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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이 너무 병신같습니다. 이런 필력이어서 죄송합니다...
“그, 그럼 지금부터 황녀 전하의 지령을 전달하겠습니다.”
헛기침으로 모두의 시선이 쏠리자 에이미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시야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전부 초면이거니와, 수도 토박이였기에 베네치아의 모든 것이 낯설었다. 거기에 황명을 전해야 한다는 중압감으로 인해 그녀의 정신은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있었다.
원탁에 놓인 지령서를 어떻게든 집어 들긴 했다. 문제는 막상 소리 내어 읽으려니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긴장을 덜기 위해 태세를 몇 번이고 정비하는 와중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결국 맞은편에 앉은 아멜리아가 가볍게 조언을 건넸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잘못 읽었다고 처벌하거나 하진 않습니다.”
“아, 네. 죄송합니다…….”
사과해야 할 정도의 문제는 아니었건만, 어찌됐든 에이미는 사과를 했다. 그래도 운을 떼는 것엔 성공했기에 곳곳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A.De. 6440년 6월, 과인 아이린 바이스슈타인 폰 이메리룬은 3급 기사 한센 헤르만에게 이하의 명을 내린다.”
조용해진 좌중을 흘끗 바라본 뒤, 에이미는 글을 계속 읽어 내려갔다.
“최근 ‘검은 마도병기’를 운용하는 어떤 조직에 의한 테러 시도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과인은 납치당할 뻔했지만, 헤르만 경이 사태에 개입해준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 과인은 헤르만 경의 공로를 인정하여 합당한 보상을 내리고자 한다.”
에이미를 향했던 시선들이 이젠 한센에게 일제히 쏠렸다. 일말의 누설조차 없었던 황궁에서의 일을 지금이 되어서야 알게 된 탓이다. 갑자기 쏟아지는 관심이 부담스러웠는지, 한센은 아예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황실기사단연맹 준칙에 의거, 한센 헤르만 외 3명에게 베네치아 기지의 사용권을 부여한다. 엿새간 베네치아 기지에서 ‘가디언 엠프리스’의 시험 기동을 수행하라. 상황에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모든 것을 시험하도록. 본업을 마치고 남은 시간은 휴가로 써도 좋다.”
여기서 에이미는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표정으로 봤을 땐 내용을 전환할 준비를 미리 해두고 있는 것 같았다.
“또한 과인의 지령이 전달되는 것을 기점으로 이후의 계획을 알린다. 한센 헤르만 외 3명은 일주일 후에 열릴 군의 ‘에어쇼 6440’에 협력할 의무가 있다. 헤르만 경에겐 파일럿의 자격으로 참여해 UWP의 성과를 증명해보일 것을 명한다.”
“파일럿……?”
발코니 밑을 바라보던 한센의 눈이 한순간 에이미에게 고정되었다. 지금껏 당연하다고 생각해 넘어간 내용 속에 모난 부분이 하나 걸린 것이다. 해명을 요구하는 눈빛에 최소한의 배려라도 들어갈 여유는 없었다. 에이미는 겁먹은 강아지마냥 움찔하면서도 꿋꿋하게 지령서의 나머지를 계속 소리 내어 읽었다.
“행사 당일까지 필요한 모든 교육을 수도 경비대장, 아멜리아 베르크도프 폰 클라인에게 받아두도록 하라.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일정을 늦춰야 했지만, 그만큼 유비무환하기에 쉬워졌다. 과인과 UWP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당부한다. 본인으로서도 그대에게 많은 기대를 품고 있다. 이상, 제국 제1황녀 아이린 바이스슈타인 폰 이메리룬.”
그것을 끝으로 지령서는 원탁 위에 올려졌다. 직후 누구랄 새도 없이 손이 날아와 종이를 채갔다. 들은 내용과 실제 글을 대조하던 한센의 호흡이 어느 순간 멈췄다. 주욱 무표정이었기에 동요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잠시 시간을 들여 확인을 마친 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그는 묘한 표정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에어쇼라니, 무슨…….”
생각에 잠긴 한센 앞에 신문 한 부가 던져졌다. 이어 선배가 읽어보라는 듯 손가락으로 1면을 세 번 두드렸다. 메르겔에게 지령서를 넘기고는 조심스럽게 신문을 집어 펴 들었다. ‘에어쇼 6440, 예정대로 강행 결정’이라는 기사에 눈이 갔다.
