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그녀를 잃고 그와 이어졌을 때, 기쁜 감정을 알 수 없었다. 슬픔이 우리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가 서로를 바라 볼 때면 그녀의 빈자리가 너무 커서, 나는 그저 그의 옆에서 있어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많이 다른 우리였고, 그런 그를 이해하려고 변하게 하려고 했다. 세상은 그녀와 그가 생각한 것만큼 잔인하고 잔혹하며 거짓투성이 일지 모르지만, 내가 생각한 만큼이나 아름답고 눈부시며 따듯하고 상냥한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삐뚤어져서, 세상의 뒷면을 먼저 봐서, 그동안 잊고 살았던 행복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없어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서 나는 힛키를 바꾸려했다.
그가 처음에 수학책을 들고 있을 때는 무슨 일인가 했다. 그렇게 싫어하던 수학 공부하는 그의 모습은, 앞으로 나아가고 다르게 세상을 바라보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와 함께 싫어하는 공부도 열심히 했다. 그동안의 힘들었던, 잘못 갔던 길에서 돌아가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 눈물도 많이 흘렸다. 처음 그가 대학교에서 동성친구를 만들었을 때는 얼마나 기쁜지 몰랐다. 안경도 쓰고 자세도 똑바로 하며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주었다. 너도 하면 되는 아이라고, 너도 그들도 다를 것이 없다고. 치료 아닌 치료를 거듭하며, 모두가 부러워할 내 남자친구가 됐을 때 다른 여자들이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친한 척 하는 것이 눈에 거슬렸지만, 그렇게 인기 있는 그가 되었을 때는 역시 이 세상은 잘못되지 않았다고, 신님이 계신다면 힘들었던 그에게도 이렇게 구원이 있는 거라고 생각하며, 웃음이 없는 날이 없었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그녀에게도 시간이 흘러 구원이 있을 거라고 믿어왔다.
모르겠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강하게 그를 원했고 그가 날 받아줄 때 그녀를 잃을 각오는 했다. 우리는 처음부터 서로 알고 있었으니까. 모든 이야기에는 마지막 페이지가 있다는 걸. 그리고 그것은 결국 우리 서로가 한명을 배신하는 행위와 다르지 않고, 버려진 그 한명은 모든 것을 잃어버릴 거라고. 결국 그것에 대한 업일까. 그녀와 같이, 지금 나는 그를 잃어버리려한다. 처음으로 얻은 가장 친한 친구인 그녀를 나는 잃고 난 보답으로 그를 얻었지만, 그가 내 곁을 떠나간다. 악마의 속삭임에 넘어간 비운의 주인공 같다. 그렇다면 역시 나와 그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인가... 고작 1년도 지나지 않아서 바람으로? 나는 그에게 평생을 약속했다. 그 또한 그러리라 믿었고 무한한 애정을 나누었다고 생각했다. 비록 큰 아픔을 겪고 만들어낸 관계이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그런 상처를 잊기 위해 행복해지려고 했다. 나 혼자만의 착각 이였을까? 나는 그날 이후 그를 제대로 보지 못한 걸까? 행복과 찬란한 태양의 빛에 눈이 멀어 그의 그늘을 보지 못 한 걸까? 분노와 슬픔 그리고 무엇보다 심장이 얼어붙은 듯, 내 전신은 차가워지는 반에, 마음 속 내면은 끓어오르는 무언가로 머리를 눈을 생각을 뜨겁게 한다.
그저 달리고 또 달렸다. 그와 잠깐 동안의 두근거림은, 그걸 대변하는 심장의 고동은, 더 이상 행복을 주지 않고, 내 심정을, 가슴을, 마음을 찢는 소리가 되어, 나에게 달리라고 한다. 그가 오늘 보인 위화감이 머릿속에 스쳐지나 간다. 그의 행동은 묘하게 대범했고 평상시에 보여주지 않던 뜨끔한 모습들, 그저 긴장했다라고 나는 바보같이 생각하며 진실로부터 눈을 돌렸다. 물론 여자 때문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지만, 그렇게 순진무구하게 행동한 내가 더 싫다. 그렇게 믿었고 의지했는데, 그는 내 곁에 머물러줄 거라고... 그의 배신이 너무나 이질적이고 현실감이 없기에 머리로는 상상이 가지 않지만, 그 향수는 그를 끌어안았을 때의 옷은 날 비웃듯, 나에게 지금 이 현실을 보라고 한다. 날지 못하는 그에게 날개를 고쳐주며 훈련을 시켰고, 누구보다 멋진 날개를 가진 그가 이제는 날 필요하지 않는다며, 날 떠나 저 멀리 하늘로 날아간다. 그런 충격에 목적지를 모른 채, 그저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이 악몽에서 깨어나고 싶다고, 어린아이처럼 달렸다. 거리에는 이렇게 행복한 사람들이 많은데... 웃고 떠들고 서로 사랑하며, 아껴주며 믿음과 생각을 공유하며, 두 존재가 하나가 된다. 크리스마스이브 따위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 난 더 이상 이 세상을 신님을 믿지 못하겠다. 역시나 세상은 그녀와 그가 겪은 것처럼 잔인하고 잔혹하다. 그리고 이제 그와 그녀 다음으로, 그저 내 차례가 된 것뿐이다.
