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들, 바뀌어버린 일상 (3)
침대에 누워 쉬고 있는 중, 책상에 놔둔 게임기가 진동했다. 우리 할아버지이자 천재 박사. 올해로 환갑.. 은 아니신 신 우현 박사님의 작품이다. 왜 하필 게임기에 달았냐고 했더니 '수혁이 네 녀석이 게임기를 달고 사니까 그렇지' 라고 하셔서 대충 납득은 했다.
그리고, 항상 쉬고 있을때만.. 진동이 울려, 날 괴롭힌다.
"이녀석, 또 게임이냐?"
"아니에요, 누워있었어요 할아버지."
화면 너머로 할아버지는 하얀 가운을 펄럭이면서 의심하는 듯한 눈초리로 날 가만히 바라보시더니, 곧 말을 이으셨다.
"그래 게임은 적당히 하고 이녀석아. 혹시 팽이 좋아하냐?"
"팽이야 좋아하죠."
잠깐 말이 없더니, 이상한 질문을 하시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질겁했다.
"혹시 네가 팽이가 되면 어떨 지 생각해본 적 있느냐? 아, 다음 연구에 필요해서 말이지."
"네? 팽이가 된다고요?"
그 순간, 소연이가 떠올랐다. 지지 않겠다는 생각만 강해서, 인간 팽이가 되었던 소연이는 재밌었을까? 생각해보니 꺅꺅 하면서 비명도 지르고, 멈춰달라면서 소리도 질렀던 것 같은데, 그때 표정이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다. 글쎄, 자기가 팽이가 되는 기분은 어떨까. 멈춰달라는 것 치고는 꽤나 즐기는 모양이었는데 말이지.
"글쎄요, 좀 어지럽긴 해도 재밌을 거 같은데."
"그래, 이 할애비가 좋은 걸 만들어주마!"
할아버지가 미소를 지으며 '좋은 걸 만들어주겠다'신다... 뭐가 그렇게 신이 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와 반대로 난 갑자기 불안한 느낌이 엄습했다.. 할아버지. 또 뭘 만드려고 하시는걸까.. 설마. 또 내 방... 팽이처럼 생긴 것들은 다 감춰놔야겠다. 또 어떤 모습으로 바뀌어있을지 모를 일이니까.
"할아버지 또 뭐 하시려고요!"
"하하하! 기대해도 좋다 이녀석아!"
또 무슨 일이 생길 지 모르겠다. 저 미소를 보고 나면 항상 새로운 무언가가 내 방이나, 거실이나.. 하여간 집 안 어딘가에 놓여있고. 호기심에 건들어보면 항상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곤 하는데 항상 얼굴이 더럽혀진다거나, 옷이 더러워지거나. 구른다거나.. 하는 등 나한테 안좋은 일만 일어나곤 했다. 일단 잠이나 자야겠다 싶어 통신 기능이 부착된 게임기를 대충 던져놓고.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서로 지기 싫어하는 성격을 가진 탓에 그날도 수업시간이라는 걸 잊고 말싸움을 벌이다가. 담임이라는 사람은 그걸 막을 생각조차 않고 그냥 우리가 운동장으로 가는 걸 가만히 구경이나 하고.. 아니, 반 전원이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운동장으로 가서까지 경쟁을 하게 된 이유라고 한다면, 아마 서로를 굴복시키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저번에는 소연이 네가 정했으니까 오늘은 내가 정할거다."
"그래. 자신있는 종목을 골라서 한번 발버둥 쳐 봐."
그 말에 조금 울컥해버려, 나도 모르게 승부욕을 자극하는 말을 꺼내버렸다. 나는 그물에 묶인 적당한 무게의 공을 한손으로 들었다 내렸다 하면서 말했다.
"이걸 쥐고 돌아서 여기, 중앙에서부터 더 멀리 던지는 사람이 이기는 걸로. 아. 여자아이라서 이런 걸 멀리 던질 힘은 없으려나?"
그 말을 들은 소연이가 검정 포니테일을 찰랑이면서 나한테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내가 쥐고 있던 걸 뺏어버렸다. 뭔 여자애가 저렇게 우악스럽다냐.
