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아호트니크(охотник) - 2
─네게 신념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나도 알고 있다.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 아멜리아는 한센을 따로 불러 이렇게 말했다. 긍정도 부정도 않지만 사실이라는 듯 목소리에 힘을 주면서.
─하지만 기분이 나빠도, 신념을 굽혀야만 할 때가 반드시 있어. 자기를 억누를 줄 아는 것 또한 기사가 가져야 될 소양이야. 뻣뻣하게 서 있는 게 나쁘다곤 못 하겠다만, 계속 그러다간 언젠가 네 신념마저 부러지게 될 거다.
그러면서 가끔은 갈대가 되어도 괜찮다고, 그녀는 덧붙였다. 원론에 매달리지 말라는 학창 시절의 조언과 별다를 건 없었다. 다만 그 상황에서 한센은 알 수 없는 동요를 느꼈다. 말 하나하나가 손가락이 되어 가슴을 직접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선택은 네가 하도록 해. 신념을 지키든지, 의무를 따르든지. 어느 쪽을 택해도 타의 모범이 된다. 어른스러운 결정인가 아닌가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러니 너에게서 좋은 대답이 나오길 기대하고 있겠다.
직후 몸을 돌려 떠나가려는 선배를 붙잡고 무엇이 ‘어른스러운’ 건지 물어보았다. 그 자신이 성숙함에 집착한 적은 없지만, 그 표현이 유난히 마음에 걸린 탓이다. 검문대 앞에 선 선배는, 엷은 미소와 함께 망설임 없이 정의를 내렸다.
─중도(中道)를 걷는 것이다. 모두가 만족할 회색 영역을 찾으면 돼.
그게 가능은 하냐고 묻자, ‘네가 생각해야 될 문제’라는 정론만이 돌아왔다. 등 뒤에서 아유다가 부르는 바람에 대화가 이어질 가능성이 파투 나고 말았다. 다시 검문대 쪽을 돌아봤을 때 선배는 벌써 저만치에 있었다. 지긋이 그를 바라보며, 겨우 들릴 듯한 속삭임을 테이블 너머로 전했다.
─그 분을 위한 길이 가장 쉽고 빠른 길일 거다, 한센 헤르만.
한 마디 부연 설명도 없이 선배는 본국으로 떠나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결국 자력으로 회색 영역을 찾아야 될 처지에 놓인 한센은, 껄끄러운 심정을 간직한 채 아유다와 함께 데이트를 하러 갔다.
선택이야 오래 전에 한 뒤였지만, 말할 기회를 놓쳐버렸기에 더욱 복잡한 고민에 빠져들고 말았다.
바람이 더욱 추워지자 한센은 감았던 눈을 떴다.
청색이 짙어진 하늘을 보면서 시간을 너무 지체했음을 깨달았다. 10분 정도 지났을 뿐이지만 아이린에게 ‘선물’을 갖다 주려면 서둘러야 했다. 이쯤 되면 이 비행장을 향하는 자동차의 수가 한두 대씩 늘고 있을 터였다. 조만간 사상 최악의 러시아워가 펼쳐지게 된다.
자신의 일일 상관에겐 이미 허락을 받아 뒀다. 도움을 요청할 만한 사람이 있을까 싶어, 핸드폰을 켜고 연락처를 뒤지기 시작했다. 바쁘게 화면을 내리는 동안 다른 손은 지프의 뒷자리로 들어갔다. 혹여 그것이 잘 있는지 몇 번을 만지고 또 만졌다.
아네모네는 기체를 조정하느라 바쁘고, 아유다는 랭 이모의 노점 준비를 돕고 있다. 아이린이나 아멜리아 선배는 당연히 불가능하며 기네비어는 악연 때문에 물을 용기조차 안 난다. 최근에 면식을 튼 에이미는 아직 어색해서 말을 못 걸겠다. 뭐야 이거. 내 인맥, 생각보다 좁잖아. 작게 탄식을 내뱉으며 한센은 아예 Z항까지 주욱 목록을 내려버렸다.
……그러던 중, ‘메르겔 라인하르트’라는 이름이 눈을 스치고 지나갔다.
손가락을 멈추고는 목록을 다시 위로 올렸다. 생각해 보니, 메르겔이 무슨 일을 하러 갔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습관대로 도서관에 있지 않을까 해도 오늘 같은 날엔 다른 걸 하고 있을 테다. 그게 무엇이든 바쁘지 않기만을 바랐다.
머뭇거리는 것도 잠시, 메르겔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흘러나오는 대기음을 듣고 있던 한센은 문득 친구 녀석이 아직도 화가 나 있는지 궁금해졌다.