글을 읽으려던 차에 선배가 입을 열었다.
“알고 있듯이, 군에선 대중 친화의 일환으로 매년 에어쇼를 개최하고 있다. 국민이 이전 시대의 기술을 가장 효과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지. 너희들의 임무는 이번 프로젝트의 성과를 그곳에서 가시적으로 공개하는 것이다."
“공개라니, 누구한테요? 국민?”
먼저 질문을 한 쪽은 한센이 아닌, 아유다였다. 일행 중 유일하게 간이침대에 누워 요리가 나올 때까지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정신은 아직 생생한지, 허리를 다쳐 고생하는 와중에도 목소리만은 여전히 깨끗했다.
“황녀 전하와 의원들 앞에서다. 스폰서라고 봐도 좋아. 에어쇼를 빙자한 작은 시사회를 가진다고 생각하면 돼.”
“꼭 그곳에서 신형기를 봐야 할 만큼 급박한 사정이 있는 것처럼 들리네요.”
숨기지 말라는 듯한 뉘앙스로 말을 꺼내며, 메르겔은 지령서를 다소곳이 접어 물컵 옆에 내려놓았다. 옆자리에 앉은 아네모네가 곤란한 듯 탄식을 내뱉었다. 그의 지적에 공격적인 의도가 없음을 판단하고 나서야 아멜리아는 운을 뗐다.
“그래, 네 말대로 지금 상황이 좋지 않다. 검은 마도병기 때문에 일을 서둘러야만 하는 처지야. 설명을 원한다면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해주겠다.”
“상관없어요.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을 테니까.”
그제야 한센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신문을 돌돌 마는 것으로 보아 기사를 다 훑어본 모양이다. 표면상으론 동요가 없었지만, 이어지는 말은 확실히 상대를 비꼬는 모양새였다. 듣고 있던 아멜리아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이건 상식적으로 나올 수 없는 발상이에요. 이제까지 기밀로 유지하던 걸 어느 날 갑자기 짠, 하고 풀어버리는 게 말이 돼요? 분명 누군가가 이게 최선의 방법이라면서 아이…… 아니, 황녀 전하를 부추겼겠죠. 틀렸나요, 선배?”
“이해하기 힘든 지령이라는 건 나도 알고 있다. 그래서 필요하면 사정을 설명해주겠다고 끝에 덧붙였다만.”
“경위를 들을 생각은 있습니다. 황녀 전하의 지령이 아닌, 선배의 아이디어라는 전제를 깔고요. 괜찮겠습니까?”
“……좋을 대로 해.”
후배의 태도가 불쾌해도 아멜리아는 화를 내며 지적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순점이 들춰지는 것으로 이야기에 속도가 붙기 때문이다. 물론 기사에 어울리지 않는 후배의 언동이 한심하게 느껴지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의회에서 UWP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나섰다.”
지령서와 신문을 다시 가져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확하게는, 프로젝트 자금이 어떻게 운용됐는지 조사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경우에 따라선 국고를 개인적으로 유용했다는 혐의가 전하께 씌워질 수도 있다. 에어쇼에 신형기를 내보내려는 것도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의원들에게 전하의 성과를 보일 수 있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인 셈이지.”
“참고로 전하께서 ‘이런 일에 휘말리게 만들어 면목 없다’고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저는 잘 모르겠지만, 많이 곤란해하시는 것 같았어요.”
에이미의 첨언에 아멜리아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린과 한센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아주 모르고 있진 않았다.
“이번 납치미수 사건으로 본국에 비상이 걸렸다. 의회에선 적의 영향력이 마침내 수도에까지 뻗었다고 보고 있어. UWP의 실체를 요구하는 건 거기에서 느낀 조바심의 발로다.”
“의회는 가디언을 일종의 타개책으로 생각하는군요.”
“그래. 너와 네 마도병기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자금 운용을 조사하겠다는 말은 반쯤 핑계일 가능성이 높아. 아마 검은 마도병기에 대항할 수단을 강구하려는 게 본심이겠지. 다른 말로는, 신무기.”
마지막의 신무기, 라는 단어를 일부러 힘주어 발음했다. 아직도 한센이 거부감을 보이는지 한 번 떠보려는 것이다. 미간을 찡그리다 만 것을 보니 화가 많이 누그러졌을지도 모르겠다. 아멜리아는 이쯤에서 부언을 줄이기로 했다.
