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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아호트니크(охотник) - 4


 황녀의 신속한 행동에 놀랐는지, 얼마 안 가 샤워실의 문이 열리자 노신사는 눈을 크게 떴다.




 아이린은 드레스 차림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검정 일색의 옷이 강렬하면서도 취향에 맞게 단순했다. 장신구와 화장은 최소한으로 했고, 머리는 양옆을 남겨둔 채 뒤쪽만 접어 머리핀으로 고정을 해 두었다. 상류층에 맞지 않게 소박했지만 그만큼 준비하는 시간이 줄어드는 이점이 있었다.




 노신사의 키가 더 컸기에 아이린은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췄다. 공평하게 시작된 대면은 곧 주군과 신하의 상하관계로 바뀌었다. 노신사가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표하자, 아이린은 가벼운 묵례로 인사를 받아주었다.




 “전하.”




 “……라인하르트 경.”




 노신사를 내려다보는 아이린의 시선이 한순간 미묘해졌다.




 클라우스 라인하르트. 의회를 대표하는 제국의 총리. 지금까지 세 명의 황제를 보좌해온 자로서 그 존재는 친숙하다 못해 일상적이었다. 그러니 좀 늦은 시간에 만나도 감정의 동요는 없어야 할 터. 하지만 당연한 것의 발목을 잡는 어떤 사실에, 아이린은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에 추궁을 담고 있었다.




 “카르카손에 있어야 할 당신이 왜 이곳에 있는 겁니까.”




 요양을 갔다 오라는 명을 받아 사흘 전에 로망스로 떠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 질문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라인하르트 경은 곧바로 대답했다.




 “급보를 받아 일시적으로 복귀하였습니다. 직접 말씀드리는 편이 아무래도 좋을 것 같아서.”




 가족들은 한창 해변에서 놀고 있겠지요, 라고 그는 장난조로 덧붙였으나 아이린은 웃지 않았다. 잠시 입을 다문 황녀는 이내 결심한 듯 뒤따라온 에이미에게 퇴근 명령을 내렸다. 이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어린 메이드는, 그저 고개를 조아리며 기쁜 마음으로 황명에 따를 뿐이었다.




 멀어져가는 에이미의 등을 바라보며 아이린은 작게 운을 뗐다.




 “서재로 가면서 얘기하시죠.”




 그리고는 노신사에게 일어설 것을 명했다. 그를 기다릴 필요도 없이 몸을 돌려 서재가 있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가벼운 힐 소리는 곧 무게 실린 구두 소리와 섞여 불협화음을 만들어냈다. 복도가 필요 이상으로 넓어 작은 소리라도 쉽게 울리기에, 어쩔 수 없이 아이린은 이 껄끄러운 잡음을 모두 들어야 했다. 총리의 급보가 무엇이 됐든 얼른 해결하고 본업에 집중하고 싶었다. 봐둬야 할 일이 산더미인 건 그녀도 마찬가지니까. 뒤쪽에서 걸음을 서두르는 기색이 느껴지자 나름 다행이라고 여기며 표정을 조금 풀었다.




 라인하르트 경이 옆으로 다가오자마자 아이린은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 급보는?”




 “좋은 소식…… 이라고 할 순 없습니다. 보안국에서 직접 전해왔으니까요.”




 “보안국? 즉시 보고해야 될 정도로 심각한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잠시 귀를 빌려주시죠.”




 주군의 윤허 아래 라인하르트 경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직후 보안국에서 가져온 소식을 오탈자 하나 없이 그대로 황녀에게 전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던 아이린은, 이야기가 끝날 무렵 미간을 찌푸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사망 시각은 오늘 새벽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외부 세력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더군요.”




 “어이가 없네요. 장난도 아니고, 보안국에서 외부인을 걸러내지 못해 그런 사단이 벌어졌단 말입니까?”




 안타깝게도, 라고 말하듯 라인하르트 경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화가 치밀어 오르기 이전에 가슴이 메었기에 아이린은 이후의 말을 생각해낼 수 없었다.