메르겔은 결국 에어쇼에 불참하는 쪽을 택했다. 팀의 서포터로서 얻을 수 있는 혜택과 경력을 전부 포기하겠다고 분명히 밝혔다. 과도한 간섭으로 비쳐지긴 싫었는지, 한센의 결정은 존중한다고 덧붙이긴 했다. 그 뒤 본국으로 돌아와선 에어쇼 당일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을 보냈다.
줄곧 평온한 분위기였기에 기분이 어떤지조차 감 잡기 어려웠다. 평소대로 웃고, 지적이고, 긍정적이었지만 사람의 감정이 숨긴다고 쉽게 숨겨지는가. 이번 일에 대한 메르겔의 생각은 가끔씩 보이는 언동을 통해 단편적으로나마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불참한다고 했을 때 한센만은 그에게 어떤 비난도 하지 않았다.
─돕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 여자에게 너무 휩쓸리진 마.
가게를 출발하기 전에 메르겔이 마지막으로 남긴 충고였다. 개인적인 감정과는 별개로 친구를 걱정하는 진심이 담겨 있어 나쁘게 들리지 않았다. 이런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려는 자신이 참 뻔뻔스럽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한센은 전화가 연결되기만을 차분히 기다렸다.
30초 정도를 기다린 끝에 대기음이 멈췄다. 그리고 ‘여보세요’라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뚝, 하고 신호가 끊겼다.
당황한 한센은 귀에서 수화기를 뗐다. 잘만 되던 통화가 갑자기 안 되는 건 무슨 조화일까. 메르겔은 지인의 전화를 거부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루 만에 태도를 바꾼 것은 아닐 테니,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분명했다. 기기를 뒤집자 ‘통화권 이탈’을 상징하는 표시가 화면에 떠 있었다. 이거였냐, 하고 중얼거리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환상적이군. 하필 이런 때에…….”
미간에 섞인 조급함과 짜증이 몇 초 만에 의구심으로 바뀌었다. 신호 상태야 나빠질 수 있어도, 통화를 못 할 정도까지 가는 건 흔치 않았다. 게다가 꽤나 심각한 문제인 듯 이 표시가 지금도 깜빡거리고 있었다. 군사시설이라 해도 통화권 안에는 들 텐데?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결국 그뿐이었다. 한센은 핸드폰을 일단 하늘 높이 들어 올리고 봤다. 머리를 오묘하게 치켜든 바보 같은 자세로 활주로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주변에 아무도 없었기에 부끄러움 따위 느껴지지 않았다. 백열등 같은 화면을 계속 주시하고 있자 최면에 빠진 듯,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주변이 점점 어둠에 휩싸여갔다.
신호가 다시 잡히는 동시에 복부와 허벅지에 충격이 전해졌다. 다행이게도 그것으로 한센의 의식은 현실로 돌아오게 되었다. 깜짝 놀란 그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을 친 게 무엇인지 얼른 찾아내려 했다.
반쯤 쓰러진 한 소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작고 가늘어서 꽃이 필 나이라고 표현될 법했다. 빵모자에 눌린 미려한 은발에 제일 먼저 눈이 갔다. 옆머리를 길게, 뒷머리를 짧게 친 모양새가 상당히 특이하다. 체구에 비해 약간 큰 트렌치코트 밑으로는, 아직 이르지 않을까 싶은 디자인의 롱부츠가 있었다. 넘어진 탓인지 펄럭일 수 있는 모든 부분이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상태였다. 전체적으로 숙녀보단 ‘숙녀가 되고 싶어 하는 아이’의 인상을 주었다.
본의 아니게 쓰러진 소녀는 소리도 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옷에 묻은 먼지를 터는가 싶더니, 곧 자기 키만 한 스포츠 가방을 등에 멨다. 군사시설에 웬 여자애가 있는지 알고 싶어진 한센은, 우선 사과부터 할까 해서 그녀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을 걸었다.
“미안해. 다친 데는 없어?”
소녀는 팔을 멈추고 한센을 올려다보았다. 눈동자의 색과 깊이가 묘하게 아유다를 닮아서 무심결에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침묵을 지키던 소녀는, 이내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걱정 말라는 듯 가볍게 대답했다.
“괜찮아, 아저씨. 이 정도로 다치거나 하진 않아.”
아저씨라니……. 초면인 것치고는 상당히 과격한 언사였다. 내심 화가 났는지 나이차를 무시하고 반말까지 쓰고 있었다. 그 추측을 증명하듯 소녀의 미소가 장난스러운 쪽으로 짙어졌다.
소녀는 말을 이었다.
“나도 아저씨의 일을 방해해서 미안해. 통화 신호를 잡고 있었지? 자세가 바보 같아서 나도 모르게 웃게 되더라고.”
“아, 응. 되던 게 갑자기 안 돼서.”
얼떨결에 한센은 소녀의 말을 긍정했다. 한 마디 지적이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저 악의 섞인 솔직함에 휘말려 운을 뗄 수 없었다. 특이한 아이, 라는 정의가 머릿속에서 성립되려는 찰나 저쪽에서 대뜸 악수를 청해왔다.
