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전투, 첫 승리 (2)
다시 의지를 가다듬고, 랜서 타입으로 추정되는 적에게 돌진했다. 방향을 전환할 필요도 없다. 그저 이대로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런 확신이 섰다.
[Damaged, Leg 4 : 3%]
갑자기 메세지가 떠서 이상하다 싶더니, 랜서 타입의 적이 4번 다리를 향해 마구 발칸 포를 난사 하고 있었다. 이쪽을 향해 무작위로 발사하고 있는데.. 설마. 저래보여도 사격계인가? 그럼.. 저 방패는 페이크였나..
그렇다면 일단 저 놈부터 잡기 위해 방향을 전환하기로 했다. 소연이가 알려줬던 내용을 토대로 생각해본다면, 만화처럼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회전력을 최대한 유지한 채 방향을 전환하는 최선의 방법은 외부에서 타격을 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팽이 치기라고 할 수 있겠지. 이와 같은 효과를 내기 위해서, 방향 조정을 수동으로 해보기로 했다.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Boost, Leg 2 : On]
일단 움직임의 균형이 조금씩 무너지는 게, 스크린에 보이는 시야가 점점 눕혀져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뭐, 이정돈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지. 물론 화면이 눕혀지고 있다는 것은 이건 보나마나 내가 쓰러지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에 해야 할 일은 이 불안정해진 팽이의 상태를 정상적으로 돌려주기 위해 반대로 쳐주면 된다. 그러니까..
[Boost, Leg 2 : Off]
[Boost, Leg 1 : On]
이렇게 하니까 회전력을 유지한 채 성공적으로 방향을 전환할 수 있었다. 다시 시야도 회복되었고, 그리고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온 랜서 타입의 적. 내가 이만큼 다가온 거겠지만.. 당황하지 않고 생각해둔 기술을 그대로 적용시켜보기로 했다.
[Boost, Leg 1 : Off]
[Blast Claw, Charging]
[Leg 2 : Claw]
[Leg 1 : Claw]
양쪽 다리에 클로를 장착, 폭발력을 지닌 클로를 챠징. 챠징이 완료되기까지 3초.. 2초.. 1초.. 가까이서 보니 저건 랜서가 아니라 블래스터 타입이었던가? 이 전투가 끝나고 나면 다시 익혀둬야겠다. 클로가 닿는 순간 적의 방패에 불꽃이 튀면서 경쾌한 폭발음과 함께 하늘로 띄워졌다. 자, 한방 더..
어.
어어? 이거 왜이래?
갑자기 고속으로 화면이 돌아간다. 그와 동시에 또 등받이가 제 역할을 못하고 내 등을 신나게 연타하기 시작했다. 뭔가 잘못되었다. 확실히 뭔가가..
"아.. 이런 멍청한!"
폭발에 의한 반발력을 생각하지 못했다! 근거리에서 직접 부딪히는 경우라면 그 점을 고려했어야 하는건데..! 화면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솔직히 이젠 어지러움까지 느껴질 정도다. 화면도 돌고, 내 눈도 뱅뱅 돈다. 적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어질어질해서 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리고 뭔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고, 폭발하는 소리가 났다. 두번째 폭발. 화면은 더 빠르게 회전하고 내 머리도 돌고 눈도 돌고 뱅글뱅글 세상이 돌기 시작했다.
지구는 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아니. 내가 돌고 있는 거구나 지금은.
"으아아아아아!!"
완전히 조종 불가 상태가 되어버린 내 팽이는 갈 곳을 잃은채 정처없이 뱅글뱅글 돌고 있다. 레이더라도 좀 보고싶은데 회전이 멈추질 않는다. 이 상황은.. 그때 그..! 소연아! 내가 재밌어보인다고 했던 거 진심으로 사과한다, 마음 깊이 반성하고 있어. 재밌기는 커녕 어지럽고 누가 정말로 멈춰줬으면 좋겠는데 이거?