“유이! 기다려봐. 내 말 좀 들어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변명이라도 해주려나? 미안하다고 해줄까? 나에게 다시 돌아 와줄까? 그의 목소리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내 머리에 울린다. 희망은 불안이 되고, 그런 불안감은 이 현실을 보여준다. 역시 그에게 무슨 말을 들을 지, 너무 무섭다. 그렇지만 그는 쫓아와주고 있다. 날 부른다. 이 사실만이 나를 희망을 주다가, 다시 현실을 바라보라며 고문한다. 만약 그가 날 쫓아와주지 않으면? 그 생각과 함께, 고장 난 시계와 같이 내 두 다리는 두 바늘 같이 멈춰 선다. 지면에서 발을 띄고 내리고를 반복한다. 어쩌면 좋을까? 모르겠다. 고개를 들자 눈물이 흘러내리고, 이 맑은 하늘이 나에게 진실을 보라는 듯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모습으로 내 시야에 들어온다. 멈춰서 있자, 멀리서 달려오던 그가 점점 가까이 오는 것을 느낀다. 사과해줘. 용서를 빌어줘. 변명해줘, 힛키. 그러면 이번엔 딱 한번만 용서해줄게. 찢어질 듯한 가슴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릴 것만 같이 가슴이 아프고 속이 쓰리다. 눈물은 멈추지 않고 흘러내려 내 시야를 일그러뜨리며, 나는 그저 고집스럽게 그에게 등지고 있다. 그를 볼 용기가 필요하다. 이대로는 그를 보면 떠나갈까 마음을 졸이며 눈을 감는다.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니까, 그녀를 잃으면서까지 이어진 우리니까, 서로 사랑하는 사이니까. 행복해야 된다. 내가 어려서부터 읽은 책들은 하나같이 해피엔딩, 그동안 힘든 길을 걸었던 그에게는 이제 좋은 일만 가득할 거라며 얘기했다. 그러니까 나도 그것을 믿고 그렇게 운명의 사람과 맺어질 거다. 독한 마음을 먹고 뒤를 돌아 그를 본다. 언제부턴가 눈물은 흘리지 않았고 요동치던 내 감정은 이 푸른빛 한적한 하늘의 경치처럼 잠잠하다.
“힛키, 그 여자 누구야?”
그 누구도 나와 그의 행복을 방해하게 둘 순 없다. 우린 그날 사고 때부터 이어진 운명의 연인이니까. 그녀를 위해서라도 나는 그와 행복해질 것이다. 그런데 아무 것도 모르는 여자가 우리 사이에 끼어들며, 힛키를 유혹한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당장 그 여자를 죽여 버리고 싶다. 이를 악물려 분노를 절제한다.
“이로하짱....이야? 아니면 클럽에 여자중 한명? 아니면... 아니면.. 누구야.. 누.구.야!”
목소리가 격양되어 목에 힘이 들어간다. 목이 타들어가는 듯하다. 이성을 잃었나? 아니 그렇지 않아. 단지 목표가 확실해 진 것뿐이다. 무엇이 먼저고, 어떤 것을 지켜야 하는지. 모든 것을 없었던 일로 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포기했고,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누가 힛키를 유혹한 거야? 대답해 힛키.”
“.....”
“왜 아무 말 하지 않는 거야? 혹시 그 여자를 감싸려고 그러는 건 아니지?”
혹시라도 그가 그렇게 행동하는 건가를 생각하니, 머리에 피가 몰린다. 그가 나보다 그녀를 더 생각한다면, 내가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그동안 우리의 시간은 어떤 가치도 없었던 거야? 비록 그녀를 떠나보냈지만, 우리 둘이서 보낸 시간은 무의미했던 거야? 그가 쉽게 입을 때지 못한다. 그의 미간에 힘이 들어가고 고민하면서 내 눈을 보지 못한다. 그러더니 고개를 숙이고 마침내 그가 입을 움직인다. 마음을 다 잡고 들을 준비를 한다. 이미 주의의 사물과 경치는 내 시야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모든 신경을 그의 입과 말에 집중하고 있다.
“유키노시타야.”
“뭐? 유키농?”
그녀 아닌 다른 누구라면 그 여자를 원망했을 꺼다. 저주하며 미워해서 내 추악한 모습을 다 보여줬을 건데. 운명의 장난일까? 70억 인구에서 그녀의 이름이 나온다. 증오도 배신감도 방금 전까지 내 전신을 뒤덮는 무수한 감정들이, 그녀의 이름과 함께 사라진다. 다리에 힘이 풀리자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진다. 아직 저녁도 되지 않았다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지, 모르겠다. 그저 눈을 감고 잠시나마 잠을 취한다.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유이? 유이! 괜찮아? 왜 그래? 유이, 어서 일어나봐. 유이! 병원... 그래 병원에 가야해.”
그녀는 마치 잠자는 숲 속의 공주처럼 평안하게 잠을 자고 있다. 그날 이후 다시 그녀가 눈을 뜨는 것을 볼 수 없었다. 그저 저주 걸린 공주와 같이 깊은 잠에서 일어나기를 거부한다. 의사 선생님께서도 본인이 살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고 하신다. 그저 그렇게 그녀 옆에서 반년이라는 시간이 더 흘러, 아직도 자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다.
“유이 벌써 여름이야. 친구들이 코마치가 잇시키가 유키노가 내가 모두가 너를 기다리고 있어. 그러니까, 제발 일어나줘.”
같은 말. 같은 침묵. 같은 눈물. 우리의 시간은 봉사부가 끝난 그 날로부터,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어른인 척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성장이라는 핑계로 진실을 보지 않고, 그 관계를 부수었다. 그래서 난 이 운명의 족쇄를 부수려한다. 이딴 현실 세계 따위 엿 먹어라. 세상이 우리를 불행하게 한다면 나 또한 생각이 있다.
“유이, 나 이제 널 보러오지 못 할 거 같아. 그러니까 늦기 전에 눈을 떠줘.”
그녀의 이마에 마지막 입맞춤을 하며 문을 닫는다. 그리고 나는 그동안 애용한 이 안경을 벗어던지며 밟아 부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