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의: altegirlsguy@naver.com
저녁 하늘에 감싸인 비행장은 왠지 모르게 공허하다.
사라진 노을의 빈자리를 서늘한 청색이 메워갈 무렵이 되면, 가슴 속의 감흥은 사라지고 오직 허무함만이 남는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부는 바람이 제철에 맞지 않게 춥다. 주변에 사람이라곤 찾아볼 수 없어서 외롭다는 기분마저 들 정도다.
해가 지면서 활주로를 오르내리는 마도병기의 수도 줄었다. 에어쇼 준비를 위해 연습 비행을 하고 있는 기체들만이 남아 있었다. 비행용 등을 깜빡이며 밤하늘을 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한 폭의 그림이 된다. 쓰이지 않는 활주로 한가운데에서 그걸 올려다보니 느낌이 새롭다.
그 서너 대로 구성된 편대를 지켜보며, 한센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관객이 아닌, 참여자로 바뀐 자신의 입장이 굉장히 낯설다. 에어쇼는 실력이 입증된 기사들만이 참여할 수 있는 곳이다. 그는 실적도 없으면서 황녀의 힘으로 이곳에 왔다. 당연하게도 주변의 시선이 그리 좋을 리 없었다. 그 불편함이 비행장의 공허와 만나, 무의식중에 응어리를 하나 가슴에 맺히게 했다. 물론 이곳에서 고립될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었지만.
회의에 빠지려는 찰나 고개를 세차게 저어 잡생각을 떨쳐냈다.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다시 귀에 가져다 댔다.
「……핸드폰이라는 건 신기하네요. 멀리서도 이렇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니.」
깊은 호기심에 젖은 목소리가 들렸다. 상대는 제1황녀, 아이린 바이스슈타인 폰 이메리룬이다. 기쁜 소감을 다 풀어낸 것 같으니 이젠 그가 말할 차례였다.
“좋아해주셔서 다행입니다. 앞으로 계속 갖고 있어주세요. 그것만 있으면 여차할 때 서로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 가능해요.”
「고마워요. 어떤 기능이 있는지 확실히 공부해둘게요.」
황궁에서 만났던 때와 달리 활기차면서 다정한 분위기를 풍겼다. 마치 황녀라기보단 한 명의 수줍은 소녀를 대하는 듯했다. 단언컨대, 그녀와 개인적인 통화까지 하는 사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다.
「지금 비행장에 계신 거죠? 연습은 해보셨어요?」
아이린의 질문에 한센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제 차례가 올 때까지 휴식이에요. 두 시간이나 비어서 구경 좀 하려고 활주로로 나왔어요.”
「거기 혼자 서 있으면 꽤 위험할 텐데요.」
“안 쓰는 활주로라서 괜찮아요.”
이곳이 더 편하기도 하고, 라는 말은 속으로만 덧붙였다. 아이린은 수긍하는 반응을 보이고는, 잠깐의 침묵 후 사근사근 운을 뗐다.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좋아하지 않을 건 알지만, 클라인 경이 이게 최선이라고 했어요. 한센의 심기를 건드린 건 아닌지 심히 걱정되네요.」
혹여나 불쾌해할까 조심스럽게, 유감이 아닌 사과의 말을 건넸다. 사람 대 사람의 대화이니 솔직해져도 된다 싶었으리라. 다만 한센은 이미 마음을 굳힌 일을 다시 되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사정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니까.”
「그렇군요. 클라인 경의 공이네요.」
“그리고…… 인정하긴 싫지만, 제가 원해서 하는 것도 있어요. 선배의 말을 듣고 좀 더 ‘어른스러운’ 결심을 했거든요.”
「흐음, 어떤 결심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의외라는 듯 아이린은 흥미를 보였다. 이 남자의 생각을 알고 싶다는 마음이 선명히 표현되고 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센은 주차해둔 지프에 몸을 기댔다. 괜히 망설여져서 뒷머리를 살짝 긁는다.
“회색 영역을 찾을 겁니다. 아이린과 저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방안이 있을 테죠. 그 가능성을 보고 당신을 돕기로 했어요.”
「그 말은, 역시 기사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아뇨. 좀 더 개인적인 이유입니다.”
「개인적인 이유?」
아이린은 말꼬리를 올렸다. 들을 테니 무엇이든지 말해보라는 은연중의 격려였다. 할 대답이야 정해져 있었지만, 막상 입을 열려니 한센은 막막했다. 잘만 해오던 감정 표현이 이번만큼은 이상하게 어렵다.