“그래서 의원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동시에 황녀 전하의 입지도 보전되는 합의점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에어쇼 6440을 이용하자는 사견이 최선책으로 떠올랐어. 이 정도면 상황이 대충 이해됐을 것 같다만, 부족한 부분이 있나?”
한센은 당장 대답하지 않았다. 강요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여전한 탓이다. 이래저래 결국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이 아닌가. 자기 의지에 반하는 일은 이유가 그럴싸해도 하기 싫은 법이다. 진정으로 누구를 위한 결정이 되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래도 선배의 말이 조금은 납득되긴 했다. 검은 마도병기의 출현이 국가적 위기라는 건 알고 있다. UWP-언바운드 윙 플랜의 취지가 아이린을 옭아맬 수도 있다. 방법이 잘못됐지만, 사정이 저렇다면 엠프리스의 데이터를 수집하려 든 것도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저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건 위험하다는 판단이 섰다.
결국 어떤 결심도 하지 못한 채, 일단 입부터 열고 봤다.
“즉, 제가 하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 피해가 간다는 거죠?”
무의식적으로 잘못된 호칭을 썼지만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아멜리아는 옅은 미소와 함께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쉽게 말하자면 그렇지. 진정으로 황녀 전하를 생각한다면, 그분의 위신을 위해 한 번쯤 봉사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이 일은 궁극적으로 너에게도 득이 된다.”
“득이 될지 아닐지는 제가 판단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곤란해지는 것도 보기 싫어요. 저답지 않은 말이겠지만…… 정말 좋은 분이셨어요. 그래서 지령을 바로 거부하지 못하는 겁니다.”
단지 아이린의 진의가 무언가에 가려진 듯한 느낌이 껄끄러울 뿐이었다. 선배는 아직 자신의 의도를 완전히 드러내지 않았다. 무턱대고 동의하면 스스로 올가미에 걸려드는 꼴이 된다. 명확해진 의문점은 겨우 하나다.
조심해지자. 하지만 어떻게 빠져나오지? 피로와 함께 작은 두통이 몰려왔다.
“한센의 감정을 건드리는 건 그쯤 해두시죠, 선배.”
침묵이 길어질 즈음, 메르겔이 분노 어린 목소리로 이야기에 개입했다. 신경질적으로 컵을 내려놓으면서 나는 소음이 어지간히 크다.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
“그건 득이 아니에요. 거대한 실이지. 누구의 의도가 됐든, 에어쇼에 나가는 건 원래의 목적을 망각하는 행위입니다.”
“메르겔, 제발 선배 앞에서…….”
다급히 그를 말리려는 아네모네를 아유다가 눈짓으로 멈추게 했다. 상황은 잘 몰라도 메르겔의 동요가 예사롭지 않음을 감지한 것이다. 저렇게 작정하고 싸움을 거는 인간에게 중재가 통할 리 없다. 그저 가만히 듣는 수밖에.
“UWP의 취지를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만.”
냉정을 유지하던 아멜리아도 이번만큼은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관제실에서 이것저것 묻던 때부터 메르겔과는 반드시 충돌할 것이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다.
“저는 신형기가 만들어진 의도를 이야기하고 있어요. 가디언 엠프리스는 처음부터 비전투형으로 기획된 기체에요. 그것을 군이 개최하는 에어쇼에서, ‘무기’로 선보인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한센이 자기 사상을 스스로 부정하게 만드는 것과 똑같아요.”
“비전투형이니, 굳이 무기로 소개해야 될 필요는 없어. 한센의 의지도 최대한으로 존중한다. 그들이 주목할 건 신형기의 용도가 아닌, 성능이야.”
“선배나 황녀의 뜻을 의회가 온전히 따를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사태가 사태이니만큼 신형기를 무기로 개조할 가능성도 적지 않아요. 거기에서 제작자의 의지가 존중될 여지는 없고요.”
말을 마친 뒤 메르겔은 얕게 호흡을 골랐다. 논쟁이나 토론을 할 때면 이런 식으로 감정을 다스리곤 했다. 정치인 지망생답게 좌중의 주의를 모으고는, 한센에게 시선을 옮기며 다시 운을 뗐다.
“개인적으로는 네가 황녀의 지령을 거부했으면 해. 이건 그 사람에 대한 감정만으로 접근해선 안 되는 문제야. 아유다와 널 싸움붙인 게 ‘존중’의 일환인지 잘 생각해봐. 아멜리아 선배는 군의 사람이야. 그걸 간과하지 마.”
