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free yourself (스스로 구원하라). 우린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맑은 하늘 크리스마스이브, 그는 역시 그녀에게 갔다. 알고 있었던 일이지만, 쓸쓸하지 않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녀와 그의 행복을 멀리서 지켜보며 그와의 여운을 느끼며 홍차를 마신다. 그 때만큼 맛있지는 않지만 이 맛도 나쁘지 않다. 인생이 이런 것 아닐까라는 생각과 함께 서재에 들어간다.
나는 잘못된 선택을 한 걸까? 내 세계에 들어온 그를 나는 거부할 수 없었다. 지난 오랜 세월 혼자서 싸워왔다. 고독하고 음침한 삶에서 빛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내 하늘에서, 그는 다시 내 하늘을 비추고 있다. 달라진 그는 적극적 이였고 섬세했다. 봉사부실에 처음만난 순간 나는 그를 고쳐주겠다고 했지만, 그때도 지금도 변함없이 그는 나를 인정해주고 구하려한다. 지금 같이 검게 변한 나지만 그런 면을 알면서도 나에게 손을 뻗으려는 그라면, 나는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비록 그의 옆에는 있지 못하겠지만, 언젠가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이 생길까? 눈을 감으며 그를 그린다. 이제 다시 이런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내 마음속 그는 장난치기 좋아하는 아이처럼 웃고 있다. 그 웃음은 순진한 웃음이 아니라 쓴 웃음이다. 나를 탓하지도 않고 그저 내 세계에 들어와서, 아무런 의미 없는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아직도 허리가 아프다. 양 손으로 몸을 감싸면 그를 상상하게 된다.
“히키가야군, 난 네 옆에 없을 거야 하지만 내 옆에는 항상 네가 있어.”
눈물이 난다. 그동안 만들었던 눈물과 달리 뜨거워서 그만 울음을 터뜨린다. 그동안 참았던 감정이 다시 한 번 터진다.
“좋아했어, 히키가야군. 그녀를 선택하지 말고 나를 골라주기 바랬어. 그렇지만 선택하지 않아서 고마워.”
성장이란 무엇일까? 무언가를 잃고 나아가 얻는 것일까? 현실의 가혹함을 깨닫는 것인가? 아름다움에 눈을 돌리지 않고 나아가는 용기일까? 타인을 위한 희생일까? 진실은 뭐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고 그것은 일정하지도 않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이렇게 다 다르게 태어났을까? 불이해와 무관심은 오해와 불신을 낳고 투쟁과 반항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결국 세상이 이런 것은 그것을 뛰어넘고 관용과 이해 그리고 화해가 있기에 아름답고 의미 있는 것일까? 예전에 자신에 대해 쓴 책을 쓰레기통에 집어 던진다. 그 누구도 나를 완벽하게 알 수 없어. 나 스스로를 포함해서. 서재에서 또 다시 나는 스스로를 돌아본다. 그렇지만 그때와 달리 열기가 띤 미소가 아닌 잔잔한 미소가 지어진다. 바람 없는 태평양의 바다처럼 잔잔하고 차분한 느낌이 사고를 돕는다.
점심이 지나 창문 밖을 보면, 푸른 하늘이 나에게 반성은 끝났냐고 물어보는 듯 햇빛을 비추며 인사를 한다. 눈을 감고 따스한 빛을 받는다. 몸이 녹을 듯 상냥한 햇살을 받으며 이제 슬퍼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그는 사람 人으로 현실을 비꼬았지만 그도 느꼈을 거다. 설령 그렇다해도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서로 의지하면서 의존하는 존재이기에 우리는 고독감을 느끼고, 질투를 하며, 사랑을 한다. 비록 그와 나의 사랑은 여기까지지만 이 소중한 배움은 평생 간직할 거다. 어깨를 물었던 건 역시 내 미련 이였을 거다. 미안해 히키가야군. 하지만 미숙했던 내가 저지른 실수에 하나 쯤 더 해도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슬픔도, 고독감도 조금은 사라진다. 하지만 어차피 그를 잊고 살아야할 거라면 마지막까지는 그를 다시 한 번 더 그려보자. 언젠가 그의 모습을 다시 잊겠지만... 그와 내가 시간을 보냈던 침대에 가 잠을 청한다.
“따뜻해.”
눈을 떠보니 어느덧 해가 저물면서 저녁노을이 하늘에 펼쳐졌다. 그와 그녀는 지금쯤 한창 즐거운 시간을 보내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혼자 있는 내가 조금 외롭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고양이를 한번 보고 싶다. 같은 외톨이였지만 그는 여자친구가 생겨 리얼충이 됐으니까 한번쯤은 방해해도 괜찮겠지. 컴퓨터가 켜지는 동안 그에게 전화를 건다.
“여보세요 히키가야군?”