 보안국에 구속된 3인조—정확히는, 지난번 황궁을 습격했던 테러리스트들이 살해당했다.




 사인은 독극물을 이용한 자살이라고 들었다. 그리고 시신이 목격된 시각에 보안국 직원 두 명이 모습을 감추었다. 경비였던 한 명은 목이 졸려 사망한 채로 곧 발견됐고, 나머지 한 명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후자에 대한 기록은 완전히 말소되어 있었다고 한다.




 자살이라고 해도, 외부의 개입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강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게 아니라면 그 셋이 목숨을 버릴 이유가 존재하지 않았다. 안전을 보장받는 대가로 조사에 협력하고, 귀중한 내부 정보를 넘겨주기까지 했다. 그 말은 즉 전향할 의사가 어느 정도는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아이린은 결국 그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대책반을 꾸려 이번 일을 조사하게 하세요. 추가 보고는 내일부터 받겠습니다.”




 살며시 쥔 주먹이 떨렸지만 어찌됐든 담담한 분위기를 유지했다. 여기서 흔들려봤자 득이 될 것은 없었다.




 “즉시 수사에 착수하도록 지시를 내려뒀습니다.”




 “책임자는 누구입니까?”




 “현장에 있었던 클라인 경이 자원하더군요. 저의 권한으로 승인했습니다.”




 대답 대신 아이린은 나지막이 탄식을 내뱉었다. 아멜리아가 언급되자 마음속에 맺힌 무언가가 스르륵 풀려버린 탓이다. 그래, 그녀가 나선다면 일이 어떻게든 풀리겠지. 수도 경비대장인 사람이 왜 보안국에 있는지는 차치하고, 지금은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기만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래도 조금 괘씸한 건 사실이므로 의무 몇 개 정도는 더 지어주자.




 “클라인 경에게 명할 것이 있습니다. 그대로 전하세요.”




 “듣고 있습니다.”




 모퉁이를 돌자 저편에 서재로 들어가는 문이 나왔다. 아이린은 이제 막 떠오른 의문을 차분하게 하나씩 풀어놓았다.




 “크게 세 가지가 마음에 걸립니다. 그들에게 자살을 종용한 외부 세력의 정체는 무엇이고, 기록이 말소된 보안국 직원은 이 사건과 어떤 관련이 있으며, 왜 하필 모든 조사가 끝난 지금에야 입막음이 일어났는지. 이에 대한 규명을 중점으로 수사가 진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분부하신 그대로 클라인 경에게 지시하겠습니다.”




 정중하게 대답하는 총리의 모습엔 필기를 해두려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연륜과 요령이 생긴 덕에 한 번 들은 것만으로도 완벽하게 기억한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아이린이 아니었기에 그의 손이 비어 있어도 딱히 지적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 뒤에도 이야기를 주고받던 두 사람은 어느새 나무 문 앞에 멈춰 서 있었다.




 양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메이드 두 명이 허리를 숙여 경의를 표했다. 아이린이 간단한 손짓을 하자 잠시 뒤, 그녀의 두 배 정도는 큰 문이 친숙한 소음과 함께 좌우로 열렸다. 칠흑으로 물들여진 방은 발을 들인 순간 센서의 작동과 함께 모든 어둠을 내몰았다. 예고 없이 샹들리에가 점등하는 바람에 아이린은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이곳은 그녀의 꿈과 사상과 연구가 집약돼 있는 장소였다. 사별한 모친을 기리고 싶은 마음에 침실로 쓰이던 것을 무리하게 서재로 개조했다. 화려함을 기조로 삼던 시절에 지어져서인지 변태적으로 세밀한 실내와 검소한 가구가 서로 충돌하는 면이 적잖았다. 그럼에도 아이린은 한 번도 그것을 부담스럽게 여긴 적이 없었다.