"시끄러워. 빨리 던지기나 해! 안던지면 내가 먼저 던질테니까!"
보나마나. 하는 방법도 모르고 내가 괜히 무시하는 말을 한 탓에 마음만 앞서서 서두르려고 하는 모양이지.
"야. 야. 던지는 법도 모르면서 뭘 하겠다고.. 거기 서 있어. 먼저 보여줄테니까."
소연이가 이해하기 쉽게끔. 하나하나 설명하면서 했다. 승부는 공정해야 하는 법이니까.
"이 공이 추의 역할을 하고, 그 공을 묶고 있는 그물같은 것에 줄을 이어놓은 건데. 제자리에서 뱅뱅 돌다가 손을 놓아 던지는거지. 당연하지만 잘못 던졌다간 학교 건물에 직격할 수도 있으니 조심해서 던져야 한다? 창문같은 곳에 맞기라도 하면 둘 다 교무실행이니까."
"그야 그렇겠네.. 시범이나 보여봐."
"이 끝에 이어진 줄을 손에 대충 묶고, 뱅뱅 돌기 시작하는거야. 이 공이 닿으면 자국이 생길테니까 거기를 중심으로 이 원 안에서 거리를 재서 누가 더 멀리 던졌는지를 정하는거지.. 자. 이제 돌테니까 멀리 떨어져 있어... 간다!"
제자리에서 한 10바퀴쯤 돌자 충분히 회전에 속도가 붙었다고 느껴져, 한 5바퀴 정도를 더 돌다가 그대로 손을 놓았다. 천천히 회전을 멈춰서 넘어지지 않도록 자세를 잡았지만. 조금 어지러워서 반대로 뱅뱅 돌아서 정신을 차렸다.
공은 다행히도 학교 건물 방향으로는 나아가지 않고, 그럭저럭 만족할만한 거리에 놓여있었다. 저 멀리에서 박수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그쪽을 바라보니. 아니나 다를까 3학년 2반.. 우리 교실에서 나는 소리였다.
"수혁이 너 장난 아닌데?"
"야 팔은 안아프냐!"
"머리는 안어지럽냐?"
하여간, 하나하나 소란스러운 녀석들.. 피식 웃어보이며 팔을 가볍게 풀어보이고 목을 가볍게 돌려주자.. 좀 어지러웠지만. "엄살 부리다 병원간다 임마!" 라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문 너머로 몸을 갖다대며 양 손을 입에 갖다 대고 들으라는 듯 소리치는 것은, 짧은 머리인데 어째서인지 앞머리만 한움큼 붕 떠있는 내 옆자리에 앉은 녀석, 손 아준이었다.
아준이 녀석의 말을 무시하고, 소연이 손에 공을 얹어주었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쉬고를 잠깐 반복하더니, "저리 가" 라길래 멀리 떨어져서 구경하기로 했다. 그런데 왠지 줄을 너무 많이 묶는 것 같은데. 저러다간 던져지면서 마찰때문에 손바닥에 상처가 나거나 제대로 던지지 못해 그대로 힘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회전력을 극대화하면 된다는 거지?"
"어? 어. 그래. 그런 셈이지. 그렇다고 욕심은 부리지 말고.."
뱅글뱅글 돌기 시작하는 소연이. 포니테일도 같이 뱅글뱅글 돌아서 마치 팽이와도 같은 느낌을 받는다. 공이 공기와 닿으면서 내는 날카로운 소리가,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느낌까지 준다.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많이 돈다. 이제 손을 놔도 될텐데.
"야, 너 너무 돌았어. 슬슬 놔!"
"뭐어어어라아아아고오오오오"
말이 묘하게 긴 것 같지만.. 다시 말을 걸어보았다.
"소연아. 이제 놔! 괜히 학교 건물에 던지지 말고.. 그러다 창문 맞춘다?"
"아아안놔아아져어어어"
네?
"뭐라고?"
"아안놔아아져어어어어그리고오오안드으을려어어"
안놔져, 그리고 안 들려인가.. 그리고 이쪽으로 점점 다가오는 것 같이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이겠지.