“경솔해질 생각은 없어. 그러니까 좀 진정해.”
메르겔이 화를 내니 한센은 오히려 곤란해졌다. 쓸데없이 선배를 자극해서 좋을 일은 없다. 밝고 긍정적이었던 녀석이 갑자기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생소했다. 놓친 부분이 보여, 퇴로가 하나 뚫리게 된 건 불행 중 다행이지만.
“결국 대의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본래의 목적에 충실할 것인가의 문제네요.”
분위기를 가라앉히듯 아유다가 나직이 쟁점을 요약했다. 그녀가 중립을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이 모두에게 의외로 받아들여졌다. 대화가 멈춘 동안 메르겔은 다시 자리에 앉았고, 한센은 생각에 잠겼다.
문제를 보는 관점이 확실히 달라지긴 했다.
“가디언을 군사적으로 이용할 의향이 있나요, 선배?”
아유다를 통해 자신의 투지를 끌어내려 했던 이유를, 한센은 이 한 문장에 압축해서 표현했다. 아멜리아는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진의를 풀어나갔다.
“없다고 말하는 건 불가능하겠지. 비전투형인 건 알지만 무기로서의 도입도 검토해야만 해. 메르겔의 말대로, 나는 군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유다에게 절 자극하도록 시킨 건, 데이터 수집을 위해서?”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네 트라우마가 아직도 살아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한센 헤르만과 그의 기체를 병력으로 쓰기 적합한가에 대한 실험이었지. 실패로 돌아가면 신형기의 데이터 일체를 양도받을 생각도 있었다.”
“역시 어디로 봐도 존중이라고 할 수 없겠네요.”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로 메르겔이 작게 비아냥거렸다. 그리고 아네모네도 참을 것 없이 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가격했다. 메르겔의 상체가 반쯤 접히는 것을 본 아멜리아는,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려 한센을 바라보았다.
“누구의 의견을 수용할지는 네 자유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반드시 포기해야 되는 게 있다는 사실은 기억해둬. 너도 성인이니 그 정도는 알 거라고 본다. 그러니 결정은 전적으로 너에게 맡기겠다.”
역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한센의 시선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한 지 오래였다.
아멜리아 선배의 진의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가디언이 군사용으로 쓰이지만 않는다면 기술 정도야 넘겨줄 수 있다. 그것으로 검은 마도병기의 위협이 줄어든다면 다행이겠지. 다만 정치적, 감정적인 이유에 휘둘리지 않은 채로 결정을 내리고 싶었다.
UWP의 우산 아래 자신은 취지와 어울리지 않는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아이린은 웃으며 괜찮다고, 존중하겠다고 했다. 단지 1호 선발자의 격에 어울리는 성과만 내주면 된다면서. 그렇다면 에어쇼 참가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아이린을 실망시키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까.
그 대가로 사람들에게 신형기는 ‘무기’로 각인된다. 아니라고 해도 군에서 개최하는 행사에 많은 것을 기대하면 곤란하다. 오해가 생기면 그것에 맞춰 자신의 사상도 바꿔야 한다. 그것만큼은 절대로 피하고 싶다. 에어쇼에 불참하면 사상을 보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경우에 따라선 최선의 선택이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타인, 그것도 아이린의 입지가 위태로워지는 엄청난 실례를 저질러야 한다.
“치잇, 한센. 기억나?”
가만히 누워 있던 아유다가 갑자기 소매깃을 당겼다. 한센과 눈이 마주치자 평소대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속삭였다.
“신형기의 이름을 가디언(Guardian)으로 정한 이유.”
가디언. 고대어로 ‘수호자’라는 뜻이다. 한때 아유다에게 설명해준 적이 있었다. 따로 골라놓은 명칭 중에서 왜 그것을 가장 마음에 들어 했는지. 한동안 그녀를 응시하던 한센은, 그제야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결심이 섰다.
“저는…….”
“저, 죄송합니다만.”
말을 꺼내는 찰나, 전혀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앳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다시 모두의 시선이 쏠리자 에이미는 한순간 몸이 굳었다. 하지만 이내 검지로 유리문을 가리키며 주목하라는 듯 힘을 주어 말을 맺었다.
“저녁식사 준비 다 된 것 같은데요.”