“그게…….”
알 수 없는 난관에 봉착한 그는, 이내 눈을 질끈 감고 억지로라도 목소리를 내뱉었다.
“당신의 호의를 배신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에요.”
대답 대신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륙을 준비하는 또 다른 편대를 바라보며 한센은 말을 이었다.
“아이린,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말도 안 되는 프로젝트에 아무렇지도 않게 돈을 대줄 정도로. 황녀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그런 사람의 곤란을 무시할 수 있을 리 없잖아요.”
그 심리를 이용당한 지금이, 솔직히 말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려던 말은 차마 꺼낼 용기조차 낼 수 없었다. 그게 과연 진심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던 탓이다. 어른스러운 결정이 항상 만족스럽다는 보장은 없다. 그것 때문에 쉽게 입을 못 열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한센이 조금이라도 제게 실망했을 법하네요.」
맥락 사이에 숨겨진 의미를 아이린이 잡아내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옅게 떨리는 목소리로 씁쓸하게 사실을 인정했다. 자기 책임만 있는 게 아님에도 회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그 태도에, 한센은 순간 죄책감마저 느꼈다.
아직 그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좀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화가 안 났다고는 말할 수 없겠죠. 하지만 아이린이 최선을 다한 것도 사실이에요. 수없이 고민했지만 결국 그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어요. 당신 같은 관대한 인품의 사람이라면, 조금은 현실과 타협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고."
「관대했던 건가요, 저는.」
"네. 그런 아이린을 믿기 때문에 여기에 있는 거잖아요."
한센이 확실하게 대답한 덕분인지, 아이린은 나쁘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정확히는 좀 전의 씁쓸함이 부드러운 날숨에 대부분 씻겨나갔다.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기분이 상당히 좋아진 듯했다. 나직이 전하는 감사의 말에 상냥함이 묻어나왔다.
「고마워요, 저를 그렇게 생각해주셔서. 알고 보니 한센에겐 여자를 기분 좋게 만드는 재주도 있었군요.」
"음? 딱히 뭘 의도하고 말한 건 아닌데……."
이해가 안 된다는 듯 한센이 말끝을 흐리자 아이린은 조용히 웃음을 흘리고는, 한결 가벼워진 분위기 속에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이런 부조리를 받아준 보답을 꼭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뭘 해야 한센이 기뻐할지 감이 오지 않더군요. 그래서 묻는데, 에어쇼가 끝나면 둘이서 저녁식사라도 하지 않을래요?」
"엣."
전혀 예상치 못한 제의에, 말보다 이상한 소리가 먼저 튀어나온 한센이었다. 식사야 괜찮지만 저편에서 풍겨오는 어감이 왠지 수줍다. 역시, 이번에도 황녀가 아닌, 한 명의 소녀를 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아이린의 부언이 구름 끼기 시작한 머릿속을 헤집었다.
「강가에 좋은 레스토랑이 하나 있거든요. 이맘때면 심야에도 영업하니까 느긋이 있을 수 있어요. 아, 물론 돈은 제가 낼 거에요. 수도의 귀족도 쉽게 못 가는 비싼 데라서…….」
“저와 함께 가야 될 이유라도 특별히 있습니까?”
「네?」
아이린은 자기도 모르게 벙찐 목소리로 되물었다. 이후 한센의 말을 곱씹듯 몇 초간 침묵에 빠졌다. 설명이 불충분했나? 보답이 만족스럽지 않은 건가? 아니면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못해서 저런 질문을 꺼냈나?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어 일단 물어보았다.
「식사를 같이 하는 게 싫으신가요?」
“아뇨, 그게…… ‘둘이서’라고 하셨잖아요. 그 부분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의아함이 든 것뿐이에요. 웬 3급 기사와 밤늦게까지 함께 있으면, 아이린이 쓸데없는 오해를 사게 되니까요.”
일이 그렇게 틀어지는 순간 상당히 피곤해지는 건 자명했다. 그제야 아이린은 한센이 무엇을 걱정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파파라치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일대 스캔들로 번질 것이라는 예상은 그녀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걸 한두 번 겪어본 게 아니다. 대비책이야 물론 준비되어 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단둘이 가도 아무 문제없게 처리해뒀으니까. 거기에 더해서, 한센이 찾는 ‘특별한 이유’는 이미 있지 않나요? 황궁 연회에서 있었던 일, 기억 안 나세요?」
조금은 추궁조가 되어버린 것 같은 질문에 이번엔 한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때의 일을 되짚으려는 듯 지프의 보닛 표면을 손가락으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기대도 안 했는지, 아이린은 실소와 함께 천천히 운을 뗐다.