“아냐(А́ня)라고 해. 아냐 아호트니크.”
이국적인 이름이다. 저 멀리 스칸디나비아 연맹에서나 쓰일 법한. 그런 생각을 하며 한센은 소녀의 손을 잡고, 자기 이름도 알려주었다.
이름 교환이 끝난 뒤 두 사람은 손을 뗐다. 초면에 이 이상 나아가는 건 서로 어색해질 뿐이다. 애당초 갖고 있던 의문은 분위기상 풀지 못할 것 같아, 한센은 혼자 체념에 잠겼다. 어차피 이 소녀가 자기 같은 타인에게 그런 것을 알려줄 이유는 없을 테다. 다음부턴 조심하겠다는 말과 함께 적당히 소녀를 보내려 했다.
한순간, 어둠 속에서 한센을 바라보는 아냐의 눈이 가늘어졌다. 잠시 후에 내뱉은 말은 그의 심중을 정확히 꿰뚫는 듯했다.
“아쉬워하고 있구나, 알고 싶은 걸 알지 못해서.”
“……어?”
당황한 한센은 아랑곳 않은 채 아냐는 싱긋 웃었다. 그 미소에 왠지 모를 경계심을 품게 되는 건 왜일까. 한센의 어깨 너머, 흐릿하게 보이는 격납고를 가리키며 아냐는 운을 뗐다.
“최대한 빨리 저기로 가야 해. 이래봬도 중요한 일을 하고 있거든.”
“너 같은 어린애가 저런 곳에 갈 수 있을 리 없잖아.”
한센은 무심코 가슴속의 진심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아냐는,
“아니, 갈 수 있어.”
코트를 살짝 젖히고는, 목에 건 무언가를 꺼내 한센에게 보여주었다. 조명이 별로 없어서 그것의 정체를 파악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아냐가 손에 들어 보인 것은 다름 아닌 프레스(press)증이었다.
“에어쇼에 참여하는 파일럿들을 취재하러 왔어.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내 역할은 스승님의 촬영 보조야. 격납고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약속 시간에 늦어버려서 말이지.”
“그렇구나. 뭐, 그런 것까지 내게 말해줄 필요는 없었지만.”
뭔가 그럴싸한 설명에 한센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의 제자, 라고 소개받으면 보통 저 나이대의 아이들을 보기 마련이었다. 그렇다면 저 엄청나게 큰 스포츠 가방엔 촬영 장비가 들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아까부터 신경 쓰이긴 했지만, 말을 들어보니 납득이 갔다.
흐음, 하고 숨을 내쉬며 의심의 잔재를 모두 씻어냈다. 아냐는 코트 속에 프레스증을 다시 집어넣은 뒤, 흥미 가득한 얼굴로 한센의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아저씨도 마도병기 파일럿이지? 에어쇼 참가자니까 이 시간까지 남아 있는 것일 테고. 어때, 인터뷰 한 번 해보지 않을래? 스승님께 좋은 기사 써달라고 부탁드려줄게.”
“아니, 됐어. 인터뷰 같은 건 별로 안 좋아해.”
이름으로 불리지 않은 건 둘째 치고, 인터뷰라니. 여러 가지로 특이한 입장에 있는 한센이 그런 제의를 받아들이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럼에도 자기가 ‘파일럿’이라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자기도 모르게 변덕을 부린 것이리라. 빼지 말라면서 아냐가 재차 물었지만, 한센의 대답은 바뀌지 않았다.
“그래. 아쉽게 됐네.”
의외로 아냐는 순순히 물러나주었다. 시계를 잠시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작게 혼잣말을 했다. 늦은 모양이었다.
“이런, 너무 게으름을 피웠네. 스승님께 혼나겠어.”
“격납고까지 차로 데려다줄까?”
초면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게 무의미해졌으므로 한센은 일단 묻고 봤다. 하지만 받아들일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아냐는 손을 내저으며 거절의 뜻을 밝혔다.
“뛰어서도 충분히 갈 수 있어. 지름길 정도는 나도 알고 있거든. 그럼 먼저 가볼게, 아저씨. 서로 바쁜 처지니까.”
“한센 헤르만이라니까…….”
소소한 불평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아냐는 격납고를 향해 달릴 준비를 했다. 일부러 호흡까지 고르는 모습은 흥분한 어린애나 다름없었다. 지면을 박차기 전, 아냐는 곁눈질로 한센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이런 말을 했다.
“‘운이 좋으면’, 다시 만날 수도 있겠네.”
“뭐?”
한센이 되묻는 때에 맞춰 아냐는 재빨리 어둠 속으로 달려들었다. 이윽고 그녀의 모습을 육안으로는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지프 쪽으로 돌아간 한센은 혼자 남게 되자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별난 경험을 다 했다고 생각하며 다시 핸드폰을 켰다.