결말이 너무 병신같습니다. 이런 필력이어서 죄송합니다...
03. 루벤크렌체(Luvenkrantze) - 7 (3장 完)
“그, 그럼 지금부터 황녀 전하의 지령을 전달하겠습니다.”
헛기침으로 모두의 시선이 쏠리자 에이미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시야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전부 초면이거니와, 수도 토박이였기에 베네치아의 모든 것이 낯설었다. 거기에 황명을 전해야 한다는 중압감으로 인해 그녀의 정신은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있었다.
원탁에 놓인 지령서를 어떻게든 집어 들긴 했다. 문제는 막상 소리 내어 읽으려니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긴장을 덜기 위해 태세를 몇 번이고 정비하는 와중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결국 맞은편에 앉은 아멜리아가 가볍게 조언을 건넸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잘못 읽었다고 처벌하거나 하진 않습니다.”
“아, 네. 죄송합니다…….”
사과해야 할 정도의 문제는 아니었건만, 어찌됐든 에이미는 사과를 했다. 그래도 운을 떼는 것엔 성공했기에 곳곳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A.De. 6440년 6월, 과인 아이린 바이스슈타인 폰 이메리룬은 3급 기사 한센 헤르만에게 이하의 명을 내린다.”
조용해진 좌중을 흘끗 바라본 뒤, 에이미는 글을 계속 읽어 내려갔다.
“최근 ‘검은 마도병기’를 운용하는 어떤 조직에 의한 테러 시도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과인은 납치당할 뻔했지만, 헤르만 경이 사태에 개입해준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 과인은 헤르만 경의 공로를 인정하여 합당한 보상을 내리고자 한다.”
에이미를 향했던 시선들이 이젠 한센에게 일제히 쏠렸다. 일말의 누설조차 없었던 황궁에서의 일을 지금이 되어서야 알게 된 탓이다. 갑자기 쏟아지는 관심이 부담스러웠는지, 한센은 아예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황실기사단연맹 준칙에 의거, 한센 헤르만 외 3명에게 베네치아 기지의 사용권을 부여한다. 엿새간 베네치아 기지에서 ‘가디언 엠프리스’의 시험 기동을 수행하라. 상황에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모든 것을 시험하도록. 본업을 마치고 남은 시간은 휴가로 써도 좋다.”
여기서 에이미는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표정으로 봤을 땐 내용을 전환할 준비를 미리 해두고 있는 것 같았다.
“또한 과인의 지령이 전달되는 것을 기점으로 이후의 계획을 알린다. 한센 헤르만 외 3명은 일주일 후에 열릴 군의 ‘에어쇼 6440’에 협력할 의무가 있다. 헤르만 경에겐 파일럿의 자격으로 참여해 UWP의 성과를 증명해보일 것을 명한다.”
“파일럿……?”
발코니 밑을 바라보던 한센의 눈이 한순간 에이미에게 고정되었다. 지금껏 당연하다고 생각해 넘어간 내용 속에 모난 부분이 하나 걸린 것이다. 해명을 요구하는 눈빛에 최소한의 배려라도 들어갈 여유는 없었다. 에이미는 겁먹은 강아지마냥 움찔하면서도 꿋꿋하게 지령서의 나머지를 계속 소리 내어 읽었다.
“행사 당일까지 필요한 모든 교육을 수도 경비대장, 아멜리아 베르크도프 폰 클라인에게 받아두도록 하라.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일정을 늦춰야 했지만, 그만큼 유비무환하기에 쉬워졌다. 과인과 UWP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당부한다. 본인으로서도 그대에게 많은 기대를 품고 있다. 이상, 제국 제1황녀 아이린 바이스슈타인 폰 이메리룬.”
그것을 끝으로 지령서는 원탁 위에 올려졌다. 직후 누구랄 새도 없이 손이 날아와 종이를 채갔다. 들은 내용과 실제 글을 대조하던 한센의 호흡이 어느 순간 멈췄다. 주욱 무표정이었기에 동요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잠시 시간을 들여 확인을 마친 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그는 묘한 표정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에어쇼라니, 무슨…….”
생각에 잠긴 한센 앞에 신문 한 부가 던져졌다. 이어 선배가 읽어보라는 듯 손가락으로 1면을 세 번 두드렸다. 메르겔에게 지령서를 넘기고는 조심스럽게 신문을 집어 펴 들었다. ‘에어쇼 6440, 예정대로 강행 결정’이라는 기사에 눈이 갔다.