「한센이 와인을 건넸을 때, 공석에선 술을 안 마신다면서 거절했잖아요. 당연한 대응을 한 거였지만 항상 마음에 걸렸어요.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당신과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자 싶었죠. 물론…… 술도 함께 하겠지만요.」
……뭐야, 그걸 담아두고 있었나.
거절당했다 해도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괜찮다고 한센은 말하고 싶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가볍게 생각해선 안 된다는 판단이 섰다. 무턱대고 위로하면 아이린을 실망시킬 가능성이 있다. 어쩌면 좋지, 하고 고민하다 결국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존중해주자. 여태까지 그래왔듯.
“알겠습니다. 아이린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했어요. 몇 시에 만나면 되는 거죠?”
「에어쇼를 성공시키고 나서 같이 논해봐요. 한센도 저도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나쁘지 않은 반응에 아이린의 목소리도 조금 밝아졌다. 창공을 질주하는 편대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리며, 한센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이제 다른 일을 하러 가볼게요. 아이린을 위해 준비해둔 게 있어서. 완성은 했지만, 아직 미세한 조정이 필요한 단계거든요.”
「어머, 선물인가요? 제가 받을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무엇인지는 그쪽으로 가서 보여드릴게요. 황족이 입을 거라서 신경 좀 썼어요. 30분 내로 도착하니까 기다리고 있어주세요.”
「네? 한센이 이쪽으로 온다니, 무슨…….」
아이린의 말을 끝까지 들을 생각이 없었던 한센은, ‘이만 끊습니다.’라는 짧은 인사와 함께 통화종료를 눌러버렸다. 신호음이 울리고, 대화가 완전히 죽은 때에 맞춰 비행장의 공허함이 다시 찾아왔다. 어둠과 냉기에 감싸인 그의 표정이 어느덧 무거워졌다.
그러나 이내 하품과 함께, 있는 힘껏 기지개를 켰다. 두 시간의 공백은 역시 딴짓하기 좋은 시간이었다.
04. 아호트니크(охотник) - 1
저녁 하늘에 감싸인 비행장은 왠지 모르게 공허하다.
사라진 노을의 빈자리를 서늘한 청색이 메워갈 무렵이 되면, 가슴 속의 감흥은 사라지고 오직 허무함만이 남는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부는 바람이 제철에 맞지 않게 춥다. 주변에 사람이라곤 찾아볼 수 없어서 외롭다는 기분마저 들 정도다.
해가 지면서 활주로를 오르내리는 마도병기의 수도 줄었다. 에어쇼 준비를 위해 연습 비행을 하고 있는 기체들만이 남아 있었다. 비행용 등을 깜빡이며 밤하늘을 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한 폭의 그림이 된다. 쓰이지 않는 활주로 한가운데에서 그걸 올려다보니 느낌이 새롭다.
그 서너 대로 구성된 편대를 지켜보며, 한센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관객이 아닌, 참여자로 바뀐 자신의 입장이 굉장히 낯설다. 에어쇼는 실력이 입증된 기사들만이 참여할 수 있는 곳이다. 그는 실적도 없으면서 황녀의 힘으로 이곳에 왔다. 당연하게도 주변의 시선이 그리 좋을 리 없었다. 그 불편함이 비행장의 공허와 만나, 무의식중에 응어리를 하나 가슴에 맺히게 했다. 물론 이곳에서 고립될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었지만.
회의에 빠지려는 찰나 고개를 세차게 저어 잡생각을 떨쳐냈다.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다시 귀에 가져다 댔다.
「……핸드폰이라는 건 신기하네요. 멀리서도 이렇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니.」
깊은 호기심에 젖은 목소리가 들렸다. 상대는 제1황녀, 아이린 바이스슈타인 폰 이메리룬이다. 기쁜 소감을 다 풀어낸 것 같으니 이젠 그가 말할 차례였다.
“좋아해주셔서 다행입니다. 앞으로 계속 갖고 있어주세요. 그것만 있으면 여차할 때 서로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 가능해요.”
「고마워요. 어떤 기능이 있는지 확실히 공부해둘게요.」
황궁에서 만났던 때와 달리 활기차면서 다정한 분위기를 풍겼다. 마치 황녀라기보단 한 명의 수줍은 소녀를 대하는 듯했다. 단언컨대, 그녀와 개인적인 통화까지 하는 사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다.
