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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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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그녀와 그가 이어지고 반년, 아니면 내가 그들과 떨어진지 반년. 우리 3명은 갈라졌고 예상된 파멸은 나에게 돌아왔다. 이번에도 나는 선택받지 못했고, 구원 받지 못한 체 반년 동안 나의 세계는 무너져 내렸다. 그가 날 선택하지 않았으니, 나는 그의 이상를 선택했다. 그렇게 나는 그의 가르침만 간직한 체 반년의 시간이 흘렀다.



오랫동안 물을 저수한 댐은 그 물의 양을 견뎌내지 못하고 오랜 세월의 부식으로 터져버리고 말았다. 그동안 댐으로 인해 유지됐던 광경은 이제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잘못된 일일까? 아니면 다시 댐을 짓는 것이 옳은 일일까? 오히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더 아름다운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시 댐을 만들기 원한다. 그럼 그라면 어떤 대답을 해줄까? 그의 가르침 안에는 내가 없기에 정답을 모르겠다.

숨이 차고 목이 마르다. 선생님은 아무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저 내 옆에 있어주시기만 한다. 이 침묵은 그동안의 침묵과 달리 따뜻하고 편안했다. 마치 그와 단둘이서 책을 읽고 있을 때처럼 익숙한 기분이 든다. 눈을 감고 이 분위기를 전신으로 느껴본다. 그리고 나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말은 모든 오해의 근원이라 한다면, 침묵이야 말로 가장 진실 된 형태가 아닐까? 하지만 그는 진실함을 울부짖었고, 그것은 침묵과 가장 거리가 먼 형태였다. 그의 행동과 이상은 항상 모순되어 있다. 사람을 믿지 못하고 싫어하는 주제, 누구보다 사람을 좋아했다. 거짓과 기만을 증오하면서, 항상 자신을 숨기고 변명만 해왔다. 약함을 숭배하면서 강함에 매료되었다. 노력과 현실을 부정했지만, 성실한 노력가였다. 그렇게 타인에게 관심 없으면서 누구보다도 타인에게 상냥했다. 나는 지난 시간동안 계속 꿈을 꾸었다. 언제부터 현실을 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난 오랫동안 그린 이 꿈의 환상을 부수어야 한다. 그는 내가 아니고 나도 그가 아니기에 나는 더 이상 그의 이상을 짊어지지 않을 거다. 그는 구원자도 아니었고, 그저 나에게 꿈을 꾸게 해준 부원, 나와 친구가 되고 싶어 했던 부원, 그리고 상냥한 아이를 좋아했던 그런 평범한 고등학생 이였다.

“히라츠카 선생님 이제 괜찮습니다. 이 은혜는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사제의 관계는 이익을 따지지 않는 법이다. 언제든지 힘들면 오거라. 그나저나 시간도 늦었는데 저녁으로 라면 어떠냐?”
선생님은 라면 아직도 좋아하시구나. 변함없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주위를 둘러보니 캄캄한 어둠이 창문을 메우고, 양지에서의 모습만 보여준 봉사부실은 내가 학창시절 때 몰랐던 음지의 모습을 드러냈다. 학생들은 저녁에 귀가하니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물론입니다 선생님.”

그동안 차를 많이 타봤지만, 오늘 선생님의 차 안 창문을 통한 세상은 색다른 느낌이다. 깜깜한 하늘은 내 일생을 표현한 것 같다. 비록 어두운 밤하늘이지만, 밝은 달을 중심으로 조그마하게 별빛들이 보인다. 만약 지금까지의 내 일생이 지금 이 밤하늘과 같다면, 낮의 하늘로 바뀌보자. 이 밤하늘 전체에 달은 그렇게 크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내 하늘에 달은 너무나도 크다. 그렇기에 먼저 난 내 하늘에 있는 달을 지워야겠다. 비록 그 결과로 하늘이 더욱 어두워질지도 모르고, 해가 뜰지도 모른다. 이 변화로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겠지만, 과거의 추억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좋았던 기억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도착했다, 유키노시타. 사람이 너무 많은 곳은 부담스럽지? 여기는 그래도 다른 곳보다는 한적한 편이다. 여기는 소고기 육수와 돼지고기 챠슈가 일품이다. 그리고..”
“선생님 진정하세요.”
오랜만에 다른 사람과 같이 라면집이라 무척이나 기쁘신가보다. 나도 그렇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이야기하는 걸 좋아한다. 이건 항상 염두에 두어야겠다.

식사 후 선생님과 헤어져 곧바로 집에서 새로 산 공책을 핀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다. 과거의 나 그리고 지금의 나는 승리할 수 없었다. 나를 알지 못 했거나 상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노트에 나에 대한 것과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다짐을 적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입꼬리가 계속 올라간다. 나 자신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뜨겁다. 이대로라면 식후 차는 못 마실 것 같다.