“유키노시타냐...”
“무슨 일이야? 목소리에 기운 없는 거 같은데.”
“.....”
“히키가야군?”
“유키노시타, 유이가 쓰러졌다.”
“뭐? 무슨 말이야, 히키가야군. 농담이라고 도가 지나쳐. 그녀는 내가 알고 있기로 무척 건강한 아이였어. 거기에 네가 그녀와 있는데 신변에 문제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치바국립병원으로 와라.”
‘뚜... 뚜..’
“어?...”
말을 잇지 못하겠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머릿속에서 정리가 안 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생각해보지만 그를 물은 자국은 이미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쓰러진 건 확실한 것 같다. 성급히 준비해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실이 아닌 복도에 그는 고개를 숙이며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가 예전의 나를 보았을 때 그랬을까? 지금의 그는 빛을 잃어버렸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이제부터 그는 어찌해야 될지 모르는 길 잃은 여행자가 되었다. 그 누구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고 무시하며 지나간다. 그 모습이 더욱 더 내 모습을 강하게 떠오르게 한다. 그에게 다가가 자세히 보니 한쪽 뺨에 맞은 흔적이 보인다.
“히키가야군, 괜찮아? 누구에게 맞은 거야, 경찰에 신고는 했어?”
“....”
침묵을 지키며 고개를 젓는다.
“그럼 뭐가, 왜 이런 일이 생긴 거야?”
“나 때문이야....”
스스로를 자책하며 울고 있는 그를 나는 전력을 다해 안아줬다. 동정심일까? 그의 호감을 얻기 위해 발버둥치는 비겁한 짓일까? 누군가가 누군가를 구원하는데 이유 따윈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말을 믿지 못했다. 내 주변은 언제나 적으로 가득했고 그들은 날 몰아내기위해 전력을 다 했다. 나는 그런 나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갑옷을 입고 그들을 당당하게 굴복시켰다. 그래서 나는 누구보다 구원을 원했지만 누구보다도 구원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 이였다. 왜냐하면 나는 구원이 아니라 그저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을 뿐 이였으니까. 세상을 바꾸겠다고 했지만, 나는 나 스스로도 바꾸지 못 했다. 내 주변 사람들마저 나는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으니까. 결국 바꿨다고 생각한 결과가 지금의 나다. 실패작이다. 그러니까 나는 누군가를 구해줄 수 없다. 하지만 도움이 필요한 상대가 있다면, 그게 너라면, 그동안 갚지 못한 빚을 조금 갚아보자. 그것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지 모르겠지만.
“스스로를 탓하지 마. 히키가야군, 전부 내가 나쁜 거야. 내가 나약해서 너를 끌어당겨서 이런 일이 생긴 거야. 그러니까 넌 잘못한 거 없어. 유이가하마양, 어디에 있니?”
“유이는 지금 부모님과 계셔. 언제 깨어날지 아무도 모른데.”
“아무도 모른다니.. 그게 무슨 말이니?”
“그녀는 혼수상태에 빠졌어. 스스로가 살 의지를 보여주지 않고 있어. 이대로 유이가 삶의 의욕일 잃어버린다면 이렇게 계속 잠만 자게 될 거래.”
“뭐? 살 의지라니... 일단 자리를 옮겨서 얘기하자.”
자초지정을 듣고 나서, 그는 조금은 진정했는지 눈물은 보이지 않고 있다. 늦은 저녁 다들 크리스마스이브를 즐기고 있기에, 더욱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병원 내부 카페에서 그와 나 둘만이 고요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운명의 여신도 성격이 나쁘다. 그녀가 아닌 내가 그와 함께 크리스마스이브의 밤을 보내고 있다니.
“히키가야군, 역시 너에게 잘못은 없어. 결국 내 부주의로 그녀가 알아채고, 이렇게 된 거잖아. 그럼 그 때나 지금이나 가해자는 역시 나야. 그러니까 날 원망해. 너희들 피해자니까.”
슬픔 웃음을 보이며 그때와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전부 자신이 나쁘다고, 자신이 이 관계에 있어서 방해라고. 이건 내가 그녀에게 남겨준 옛 나의 특기였다.
“왜 네가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그런 눈으로 말하면 내 과거 트라우마 불러일으킨다고.”
안경을 쓰지 않은 그녀의 두 눈은 썩어 보이지만 싫은 기분이 들지 않는다. 늦게까지 일하고 들어온 어머니의 눈과 같이 피곤하지만, 아이에 대한 상냥함이 느껴지는 눈 이였다. 그런 그녀를 쳐다보자 긴장의 끈을 놓고 싶은 충동이 든다.
“엄마..”
“에? 히키가야군, 지금 뭐라고...”