글을 읽으려던 차에 선배가 입을 열었다.
“알고 있듯이, 군에선 대중 친화의 일환으로 매년 에어쇼를 개최하고 있다. 국민이 이전 시대의 기술을 가장 효과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지. 너희들의 임무는 이번 프로젝트의 성과를 그곳에서 가시적으로 공개하는 것이다."
“공개라니, 누구한테요? 국민?”
먼저 질문을 한 쪽은 한센이 아닌, 아유다였다. 일행 중 유일하게 간이침대에 누워 요리가 나올 때까지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정신은 아직 생생한지, 허리를 다쳐 고생하는 와중에도 목소리만은 여전히 깨끗했다.
“황녀 전하와 의원들 앞에서다. 스폰서라고 봐도 좋아. 에어쇼를 빙자한 작은 시사회를 가진다고 생각하면 돼.”
“꼭 그곳에서 신형기를 봐야 할 만큼 급박한 사정이 있는 것처럼 들리네요.”
숨기지 말라는 듯한 뉘앙스로 말을 꺼내며, 메르겔은 지령서를 다소곳이 접어 물컵 옆에 내려놓았다. 옆자리에 앉은 아네모네가 곤란한 듯 탄식을 내뱉었다. 그의 지적에 공격적인 의도가 없음을 판단하고 나서야 아멜리아는 운을 뗐다.
“그래, 네 말대로 지금 상황이 좋지 않다. 검은 마도병기 때문에 일을 서둘러야만 하는 처지야. 설명을 원한다면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해주겠다.”
“상관없어요.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을 테니까.”
그제야 한센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신문을 돌돌 마는 것으로 보아 기사를 다 훑어본 모양이다. 표면상으론 동요가 없었지만, 이어지는 말은 확실히 상대를 비꼬는 모양새였다. 듣고 있던 아멜리아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이건 상식적으로 나올 수 없는 발상이에요. 이제까지 기밀로 유지하던 걸 어느 날 갑자기 짠, 하고 풀어버리는 게 말이 돼요? 분명 누군가가 이게 최선의 방법이라면서 아이…… 아니, 황녀 전하를 부추겼겠죠. 틀렸나요, 선배?”
“이해하기 힘든 지령이라는 건 나도 알고 있다. 그래서 필요하면 사정을 설명해주겠다고 끝에 덧붙였다만.”
“경위를 들을 생각은 있습니다. 황녀 전하의 지령이 아닌, 선배의 아이디어라는 전제를 깔고요. 괜찮겠습니까?”
“……좋을 대로 해.”
후배의 태도가 불쾌해도 아멜리아는 화를 내며 지적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순점이 들춰지는 것으로 이야기에 속도가 붙기 때문이다. 물론 기사에 어울리지 않는 후배의 언동이 한심하게 느껴지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의회에서 UWP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나섰다.”
지령서와 신문을 다시 가져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확하게는, 프로젝트 자금이 어떻게 운용됐는지 조사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경우에 따라선 국고를 개인적으로 유용했다는 혐의가 전하께 씌워질 수도 있다. 에어쇼에 신형기를 내보내려는 것도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의원들에게 전하의 성과를 보일 수 있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인 셈이지.”
“참고로 전하께서 ‘이런 일에 휘말리게 만들어 면목 없다’고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저는 잘 모르겠지만, 많이 곤란해하시는 것 같았어요.”
에이미의 첨언에 아멜리아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린과 한센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아주 모르고 있진 않았다.
“이번 납치미수 사건으로 본국에 비상이 걸렸다. 의회에선 적의 영향력이 마침내 수도에까지 뻗었다고 보고 있어. UWP의 실체를 요구하는 건 거기에서 느낀 조바심의 발로다.”
“의회는 가디언을 일종의 타개책으로 생각하는군요.”
“그래. 너와 네 마도병기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자금 운용을 조사하겠다는 말은 반쯤 핑계일 가능성이 높아. 아마 검은 마도병기에 대항할 수단을 강구하려는 게 본심이겠지. 다른 말로는, 신무기.”
마지막의 신무기, 라는 단어를 일부러 힘주어 발음했다. 아직도 한센이 거부감을 보이는지 한 번 떠보려는 것이다. 미간을 찡그리다 만 것을 보니 화가 많이 누그러졌을지도 모르겠다. 아멜리아는 이쯤에서 부언을 줄이기로 했다.