대기음은 울렸지만, 통화가 안 되는 건 여전했다.
흐뭇한 미소와 함께 아냐는 텅 빈 활주로를 가로질렀다. 스포츠 가방이 몸짓에 따라 덜커덕, 하고 거칠게 흔들렸다.
백 미터 전방의 가로등에 도달한 뒤 120도 돌아 목적지를 향해 이동. 중간에 벽이 보이자 그림자에 녹아든 채 소리를 죽여 전진했다. 그대로 걷는가 싶더니, 점점 속도를 붙여 달리기까지 했다. 어느 순간 튕겨 올라 벽을 짚고 넘었다.
아냐는 지면에 사뿐하게 내려앉았다. 착지하자마자 주위를 살피고, 구석을 따라 움직였다. 여기까지 오면서 가로등 불빛에 노출된 시간은 도합 4초. 이곳에 있을 정당한 자격을 갖췄는데, 굳이 은밀한 방식을 쓰면서 격납고와의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앗.”
걸음을 옮기던 도중 아냐의 몸이 살짝 뒤로 쏠렸다. 고개를 돌리니, 소매 부분이 철조망에 끼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지나친 가로등과 인접했기에 서둘러 소매를 뺐다. 저 너머를 주시하는 그 눈빛에 장난기는 더 이상 없었다. 오히려, 그것은 뼛속까지 아파올 정도로 냉정하고 무감정했다.
어딜 봐도 평범한 사진사의 제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거기 멈춰.”
길을 재촉하려는 찰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령조인 것을 보니 군인이 확실했다. 침입자로 인식한 듯 총구를 겨누는 소리가 더해졌다.
……하지만 아냐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프레스증을 꺼낸 직후 두 손을 들었다. 그리고 군인의 명령에 따라 천천히 뒤로 돌았다. 이쪽을 비추는 플래시가 따가울 정도로 눈부시다. 눈이 살짝 가늘어졌지만 그저 그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스승님과 떨어지는 바람에 길을 잃었어요.”
일단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사정을 설명했다. 그게 진실인지 아닌지는 저 군인이 알 필요 없었다. 아냐의 목에 걸린 프레스증을 본 군인은 예상대로 경계를 조금 풀었다.
“여긴 제한 구역입니다. 죄송하지만 이름과 신분을 밝혀주십시오.”
“아냐 보리소브나 아호트니크. 기자단과 함께 온 촬영 보조입니다.”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명단에 이름이 있으니, 최소한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냐의 말을 들은 군인의 표정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살짝 일그러졌다.
“현망에 수신 대기 중인 바우어. 여기는 에딘, 송신바람.”
군인은 곧바로 무전을 시도했다. 작전 실패를 의미했지만, 아냐는 여유 있는 모습 그대로였다. 신호가 안 잡히는지 군인은 무전기를 이리저리 조작했다. 응답이 돌아온 것 같자,
“확인점 4번에 거수자 발견. 기자단 명단에 ‘아냐 보리소브나 아호트니크’가 있는지 확인 바람.”
그 자세로 몇 초 기다렸으나 지직거리는 소음만이 돌아왔다. 조급해진 군인은 똑같은 보고를 올린 직후 말 하나를 뒤에 덧붙였다.
“비행장에 들어온 기자단 속에 여자아이가 있었는지도 확인바람. 반복, 비행장에 들어온 기자단 속에…….”
의혹이 짙어질 기미가 보이자 아냐는 즉시 움직였다. 총구를 다른 방향으로 쳐내는 동시에 소매에 숨겨둔 칼날을 꺼냈다. 입을 틀어막고는, 왼쪽 허벅지에 날을 박아 넣었다. 피가 솟구치며 희생양의 몸이 반쯤 쓰러졌다.
아냐는 군인의 어깨를 타고 올라가, 허벅지 안쪽으로 목을 감았다. 총을 잡으려는 손은 히든 블레이드를 뽑아 손등에 찔렀다. 신음만을 흘릴 수 있는 군인을 위해, 온화한 목소리로 이렇게 속삭여주었다.
“미안해. 나도 이럴 생각은 없었어. 하지만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인다는 말도 있잖니?”
무전을 보내봤자 어차피 소용없다. 이 비행장엔 산발적으로 전파 장애가 일어나고 있다. 보고가 올라갔다 해도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아냐는 여태껏 태연하게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잠깐 자고 있으렴. 나중에 깨우러 올 테니까.”
아냐는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 잠시 후 뚝, 하고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경련이 멈추고 나서야 손등에 박은 칼날을 뽑았다. 묻은 피는 트렌치코트 안쪽으로 대충 닦았다.