자기 자신에 대한 정의를 끝났다. 처음부터 간단한 것이었다. 환상을 배제하고 어떠한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고, 그저 사실만을 적었다. 결국 난 바보 같은 여자였다. 신념에 틀을 맞추고 ,규칙에 속박되어, 세상을 통해서 나를 보려했다. 무엇보다, 고집과 착각이 나 스스로를 장님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장님이 된 나는, 어두운 하늘 아래 그저 달빛만을 바라보다가 길을 잃었다. 역시 내 삶이 밤하늘 같다고 느껴졌다. 밤하늘 달빛의 존재로 더 이상 흔들리지 말자. 이 달은 내가 얻은 것이 아니고, 내 하늘은 꼭 어두울 필요도 없을 테니까. 이제 내 약점과 강점에 충실하자, 그리고 감정에 솔직해지자.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누군가가 부여해준 길을 걷기보다는, 나 스스로가 길을 만들자 그렇다면 밤이든 낮이든 길을 잃어버리지 않겠지. 그리고 역시 댐은 다시 만들자 내 자신의 의지로 그리고 내 소유물로써. 오늘은 잠이 잘 올 것 같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난 이제 그를 그리지 않게 된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오늘 고양이들 보지 못 했구나.



“으응”
기지개와 함께 아침을 맞이한다. 커튼 넘어 강렬한 햇빛은 집안을 은은하게 비춘다. 커튼을 쳐 집안을 밝게 한 뒤에, 아침 조깅을 위해 나갈 준비를 한다. 거울에 비친 썩은 내 두 눈이 의외로 나쁘지 않은 것 같다.

“하아. 하아. 하아...”
이른 아침 서늘한 바람이 분다. 바닥에는 어제 비가 내린 흔적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어제의 비가 시원하게 쏟아지고 나니, 오늘 이렇게 아침 날씨가 좋은 것일까? 달리기로 힘들기 보다는 개운함이 느껴진다. 추운 겨울 비록 생명 활동이 가장 적은 계절이지만 나는 지금 어느 때보다도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낯설지가 않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신기했다. 걷는 길을 따라 고개를 돌리면, 지금까지 잊고 있던 풍경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풍경은 익숙해서, 내가 지난 반년동안 걷고 있는 길보다도 더 친숙하게 느껴졌다. 햇볕이 내리쬐고, 비에 젖은 도로는 그 빛을 반사한다. 무지갯빛이 인도를 따라 희미하게 나타나며, 앙상한 나무보다는 맑은 하늘에 눈이 간다. 그러던 중 편의점이 보인다. 어제의 일을 떠올린다. 나 자신뿐 아니라 나는 타인을, 사회를 알아야한다. 내가 앞으로 무엇과 승부할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부터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잃지 않기 위해 이기고 말겠다. 그래서 난 그 첫 걸음으로 여성잡지를 처음으로 구매하길 결정했다.

평소보다 맛난 아침 식사를 끝내고 대학 강의 시간표를 확인한다.
'경영, 정치, 외교, 행정...'
“하아”
한숨이 나는 지루한 수업이 일정이다. 오늘은 특별히 평소에 입지 않았던 옷을 입고 화장도 평소보다 조금 진하게 해보기로 했다.

대학까지 가는 길에 많은 시선을 느낀다. 옛날의 나라면 그저 무시해왔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주변을 둘러보자, 역시나 남자들과 많이 눈이 마주치게 된다. 가끔 여자들도  있었지만, 묘하게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것이 매우 불쾌하다. 그런데 이상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사람들은 다시 날 보지 않는다. 역시 이 눈, 고쳐야겠다. 옛날부터 그래왔지만 내 외향은 시선을 끌고 이성으로부터 호감을 산다면, 내 무기로써 철저히 이용해야겠다. 그렇지만 이상하다. 이번 시선에서는 여자들의 질투가 예전만큼 강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답을 넣지 못하고 대학에 도착했다.

1학년 과정이라 그런지 수업 내용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다만, 캠퍼스 안에서 크리마스 관련 이벤트로 너무 시끄러웠다. 왜 이렇게 사람들은 이런 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열광하는지, 나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행사 규모도 크고, 이들 전부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적어도 클럽에 들어가보는게 어떨까? 학기 초가 아닌 학기말 애매하게 들어가는 것도 이상하겠지만, 내가 모르는 걸 알고 있는 이들을 이해하는 게 지금의 나에게는 먼저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룹에서 배척만 받아왔지만 이번에는 들어가 보자. 그래서 하야마와 유이가하마가 추구했던 인간관계를 배우자.

내 취미생활을 기초로 클럽 선택폭을 줄여보자. 독서, 문학, 동물.... 여기서 무난하게 문학 클럽 같은 곳에 들어가면, 평상시처럼 책만 읽게 되지 않을까? 여기서는 대인관계를 배울 수 있는, 사람과 많이 접하는 클럽에 들어가야겠다. 마침 크리스마스 이벤트가 있을 테니, 손이 필요할 것이다. 클럽 리스트를 쭉 보는 순간, 사고가 멈춘다. 봉사부, 이곳에서도 있다. 주변에 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이윽고 나의 세계에는 그 글자와 나만이 남게 된다. 역시 이곳에는 가지말자. 순수한 동기가 아닌 내가 다른 목적으로, 비록 다른 봉사부지만, 들어가는 것은 과거 봉사부 부장으로써 할 수 없다. 죄책감 때문일까? 곧바로 나는 망설임 없이 테니스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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