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들, 바뀌어버린 일상 (2)
눈을 감고서 가만히 있다가 등을 두두두두 때리는 등받이의 진동이 좀 멎을때쯤 해서 눈을 살짝 떴다. 시간이 지나 데미지 로그는 다 사라지고 없어진 뒤, 다른 로그가 스크린 너머로 나에게 환영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완벽하게 패배했어요' 라는 메세지를 담은.. 자동 수복 메세지가.
[Auto Recovery - Activated]
[29 : 32]
"그렇게 해서는 강해지지 못한다."
화면 너머로 언뜻 보이는 푸른 색의 보우건. 그걸 들고 있는 푸른 색의 기체의 움직임은 완전히 멈춰있다. 그리고는 통신으로 하면 될걸 굳이 스피커를 켜서 실컷 광고하는 그 푸른 조종기의 유저.. 진 시훈. 승자의 여유라는 녀석이냐.. 아. 젠장. 짜증난다.
"누구도 부탁한 적 없습니다만!?"
적어도 거리는 벌릴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그 타이밍에 3번째 다리를 공격할 게 뭐람.. 충격탄도 전혀 맞지 않았던 모양이고.. 솔직히, 자기 기체쪽을 향해서 충격탄을 날리는 바보같은 짓을 상식적으로 할 리가 없는데, 어째 그러려던 걸 간파하고 두번째 다리를 먼저 제압하질 않나. 이어서 거리를 최대한 벌리려고 볼트 스트라이커를 활성화 시켜둔 세번째 다리를 마저 때려버리질 않나..
"거기선 보통 위로 튀어나온 녀석을 제압하면 중심이 뒤집힌다고 그랬었잖아요? 그러면 위로 솟은 네번째 다리를 패야죠. 상식적으로. 이거 형이 알려준거잖아요? 일부러 4번째 다리에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머리를 좀 더 굴려라. 알려준 걸 토대로 새로운 전술을 짜내는 그 과정에서 네 실력은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화가 나서 생각나는 대로 마구 말을 내뱉었는데.. 그 결과가... 저거, 나 비꼬는거지? 나 머리 못쓰는거라고 비꼬는거지 지금? 아오. 짜증나. 화가 난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에라도 멈춰있는 저 망할 푸른 색 조종기에 볼트 스트라이커를 한방 먹이고 싶은데!
"예! 예! 오늘도 좋은 가르침 자알 받았습니다!"
"일단은 좀 쉬어둬라."
아무 반격도 못한 채, 이따 미끼 역할을 하기 전에 들어올 공격의 강도가 두려워.. 그저 소리를 크게 내는 걸로밖에 반항하지 못한다.. 크흑. 난 왜이리 약한걸까..
"시훈이 형"
"뭐냐."
"이제 그것들이 신호를 잡고 움직이기 시작할까요?"
"상세 과정을 말한다 한들 이해하기 힘들테니. 결과만 말하자면 최소 3시간은 지나야 여기에 올 수 있을거다."
이해하기 힘들테니.. 라니. 저 인간.. 굳이 할 필요 없는 말까지 붙여서는 신경을 박박 긁는다.. 젠장.
"그나저나 오늘은 뭘 먹을겁니까?"
"난 대충 먹고 왔다. 너야말로 아침 식사를 하는 건 어떤가. 수혁."
"아. 예.."
말 안해도 이미 빵 만들어지는 중입니다. 'Bread - 12:10' 이라는 단어와 숫자가 컨트롤 패널에 띄워진 것을 확인한 뒤, 목이 타서 대충 에이드나 마실까 하다가 생각이 나서 한번 더 물어보기로 했다.
"뭐 마실거라도 들래요. 시훈이 형?"
"그럼 난 레몬에이드로 부탁하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레몬에이드를 주문하는 저 뻔뻔함.. 보나마나 성격이 엄청 꼬인 인간이 분명할 것이다. 패널에서 에이드 - 레몬에이드를 눌러서 1분 30초정도 걸린다는 걸 확인하고 가만히 기다렸다. 보글보글거리는 투명한 액체가 컵에 담겨 올라와, 해치를 열고 조심스레 내려갔다.