“그래서 의원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동시에 황녀 전하의 입지도 보전되는 합의점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에어쇼 6440을 이용하자는 사견이 최선책으로 떠올랐어. 이 정도면 상황이 대충 이해됐을 것 같다만, 부족한 부분이 있나?”
한센은 당장 대답하지 않았다. 강요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여전한 탓이다. 이래저래 결국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이 아닌가. 자기 의지에 반하는 일은 이유가 그럴싸해도 하기 싫은 법이다. 진정으로 누구를 위한 결정이 되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래도 선배의 말이 조금은 납득되긴 했다. 검은 마도병기의 출현이 국가적 위기라는 건 알고 있다. UWP-언바운드 윙 플랜의 취지가 아이린을 옭아맬 수도 있다. 방법이 잘못됐지만, 사정이 저렇다면 엠프리스의 데이터를 수집하려 든 것도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저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건 위험하다는 판단이 섰다.
결국 어떤 결심도 하지 못한 채, 일단 입부터 열고 봤다.
“즉, 제가 하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 피해가 간다는 거죠?”
무의식적으로 잘못된 호칭을 썼지만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아멜리아는 옅은 미소와 함께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쉽게 말하자면 그렇지. 진정으로 황녀 전하를 생각한다면, 그분의 위신을 위해 한 번쯤 봉사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이 일은 궁극적으로 너에게도 득이 된다.”
“득이 될지 아닐지는 제가 판단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곤란해지는 것도 보기 싫어요. 저답지 않은 말이겠지만…… 정말 좋은 분이셨어요. 그래서 지령을 바로 거부하지 못하는 겁니다.”
단지 아이린의 진의가 무언가에 가려진 듯한 느낌이 껄끄러울 뿐이었다. 선배는 아직 자신의 의도를 완전히 드러내지 않았다. 무턱대고 동의하면 스스로 올가미에 걸려드는 꼴이 된다. 명확해진 의문점은 겨우 하나다.
조심해지자. 하지만 어떻게 빠져나오지? 피로와 함께 작은 두통이 몰려왔다.
“한센의 감정을 건드리는 건 그쯤 해두시죠, 선배.”
침묵이 길어질 즈음, 메르겔이 분노 어린 목소리로 이야기에 개입했다. 신경질적으로 컵을 내려놓으면서 나는 소음이 어지간히 크다.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
“그건 득이 아니에요. 거대한 실이지. 누구의 의도가 됐든, 에어쇼에 나가는 건 원래의 목적을 망각하는 행위입니다.”
“메르겔, 제발 선배 앞에서…….”
다급히 그를 말리려는 아네모네를 아유다가 눈짓으로 멈추게 했다. 상황은 잘 몰라도 메르겔의 동요가 예사롭지 않음을 감지한 것이다. 저렇게 작정하고 싸움을 거는 인간에게 중재가 통할 리 없다. 그저 가만히 듣는 수밖에.
“UWP의 취지를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만.”
냉정을 유지하던 아멜리아도 이번만큼은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관제실에서 이것저것 묻던 때부터 메르겔과는 반드시 충돌할 것이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다.
“저는 신형기가 만들어진 의도를 이야기하고 있어요. 가디언 엠프리스는 처음부터 비전투형으로 기획된 기체에요. 그것을 군이 개최하는 에어쇼에서, ‘무기’로 선보인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한센이 자기 사상을 스스로 부정하게 만드는 것과 똑같아요.”
“비전투형이니, 굳이 무기로 소개해야 될 필요는 없어. 한센의 의지도 최대한으로 존중한다. 그들이 주목할 건 신형기의 용도가 아닌, 성능이야.”
“선배나 황녀의 뜻을 의회가 온전히 따를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사태가 사태이니만큼 신형기를 무기로 개조할 가능성도 적지 않아요. 거기에서 제작자의 의지가 존중될 여지는 없고요.”
말을 마친 뒤 메르겔은 얕게 호흡을 골랐다. 논쟁이나 토론을 할 때면 이런 식으로 감정을 다스리곤 했다. 정치인 지망생답게 좌중의 주의를 모으고는, 한센에게 시선을 옮기며 다시 운을 뗐다.
