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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프를 겪고 있어서 많이 늦어졌습니다. 글이나 전개, 문장의 퀄리티가 너무 쓰레기네요. 다음부턴 좀 더 나은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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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루벤크렌체(Luvenkrantze) - 6
몇 초나마 확보된 틈을 인지하며 한센은 조용히 침을 삼켰다. 여기서부턴 신형기가 오체분시를 당할 각오까지 해두는 편이 좋다. 아유다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내기 힘들었지만, 달리 뾰족한 수가 없는 상황에서 뭘 어쩌겠는가. 일이 좋게 될 것이라는 기대는 애초부터 하지도 않았다. 긴장의 응어리에서 전해지는 묘한 그리움을 음미하면서, 열기 섞인 날숨과 함께 부르르 떨리는 조종간을 다시 바로 쥐었다.
탑승자의 의지에 호응하여, 엠프리스는 와이어에 구속된 팔을 비틀었다. 맞대어진 아르엘의 오른팔이 그 움직임에 휘말려 바깥쪽으로 벌어졌다. 저편의 저항에도 아랑곳 않고 비틀리는 각도는 커졌다. 힘을 더하자 장갑이 구겨지면서 끼익, 하고 날 선 소음이 났다. 어느 순간 와이어의 수명이 다했음을 알았고, 그에 맞추듯 한센은 좀 더 공격적으로 나아가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상식선에서 대응하겠다고 하지 않았어?」
아르엘의 외장 장갑이 반쯤 뜯겨나갔을 즈음, 아유다가 비웃음 섞인 어조로 물었다. 이상하게 화가 나는 대신 파괴적인 흥분이 폭발하듯 전신에 퍼져갔다. 좀 전의 자제심은 어디에 팔아먹었는지, 양심의 가책도 못 느낀 채 한센은 남은 장갑마저 거칠게 떼어냈다.
「모순덩어리네, 한센 헤르만.」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데.”
힘없이 풀린 와이어와 고철이 된 장갑과 체인 블레이드가 차례로 추락했다. 묶인 시간은 길지 않았는데, 꼭 몇 년 만에 구속구를 벗어던진 기분이었다.
이 직후 이어진 아유다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열린 쪽에서 달려드는 톱날이 엠프리스의 어깨를 긁고 지나갔다. 전이장갑을 찢고 직접 피해를 줄 만큼의 강도다. 수백 개의 이빨들이 레일을 따라 돌면서 대각선으로 긴 상흔을 남겼다. 입자와 섞인 불똥의 다발이 강렬한 색채의 대비를 내뿜으며 메인 모니터 한구석을 순식간에 물들여갔다.
간담이 서늘해졌지만, 이미 예상하고 있지 않았는가. 아쉬운 감정은 곧 복수하고픈 본능에 완전히 덮여버렸다. 마침내 엠프리스는 적의 머리를 붙잡고, 뜯어냈다. 다신 못 쓰도록 악력으로 으깬 뒤 그것 역시 허공에 내팽개쳤다. 우측에서 다가오는 톱날은 피할 것 없이 맨손으로 받아냈다. 손가락이 잘리기 전에 체인 블레이드를 완전히 망가뜨리려 했다.
아유다는 하나 남은 장비마저 잃으려 하지 않을 테다. 실제로 아르엘은 서둘러 무기를 거두고는 뒤로 빠지려는 기색을 보였다. 쫓으려 하자 이쪽으로 주먹세례가 찾아왔다. 권투로 단련된, 체계 잡힌 주먹질을 막아내는 것만으로도 한센을 벅차게 했다. 그 와중에 메인 카메라에 한 번 맞으니 콕핏에까지 진동이 전해졌다. 시끄럽게 울려대는 알람이 왠지 거슬린다.
자세가 흐트러진 사이에 아르엘은 엠프리스의 어깨를 붙잡고 크게 곡선을 그리며 날았다. 등 뒤를 점하려는 의도가 빤히 보이는 노림수다. 움직이지 못하는 동안 어깨 관절을 완전히 망가뜨리려는 거겠지. 찢긴 장갑의 틈새 사이로 손을 쑤셔 넣으려 들 것이다. 물론 그 사단이 일어나기 전에 엎어치기로 아르엘을 내던졌다.
저 멀리까지 힘없이 날아가는, 시커먼 갑주를 두른 철거인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머리가 날아갔으니 장님이 됐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았다. 스러스터 불꽃이 터져 나오는 거의 동시에 엠프리스를 향해 와이어가 날아들었다. 빠르기도 빠르기지만 오른쪽 허벅지에 정확히 닿는 순식간에 감겨왔다. 하나 남은 와이어를 이용한 최후의 발악. 끝이 머지않았음을 직감한 한센이었다.
와이어가 회수되자 자연스레 두 기체의 사이가 좁혀졌다. 멀게 느껴지는 거리라는 착각은 이 순간이 되자 단번에 소멸해버렸다. 서로가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누가 먼저 손을 썼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유다나 자신이나 끝장을 낼 각오로 달려들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은색 나이프가 엠프리스의 허벅지를 꿰뚫었다. 같은 순간에 아르엘의 어깨 관절부로 손날이 침투했다. 그 상태 그대로 아르엘은 발밑으로 전개한 나이프를 비틀었다. 우드득, 하는 소리가 콕핏에까지 전해질 정도로 크게 났다. 이에 질세라 엠프리스도 붙잡은 관절에 힘을 주었다. 아르엘의 오른팔이 완전히 떨어져나갔다.