마지막으로 조용히 군인의 시체를 어둠 속으로 끌고 갔다. 칠흑의 장막에서 다시 나왔을 땐 그녀 혼자밖에 없었다.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 아멜리아는 한센을 따로 불러 이렇게 말했다. 긍정도 부정도 않지만 사실이라는 듯 목소리에 힘을 주면서.
─하지만 기분이 나빠도, 신념을 굽혀야만 할 때가 반드시 있어. 자기를 억누를 줄 아는 것 또한 기사가 가져야 될 소양이야. 뻣뻣하게 서 있는 게 나쁘다곤 못 하겠다만, 계속 그러다간 언젠가 네 신념마저 부러지게 될 거다.
그러면서 가끔은 갈대가 되어도 괜찮다고, 그녀는 덧붙였다. 원론에 매달리지 말라는 학창 시절의 조언과 별다를 건 없었다. 다만 그 상황에서 한센은 알 수 없는 동요를 느꼈다. 말 하나하나가 손가락이 되어 가슴을 직접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선택은 네가 하도록 해. 신념을 지키든지, 의무를 따르든지. 어느 쪽을 택해도 타의 모범이 된다. 어른스러운 결정인가 아닌가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러니 너에게서 좋은 대답이 나오길 기대하고 있겠다.
직후 몸을 돌려 떠나가려는 선배를 붙잡고 무엇이 ‘어른스러운’ 건지 물어보았다. 그 자신이 성숙함에 집착한 적은 없지만, 그 표현이 유난히 마음에 걸린 탓이다. 검문대 앞에 선 선배는, 엷은 미소와 함께 망설임 없이 정의를 내렸다.
─중도(中道)를 걷는 것이다. 모두가 만족할 회색 영역을 찾으면 돼.
그게 가능은 하냐고 묻자, ‘네가 생각해야 될 문제’라는 정론만이 돌아왔다. 등 뒤에서 아유다가 부르는 바람에 대화가 이어질 가능성이 파투 나고 말았다. 다시 검문대 쪽을 돌아봤을 때 선배는 벌써 저만치에 있었다. 지긋이 그를 바라보며, 겨우 들릴 듯한 속삭임을 테이블 너머로 전했다.
─그 분을 위한 길이 가장 쉽고 빠른 길일 거다, 한센 헤르만.
한 마디 부연 설명도 없이 선배는 본국으로 떠나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결국 자력으로 회색 영역을 찾아야 될 처지에 놓인 한센은, 껄끄러운 심정을 간직한 채 아유다와 함께 데이트를 하러 갔다.
선택이야 오래 전에 한 뒤였지만, 말할 기회를 놓쳐버렸기에 더욱 복잡한 고민에 빠져들고 말았다.
바람이 더욱 추워지자 한센은 감았던 눈을 떴다.
청색이 짙어진 하늘을 보면서 시간을 너무 지체했음을 깨달았다. 10분 정도 지났을 뿐이지만 아이린에게 ‘선물’을 갖다 주려면 서둘러야 했다. 이쯤 되면 이 비행장을 향하는 자동차의 수가 한두 대씩 늘고 있을 터였다. 조만간 사상 최악의 러시아워가 펼쳐지게 된다.
자신의 일일 상관에겐 이미 허락을 받아 뒀다. 도움을 요청할 만한 사람이 있을까 싶어, 핸드폰을 켜고 연락처를 뒤지기 시작했다. 바쁘게 화면을 내리는 동안 다른 손은 지프의 뒷자리로 들어갔다. 혹여 그것이 잘 있는지 몇 번을 만지고 또 만졌다.
아네모네는 기체를 조정하느라 바쁘고, 아유다는 랭 이모의 노점 준비를 돕고 있다. 아이린이나 아멜리아 선배는 당연히 불가능하며 기네비어는 악연 때문에 물을 용기조차 안 난다. 최근에 면식을 튼 에이미는 아직 어색해서 말을 못 걸겠다. 뭐야 이거. 내 인맥, 생각보다 좁잖아. 작게 탄식을 내뱉으며 한센은 아예 Z항까지 주욱 목록을 내려버렸다.
……그러던 중, ‘메르겔 라인하르트’라는 이름이 눈을 스치고 지나갔다.
손가락을 멈추고는 목록을 다시 위로 올렸다. 생각해 보니, 메르겔이 무슨 일을 하러 갔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습관대로 도서관에 있지 않을까 해도 오늘 같은 날엔 다른 걸 하고 있을 테다. 그게 무엇이든 바쁘지 않기만을 바랐다.
머뭇거리는 것도 잠시, 메르겔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흘러나오는 대기음을 듣고 있던 한센은 문득 친구 녀석이 아직도 화가 나 있는지 궁금해졌다.
메르겔은 결국 에어쇼에 불참하는 쪽을 택했다. 팀의 서포터로서 얻을 수 있는 혜택과 경력을 전부 포기하겠다고 분명히 밝혔다. 과도한 간섭으로 비쳐지긴 싫었는지, 한센의 결정은 존중한다고 덧붙이긴 했다. 그 뒤 본국으로 돌아와선 에어쇼 당일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을 보냈다.