“개인적으로는 네가 황녀의 지령을 거부했으면 해. 이건 그 사람에 대한 감정만으로 접근해선 안 되는 문제야. 아유다와 널 싸움붙인 게 ‘존중’의 일환인지 잘 생각해봐. 아멜리아 선배는 군의 사람이야. 그걸 간과하지 마.”
“경솔해질 생각은 없어. 그러니까 좀 진정해.”
메르겔이 화를 내니 한센은 오히려 곤란해졌다. 쓸데없이 선배를 자극해서 좋을 일은 없다. 밝고 긍정적이었던 녀석이 갑자기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생소했다. 놓친 부분이 보여, 퇴로가 하나 뚫리게 된 건 불행 중 다행이지만.
“결국 대의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본래의 목적에 충실할 것인가의 문제네요.”
분위기를 가라앉히듯 아유다가 나직이 쟁점을 요약했다. 그녀가 중립을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이 모두에게 의외로 받아들여졌다. 대화가 멈춘 동안 메르겔은 다시 자리에 앉았고, 한센은 생각에 잠겼다.
문제를 보는 관점이 확실히 달라지긴 했다.
“가디언을 군사적으로 이용할 의향이 있나요, 선배?”
아유다를 통해 자신의 투지를 끌어내려 했던 이유를, 한센은 이 한 문장에 압축해서 표현했다. 아멜리아는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진의를 풀어나갔다.
“없다고 말하는 건 불가능하겠지. 비전투형인 건 알지만 무기로서의 도입도 검토해야만 해. 메르겔의 말대로, 나는 군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유다에게 절 자극하도록 시킨 건, 데이터 수집을 위해서?”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네 트라우마가 아직도 살아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한센 헤르만과 그의 기체를 병력으로 쓰기 적합한가에 대한 실험이었지. 실패로 돌아가면 신형기의 데이터 일체를 양도받을 생각도 있었다.”
“역시 어디로 봐도 존중이라고 할 수 없겠네요.”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로 메르겔이 작게 비아냥거렸다. 그리고 아네모네도 참을 것 없이 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가격했다. 메르겔의 상체가 반쯤 접히는 것을 본 아멜리아는,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려 한센을 바라보았다.
“누구의 의견을 수용할지는 네 자유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반드시 포기해야 되는 게 있다는 사실은 기억해둬. 너도 성인이니 그 정도는 알 거라고 본다. 그러니 결정은 전적으로 너에게 맡기겠다.”
역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한센의 시선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한 지 오래였다.
아멜리아 선배의 진의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가디언이 군사용으로 쓰이지만 않는다면 기술 정도야 넘겨줄 수 있다. 그것으로 검은 마도병기의 위협이 줄어든다면 다행이겠지. 다만 정치적, 감정적인 이유에 휘둘리지 않은 채로 결정을 내리고 싶었다.
UWP의 우산 아래 자신은 취지와 어울리지 않는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아이린은 웃으며 괜찮다고, 존중하겠다고 했다. 단지 1호 선발자의 격에 어울리는 성과만 내주면 된다면서. 그렇다면 에어쇼 참가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아이린을 실망시키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까.
그 대가로 사람들에게 신형기는 ‘무기’로 각인된다. 아니라고 해도 군에서 개최하는 행사에 많은 것을 기대하면 곤란하다. 오해가 생기면 그것에 맞춰 자신의 사상도 바꿔야 한다. 그것만큼은 절대로 피하고 싶다. 에어쇼에 불참하면 사상을 보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경우에 따라선 최선의 선택이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타인, 그것도 아이린의 입지가 위태로워지는 엄청난 실례를 저질러야 한다.
“치잇, 한센. 기억나?”
가만히 누워 있던 아유다가 갑자기 소매깃을 당겼다. 한센과 눈이 마주치자 평소대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속삭였다.
“신형기의 이름을 가디언(Guardian)으로 정한 이유.”
가디언. 고대어로 ‘수호자’라는 뜻이다. 한때 아유다에게 설명해준 적이 있었다. 따로 골라놓은 명칭 중에서 왜 그것을 가장 마음에 들어 했는지. 한동안 그녀를 응시하던 한센은, 그제야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결심이 섰다.
“저는…….”
“저, 죄송합니다만.”
말을 꺼내는 찰나, 전혀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앳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다시 모두의 시선이 쏠리자 에이미는 한순간 몸이 굳었다. 하지만 이내 검지로 유리문을 가리키며 주목하라는 듯 힘을 주어 말을 맺었다.
“저녁식사 준비 다 된 것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