자기도 비슷한 꼴을 당할 순 없다. 엠프리스는 떼어낸 팔을 몽둥이삼아 아르엘의 콕핏을 향해 내리쳤다. 효과가 있었는지 상대는 크게 휘청거렸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나이프가 전개된 다리를 ‘몽둥이’로 여러 번 가격했다. 무릎 관절이 너덜너덜해질 때가 되어서야 직접 손으로 잡아 뜯었다. 이로서 아르엘은 오른팔과 왼쪽 다리를 차례로 잃었다.
무전으로 들려오는 쳇, 뒤로 아유다의 볼멘소리가 이어졌다.
「아파라…… 싸움 참 무식하게 하네.」
고통을 호소하듯, 신음이 섞인 목소리. 얼핏 들어보면 제정신을 차린 것 같기도 했다. 충격으로 이성이 돌아왔다면 희소식이겠지만, 한센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몽둥이’를 버린 뒤 아직 꽂혀 있는 나이프를 뽑았다. 아래쪽의 와이어를 잘라내고는 체인 블레이드를 피해 아르엘의 팔꿈치에 날을 찔러 넣었다. 한 번 눌러 깊숙이 파고들게 하고, 한 번 돌려 하완부를 완전히 도려냈다. 톱날이 회전을 멈추기 전에 멀쩡한 쪽 다리에 그것을 처박아버렸다. 콕핏을 걷어차 뒤로 뺀 직후 하늘 높이 나이프를 들었다. 마지막 일격으로 단번에 전투불능까지 내몰 생각이었다.
아르엘의 몰골은, 이게 마도병기인가 싶을 정도로 처참했다. 보통 모의전에서 이 정도의 파괴는 인정되지도, 용납되지도 않는다.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음에도 굳이 여기까지 온 이유는 뭘까. 신형기의 성능은 이미 충분히 입증되었다. 물러서려는 아르엘을 보면서 한센은 문득, 자길 몰아붙여온 이 충동이 낯설지 않은 것임을 깨달았다.
몇 년 전에 느껴본 적이 있다. 친숙함을 넘어 몸에 밴 이 감각. 조종간을 당기면서, 거칠게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정확히 언제였더라. 그래, 기억났다.
난생 처음, 사람을 죽였을 때…….
「생각해봤어? 지금 누가 더 야수 같은지.」
아유다가 나직이 던진 지적에 한센은 눈을 크게 떴다. 마치 자기가 누나인 양 꺼낸 그 말이 왠지 모르게 심장을 깊이 찔러왔다. 이젠 아유다가 카페인에 취했는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순간 간접적으로 전달된 아멜리아 선배의 진의는 확실히 이해했다.
잘라낸 나이프가, 일광을 머금은 채 아르엘의 콕핏을 꿰뚫으려던 찰나,
「거기까지. 모의전은 종료다.」
일방적인 명령과 함께 한센의 손도 멈췄다. 최후의 일격은 장갑을 칼끝으로 콕 건드리는 선에서 끝났다. 목소리의 주인은 당연히 아멜리아 선배였다. 통신이 연결된 것을 볼 때 재밍을 푼 것이리라.
크게 숨을 내쉰 뒤 한센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잔존해 있던 미소의 여분마저 싹 사라졌다.
귀환을 학수고대하며 행거까지 달려온 아네모네는, 두 마도병기를 보자마자 아연실색하고야 말았다. 관제실에서 이미 보아 알고 있었지만 실제 광경은 훨씬 더 심했다. 머리가 하얘진 채 가만히 서 있는 와중에, 엠프리스의 콕핏이 동요하자 망설일 것 없이 바닥을 박찼다.
삼중으로 개방된 커버에서 한센이 힘없이 걸어 나왔다.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어서 쉽사리 다가가기 어려웠다. 몇 보 나아가던 한센은 아네모네와 눈이 마주치자 입꼬리를 올려 보이고는, 그대로 몸이 고꾸라졌다. 체력을 많이 소진한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오빠? 병원에 연락할까요?”
그렇게 말하며 아네모네는 구급상자를 열었지만, 한센은 패닉에 빠진 여동생의 손목을 일단 붙잡고 봤다. 놀라 어깨를 들썩이는 그녀를 보지도 않은 채 작게 고개를 저었다.
“다리가 풀린 것뿐이니까 걱정 마. 나보단 아유다를 먼저 봐줘. 험하게 다뤄버려서 다친 곳이 한둘이 아닐 거야.”
“그러니까 자제하셨어야죠. 아유다 언니를 죽일 것 같이 보였다고요. 메인 시스템을 해킹하려던 걸 몇 번이나 참았는지…….”
“하하, 미안하게 됐네.”
울먹이기 시작한 아네모네 앞에서 한센은 머쓱하게 웃으며 사과를 했다. 그래도 아직 건재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는지 난간을 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자세를 고치고 있으니, 아르엘의 콕핏에서도 압력 빠지는 소리가 났다. 행거에 모습을 드러낸 아유다의 상태도 한센과 별다를 게 없었다. 아유다는 가까스로 난간에 상체를 걸친 뒤, 부들부들 떨면서 허리에 손을 가져갔다.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게 상당히 가관이었다.
상황을 파악한 아네모네는 즉시 구급상자를 들고 아유다에게 달려갔다. 그것을 보니 그제야 모의전이 끝났다는 실감이 든 한센이었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며, 힘겹게 슈트를 벗고 있는 아유다에게 나직이 도발 아닌 도발을 걸었다.