가동 상태가 아닌 시훈이 형의 조종기, 칼로베리프는 겉보기에 푸른색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엑사베리온과 비슷한 갈색을 띠고 있다. 단순히 흙먼지에 묻혀서 이런 색깔이 나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는 추측 정도만 가능할 뿐.
잠깐 멍하니 기다리고 있자, 해치를 열고 검정색에 녹색 줄무늬가 살짝 그어진 가면을 쓴 사내, 시훈이 형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형은 항상 전투 준비에 들어가게 되면 저런 가면을 쓰고서 나타난다.
"가면 너머로 음료가 들어갑니까?"
일단 내 말을 듣긴 들은 모양인지, 한 손으로 가면을 슬쩍 걷어올리곤 레몬에이드를 컵채로 벌컥벌컥 들이키는데.. 목이 따갑진 않은걸까..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만 말이지. 왠만하면 괴로워하는 모습을 꼭 보고 싶어서 말이야..
"잘 마셨다."
"그럼 전 아침이나 먹어야겠습니다."
"저건 너만이 조종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겨내려면, 강해져야 한다. 수혁."
뜬금없이 저게 왠.. 아. 말버릇이었지.
"예. 예. 덕분에 매일 착실히 강해지고 있습니다."
"그런 반면에 머리는 잘 안돌아가는 것 같다만.. 아니. 여기까지만 하지."
할 말 다 해놓고 "무슨 여기까지만 하지"야 이 인간아. 어쩌면 나도 모르게 그 생각이 눈빛으로 드러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라, 슬쩍 흘겨봤지만 다행히 겉으로 보기에 변화는 없다. 시훈이 형은 다시 가면을 내려 쓰고는, 내 엑사베리온을 손가락으로 슥 가리키고는 칼로베리프에 올라탔다. 나도 슬슬, 엑사베리온으로 들어가서 아침이나 먹을까.. 빵도 다 만들어졌겠지.
내 취향의 블루베리 에이드를 마시고 있자, 멋대로 통신이 들어왔다.
[Connected]
-"2시간 동안 쉬고 있어라. 잠이 온다면 자고 있어도 상관은 없다."
-"밥먹고 바로 자면 체한다면서요. 형이 그랬잖아요."
-"말을 잘못했군."
-".. 아 알아서 할테니까 이따 알아서 오든가 해요."
-"적어도 몇 분 안에는 올 수 있는 곳에서 대기해 있을테니 큰 걱정은 말아라."
걱정이라? 걱정을 하는 인간이 '충격 흡수' 기능이 있는 내 조종복이 그 역할을 하기 힘들 정도로 패고 그러냐?... 말해 뭣해. 젠장.
-"아침이나 좀 편하게 먹읍시다."
-"방해했다면 미안하군. 그럼. 그것들이 등장하면 나타나도록 하겠다."
-"시훈이 형, 부탁이니까 오늘은.."
[Disconnected]
"살살 좀 해.. 달라고 야 이자식아아아아아아아아아!!"
멋대로 통신을 끊은 저 인간을 향해 먹던 빵을 튀겨가며 이야기하는 내가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진다..
플레이트를 대충 꽂아놓고, 시원하게 트림을 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소화하겠답시고 이 흙먼지투성이인 곳을 내달리는 건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절대 해서는 안 될 짓이니까..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하거든.
몸이 조금 풀리고 난 뒤에 등받이를 최대한 눕혀 시훈이 형이 했던 말대로 잠이나 좀 자두기로 했다. 어차피 푹 자고 있다 한들 날 때려서 깨울 인간이다. 진 시훈 그 인간은.