 세 번의 박수를 거쳐 탁상 등에만 조명이 들어오게 했다. 황녀와 총리가 서 있는 곳을 제외한 여분의 공간을 어둠이 순식간에 채워갔다. 그나마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이 있었기에 완전한 장님이 되는 것만은 면할 수 있었다.




 가볍게 종을 쳐 메이드를 호출한 아이린은, 얼음에 담긴 샴페인을 가져올 것을 명령했다. 문이 다시 닫히자 책상 위에 걸터앉고는 총리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급보가 하나 더 있지 않나요?”




 나직이 지적 아닌 지적을 던졌지만 라인하르트 경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부정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말씀드리기도 전에 벌써 ​알​아​채​버​리​셨​군​요​.​”​




 “그저 한 번 찔러본 것뿐입니다. 겨우 그것 하나 전하려고 당신이 여기까지 온 건 아닐 테니까요. 그래서 묻는데, 이번에도 나쁜 소식입니까?”




 “해석하기에 따라서 다를 겁니다. 전보의 내용이 좀 미묘해서요.”




 전보? 아이린은 의문이 담긴 눈빛으로 총리에게 물었다. 코트 안주머니에서 그가 꺼낸 것은 반으로 접힌 작은 쪽지였다. 그 분위기가 사뭇 진지해서 마음속 깊이 당혹감이 밀려들어왔다. 그래도 어떻게든 종이를 받아 손으로 들기는 했다.




 “오늘 낮, 카르카손 기지에 도착한 전보입니다.”




 총리가 곁들이는 설명을 들으며 아이린은 천천히 쪽지를 폈다.




 급하게 옮겨 적었는지 휘갈겨진 글자들이 눈에 밟혔다. 인쇄가 아닌 자필이라는 건 원본이 암호문이었다는 뜻이다. 겨우 두 문장에 불과한 이 전보는, 특이하게도 제국어가 아니었다. 고대어인 영어라는 점에서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독해를 마친 아이린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었다. 혹여 잘못 이해했나 싶어 단어를 하나씩 짚어보기도 했다. 머릿속에 의미가 완전히 들어왔을 무렵, 열린 입으로 흘러나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전보다 무거워져 있었다.




 “발신자는 누구입니까.”




 돌아오는 대답은 여전히 무미건조했다.




 “불명입니다. 이름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고 하더군요.”




 “하긴, 자길 ​익​명​(​a​n​o​n​y​m​o​u​s​)​으​로​ 칭한 시점에서 이름을 댈 마음은 없는 듯했습니다. 일방적인 통보에 가까운 걸 보니 호의로 쓴 글은 아니네요. 상당히 건방진 태도군요.”




 “그렇습니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총리의 말에 아이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 사람은 고대어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다. 박식하고 지혜로운 그라도 익숙하지 않은 분야에선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리라. 이렇게 직접 와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그녀였다. 쪽지에 적힌 내용은, 아무리 생각해도 에어쇼 전에 혼자 끝낼 수 있는 일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급해지는 심정을 억누른 채 종이를 다시 반으로 접었다. 그 후 책상 뒤로 걸어가 메모지와 만년필을 꺼내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손님 맞을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이것을 스튜어트 양에게 전해주세요.”




 “그만큼 중요한 일입니까?”




 최소한 저에게는 중요한 일이지요.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아이린은 급히 필기를 끝냈다.




 “전보를 보낸 사람은 저와 단둘이서 대면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근처에 있을 테니 곧 만나게 되겠죠.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대면할 상대라 함은……?”




 총리는 아주 잠깐,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을 했다. 그제야 아이린은 자기 멋대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었음을 깨닫고 뺨을 붉혔다. 영어로 된 전보엔 그런 것을 직접적으로 암시하는 내용이 없었다. 언어 외의 지식도 있어야만 풀 수 있는 수수께끼였으니까.




 이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총리는 말을 이었다.