“내가 이겼다는 거에 이의 없지?”
정말 제정신으로 돌아왔는지 떠보려는 것도 있었다. 한센에게 시선을 맞춘 아유다는, 이내 작은 탄식과 함께 평소의 그녀다운 반응을 보였다.
“그래, 네 승리야. 조금만 더 버텼으면 내가 이길 수도 있었는데…….”
승패에 상관없이 결과에 승복할 줄 아는 여자. 원래의 아유다로 돌아온 것을 확인한 한센도 마찬가지로 탄식을 내뱉었다. 하지만 좋아할 새도 없이 쿵, 하는 요란한 충격음이 현실을 일깨워주었다. 아유다는 부상을 당한 상태였다.
“언니, 여기서 전라가 될 생각은 아니죠?”
“미안해. 허리가 아파서 못 참겠어.”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아네모네를 뒤로한 채, 아유다는 척추를 지탱하는 외골격마저 벗어 던졌다. 갑주가 모두 분리되자 외피가 등 중앙에서 양옆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등줄기의 희고 고운 살결이 드러나는 것도 잠시, 트임이 벌어지면서 등, 허리, 옆구리가 차례로 노출되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움직이면 흉부마저 공개되는 대참사가 일어날 게 자명했다.
처치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한센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엠프리스의 상처를 살펴보려 했지만, 짜증이 밀려올 것 같아 단번에 생각을 접었다. 왠지 모르게 시원한 물로 목을 축이고 싶어졌다. 아네모네에게 방해가 될 순 없으니 혼자서 어떻게든 구해오는 게 현명하리라.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서려던 그 때, 여어, 하는 말소리와 함께 이쪽으로 무언가가 날아왔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그것을 잡았다.
“수고했다, 한센 헤르만. 내 기체를 걸레짝으로 만들어놨더군.”
듣기만 해도 아멜리아 선배임을 알았다. 곧이어 여러 개의 발걸음이 플랫폼 위에서 자잘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선배를 바라보기 전, 한센은 손을 뒤집어 무엇을 잡았는지부터 확인했다. ‘헤르만’이 큼지막하게 인쇄된 군용 수통이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싸움부터 거는 게 요즘 인사법인가요?”
익숙한 손놀림으로 수통을 따며 한센은 비아냥거리는 투로 물었다. 예의가 부족한 건 둘째 치고, 아멜리아 선배를 환대해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이것도 예상범위라는 듯 오히려 미소를 짓는 선배의 반응이 거슬린다면 거슬렸다. 뭐가 즐겁다고 저렇게 웃는지.
뒤편으로 일행이 보이자 한센은 다시 일어서려 했다. 힘이 돌아오지 않은 탓에 휘청거리고 버티기를 반복하다, 쓰러지기 직전에야 간신히 난간에 몸을 기대어 섰다. 그 모습이 보기 힘들었는지 한 여성이 다가와 그를 부축해주었다. 메이드복 차림을 흘끗 살핀 한센은 그녀에게 감사의 말을 남겼다.
“아니에요. 황궁에서 도움 받은 빚이 있으니까요.”
……황궁이라고? 눈이 동그래진 한센은, 그제야 팔짱을 낀 여성이 자기가 구해줬던 그 사람이었음을 깨달았다. 이름은 모르지만 황녀를 구출할 때 같이 데리고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신경을 못 쓴 자신이 머쓱해져 수통에 있는 물을 몇 차례 들이켰다.
갈증이 완전히 해결되고 나서야 아멜리아 선배의 말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스튜어트 양은 이번 일에 대한 황녀 전하의 친서를 갖고 왔다. 아는 사이인 것 같으니 부언은 줄이도록 하지. 중요한 안건이 있다는 것만 기억하면 돼.”
“에이미 스튜어트에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분위기에 맞춰 에이미는 간단한 인사를 건넸다. 나름 격식을 차리고는 있었지만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앳된 느낌이 지워지지 않았다. 한센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다시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아멜리아 선배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아유다에게 그런 아르바이트를 시킨 이유부터 들어볼까요.”
시비조에 가까운 말투였지만, 아멜리아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싸움을 받아주는 모습은 영락없이 기네비어의 언니다웠다. 한숨으로 호흡을 고른 뒤, 느긋하지만 확실한 말투로 일단 반문을 해보았다.
“그 정도는 너도 이미 알고 있지 않나?”
“선배가 직접 설명해주시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요. 잘 돌아가던 시뮬레이션을 갑자기 모의전으로 바꿔버린 책임은 있다고 생각됩니다만.”
몸에 물이 좀 들어가니 사고를 할 수 있게 된 한센이었다. 아멜리아 선배의 반응은 아직까진 평온했다.
“그렇군. 뭐, 책임을 회피할 생각은 없다. 당사자인 네가 궁금하다면 몇 번이고 말해주도록 하지.”
“들을 준비는 돼 있습니다.”
“1차적으로는 실력 테스트. 전하께서 주목하시고 있기에 감각이 죽지 않았는지 확인해둘 필요가 있었다. 그 다음은 데이터 수집. 시험 기동만으론 성능을 충분히 파악할 수 없다고 여겨 아유다를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사정은 이것보다 더 복잡하지만, 목적은 크게 이 두 가지다.”
“비전투형의 성능이 전투로 측정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선배도 알고 계실 텐데요.”