줄곧 평온한 분위기였기에 기분이 어떤지조차 감 잡기 어려웠다. 평소대로 웃고, 지적이고, 긍정적이었지만 사람의 감정이 숨긴다고 쉽게 숨겨지는가. 이번 일에 대한 메르겔의 생각은 가끔씩 보이는 언동을 통해 단편적으로나마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불참한다고 했을 때 한센만은 그에게 어떤 비난도 하지 않았다.
─돕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 여자에게 너무 휩쓸리진 마.
가게를 출발하기 전에 메르겔이 마지막으로 남긴 충고였다. 개인적인 감정과는 별개로 친구를 걱정하는 진심이 담겨 있어 나쁘게 들리지 않았다. 이런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려는 자신이 참 뻔뻔스럽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한센은 전화가 연결되기만을 차분히 기다렸다.
30초 정도를 기다린 끝에 대기음이 멈췄다. 그리고 ‘여보세요’라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뚝, 하고 신호가 끊겼다.
당황한 한센은 귀에서 수화기를 뗐다. 잘만 되던 통화가 갑자기 안 되는 건 무슨 조화일까. 메르겔은 지인의 전화를 거부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루 만에 태도를 바꾼 것은 아닐 테니,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분명했다. 기기를 뒤집자 ‘통화권 이탈’을 상징하는 표시가 화면에 떠 있었다. 이거였냐, 하고 중얼거리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환상적이군. 하필 이런 때에…….”
미간에 섞인 조급함과 짜증이 몇 초 만에 의구심으로 바뀌었다. 신호 상태야 나빠질 수 있어도, 통화를 못 할 정도까지 가는 건 흔치 않았다. 게다가 꽤나 심각한 문제인 듯 이 표시가 지금도 깜빡거리고 있었다. 군사시설이라 해도 통화권 안에는 들 텐데?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결국 그뿐이었다. 한센은 핸드폰을 일단 하늘 높이 들어 올리고 봤다. 머리를 오묘하게 치켜든 바보 같은 자세로 활주로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주변에 아무도 없었기에 부끄러움 따위 느껴지지 않았다. 백열등 같은 화면을 계속 주시하고 있자 최면에 빠진 듯,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주변이 점점 어둠에 휩싸여갔다.
신호가 다시 잡히는 동시에 복부와 허벅지에 충격이 전해졌다. 다행이게도 그것으로 한센의 의식은 현실로 돌아오게 되었다. 깜짝 놀란 그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을 친 게 무엇인지 얼른 찾아내려 했다.
반쯤 쓰러진 한 소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작고 가늘어서 꽃이 필 나이라고 표현될 법했다. 빵모자에 눌린 미려한 은발에 제일 먼저 눈이 갔다. 옆머리를 길게, 뒷머리를 짧게 친 모양새가 상당히 특이하다. 체구에 비해 약간 큰 트렌치코트 밑으로는, 아직 이르지 않을까 싶은 디자인의 롱부츠가 있었다. 넘어진 탓인지 펄럭일 수 있는 모든 부분이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상태였다. 전체적으로 숙녀보단 ‘숙녀가 되고 싶어 하는 아이’의 인상을 주었다.
본의 아니게 쓰러진 소녀는 소리도 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옷에 묻은 먼지를 터는가 싶더니, 곧 자기 키만 한 스포츠 가방을 등에 멨다. 군사시설에 웬 여자애가 있는지 알고 싶어진 한센은, 우선 사과부터 할까 해서 그녀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을 걸었다.
“미안해. 다친 데는 없어?”
소녀는 팔을 멈추고 한센을 올려다보았다. 눈동자의 색과 깊이가 묘하게 아유다를 닮아서 무심결에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침묵을 지키던 소녀는, 이내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걱정 말라는 듯 가볍게 대답했다.
“괜찮아, 아저씨. 이 정도로 다치거나 하진 않아.”
아저씨라니……. 초면인 것치고는 상당히 과격한 언사였다. 내심 화가 났는지 나이차를 무시하고 반말까지 쓰고 있었다. 그 추측을 증명하듯 소녀의 미소가 장난스러운 쪽으로 짙어졌다.
소녀는 말을 이었다.
“나도 아저씨의 일을 방해해서 미안해. 통화 신호를 잡고 있었지? 자세가 바보 같아서 나도 모르게 웃게 되더라고.”
“아, 응. 되던 게 갑자기 안 돼서.”
얼떨결에 한센은 소녀의 말을 긍정했다. 한 마디 지적이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저 악의 섞인 솔직함에 휘말려 운을 뗄 수 없었다. 특이한 아이, 라는 정의가 머릿속에서 성립되려는 찰나 저쪽에서 대뜸 악수를 청해왔다.
