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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부이니 짧게 끊습니다

04. 아호트니크(охотник) - 3


 따뜻한 물로 하는 샤워는 어느 때나 상관없이 기분이 좋다. 위에서 내려오는 물을 맞으며 아이린은 가슴골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갑자기 샤워를 하는 이유가 있다면, 에어쇼를 주관하기 전 심신을 정갈히 해두기 위함이었다. 크게 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다 보면 자연스레 여러 가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오묘한 곡선을 그리는 물줄기에 감싸여 이곳저곳으로 조금씩 눈을 돌렸다. 온기를 제대로 음미할 새도 없이 아이린은 자신의 고민을 하나씩 곱씹어가고 있었다.



 평소라면 그저 심신의 만족만을 얻고 끝났겠지만, 지금은 뭔가 다른 느낌이 있었다. 예상치 못한 소식을 접하는 바람에 평온하게 있을 순 없게 되었다. 그것이 불안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정신을 차렸을 땐 가슴 위에 손을 얹고 있었다. 심적으로 동요하고 있을 때 가끔씩 이런 버릇을 보이곤 했다.



 한센 헤르만이 그녀가 있는 곳으로 온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바로 지금.



 손 때문에 진로가 막힌 물이 양옆으로 완만한 호를 타고 떨어져내렸다. 투두둑, 하고 바닥에서 나는 소리가 샤워 부스 속에서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고개를 숙인 채 머리, 목, 전면으로 물을 받아들이던 아이린은, 문득 저쪽에서 이변을 느끼고 말없이 시선을 옮겼다.



 문이 열리면서 작은 소녀가 샤워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에이미였다. 수증기 진 유리를 통해 눈이 마주치자 흠칫한다. 아직도 적응이 안 됐구나 싶어 아이린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밖에서 대기하라고 했는데, 굳이 안으로 들어온 것을 보니 전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나직이 입을 열었다.



 “용무가 있나요, 스튜어트 양?”



 “전하께서 입으실 옷이 준비되어 전달드리러 왔습니다.”



 “벌써 준비됐다고요? 오늘따라 메이드장이 급하게 구는군요.”



 “아, 그게 아니라…….”



 아이린은 확실한 구석이 없는 에이미가 답답했지만, 아직 나이가 어리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샤워기를 끈 뒤 목욕 타월로 몸을 가린 채 부스를 나왔다. 에이미가 외출복을 안은 채 가만히 서 있자 아연한 미소와 함께 조용히 지적했다.



 “주군이 몸을 닦을 수건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만.”



 “죄, 죄송합니다! 당장 가져오겠습니다!”



 물기를 닦는 용도의 수건은 따로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테다. 바로 시정하려는 에이미를 아이린은 간단한 손짓과 함께 제지했다. 뒤쪽의 서랍에서 수건을 꺼내고는 에이미가 서 있는 곳 옆으로 다가갔다. 여자끼리였기에 몸을 감싼 타월을 벗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



 앞에 있는 거울에 나신이 하나 비쳤다. 얇고 단단히 잡힌 근육이 꾸준히 운동을 해온 세월을 증명했다. 군살 하나 없는 실루엣이 영애답다고 하면, 뭐 그렇겠지. 에이미도 그런 생각을 할까 싶어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꼼꼼하게 전신의 물기를 훑어내고 미리 준비된 속옷을 입었다.



 “레이디스 ​메​이​드​(​l​a​d​y​'​s​ maid)로 고속 승진한 소감은 어때요?”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아이린은 물었다. 주위가 조용한 탓인지, 에이미가 숨을 삼키는 것이 여기까지 다 들렸다.



 “일은 어렵지만, 적응하려고 노력중입니다.”



 “그래 보여요. 스튜어트 양의 그런 점은 높이 평가하고 있어요. 주변에서 축하의 말은 없던가요?”



 “동기들은 모두 잘 됐다고 했습니다. 선배님들도 축하해주셨고요. 다만…….”