한센은 자기도 모르게 하는 말에 적개심을 담고 있었다. 고작 데이터 수집을 위해 이런 일을 벌였다고 보기엔 의심쩍은 부분이 한둘이 아니다. 설사 모의전을 하게 되어도 이런 사단은 절대 일어날 리 없어야 했다. 저건 그저 일반적인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 일엔 그 사람의 의지도 일부 개입돼 있다고 봐야 해. 아멜리아 선배도 그 사람의 명령으로 베네치아에 온 거니까.”
지금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메르겔이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었다. 가만히 지켜보는 역할을 자처해오던 그가 이례적으로 발언을 한 것이다. 아멜리아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메르겔을 곁눈질하는 것으로 불편한 감정을 내비쳤다. 그녀로서도 굉장히 드문 행동이었다.
물론 한센도 에이미 스튜어트를 발견한 시점에서 아이린의 개입 가능성을 보긴 했다. 하지만 아이린에게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한 게 바로 며칠 전의 일이었다. 그 정직하고 굳센 사람이 자기 결정을 쉽게 번복하리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심지어 아이린은 한센 앞에서 존중을 우선으로 하겠다는 공언까지 했다.
혼란에 빠진 한센은,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미약한 두통이 사라지자 다시 선배를 바라보며 자기가 내린 결론을 말했다.
“황녀 전하의 명을 선배가 곡해했다고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말투가 꼭 메르겔을 닮아 있군. 그렇게 봐도 상관은 없어.”
“그렇다면 일이 끝난 이상, 쓸데없는 질문은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아유다에게 초콜릿을 준 이유는 꼭 들어야겠네요. 개인적으로 봤을 때, 선배는 아유다를 이용해 옛날의 저를 끌어내려는 것 같았습니다.”
아멜리아 선배에게 비밀스런 구석이 있음은 이미 파악한 지 오래였다. 정말로 신형기의 성능만 보러 왔다면 이런 불쾌한 짓은 처음부터 하지도 않았을 테다. 모의전에서 아유다가 걸어왔던 도발을 상기하며 한센은 공격적으로 말을 이었다.
“선배가 옛날의 절 봐서 얻는 이득은 뭐죠? 아니, 황녀 전하의 의도를 제하고 남은 선배의 진의는 뭔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가 ‘곡해한’ 선배의 진의를 힘을 주어 첨언했다.
“혹시 선배는 제가 사람을 쉽게 죽였던 그 시절로 돌아가 줬으면 하는 겁니까?”
“말조심해라, 한센 헤르만. 난 네 선배이자 한 국가의 안보를 책임지는 기사다. 한 번만 더 날 능멸하려 들었다간 그에 합당한 조치를 취하겠다.”
아멜리아는 언성을 높이진 않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경고를 내렸다. 그 모습에 한센은 기가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싸늘해진 둘 사이를 누구도 중재하려 하지 않았다. 오직 아네모네만이 아유다의 허리에 냉각팩을 댄 채, 뭐라도 좀 해보라고 메르겔을 향해 열심히 손짓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행히도 아멜리아가 먼저 얼음의 벽을 녹였다. 머리를 식히려는 듯 깊은 숨을 내쉰 그녀는, 짧게 고민한 끝에 침묵에 빠진 한센에게 말을 걸었다.
“아유다에게 초콜릿을 먹인 이유는 중요하지 않아. 하지만 내 진의를 알고 싶다면 기꺼이 알려줄 의향은 있다. 단, 여기선 제대로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군.”
그렇게 말하며 턱짓으로 아유다를 가리켰다. 그녀의 처치부터 먼저 끝내야 한다는 메시지는 한센도 금방 알아들었다. 제복 주머니에서 꺼낸 쪽지를 후배에게 내밀며 아멜리아는 말을 이었다.
“일단 푹 쉬고 지정한 시간에 이곳으로 올 것. 될 수 있으면 아유다도 데려와주길 바란다. 그곳에서 황녀 전하의 지령을 전달한 뒤 나의 의도를 알려주겠다. 이 정도면 충분한가?”
“……좋아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별 수 없겠다 싶어 한센은 제안을 받아들였다. 조용히 손을 내미는 그에게 쪽지를 쥐어주며, 아멜리아는 미소와 함께 짧은 인사를 했다. 에이미도 ‘다들 고생하셨어요’라고 말하고는 허둥지둥 그녀를 따라 행거를 빠져나갔다.
플랫폼 중앙엔 이제 한센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메르겔과 눈짓을 주고받은 뒤 한센은 아유다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수통을 건네주면서, 일부러 반을 남겼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아예 주저앉아버린 아유다 옆에 자리를 잡고는, 엠프리스와 아르엘을 번갈아 바라보며 나직이 사과의 말을 건넸다.
“수고했다, 아유다. 다치게 한 건 미안해.”
“별 일 아냐. 허리 근육이 조금 놀란 정도니까. 며칠 있으면 금방 풀…… 릴 거야.”
냉각팩을 대고 있어도 고통은 여전한지 아유다는 힘겹게 말을 끝맺었다. 그게 미안해서라도 베네치아에서 한 번 거하게 돈을 써야겠다고 한센은 생각했다.
“그…… 뭐냐. 일이 끝나면 오랜만에 데이트라도 하자. 좋은 레스토랑에도 가고 수영복도 몇 벌 사줄 테니까.”