“어? 아.. 미안, 아무것도 아니야. 그 뭐냐 이 나이에 질질 우는 게 참 모양 빠지네. 하하... 유키노시타 돌아가자. 오늘은 너무 피곤해. 아마 오늘 유이 부모님이 계속 머무실 거 같은데, 유이 만나는 건 힘들 거야.”
“그래.. 너만 괜찮다면 그렇게 하자.”
집으로 가는 길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다. 유키노시타와의 재회, 유이의 기절. 한 문제를 풀면 다른 문제가 나타난다.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일은 의미가 있는 일인가? 많은 잡념이 머릿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그녀와 함께 길을 걷는다. 그러다 얼마가지 않아 뒤에서 따라오던 그녀는 뒤에서 포옹을 한다.
“유키노시타?”
“히키가야군, 슬퍼하는 일은 잘못된 게 아니야. 네가 그랬지.. 진실을 원한다고. 이제 다 알고 있잖아. 우리는 널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을 거야. 우리 서로가 감수했던 일이야. 확실히 내가...”
“아니야, 유키노시타. 네가 그러지 않았어도 난 너에게 참견 했을 거야. 처음에는 놀랐지만 너 역시 날 좋아했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기뻤어. 그러니까 이건 네 책임이 아니야.”
그렇다. 나는 그날 널 계속 보고 있었으니까. 같이 있고 싶다고,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비록 구원이라는 핑계로 그렇다할 지라도, 난 그녀와 있고 싶었다. 그날 눈이 내리던 밤 그녀와의 대화는 즐거웠으니까. 운명의 신도 성격이 안 좋다. 왜 나는 2명의 그녀들과 만났을까. 혼자였다면 망설임도 없었을 거다. 물론 이런 우리 셋이기에 이렇게 각별한 인연을 이어왔지만, 도무지 결말이 마음에 안 든다. 맑은 하늘은 어느덧 칠흑 같은 밤이 되어 자그마한 별빛과 달만이 하늘을 비춘다. 그렇게 하늘을 보고 있자..
“히키가야군 그거 알아? 난 밤하늘이 꼭 내 인생같이 보였어. 이렇게 시커먼 밤이지만 그런 나에게도 작은 소중한 추억들이 작은 별빛이 되어 내 길을 밝혀줘. 그래서 나는 길을 걸어 갈수 있었어.”
“뭐 시커먼 건, 너나 나나 똑같지.”
“근데 말이야. 이 빛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자신을, 난 견딜 수가 없었어. 히키가야군이라면 어떻게 하겠어?”
“글쎄 빛을 잃으면 만들면 되는 일 아니냐? 새로운 추억을 찾아가는 거지.”
“고통이 따르는 일이어도?”
“그래 설령 그럴지라도 앞으로 나아간다. 그게 너희들이 나에게 가르쳐 준거 아니었어?”
“하지만 그렇게 해서 난 빛을 잃었어. 유이가하마도 이번일로 그렇게 됐어.”
“그럼 넌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아?”
“모르겠어. 하지만 이게 우리 방식 이였어. 넌 앞으로도 이 방식을 이상을 짊어질 수 있겠어?”
침묵이 감돈다. 이 대화, 옛날 그녀의 집에서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가 겹친다. 물론 듣는 이와 말하는 자가 바뀌었지만 말이다. 그녀가 뒤에 안긴 채, 그녀가 말한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검고 어두운 밤하늘. 고작해야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작은 별빛만이 하늘에 보인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왜 우리는 이렇게 힘든 길을 걷게 된 걸까. 그저 남들처럼 지내고 싶었다. 친구를 원했고, 다른 리얼충 같이 놀면서 청춘을 보내고 싶었다. 분명 그녀들도 다르지 않겠지. 우리같이 외톨이의 삶이 밤하늘이라면 리얼충들의 삶은 태양이 찬란한 낮의 하늘일까.
고요한 밤 길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보고 싶지 않다. 내가 우리가 지금까지 달려온 이 길이 옳은 길 이였을까? 침묵 속에서 서로의 존재만을 느끼며 자기고찰을 시작한다. 그녀와 사귀면서 잠깐 동안 그녀와 함께한 행복한 꿈은 끝났다. 리얼충이 되어 봤지만 결국 내 인생은 세상은 나에게 행복을 허락하지 않는다. 봉사부에 들어가기 전, 세상에 대한 증오가 내 마음속에 다시 생겨난다. 역시 우린 그날부터 전혀 성장하지 못했다. 내 뒤에 느껴지는 그녀를 생각하며, 날 끌어안은 그녀의 두 손을 잡는다. 그동안의 시간은 무의미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내 뒤에 누군가가 있어주니까. 내 옆에 있어주는 사람을 위해서 난 다시 한 번 신세계의 신이 될 거다. 그렇게 중2병 같은 생각을 하며 그녀의 손을 좀 더 꽉 잡는다.
“유키노시타, 세상을 바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