"소연아! 당황하지 말고 일단 줄을 손에서 놓고 멈춰봐 좀!"
"머어어엄추우어어어어주어어어어"
거친 속도로 회전하며 다가오는 소연이. 저거 맞으면 정말로 병원 신세를 져야 할 지도 모르겠다. ...어. 아니. 이쪽으로 오지 말라니까.
"머어어어어엄추우우어어어어주어어어어어"
"야, 오지 마! 저쪽으로 가!"
"모오옴이이이마아아르으으으르아아아안드으으러어어"
몸이 말을 안들어? ...망했다. 저 녀석 괜히 승부욕만 앞서서 거칠게 돌기 시작한 모양이다.
"이쪽으로 오지 마!"
"도오오오우우아아아아주우우어어어어"
이젠 뭐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이쪽으로 오지 말라니까? 야, 너 지금 원 벗어났어. 벗어났다고!
"오지 마아아아! 야!! 저리 가!!!"
조금씩 뒷걸음질 치는 걸로 거리를 벌렸다 싶으면 금새 이쪽으로 계속 다가오는 저 팽이같이 돌고 있는 소연이를 피하기 위해 이제 나도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소연이도 속도가 붙어 이쪽으로 계속 다가오는게 아닌가.
"오지 말라니까!"
"머어어엄추어어어어주어어어어어어어어"
뉴스에 대문짝만하게 실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므로, 오지 말라고 소리를 질러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젠 쟤가 지칠때까지 도망치는 수 밖에 없다! 저 멀리서 우리를 비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린거야!
"오지 마, 오지 마!! 으... 으아아아"
혼신을 다해 포니테일을 돌리면서 다가오는 저 물체로부터 멀어지려고 노력했다.
"잠깐, 저기요. 안 소연양? 이쪽으로 오지 마! 닿기라도 했다간 최소 전치 5주야!"
"머어어어어어엄춰어어어어어줘어어어어어"
"오지마!!!"
얼마나 달렸을까. 소연이도 지친 모양인지, 회전이 약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저 멀리 가서 토악질을 하고 있다. 그 모습에 눈을 돌리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핑 도는 것만 같다. 어지러워. 쓰러질 것만 같아.. 헉.. 헉.. 젠장.
"하아.. 하아.. 지기 싫다고.. 밧줄을 손에서 안 놓고.. 계속 도는.. 저런.. 하아.. 흐아악.."
나무가 보이길래 대충 그쪽까지 간신히 걸어가. 풀썩 주저앉았다.
"사람이.. 팽이가 될.. 수도.. 헉.."
몸에 힘이 돌아오는 대로 소연이를 데리고 보건실에 가야겠다.. 지금은 좀 쉴까.
"누가.. 이겼... 어!"
"이 마당에.. 승패가.. 중요하냐! 너도 좀 쉬어!!"
나무 그늘에 몸을 기대자, 등쪽이 시원한게 기분이 좋다. 바람도 살랑 살랑 불어와 몸 전체가 붕 뜨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지치기도 했고.. 나무에 기대서 좀 자기로 했다. 눈도 서서히 감겨오는 게..
"으.. 으아암.. 소연아? 소연.."
아. 소연이가 있을 리가 없구나. 다 꿈이었으니까.. 세상에. 꿈을 꾸다가 다시 또 꿈을 꾸다니. 이런 일이 있나.. 방금 전까지 있던 침대는 온데간데 없었고.. 하긴, 할아버지가 여기 있을 리 없으니까. 누운 자리도 딱딱하고.. 내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모양인지 시훈이 형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방금 전까지 살랑이던 기분 좋은 바람은 어느새 흙먼지를 머금은 기분나쁜 바람이 되어있었다.
인간 팽이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쳤던 그 날, 수업이 모두 마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준이 녀석이 그걸 갖고 날 놀려먹기도 했었던 게 기억난다. 아준이.. 소연이. 지금 둘 다 뭐하고 있을까.. 게다가 그날, 집에 돌아갔더니.. 하필, 무슨 플레이트에 팽이를 올려놓고 몇바퀴를 도는지 세어달라니 하는 바람에, 포니테일이 쫓아오던 그 기억이 떠올라.. 하.. 하하.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차라리 그때가 더 낫긴 했지.. 팽이.. 인가."