「지금 비행장에 계신 거죠? 연습은 해보셨어요?」
아이린의 질문에 한센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제 차례가 올 때까지 휴식이에요. 두 시간이나 비어서 구경 좀 하려고 활주로로 나왔어요.”
「거기 혼자 서 있으면 꽤 위험할 텐데요.」
“안 쓰는 활주로라서 괜찮아요.”
이곳이 더 편하기도 하고, 라는 말은 속으로만 덧붙였다. 아이린은 수긍하는 반응을 보이고는, 잠깐의 침묵 후 사근사근 운을 뗐다.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좋아하지 않을 건 알지만, 클라인 경이 이게 최선이라고 했어요. 한센의 심기를 건드린 건 아닌지 심히 걱정되네요.」
혹여나 불쾌해할까 조심스럽게, 유감이 아닌 사과의 말을 건넸다. 사람 대 사람의 대화이니 솔직해져도 된다 싶었으리라. 다만 한센은 이미 마음을 굳힌 일을 다시 되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사정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니까.”
「그렇군요. 클라인 경의 공이네요.」
“그리고…… 인정하긴 싫지만, 제가 원해서 하는 것도 있어요. 선배의 말을 듣고 좀 더 ‘어른스러운’ 결심을 했거든요.”
「흐음, 어떤 결심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의외라는 듯 아이린은 흥미를 보였다. 이 남자의 생각을 알고 싶다는 마음이 선명히 표현되고 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센은 주차해둔 지프에 몸을 기댔다. 괜히 망설여져서 뒷머리를 살짝 긁는다.
“회색 영역을 찾을 겁니다. 아이린과 저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방안이 있을 테죠. 그 가능성을 보고 당신을 돕기로 했어요.”
「그 말은, 역시 기사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아뇨. 좀 더 개인적인 이유입니다.”
「개인적인 이유?」
아이린은 말꼬리를 올렸다. 들을 테니 무엇이든지 말해보라는 은연중의 격려였다. 할 대답이야 정해져 있었지만, 막상 입을 열려니 한센은 막막했다. 잘만 해오던 감정 표현이 이번만큼은 이상하게 어렵다.
“그게…….”
알 수 없는 난관에 봉착한 그는, 이내 눈을 질끈 감고 억지로라도 목소리를 내뱉었다.
“당신의 호의를 배신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에요.”
대답 대신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륙을 준비하는 또 다른 편대를 바라보며 한센은 말을 이었다.
“아이린,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말도 안 되는 프로젝트에 아무렇지도 않게 돈을 대줄 정도로. 황녀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그런 사람의 곤란을 무시할 수 있을 리 없잖아요.”
그 심리를 이용당한 지금이, 솔직히 말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려던 말은 차마 꺼낼 용기조차 낼 수 없었다. 그게 과연 진심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던 탓이다. 어른스러운 결정이 항상 만족스럽다는 보장은 없다. 그것 때문에 쉽게 입을 못 열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한센이 조금이라도 제게 실망했을 법하네요.」
맥락 사이에 숨겨진 의미를 아이린이 잡아내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옅게 떨리는 목소리로 씁쓸하게 사실을 인정했다. 자기 책임만 있는 게 아님에도 회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그 태도에, 한센은 순간 죄책감마저 느꼈다.
아직 그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좀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화가 안 났다고는 말할 수 없겠죠. 하지만 아이린이 최선을 다한 것도 사실이에요. 수없이 고민했지만 결국 그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어요. 당신 같은 관대한 인품의 사람이라면, 조금은 현실과 타협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고."
「관대했던 건가요, 저는.」
"네. 그런 아이린을 믿기 때문에 여기에 있는 거잖아요."
한센이 확실하게 대답한 덕분인지, 아이린은 나쁘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정확히는 좀 전의 씁쓸함이 부드러운 날숨에 대부분 씻겨나갔다.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기분이 상당히 좋아진 듯했다. 나직이 전하는 감사의 말에 상냥함이 묻어나왔다.
「고마워요, 저를 그렇게 생각해주셔서. 알고 보니 한센에겐 여자를 기분 좋게 만드는 재주도 있었군요.」
"음? 딱히 뭘 의도하고 말한 건 아닌데……."