 “음?”



 역시, 어딘가 힘든 부분이 있는 걸까. 자신을 지긋이 바라보는 아이린을 향해 에이미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메이드장님께선 절 안 좋게 보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이…… 뭐, 이해는 가네요.”



 아이린은 수긍한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주군을 직접 보좌하는 레이디스 메이드는 직책 특성상 메이드장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된 신참이 단숨에 자기와 나란히 섰으니, 메이드장 입장에선 그게 아니꼽게 보였으리라. 임명을 결정한 아이린 본인의 책임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사정을 알면서도 여전히 소고집이라니. 단순한 변덕으로 에이미를 뽑은 게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거늘. 한 번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다고 결의하며, 아이린은 물기 빠진 머리를 손으로 정리해 대충 형태를 잡았다.



 “머리 손질 좀 도와주시겠어요? 우선 드라이부터.”



 “예, 전하.”



 에이미는 이번만큼은 신속하게 요청에 응했다. 드라이기와 빗을 놀리는 정도야 그녀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분홍빛이 감도는 머릿결이 빗에 이끌려 단정해지고 부드러워졌다. 기교 없이 솔직한 빗질에 아이린은 무심코 감탄 섞인 숨결을 내뱉었다. 에이미의 손길은 귀족스럽진 않지만, 의외로 능숙한 것이었다.



 “스튜어트 양도 이번 에어쇼를 기대하고 있나요?”



 어색한 침묵을 깨보고자 아이린은 가볍게 질문을 던졌다.



 “네, 기대하고 있습니다. 가능하면 구경도 가고 싶어요.”



 “호오. 특별한 이유라도?”



 “오빠가 제1기사단에서 복무하고 있어요. 첫 에어쇼니까, 가서 봐주면 힘이 되지 않을까 해서…….”



 “좋은 여동생이네요.”



 공감할 수 있는 말을 듣자 아이린은 기분이 좋아졌다. 하긴, 에이미는 자기 오빠를 끔찍이 여기고 있는 듯했다. 2급 기사까지 한 자랑스러운 오빠, 라는 수식어가 늘 입에 붙어 있었지. 그러니 일이 바쁘더라도 에어쇼엔 꼭 가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옷시중이 끝나는 대로 퇴근해도 좋아요. 티켓은 제가 말해둘 테니, 곧바로 에어쇼를 보러 가세요.”



 “예?! 그, 그렇지만 어찌 제가 감히…….”



 “바쁜 주군을 두고 먼저 떠날 수 있겠느냐, 고 말하려 했죠? 아쉽게도 제겐 위엄만으로 아랫사람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정 불편하다면, 베네치아까지 친서를 전달해준 수고에 대한 보답이라고 해 두죠.”



 에어쇼에서까지 당신을 옆에 둘 순 없기도 하고.



 행간에 이 작은 메시지를 몰래 숨겨두었다. 예상대로 에이미는 크게 거절하지 못하고 얼굴을 붉힐 뿐이었다. 거울에 비친 그 모습이 나이답지 않게 귀여워서, 아이린은 자기도 모르게 엷은 미소를 지었다.



 “보답이라 하시면 감사히 받들겠습니다.”



 현명한 선택을 했다는 듯 아이린은 고개를 조금 숙여 보였다. 그 뒤 한센이 올 것을 대비해, 드레스가 요란하지는 않은지 확인하려 눈을 돌리는 순간,



「안에 계십니까, 전하? 급보가 있으니 어서 나오시지요.」



 인터폰이 켜지는 소리와 함께, 중후한 노인의 목소리가 샤워실에 가득 퍼졌다. 이어 세면대 한쪽에 홀로그램 스크린이 떠올라 문 밖의 상대를 비췄다. 한눈에 들어오는 친숙한 얼굴. 대면을 요구하는 자를 알아본 아이린의 표정이 굳어졌다.



 눈동자에 일순 의혹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왜 저 사람이 이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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