 “알아내신 게 있다면 곧바로 말씀해주십시오. 이 이상 신원 불명의 괴한이 전하께 접근하는 일을 만들어선 안 됩니다. 늙은이의 단순한 걱정으로 치부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버지나 다름없는 경을 실망시킬 생각은 없습니다.”




 아이린은 일단 미소를 지어보였지만, 이 정도로 상대가 안심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진실을 밝히자니 문제로 번질 면이 한둘이 아니었다.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아니면 적당히 둘러댈지를 두고 고민하며 그녀는 불편한 기분으로 메모지를 뗐다.




 ……솔직히 털어놓자면, 전보를 보낸 사람은 아이린 본인을 알고 있었다.




 가장 큰 근거로는 그녀만이 이해할 수 있는 발언을 했다는 점이었다. 주어가 없는 모호한 감상글 같아도 누가 봐야 되는지 자간(字間)에 명확히 해 두고 있었다. 자기를 숨긴 채 상대를 들춰 혼란을 유발시키는 일종의 심리적 전략이기도 했다. 이쪽을 충분히 조사하지 않는 이상 꺼낼 수 없는 패였다.




 그게 정말이라면 누구인지 짐작이 갔다. 그와 동시에 황궁 연회에서 겪은 일이 떠올라 미간을 찡그렸다. 포기하지 않을 사람들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절묘하게도 이런 때에 연락을 해왔다.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대놓고 보여주려는 셈이다. 하지만 이를 함부로 말했다간 에어쇼가 취소될 위험이 있었다. 계획을 위해서라도 그것만큼은 최후의 최후로 미뤄둬야 했다.




 결국 해답은 하나—저들의 의중을 떠보는 수밖에 없다. 총리에겐 미안하지만 자신을 알고 있는 ‘그’의 출입을 허용하기로 결정했다.




 각오를 다지며 전보의 내용을 작게 읊어보았다.




 “……번역된 ‘군주론’은 인상적이었다. 익명으로 좀 더 얘기하고 싶다.”




 “어느새 그걸 다 외우셨군요.”




 아이린은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고는, 메모지를 내밀며 운을 뗐다.




 “작은 발상이 하나 떠올랐을 뿐입니다. 경은 어서 이것을 저의 메이드에게 가져다주세요. 지금이면 아직 궁을 나가지 못했을 겁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무엇을 할 생각이십니까?”




 “상대가 자기 카드를 보여주겠다는데,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겠죠.”




 즉, 충고는 고맙지만 어쨌든 나는 당신을 실망시켜야겠다, 는 표현을 우회적으로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총리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아이린은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주군이 어떤 선택을 했는가는 그도 대충 짐작이 가능할 터. 굽히고 따라오든지, 아니면 논쟁하고 대립하든지 둘 중 하나를 하게 되리라. 이미 마음을 굳힌 그녀에게, 라인하르트 경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황녀와 총리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찾아왔다.




 “……그렇다 하여 전하의 경호를 소홀히 할 순 없습니다. 최소한 헌병대가 이곳을 지키도록 조치하겠습니다.”




 “경이 이해해주셔서 다행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의미의 한숨을 내쉬었다. 분부를 확인한 총리는 메모지를 코트 주머니에 넣은 뒤 문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두 번의 가벼운 노크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메이드가 문을 열어주었다. 그의 등을 향해 아이린은 걱정할 것 없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얼른 끝내고 돌아오세요. 샴페인이 도착하기 전에.”




 총리는 고개를 돌려 아이린과 눈을 맞췄다.




 “오늘 밤은 저택에서 묵을 것이기에 시간은 많습니다. 그건 그렇고, 전하께서 간택하셨다는 그 기사에겐 연락하지 않으실 겁니까?”




 “그렇지 않아도 올 겁니다. 곧 있으면 도착하겠지요. 오늘 하루만 그 사람에게 ​셰​퍼​론​(​c​h​a​p​e​r​o​n​e​)​을​ 맡기려 합니다.”




 “신뢰받고 있군요. 3급 기사 주제에.”