'6년이라는 시간의 차이를 함부로 얕보지 마라'
저 말이.. 그 형 나름대로는 분위기 잡고 하는 말이었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순서가 뒤죽박죽이다. 그냥 '6년 차이는 하루 아침에 뛰어 넘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대충 이렇게 말했으면 될텐데..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풉.. 말을 제대로 못 배웠나. 나이는 먹을대로 먹어놓고.. 크크크"
그 인간이 혹시라도 듣게 되면 뼈도 못추릴 정도로 후폭풍을 실컷 맞게 될 말을 마음껏 하고 나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
잠깐 쉬고 있자, '삐릭' 하는 알람음과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Connected]
-"수혁. 응답해라"
-"아, 시훈이 형."
-"적 조종기 3기를 확인했다. 소속은 UDF. 싸울 수 있겠나?"
UDF. United Dominance Force.. 통칭, 지배 연합 조직.. 시훈이 형의 설명에 따르자면, 세상을 이따위로 만들어 놓은 장본인들이 속한 국가들의 연방국이라고 한다. 솔직히 싸울 의지는 없다. 가장 먼저 행동정지를 당했던 상대이기도 하고.. 그때, 시훈이 형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쯤 저들에게 잡혀가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아직은 준비가 안 됬습니다."
-"알았다. 유인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타격에 들어간다. 적 3기 예정 도착시간은 10분."
-".. 뭐, 각오가 되고 나면 저도 싸울겁니다."
-"싸우고자 한다면 재밍 상태는 언제든지 유지할 수 있다. 정보를 뺏기는 걸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통신을 종료하겠다."
[Disconnected]
통신이 끝나고, 익숙한 피해 알람 메세지와 함께 잠깐 쉰지 얼마 되지 않아 익숙한 'Auto Recovery' 라는 메세지가 날 환영했다. 더불어, 등받이가 내 등을 시원하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오늘도 미끼 역할이나 하는건가.. 어디선가 냄새를 맡고 달려드는 다양한 '조종기'들을 해치우기 위한 미끼 생활. 이 생활도 슬슬 익숙해져간다.
통신 상태를 나타내는 작은 아이콘에 X자 표기가 나서, 통신이 완전히 불가능하다는 걸 확인한 뒤 모니터를 켰다. 아니나 다를까, 몸체에 'UDF'라는 문자를 멋지게 휘갈겨놓은 문장을 달고 나타난 것은 긴 벨트같은것을 땅에 두르고 움직이는 1기와 하늘을 날아오면서 흙먼지를 덮어쓰면서 나타나는 1기였다. 분명, 3기라고 했었는데..? 어차피 나는 이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없으므로,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잠깐 시간이 흐르자, 땅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처음에 본 1기와 비슷한 조종기가 땅을 짓이기다시피 하면서 거대한 진동과 함께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왔다. 그 모습만 봐도 현기증이 일어난다. 또 얼마나 엑사베리온을 두들기고 때리고 할 셈인걸까..
[Vision OFF]
화면을 꺼버렸다.
오라드가 이 곳에 떨어진지도 거진 반년 쯤 지났다. 바깥에선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그 날, 유일한 연락수단이었던 스키넥마저 잊고서 급하게 탑승했던 탓에 다른 통신지구의 이야기나 기타 정보들은 오로지 시훈이 형이 가끔 알려주는 정도밖에 알 방법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어떻게 살아남았는지가 제일 의문이지만. 그 의문을 뒤로 해두니까 그냥 '살아가는 것' 밖에는 관심이 없어졌고. 다행히도 엑사베리온 안에서 쉬는 것도, 자는 것도.. 심지어 식사도 가능하고.
'이거 하나만 있으면 어디 가더라도 굶어 죽지는 않을거다!'
왜 이런 기능이 내장되어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지만.. 그 당시의 할아버지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사실, 저 말을 처음 들을때만 해도 이걸 팔아서 돈을 벌면 굶어 죽지 않을거라는 의미로 말한 것 일거라 생각했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로 안이한 생각이었다. 진정한 의미로 굶어 죽지는 않을 거라는 말이었다는거지.