이해가 안 된다는 듯 한센이 말끝을 흐리자 아이린은 조용히 웃음을 흘리고는, 한결 가벼워진 분위기 속에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이런 부조리를 받아준 보답을 꼭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뭘 해야 한센이 기뻐할지 감이 오지 않더군요. 그래서 묻는데, 에어쇼가 끝나면 둘이서 저녁식사라도 하지 않을래요?」
"엣."
전혀 예상치 못한 제의에, 말보다 이상한 소리가 먼저 튀어나온 한센이었다. 식사야 괜찮지만 저편에서 풍겨오는 어감이 왠지 수줍다. 역시, 이번에도 황녀가 아닌, 한 명의 소녀를 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아이린의 부언이 구름 끼기 시작한 머릿속을 헤집었다.
「강가에 좋은 레스토랑이 하나 있거든요. 이맘때면 심야에도 영업하니까 느긋이 있을 수 있어요. 아, 물론 돈은 제가 낼 거에요. 수도의 귀족도 쉽게 못 가는 비싼 데라서…….」
“저와 함께 가야 될 이유라도 특별히 있습니까?”
「네?」
아이린은 자기도 모르게 벙찐 목소리로 되물었다. 이후 한센의 말을 곱씹듯 몇 초간 침묵에 빠졌다. 설명이 불충분했나? 보답이 만족스럽지 않은 건가? 아니면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못해서 저런 질문을 꺼냈나?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어 일단 물어보았다.
「식사를 같이 하는 게 싫으신가요?」
“아뇨, 그게…… ‘둘이서’라고 하셨잖아요. 그 부분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의아함이 든 것뿐이에요. 웬 3급 기사와 밤늦게까지 함께 있으면, 아이린이 쓸데없는 오해를 사게 되니까요.”
일이 그렇게 틀어지는 순간 상당히 피곤해지는 건 자명했다. 그제야 아이린은 한센이 무엇을 걱정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파파라치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일대 스캔들로 번질 것이라는 예상은 그녀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걸 한두 번 겪어본 게 아니다. 대비책이야 물론 준비되어 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단둘이 가도 아무 문제없게 처리해뒀으니까. 거기에 더해서, 한센이 찾는 ‘특별한 이유’는 이미 있지 않나요? 황궁 연회에서 있었던 일, 기억 안 나세요?」
조금은 추궁조가 되어버린 것 같은 질문에 이번엔 한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때의 일을 되짚으려는 듯 지프의 보닛 표면을 손가락으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기대도 안 했는지, 아이린은 실소와 함께 천천히 운을 뗐다.
「한센이 와인을 건넸을 때, 공석에선 술을 안 마신다면서 거절했잖아요. 당연한 대응을 한 거였지만 항상 마음에 걸렸어요.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당신과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자 싶었죠. 물론…… 술도 함께 하겠지만요.」
……뭐야, 그걸 담아두고 있었나.
거절당했다 해도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괜찮다고 한센은 말하고 싶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가볍게 생각해선 안 된다는 판단이 섰다. 무턱대고 위로하면 아이린을 실망시킬 가능성이 있다. 어쩌면 좋지, 하고 고민하다 결국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존중해주자. 여태까지 그래왔듯.
“알겠습니다. 아이린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했어요. 몇 시에 만나면 되는 거죠?”
「에어쇼를 성공시키고 나서 같이 논해봐요. 한센도 저도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나쁘지 않은 반응에 아이린의 목소리도 조금 밝아졌다. 창공을 질주하는 편대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리며, 한센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이제 다른 일을 하러 가볼게요. 아이린을 위해 준비해둔 게 있어서. 완성은 했지만, 아직 미세한 조정이 필요한 단계거든요.”
「어머, 선물인가요? 제가 받을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무엇인지는 그쪽으로 가서 보여드릴게요. 황족이 입을 거라서 신경 좀 썼어요. 30분 내로 도착하니까 기다리고 있어주세요.”
「네? 한센이 이쪽으로 온다니, 무슨…….」
아이린의 말을 끝까지 들을 생각이 없었던 한센은, ‘이만 끊습니다.’라는 짧은 인사와 함께 통화종료를 눌러버렸다. 신호음이 울리고, 대화가 완전히 죽은 때에 맞춰 비행장의 공허함이 다시 찾아왔다. 어둠과 냉기에 감싸인 그의 표정이 어느덧 무거워졌다.
그러나 이내 하품과 함께, 있는 힘껏 기지개를 켰다. 두 시간의 공백은 역시 딴짓하기 좋은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