 셰퍼론, 혹은 황녀의 동반자가 남자였던 경우는 한 번도 없었기에 총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마치 한센을 잘 알고 있는 듯한 모습이어서 아이린은 눈을 가늘게 떴지만, 아쉽게도 시간이 그녀의 의문을 막았다. 약식 인사와 함께 총리는 메이드의 안내에 따라 소리 없이 방을 나갔다.




 이후 기다렸다는 듯, 죽음 같은 정적이 흘렀다.




 그 속에서 아이린은 서재 한가운데에 섰다. 무언가를 찾는 사람처럼 넓은 방을 한 곳도 빠짐없이 둘러보았다. 정면의 문에서 시작하여 좌측의 초상화가 걸린 벽으로 시선이 쏠리는가 싶더니, 이내 TV와 테이블이 있는 우측으로 완전히 돌아갔다. 허공을 꿰뚫을 것만 같은 그 눈빛엔 냉정함과 냉혹함, 그리고 경계심이 담겨 있었다.




 탁상 등은 오직 아이린의 주변만을 밝히고 있었다. 어둠에 감싸인 좌우로는 달빛이 비집고 들어와 사물을 푸른색으로 물들였다.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애매한 영역. 그곳을 헤집던 아이린의 시선이 단번에 테이블 옆 2인 소파에 고정되었다. 그에 호응하듯 이해할 수 없는 행동도 멈췄다. 혼자뿐인 서재 안에서 무엇을 발견한 것일까.




 잠시 뒤, 그쪽을 보고 선 아이린은 확신하듯 입을 열었다.




 “대놓고 숨바꼭질이라니, 악취미로군요.”




 그러자 분명 아무것도 없었던 소파에서 동요가 일었다. 달빛처럼 푸른 입자가 빛을 내기 시작해 곧 사람의 형태를 만들어갔다. 허공에서 그저 생겨난 이 괴한은 양복을 차려입은 성인 남성이었다. 특이한 게 있다면, 곡선형의 검은 풀 페이스 헬멧이 그의 머리를 완전히 감싸고 있었다.




 제3자가 보면 황당해했을 이변. 하지만 아이린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언제부터 거기에 숨어 있었습니까.”




 “숨어 있었다니요. 오히려 기다리고 있었죠.”




 헬멧을 통해 변조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조용히 일어서서 옷깃을 정리하는 그 태도엔 상대를 두려워하는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희미하게 빛나는 적색 안광으로 자기를 노려보는 황녀와 당당히 마주보기까지 했다.




 “광학미채를 쓰면 안 들킬까 싶었는데, 어떻게 찾아내셨나요?”




 “……여자의 감이라고 해 두죠.”




 “그렇군요. 말할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어깨를 가볍게 으쓱할 뿐인 남자의 반응이 아이린의 화를 돋우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테이블에 놓아둔 책을 집어 들었다. 아이린 바이스슈타인 폰 이메리룬이 번역한,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손을 많이 탄 그 양장본을 들고 황녀가 서 있는 중앙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가까이서 본 그의 체격은, 아이린에게 가장 친숙한 3급 기사와 거의 비슷했다.




 이 남자가 비밀 전보를 보낸 본인임을 아이린은 직감했다. 만난 건 둘째 치고, 시기가 너무 빠르지 않은가. 미묘한 불안감이 척추를 지나면서 전신을 서늘하게 했다. 그것을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도록 전심전력을 다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아이린 이메리룬. 제가 바로 보리스 예거의 직속상관입니다. 이름은 편한 대로…… 아니, 그냥 ​벤​데​타​(​v​e​n​d​e​t​t​a​)​라​고​ 불러주시죠.”




 그렇게 말하며 남자는 아이린이 번역한 <​군​주​론>​을​ 그녀의 앞에 정중히 내밀었다.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아는지, 그대로 본론을 말한다.




 “얼마 전에 제의했던…… 그 ‘외교’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고 싶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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