건 확실해.」




 “쓸데없는 수수께끼는 그만 둬. 너 지금 출격한 상태지?”




「그렇다고 보는 편이 맞지 않을까?」




 의미를 알 수 없는 반문에 한센은 급기야 손으로 얼굴을 붙들었다. 저 태도에서 아유다의 진심이 느껴지는 게 심히 거슬렸다. 더 이상의 대화는 시간낭비만 될 것 같아서, 우선 자기 혼자 어떻게든 답을 도출해보기로 했다.




 뇌리에 그들 4인방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의 명단을 펼쳤다. 돈을 좋아하는 아유다이니만큼 거액의 협상이 오고갔을 게 뻔했다. 권력과 재력이 있는 자들을 추리고, 거기에서 신형기와 관련 있는 자들을 다시 걸러냈다. 남은 이름을 곱씹는데 걸린 시간은 대략 30초. 가장 유력한 사람의 이름이 최종후보로 떠올랐다.




 수도 경비대장 아멜리아 베르크도프 폰 클라인.




 선배가 생각난 건 과거의 악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제1황녀의 기사이자 베네치아 기지를 연습 장소로 주선해준 장본인이기도 했다. 마도병기에 관해선 워낙 괴짜 같아서 이런 수를 써와도 이상할 건 없었다. 비전투형이든 뭐든, 신형 마도병기를 만들었단 사실 하나만으로 깊은 흥미를 보인 사람이다. 선배가 아유다를 이리로 데려왔다면, 목적은 ‘성능 테스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터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추측은 확신이 되었다. 침묵은 이제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길어졌다. 심각한 표정이 되어 있는 한센을 보며 아유다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을 최대한 숨기려는 게 보였다.




 한센은 그런 아유다 앞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추측이 맞는지는 둘째 치고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정리하자면, 밝힐 수 없는 누군가가 주선한 아르바이트 때문에 우리 둘이 싸워야만 한다는 거지?”




「응. 그게 대충 맞는 말이긴 한데…….」




 “바보 같은 소리. 그런 어정쩡한 이유를 내가 받아줄 리 없잖아. 기체를 쓸데없이 상처 입히는 게 기사에게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지 몰라?”




「그래봤자 모의전이야. 그리고 네가 언제부터 기사도를 신경 썼다고.」




 그 말엔 한센도 받아칠 게 없었다. 그러나 이유야 어찌됐든 자신의 마도병기를 모의전에 쓰고 싶진 않았다.




 “신경 안 썼지만 그래도 이건 말이 안 돼. 미안하지만, 난 네 장난에 휘말릴 생각 없어.”




「자, 잠깐만!」




 엠프리스가 귀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아유다는 다급히 한센을 불러 멈췄다. 당장 대답하는 대신, 한센은 조종간을 놓고 생각에 잠겼다. 애교가 섞여 감미로운 말투로 아유다는 자기가 낼 수 있는 최강의 카드를 뽑아들었다.




「소, 소꿉친구로서 진지하게 데, 데이트를 신청해줄 테니까…… 내 아르바이트 좀 도와주면 안 될까?」




 “……너 아직도 연애하던 시절에 미련이 남아 있는 거냐?”




 그렇게 말하며 한센은 무미건조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유다와는 친구 관계로 돌아갔음에도 그녀 쪽에서 종종 데이트 신청을 해오곤 했다. 하도 많이 받아서 이젠 농담으로 쓰일 정도가 됐지만, 그것을 승부수랍시고 내놓아야 하는 아유다가 약간 안쓰럽게 느껴졌다. 정말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한순간 생겨나긴 했다.




 하지만 현실은 원래 냉정한 법이다.




 “사양한다. 데이트와 맞바꾸면서까지 하고 싶은 일은 아냐. 내 기체는 비전투형이고, 모의전이라도 싸움에선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 한마디로 그 의뢰자는 번지수를 잘못 찾은 거야.”




「그렇지만 네 신형기는 성능상 전투형을 훨씬 능가한다고 그랬는데…….」




 그걸 알려준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날카로운 눈빛으로 아유다를 바라보며 한센은 자신의 추측을 한 번 터뜨려보았다.




 “널 이곳으로 보낸 사람, 아멜리아 선배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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