이런 기능이 있다는 점을 놓고 보면, 여태 할아버지가 만들었던 발명품들의 완성형이 아닌가 생각된다. 전투용 조종기로 알고 있었는데, 편의기능도 잘 갖춰져 있고..
조종석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진동. 그리고 등받이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진동을 느끼다보니, 솔직히 이 곳을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도 여러번이고 했었다. 다만 매일 아침마다 시훈이 형이 찾아오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이 주변을 벗어나면 분명 사람 사는 곳이 나오기야 하겠지만, 이 곳을 떠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다. 정말로 그 미사일이 날 향해 쏜 거였다면, 내가 이동하는 곳마다 또 그 '오라드'가 투하될 테니까. 내가 가는 곳.. 엑사베리온이 모습을 드러내는 곳마다 폐허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내가 강해져서 그 '오라드'를 쏘는 곳을 다 제압하거나 하지 않는 이상은 이러한 사태는 끊이지 않을 거라는 나름대로의 결론을 세웠고.. 그래서 강해지기 위해 시훈이 형을 이용하고 있다.. 뭐, 그렇게 봐도 좋을 일이다.
[Vision ON]
진동이 슬슬 멎는게 느껴지고, 무언가가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가 희미하게나마 들리기 시작해서 화면을 켜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곳에는 '푸른 빛'을 뿜으면서 날아다니는 두 다리를 가진 조종기. 칼로베리프가 있었다..
UDF라는 명칭이 어색할 정도로, 녀석들은 예상치 못한 공격에 벌벌 떨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 증거로 흙먼지를 뒤집어 쓴 녀석이 푸른 빛을 뿜는 조종기를 향해 쏘아댄 원거리 미사일은 완전히 빗나가 오히려 그 아군에게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몇 발은 이쪽에도 떨어지곤 했지만 폭발로 인해 번쩍이는 탓에 조금 조종석이 밝아지기만 했을 뿐 큰 차이는 없다. 애초에, 저런 간단한 공격으로 뒤집힐 거였으면 미끼 역할따윈 하지 못한다.
그제서야 녀석들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은 걸까? 급하게 내 쪽에서 소리를 내며 멀어지는 조종기를 향해, 푸른 빛이 지나갈 때 마다, 작은 빛의 기둥이 생겨나곤 했다. 그렇게 3개의 기둥이 생기고 나서.. 푸른 빛이 내 앞에 왔다.
곧, 통신이 복구되었음을 알리는 메세지가 뜬다. [Network Error]라고 적혀있던 메세지는 사라지고, 아이콘에 떠 있던 X표시도 정상적으로 되돌아와, 그에게 말을 거는 게 가능해졌다. 언제나 형이 먼저 걸곤 했지만. 이번엔 통신 목록에 놓여있는 그의 정보를 확인하고, 내쪽에서 통신을 시도했다. 곧, 통신이 연결되었다.
[Connected]
-"이야, 매번 수고가 많으십니다. 시훈이 형"
-"말로만 하지 말고 이제는 너도 싸워줬으면 하는데 말이다."
화가 났는지, 짜증이 났는지 어조로는 도저히 파악이 불가능하다. 언제나 낮은 목소리를 갖고 있는 탓에..
-"오늘은 더 안올 것 같은데요."
-"그럼. 한판 더 하도록 할까."
화가 난 모양이다.
-"사양합니다.. 하하, 전 좀 쉴게요."
그리고, 삐릭 하는 소리와 함께 [Initialize]라는 메세지가.. 분위기좀 읽어줬으면 좋겠다. 기계한테 바라는 게 멍청한 생각인 건 이해야 하겠다만..! 왜 하필 지금!
-"아무래도 네 말과는 달리 준비가 된 모양이군"
-"하.. 하하."
-"간다. 기본적인 무기 정도는 세팅해두도록."
오늘 아침에 싸웠을 때랑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하려나. 단궁 3발을 최소한의 탄환으로 막고 난사전으로 들어가면 조금은 .. 아니, 아까 미사일을 피했던 걸로 봐서는.. 그건 둘째치고, 오늘도 제대로 자긴 글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