“웬일이야, 구두쇠 씨. 갑자기 데이트 신청을 다 하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아유다는 숨을 삼켰다. 옛 생각이 떠오르자 두 뺨에 홍조가 일기까지 했다. 적당히 둘러댈 말을 찾던 한센은, 침묵이 어색할 정도로 길게 늘어지자 결국 포기하고 반쯤 솔직하게 대답했다.
“글쎄. 미련이 남았다고 해둘까.”
순간 아유다 쪽에서 피식 하고 웃었다. 보이는 건 저래도 속으로는 내심 기뻐하고 있을 터였다.
탑승자의 의지에 호응하여, 엠프리스는 와이어에 구속된 팔을 비틀었다. 맞대어진 아르엘의 오른팔이 그 움직임에 휘말려 바깥쪽으로 벌어졌다. 저편의 저항에도 아랑곳 않고 비틀리는 각도는 커졌다. 힘을 더하자 장갑이 구겨지면서 끼익, 하고 날 선 소음이 났다. 어느 순간 와이어의 수명이 다했음을 알았고, 그에 맞추듯 한센은 좀 더 공격적으로 나아가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상식선에서 대응하겠다고 하지 않았어?」
아르엘의 외장 장갑이 반쯤 뜯겨나갔을 즈음, 아유다가 비웃음 섞인 어조로 물었다. 이상하게 화가 나는 대신 파괴적인 흥분이 폭발하듯 전신에 퍼져갔다. 좀 전의 자제심은 어디에 팔아먹었는지, 양심의 가책도 못 느낀 채 한센은 남은 장갑마저 거칠게 떼어냈다.
「모순덩어리네, 한센 헤르만.」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데.”
힘없이 풀린 와이어와 고철이 된 장갑과 체인 블레이드가 차례로 추락했다. 묶인 시간은 길지 않았는데, 꼭 몇 년 만에 구속구를 벗어던진 기분이었다.
이 직후 이어진 아유다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열린 쪽에서 달려드는 톱날이 엠프리스의 어깨를 긁고 지나갔다. 전이장갑을 찢고 직접 피해를 줄 만큼의 강도다. 수백 개의 이빨들이 레일을 따라 돌면서 대각선으로 긴 상흔을 남겼다. 입자와 섞인 불똥의 다발이 강렬한 색채의 대비를 내뿜으며 메인 모니터 한구석을 순식간에 물들여갔다.
간담이 서늘해졌지만, 이미 예상하고 있지 않았는가. 아쉬운 감정은 곧 복수하고픈 본능에 완전히 덮여버렸다. 마침내 엠프리스는 적의 머리를 붙잡고, 뜯어냈다. 다신 못 쓰도록 악력으로 으깬 뒤 그것 역시 허공에 내팽개쳤다. 우측에서 다가오는 톱날은 피할 것 없이 맨손으로 받아냈다. 손가락이 잘리기 전에 체인 블레이드를 완전히 망가뜨리려 했다.
아유다는 하나 남은 장비마저 잃으려 하지 않을 테다. 실제로 아르엘은 서둘러 무기를 거두고는 뒤로 빠지려는 기색을 보였다. 쫓으려 하자 이쪽으로 주먹세례가 찾아왔다. 권투로 단련된, 체계 잡힌 주먹질을 막아내는 것만으로도 한센을 벅차게 했다. 그 와중에 메인 카메라에 한 번 맞으니 콕핏에까지 진동이 전해졌다. 시끄럽게 울려대는 알람이 왠지 거슬린다.
자세가 흐트러진 사이에 아르엘은 엠프리스의 어깨를 붙잡고 크게 곡선을 그리며 날았다. 등 뒤를 점하려는 의도가 빤히 보이는 노림수다. 움직이지 못하는 동안 어깨 관절을 완전히 망가뜨리려는 거겠지. 찢긴 장갑의 틈새 사이로 손을 쑤셔 넣으려 들 것이다. 물론 그 사단이 일어나기 전에 엎어치기로 아르엘을 내던졌다.
저 멀리까지 힘없이 날아가는, 시커먼 갑주를 두른 철거인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머리가 날아갔으니 장님이 됐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았다. 스러스터 불꽃이 터져 나오는 거의 동시에 엠프리스를 향해 와이어가 날아들었다. 빠르기도 빠르기지만 오른쪽 허벅지에 정확히 닿는 순식간에 감겨왔다. 하나 남은 와이어를 이용한 최후의 발악. 끝이 머지않았음을 직감한 한센이었다.
와이어가 회수되자 자연스레 두 기체의 사이가 좁혀졌다. 멀게 느껴지는 거리라는 착각은 이 순간이 되자 단번에 소멸해버렸다. 서로가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누가 먼저 손을 썼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유다나 자신이나 끝장을 낼 각오로 달려들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은색 나이프가 엠프리스의 허벅지를 꿰뚫었다. 같은 순간에 아르엘의 어깨 관절부로 손날이 침투했다. 그 상태 그대로 아르엘은 발밑으로 전개한 나이프를 비틀었다. 우드득, 하는 소리가 콕핏에까지 전해질 정도로 크게 났다. 이에 질세라 엠프리스도 붙잡은 관절에 힘을 주었다. 아르엘의 오른팔이 완전히 떨어져나갔다.
자기도 비슷한 꼴을 당할 순 없다. 엠프리스는 떼어낸 팔을 몽둥이삼아 아르엘의 콕핏을 향해 내리쳤다. 효과가 있었는지 상대는 크게 휘청거렸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나이프가 전개된 다리를 ‘몽둥이’로 여러 번 가격했다. 무릎 관절이 너덜너덜해질 때가 되어서야 직접 손으로 잡아 뜯었다. 이로서 아르엘은 오른팔과 왼쪽 다리를 차례로 잃었다.