아직 시훈이 형이 도착하지 않았으니. 눈을 감고 그 날의 일을 마저 떠올리기로 했다.
"수혁아! 할게 없으면 이 할애비좀 도와다오!"
오늘도 역시 조수가 필요하신 모양이다. 이것 저것 도우는 건 꽤 재밌고, 그 박사님을 둔 혜택도 톡톡히 받고 있었고.. 원치 않은 일도 좀 많이 있지만. '인간팽이와 쥐불놀이' 때문에 좀 지쳤지만 간단한 일이라면 도와드리러 가기로 했다.
"그러니까, 이게 몇바퀴를 요 위에서 도는지 세어주면 된다. 천천히 돌거거든 이게?"
플레이트 위에, 팽이같이 생긴 거 하나. 눈금이 새겨져 있고.. 어디에 쓰는 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이 팽이는 멈춰있다.
"정확히 10바퀴만 돌면 된다. 혹시 모르니까 한 10번정도 더 테스트해보고. 밑에 플레이트에 스위치 있지? 그거 누르면 돌기 시작할거다."
"아. 이 스위치 말하시는 거죠?"
플레이트 하단에 위치한 스위치를 살짝 눌러주자. 팽이가 돌기 시작한다.
"팽이.. 소연이... 으아아아아!!!"
"소연이? 소연이는 왜 찾냐? 불러줄까?"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내 손에 든 플레이트와 최대한 멀어지기 위해 난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하하 저녀석 오늘따라 기운이 팔팔하네!"
아닙니다. 할아버지! 단연코 그게 아니라구요! 으.. 으아아아아아 저리 가 저리 가!!
할아버지는 뭔가 기분이 좋은 듯 싱글벙글 웃으신다. 하하 웃는 소리가 집안을 가득 메웠다. 할아버지, 웃을 일이 아니에요. 무엇보다도 난 내 눈앞에 도는 이 팽이가 너무 싫은데. 소연아! 저리 가! 오지 마!
게다가 이 팽이, 작은 막대기가 맨 끝에 달려있어서 그때를 연상케 했다. 하루도 지나지 않은 따끈따끈한 나의 트라우마. 인간 팽이 안 소연..
"실험하면서 운동하는건 뇌 활성화에 도움이 된다! 잘 한다 내 손자!"
"그게 아니에요 할아버지..!"
그렇게, 난 팽이가 10바퀴를 돌고 또 10번정도 더 테스트하는 내내 내 손 위에 있는 플레이트와 멀어지기 위해 바쁘게 뛰어다니는 바보짓을 반복했다.
"쿠훠러억"
2층에 위치한 내 방에 들어오자마자 진이 다 빠져서 침대에 쓰러지다시피 했는데, 하필 몸이 팔을 짓누르듯이 쓰러져버려서 거기에 더해 형용하기 힘든 고통이 찾아왔다. 그 탓에 저런 정체불명의 괴성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내가 저런 소리를 낼 수 있는줄 오늘 처음 알았다.. 몸은 아픈데.. 잠이 쏟아진다..
대충 아픈 팔을 한쪽으로 치워놓고, 머리맡의 스탠드에 위치한 작은 액자를 쥐고서 바라봤다. 할아버지와 찍은 사진. 그나저나 언제 할아버지랑 같이 살게 되었을까. 확신은 안서지만, 아마 아빠든 엄마든 어느 쪽이 날 할아버지한테 맡겨두고는 어디론가 떠났고.. 대충 그런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다. 더 깊게 생각할 필욘 없겠지.. 할아버지도 내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는 해주지 않으셨으니까. 뭐, 나도 나이 먹을만큼은 먹었다. 그 정도 이야기에 막 감정 조절 못해서 버럭대고 할 나이는 지났고 말이지.
[2171. 3. 21 - 할아버지와 함께]
이야.. 5년 전이라고는 해도 할아버지는 지금이나 그때나 똑같다.. 음, 아마 올해로 예순 둘이라고 하셨던가..
'아직 환갑도 안지났다 이놈아!'
라고 말하시던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히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