“아냐(А́ня)라고 해. 아냐 아호트니크.”
이국적인 이름이다. 저 멀리 스칸디나비아 연맹에서나 쓰일 법한. 그런 생각을 하며 한센은 소녀의 손을 잡고, 자기 이름도 알려주었다.
이름 교환이 끝난 뒤 두 사람은 손을 뗐다. 초면에 이 이상 나아가는 건 서로 어색해질 뿐이다. 애당초 갖고 있던 의문은 분위기상 풀지 못할 것 같아, 한센은 혼자 체념에 잠겼다. 어차피 이 소녀가 자기 같은 타인에게 그런 것을 알려줄 이유는 없을 테다. 다음부턴 조심하겠다는 말과 함께 적당히 소녀를 보내려 했다.
한순간, 어둠 속에서 한센을 바라보는 아냐의 눈이 가늘어졌다. 잠시 후에 내뱉은 말은 그의 심중을 정확히 꿰뚫는 듯했다.
“아쉬워하고 있구나, 알고 싶은 걸 알지 못해서.”
“……어?”
당황한 한센은 아랑곳 않은 채 아냐는 싱긋 웃었다. 그 미소에 왠지 모를 경계심을 품게 되는 건 왜일까. 한센의 어깨 너머, 흐릿하게 보이는 격납고를 가리키며 아냐는 운을 뗐다.
“최대한 빨리 저기로 가야 해. 이래봬도 중요한 일을 하고 있거든.”
“너 같은 어린애가 저런 곳에 갈 수 있을 리 없잖아.”
한센은 무심코 가슴속의 진심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아냐는,
“아니, 갈 수 있어.”
코트를 살짝 젖히고는, 목에 건 무언가를 꺼내 한센에게 보여주었다. 조명이 별로 없어서 그것의 정체를 파악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아냐가 손에 들어 보인 것은 다름 아닌 프레스(press)증이었다.
“에어쇼에 참여하는 파일럿들을 취재하러 왔어.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내 역할은 스승님의 촬영 보조야. 격납고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약속 시간에 늦어버려서 말이지.”
“그렇구나. 뭐, 그런 것까지 내게 말해줄 필요는 없었지만.”
뭔가 그럴싸한 설명에 한센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의 제자, 라고 소개받으면 보통 저 나이대의 아이들을 보기 마련이었다. 그렇다면 저 엄청나게 큰 스포츠 가방엔 촬영 장비가 들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아까부터 신경 쓰이긴 했지만, 말을 들어보니 납득이 갔다.
흐음, 하고 숨을 내쉬며 의심의 잔재를 모두 씻어냈다. 아냐는 코트 속에 프레스증을 다시 집어넣은 뒤, 흥미 가득한 얼굴로 한센의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아저씨도 마도병기 파일럿이지? 에어쇼 참가자니까 이 시간까지 남아 있는 것일 테고. 어때, 인터뷰 한 번 해보지 않을래? 스승님께 좋은 기사 써달라고 부탁드려줄게.”
“아니, 됐어. 인터뷰 같은 건 별로 안 좋아해.”
이름으로 불리지 않은 건 둘째 치고, 인터뷰라니. 여러 가지로 특이한 입장에 있는 한센이 그런 제의를 받아들이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럼에도 자기가 ‘파일럿’이라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자기도 모르게 변덕을 부린 것이리라. 빼지 말라면서 아냐가 재차 물었지만, 한센의 대답은 바뀌지 않았다.
“그래. 아쉽게 됐네.”
의외로 아냐는 순순히 물러나주었다. 시계를 잠시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작게 혼잣말을 했다. 늦은 모양이었다.
“이런, 너무 게으름을 피웠네. 스승님께 혼나겠어.”
“격납고까지 차로 데려다줄까?”
초면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게 무의미해졌으므로 한센은 일단 묻고 봤다. 하지만 받아들일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아냐는 손을 내저으며 거절의 뜻을 밝혔다.
“뛰어서도 충분히 갈 수 있어. 지름길 정도는 나도 알고 있거든. 그럼 먼저 가볼게, 아저씨. 서로 바쁜 처지니까.”
“한센 헤르만이라니까…….”
소소한 불평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아냐는 격납고를 향해 달릴 준비를 했다. 일부러 호흡까지 고르는 모습은 흥분한 어린애나 다름없었다. 지면을 박차기 전, 아냐는 곁눈질로 한센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이런 말을 했다.
“‘운이 좋으면’, 다시 만날 수도 있겠네.”
“뭐?”
한센이 되묻는 때에 맞춰 아냐는 재빨리 어둠 속으로 달려들었다. 이윽고 그녀의 모습을 육안으로는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지프 쪽으로 돌아간 한센은 혼자 남게 되자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별난 경험을 다 했다고 생각하며 다시 핸드폰을 켰다.