무전으로 들려오는 쳇, 뒤로 아유다의 볼멘소리가 이어졌다.
「아파라…… 싸움 참 무식하게 하네.」
고통을 호소하듯, 신음이 섞인 목소리. 얼핏 들어보면 제정신을 차린 것 같기도 했다. 충격으로 이성이 돌아왔다면 희소식이겠지만, 한센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몽둥이’를 버린 뒤 아직 꽂혀 있는 나이프를 뽑았다. 아래쪽의 와이어를 잘라내고는 체인 블레이드를 피해 아르엘의 팔꿈치에 날을 찔러 넣었다. 한 번 눌러 깊숙이 파고들게 하고, 한 번 돌려 하완부를 완전히 도려냈다. 톱날이 회전을 멈추기 전에 멀쩡한 쪽 다리에 그것을 처박아버렸다. 콕핏을 걷어차 뒤로 뺀 직후 하늘 높이 나이프를 들었다. 마지막 일격으로 단번에 전투불능까지 내몰 생각이었다.
아르엘의 몰골은, 이게 마도병기인가 싶을 정도로 처참했다. 보통 모의전에서 이 정도의 파괴는 인정되지도, 용납되지도 않는다.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음에도 굳이 여기까지 온 이유는 뭘까. 신형기의 성능은 이미 충분히 입증되었다. 물러서려는 아르엘을 보면서 한센은 문득, 자길 몰아붙여온 이 충동이 낯설지 않은 것임을 깨달았다.
몇 년 전에 느껴본 적이 있다. 친숙함을 넘어 몸에 밴 이 감각. 조종간을 당기면서, 거칠게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정확히 언제였더라. 그래, 기억났다.
난생 처음, 사람을 죽였을 때…….
「생각해봤어? 지금 누가 더 야수 같은지.」
아유다가 나직이 던진 지적에 한센은 눈을 크게 떴다. 마치 자기가 누나인 양 꺼낸 그 말이 왠지 모르게 심장을 깊이 찔러왔다. 이젠 아유다가 카페인에 취했는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순간 간접적으로 전달된 아멜리아 선배의 진의는 확실히 이해했다.
잘라낸 나이프가, 일광을 머금은 채 아르엘의 콕핏을 꿰뚫으려던 찰나,
「거기까지. 모의전은 종료다.」
일방적인 명령과 함께 한센의 손도 멈췄다. 최후의 일격은 장갑을 칼끝으로 콕 건드리는 선에서 끝났다. 목소리의 주인은 당연히 아멜리아 선배였다. 통신이 연결된 것을 볼 때 재밍을 푼 것이리라.
크게 숨을 내쉰 뒤 한센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잔존해 있던 미소의 여분마저 싹 사라졌다.
귀환을 학수고대하며 행거까지 달려온 아네모네는, 두 마도병기를 보자마자 아연실색하고야 말았다. 관제실에서 이미 보아 알고 있었지만 실제 광경은 훨씬 더 심했다. 머리가 하얘진 채 가만히 서 있는 와중에, 엠프리스의 콕핏이 동요하자 망설일 것 없이 바닥을 박찼다.
삼중으로 개방된 커버에서 한센이 힘없이 걸어 나왔다.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어서 쉽사리 다가가기 어려웠다. 몇 보 나아가던 한센은 아네모네와 눈이 마주치자 입꼬리를 올려 보이고는, 그대로 몸이 고꾸라졌다. 체력을 많이 소진한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오빠? 병원에 연락할까요?”
그렇게 말하며 아네모네는 구급상자를 열었지만, 한센은 패닉에 빠진 여동생의 손목을 일단 붙잡고 봤다. 놀라 어깨를 들썩이는 그녀를 보지도 않은 채 작게 고개를 저었다.
“다리가 풀린 것뿐이니까 걱정 마. 나보단 아유다를 먼저 봐줘. 험하게 다뤄버려서 다친 곳이 한둘이 아닐 거야.”
“그러니까 자제하셨어야죠. 아유다 언니를 죽일 것 같이 보였다고요. 메인 시스템을 해킹하려던 걸 몇 번이나 참았는지…….”
“하하, 미안하게 됐네.”
울먹이기 시작한 아네모네 앞에서 한센은 머쓱하게 웃으며 사과를 했다. 그래도 아직 건재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는지 난간을 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자세를 고치고 있으니, 아르엘의 콕핏에서도 압력 빠지는 소리가 났다. 행거에 모습을 드러낸 아유다의 상태도 한센과 별다를 게 없었다. 아유다는 가까스로 난간에 상체를 걸친 뒤, 부들부들 떨면서 허리에 손을 가져갔다.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게 상당히 가관이었다.
상황을 파악한 아네모네는 즉시 구급상자를 들고 아유다에게 달려갔다. 그것을 보니 그제야 모의전이 끝났다는 실감이 든 한센이었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며, 힘겹게 슈트를 벗고 있는 아유다에게 나직이 도발 아닌 도발을 걸었다.
“내가 이겼다는 거에 이의 없지?”
정말 제정신으로 돌아왔는지 떠보려는 것도 있었다. 한센에게 시선을 맞춘 아유다는, 이내 작은 탄식과 함께 평소의 그녀다운 반응을 보였다.
“그래, 네 승리야. 조금만 더 버텼으면 내가 이길 수도 있었는데…….”
승패에 상관없이 결과에 승복할 줄 아는 여자. 원래의 아유다로 돌아온 것을 확인한 한센도 마찬가지로 탄식을 내뱉었다. 하지만 좋아할 새도 없이 쿵, 하는 요란한 충격음이 현실을 일깨워주었다. 아유다는 부상을 당한 상태였다.
“언니, 여기서 전라가 될 생각은 아니죠?”
“미안해. 허리가 아파서 못 참겠어.”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아네모네를 뒤로한 채, 아유다는 척추를 지탱하는 외골격마저 벗어 던졌다. 갑주가 모두 분리되자 외피가 등 중앙에서 양옆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등줄기의 희고 고운 살결이 드러나는 것도 잠시, 트임이 벌어지면서 등, 허리, 옆구리가 차례로 노출되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움직이면 흉부마저 공개되는 대참사가 일어날 게 자명했다.
처치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한센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엠프리스의 상처를 살펴보려 했지만, 짜증이 밀려올 것 같아 단번에 생각을 접었다. 왠지 모르게 시원한 물로 목을 축이고 싶어졌다. 아네모네에게 방해가 될 순 없으니 혼자서 어떻게든 구해오는 게 현명하리라.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서려던 그 때, 여어, 하는 말소리와 함께 이쪽으로 무언가가 날아왔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그것을 잡았다.
“수고했다, 한센 헤르만. 내 기체를 걸레짝으로 만들어놨더군.”
듣기만 해도 아멜리아 선배임을 알았다. 곧이어 여러 개의 발걸음이 플랫폼 위에서 자잘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선배를 바라보기 전, 한센은 손을 뒤집어 무엇을 잡았는지부터 확인했다. ‘헤르만’이 큼지막하게 인쇄된 군용 수통이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싸움부터 거는 게 요즘 인사법인가요?”
익숙한 손놀림으로 수통을 따며 한센은 비아냥거리는 투로 물었다. 예의가 부족한 건 둘째 치고, 아멜리아 선배를 환대해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이것도 예상범위라는 듯 오히려 미소를 짓는 선배의 반응이 거슬린다면 거슬렸다. 뭐가 즐겁다고 저렇게 웃는지.
뒤편으로 일행이 보이자 한센은 다시 일어서려 했다. 힘이 돌아오지 않은 탓에 휘청거리고 버티기를 반복하다, 쓰러지기 직전에야 간신히 난간에 몸을 기대어 섰다. 그 모습이 보기 힘들었는지 한 여성이 다가와 그를 부축해주었다. 메이드복 차림을 흘끗 살핀 한센은 그녀에게 감사의 말을 남겼다.
“아니에요. 황궁에서 도움 받은 빚이 있으니까요.”
……황궁이라고? 눈이 동그래진 한센은, 그제야 팔짱을 낀 여성이 자기가 구해줬던 그 사람이었음을 깨달았다. 이름은 모르지만 황녀를 구출할 때 같이 데리고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신경을 못 쓴 자신이 머쓱해져 수통에 있는 물을 몇 차례 들이켰다.
갈증이 완전히 해결되고 나서야 아멜리아 선배의 말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스튜어트 양은 이번 일에 대한 황녀 전하의 친서를 갖고 왔다. 아는 사이인 것 같으니 부언은 줄이도록 하지. 중요한 안건이 있다는 것만 기억하면 돼.”
“에이미 스튜어트에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분위기에 맞춰 에이미는 간단한 인사를 건넸다. 나름 격식을 차리고는 있었지만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앳된 느낌이 지워지지 않았다. 한센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다시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아멜리아 선배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아유다에게 그런 아르바이트를 시킨 이유부터 들어볼까요.”
시비조에 가까운 말투였지만, 아멜리아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싸움을 받아주는 모습은 영락없이 기네비어의 언니다웠다. 한숨으로 호흡을 고른 뒤, 느긋하지만 확실한 말투로 일단 반문을 해보았다.
“그 정도는 너도 이미 알고 있지 않나?”
“선배가 직접 설명해주시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요. 잘 돌아가던 시뮬레이션을 갑자기 모의전으로 바꿔버린 책임은 있다고 생각됩니다만.”
몸에 물이 좀 들어가니 사고를 할 수 있게 된 한센이었다. 아멜리아 선배의 반응은 아직까진 평온했다.
“그렇군. 뭐, 책임을 회피할 생각은 없다. 당사자인 네가 궁금하다면 몇 번이고 말해주도록 하지.”
“들을 준비는 돼 있습니다.”
“1차적으로는 실력 테스트. 전하께서 주목하시고 있기에 감각이 죽지 않았는지 확인해둘 필요가 있었다. 그 다음은 데이터 수집. 시험 기동만으론 성능을 충분히 파악할 수 없다고 여겨 아유다를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사정은 이것보다 더 복잡하지만, 목적은 크게 이 두 가지다.”
“비전투형의 성능이 전투로 측정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선배도 알고 계실 텐데요.”
한센은 자기도 모르게 하는 말에 적개심을 담고 있었다. 고작 데이터 수집을 위해 이런 일을 벌였다고 보기엔 의심쩍은 부분이 한둘이 아니다. 설사 모의전을 하게 되어도 이런 사단은 절대 일어날 리 없어야 했다. 저건 그저 일반적인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 일엔 그 사람의 의지도 일부 개입돼 있다고 봐야 해. 아멜리아 선배도 그 사람의 명령으로 베네치아에 온 거니까.”