대기음은 울렸지만, 통화가 안 되는 건 여전했다.
흐뭇한 미소와 함께 아냐는 텅 빈 활주로를 가로질렀다. 스포츠 가방이 몸짓에 따라 덜커덕, 하고 거칠게 흔들렸다.
백 미터 전방의 가로등에 도달한 뒤 120도 돌아 목적지를 향해 이동. 중간에 벽이 보이자 그림자에 녹아든 채 소리를 죽여 전진했다. 그대로 걷는가 싶더니, 점점 속도를 붙여 달리기까지 했다. 어느 순간 튕겨 올라 벽을 짚고 넘었다.
아냐는 지면에 사뿐하게 내려앉았다. 착지하자마자 주위를 살피고, 구석을 따라 움직였다. 여기까지 오면서 가로등 불빛에 노출된 시간은 도합 4초. 이곳에 있을 정당한 자격을 갖췄는데, 굳이 은밀한 방식을 쓰면서 격납고와의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앗.”
걸음을 옮기던 도중 아냐의 몸이 살짝 뒤로 쏠렸다. 고개를 돌리니, 소매 부분이 철조망에 끼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지나친 가로등과 인접했기에 서둘러 소매를 뺐다. 저 너머를 주시하는 그 눈빛에 장난기는 더 이상 없었다. 오히려, 그것은 뼛속까지 아파올 정도로 냉정하고 무감정했다.
어딜 봐도 평범한 사진사의 제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거기 멈춰.”
길을 재촉하려는 찰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령조인 것을 보니 군인이 확실했다. 침입자로 인식한 듯 총구를 겨누는 소리가 더해졌다.
……하지만 아냐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프레스증을 꺼낸 직후 두 손을 들었다. 그리고 군인의 명령에 따라 천천히 뒤로 돌았다. 이쪽을 비추는 플래시가 따가울 정도로 눈부시다. 눈이 살짝 가늘어졌지만 그저 그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스승님과 떨어지는 바람에 길을 잃었어요.”
일단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사정을 설명했다. 그게 진실인지 아닌지는 저 군인이 알 필요 없었다. 아냐의 목에 걸린 프레스증을 본 군인은 예상대로 경계를 조금 풀었다.
“여긴 제한 구역입니다. 죄송하지만 이름과 신분을 밝혀주십시오.”
“아냐 보리소브나 아호트니크. 기자단과 함께 온 촬영 보조입니다.”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명단에 이름이 있으니, 최소한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냐의 말을 들은 군인의 표정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살짝 일그러졌다.
“현망에 수신 대기 중인 바우어. 여기는 에딘, 송신바람.”
군인은 곧바로 무전을 시도했다. 작전 실패를 의미했지만, 아냐는 여유 있는 모습 그대로였다. 신호가 안 잡히는지 군인은 무전기를 이리저리 조작했다. 응답이 돌아온 것 같자,
“확인점 4번에 거수자 발견. 기자단 명단에 ‘아냐 보리소브나 아호트니크’가 있는지 확인 바람.”
그 자세로 몇 초 기다렸으나 지직거리는 소음만이 돌아왔다. 조급해진 군인은 똑같은 보고를 올린 직후 말 하나를 뒤에 덧붙였다.
“비행장에 들어온 기자단 속에 여자아이가 있었는지도 확인바람. 반복, 비행장에 들어온 기자단 속에…….”
의혹이 짙어질 기미가 보이자 아냐는 즉시 움직였다. 총구를 다른 방향으로 쳐내는 동시에 소매에 숨겨둔 칼날을 꺼냈다. 입을 틀어막고는, 왼쪽 허벅지에 날을 박아 넣었다. 피가 솟구치며 희생양의 몸이 반쯤 쓰러졌다.
아냐는 군인의 어깨를 타고 올라가, 허벅지 안쪽으로 목을 감았다. 총을 잡으려는 손은 히든 블레이드를 뽑아 손등에 찔렀다. 신음만을 흘릴 수 있는 군인을 위해, 온화한 목소리로 이렇게 속삭여주었다.
“미안해. 나도 이럴 생각은 없었어. 하지만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인다는 말도 있잖니?”
무전을 보내봤자 어차피 소용없다. 이 비행장엔 산발적으로 전파 장애가 일어나고 있다. 보고가 올라갔다 해도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아냐는 여태껏 태연하게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잠깐 자고 있으렴. 나중에 깨우러 올 테니까.”
아냐는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 잠시 후 뚝, 하고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경련이 멈추고 나서야 손등에 박은 칼날을 뽑았다. 묻은 피는 트렌치코트 안쪽으로 대충 닦았다.
마지막으로 조용히 군인의 시체를 어둠 속으로 끌고 갔다. 칠흑의 장막에서 다시 나왔을 땐 그녀 혼자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