지금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메르겔이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었다. 가만히 지켜보는 역할을 자처해오던 그가 이례적으로 발언을 한 것이다. 아멜리아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메르겔을 곁눈질하는 것으로 불편한 감정을 내비쳤다. 그녀로서도 굉장히 드문 행동이었다.
물론 한센도 에이미 스튜어트를 발견한 시점에서 아이린의 개입 가능성을 보긴 했다. 하지만 아이린에게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한 게 바로 며칠 전의 일이었다. 그 정직하고 굳센 사람이 자기 결정을 쉽게 번복하리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심지어 아이린은 한센 앞에서 존중을 우선으로 하겠다는 공언까지 했다.
혼란에 빠진 한센은,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미약한 두통이 사라지자 다시 선배를 바라보며 자기가 내린 결론을 말했다.
“황녀 전하의 명을 선배가 곡해했다고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말투가 꼭 메르겔을 닮아 있군. 그렇게 봐도 상관은 없어.”
“그렇다면 일이 끝난 이상, 쓸데없는 질문은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아유다에게 초콜릿을 준 이유는 꼭 들어야겠네요. 개인적으로 봤을 때, 선배는 아유다를 이용해 옛날의 저를 끌어내려는 것 같았습니다.”
아멜리아 선배에게 비밀스런 구석이 있음은 이미 파악한 지 오래였다. 정말로 신형기의 성능만 보러 왔다면 이런 불쾌한 짓은 처음부터 하지도 않았을 테다. 모의전에서 아유다가 걸어왔던 도발을 상기하며 한센은 공격적으로 말을 이었다.
“선배가 옛날의 절 봐서 얻는 이득은 뭐죠? 아니, 황녀 전하의 의도를 제하고 남은 선배의 진의는 뭔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가 ‘곡해한’ 선배의 진의를 힘을 주어 첨언했다.
“혹시 선배는 제가 사람을 쉽게 죽였던 그 시절로 돌아가 줬으면 하는 겁니까?”
“말조심해라, 한센 헤르만. 난 네 선배이자 한 국가의 안보를 책임지는 기사다. 한 번만 더 날 능멸하려 들었다간 그에 합당한 조치를 취하겠다.”
아멜리아는 언성을 높이진 않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경고를 내렸다. 그 모습에 한센은 기가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싸늘해진 둘 사이를 누구도 중재하려 하지 않았다. 오직 아네모네만이 아유다의 허리에 냉각팩을 댄 채, 뭐라도 좀 해보라고 메르겔을 향해 열심히 손짓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행히도 아멜리아가 먼저 얼음의 벽을 녹였다. 머리를 식히려는 듯 깊은 숨을 내쉰 그녀는, 짧게 고민한 끝에 침묵에 빠진 한센에게 말을 걸었다.
“아유다에게 초콜릿을 먹인 이유는 중요하지 않아. 하지만 내 진의를 알고 싶다면 기꺼이 알려줄 의향은 있다. 단, 여기선 제대로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군.”
그렇게 말하며 턱짓으로 아유다를 가리켰다. 그녀의 처치부터 먼저 끝내야 한다는 메시지는 한센도 금방 알아들었다. 제복 주머니에서 꺼낸 쪽지를 후배에게 내밀며 아멜리아는 말을 이었다.
“일단 푹 쉬고 지정한 시간에 이곳으로 올 것. 될 수 있으면 아유다도 데려와주길 바란다. 그곳에서 황녀 전하의 지령을 전달한 뒤 나의 의도를 알려주겠다. 이 정도면 충분한가?”
“……좋아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별 수 없겠다 싶어 한센은 제안을 받아들였다. 조용히 손을 내미는 그에게 쪽지를 쥐어주며, 아멜리아는 미소와 함께 짧은 인사를 했다. 에이미도 ‘다들 고생하셨어요’라고 말하고는 허둥지둥 그녀를 따라 행거를 빠져나갔다.
플랫폼 중앙엔 이제 한센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메르겔과 눈짓을 주고받은 뒤 한센은 아유다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수통을 건네주면서, 일부러 반을 남겼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아예 주저앉아버린 아유다 옆에 자리를 잡고는, 엠프리스와 아르엘을 번갈아 바라보며 나직이 사과의 말을 건넸다.
“수고했다, 아유다. 다치게 한 건 미안해.”
“별 일 아냐. 허리 근육이 조금 놀란 정도니까. 며칠 있으면 금방 풀…… 릴 거야.”
냉각팩을 대고 있어도 고통은 여전한지 아유다는 힘겹게 말을 끝맺었다. 그게 미안해서라도 베네치아에서 한 번 거하게 돈을 써야겠다고 한센은 생각했다.
“그…… 뭐냐. 일이 끝나면 오랜만에 데이트라도 하자. 좋은 레스토랑에도 가고 수영복도 몇 벌 사줄 테니까.”
“웬일이야, 구두쇠 씨. 갑자기 데이트 신청을 다 하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아유다는 숨을 삼켰다. 옛 생각이 떠오르자 두 뺨에 홍조가 일기까지 했다. 적당히 둘러댈 말을 찾던 한센은, 침묵이 어색할 정도로 길게 늘어지자 결국 포기하고 반쯤 솔직하게 대답했다.
“글쎄. 미련이 남았다고 해둘까.”
순간 아유다 쪽에서 피식 하고 웃었다. 보이는 건 저래도 속으로는 내심 기뻐하고 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