[DDDDDDDDDaaaaaaaaaammmmmm]
하하.. 스크린에 표시되는것조차 뱅글뱅글 돌아서 잔상이 여러개로 보이고 있는게 정말이지.. 그때 소연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영어도 깨져보이고 시야도 깨져보이고 세상이 돌고 내가 돌고 내 조종기도 돌고 등짝은 계속 맞아서 아파 죽겠고 아무리 등받이가 부드러운 소재라도 엄청난 회전력이 더해진 이 등받이를 계속 두들겨맞고 있으면 부상 당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ㅏ아아아아아"
나도 모르게 저절로 소리가 튀어나온다. 어떻게 좀 멈춰야겠는데.. 싶어서 뭐라도 막 눌러보기로 했다.
-'으아아아ㅏㅇ아ㅏ아아아'
내 목소리로 메아리같은게 들리는데. 기분 탓인가..?
[NNNNNNNNNNNooooooooooo ttttttttaaaaaaa]
상황좀 보려고 했더니 거 진짜 알아먹질 못하겠네 뭐라고 적힌거야 젠장..! 정신을 차리고 똑바로 바라보려고 했지만 이미 내 눈에 보이는 시야는 내가 아는 모습이 전혀 아니었다. 곧, 극도의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스크린에서 알파벳이 여러개로 보이는 걸 보면 내 눈 마저도 믿을 게 못되는 상황인데, 입에서 끊임없이 튀어나오는 '아아아아' 소리는 메아리처럼 울려퍼져서 공포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까지 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내가 있다. 내 엑사베리온이 지금 어떻게 되었을지는 솔직히 눈에 보이지 않아도 충분히 연상 가능하다. 그 날의 소연이와 내 상황처럼.. 아마 적들도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고 있을게 뻔하다.
블래스터를 장착한 적의 사격기도 이 상태에서 공격을 했다간 어디로 반사될 지 모르니 섣불리 공격할 수는 없을 것이므로 무조건 거리를 벌리는 수 밖에는 없을 것이다. 거리를 벌리는 수준이 아니라 말 그대로 도망치고 있을게 뻔했다. 그도 그럴게, 나 역시 컨트롤이 전혀 안되니까 이건 그야말로 스치면 대파 확정이니까 말이다.
그 점에서 적들에게 트라우마를 심어주겠다는 첫번째 목표는 달성했다고 볼 수 있겠지만, 반면 나 역시 이 기술을 두번 다시 사용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트라우마가 실시간으로 새겨지고 있었다.
전혀 소음이 없어서 쾌적했던 엑사베리온의 조종석은, 내 '아아아아' 하는 비명과 역회전의 영향으로 소음의 집합소가 되어있었고, 내가 어디를 돌고 있는 지, 대체 어떤 상태로 돌아가고 있는 지도 모르겠는데 부드러운 재질로 만들어졌을 게 분명한 조종석 등받이는 내 등을 신나게 리듬에 맞춰 두드리는 중이었다. 피로가 완전히 풀리고 난 뒤라 이제 그만 받고 싶은데도 안마를 받던 몸까지 풀려버려 안마기에서 일어날 힘도 없이 안마가 끝날 때 까지 그대로 앉아있을 수 밖에 없는 뭐 대충 그런 느낌과 비슷하다.
다만,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내가 앉아있는 곳은 자동안마의자가 아니라 조종석이라는 점과, 회전의 중심에 있기에 여기서 섣불리 일어나려고 시도했다간 튕겨져 나가 안전장치 없이 타는 어느 놀이기구와 비슷한 꼴이 될 것이 분명했기에, 잠잠히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 버튼을 누르던 손이 아파오기 시작해 그나마 손이라도 덜 아프도록 재빠르게 무릎에 올려두고는 화면을 가만히 응시했다.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아야만 했기에..
그 와중에, 스크린에 여러개로 흩어진 얼굴이 나타나면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뫄고 있나 수역!"
시훈이 형이었다. 아마 적의 사격기를 해치우고 난 뒤에 다시 통신 회선을 이은 모양이다. 다만 내 귀에는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들리지가 않는다..
-"수역! 말은 드린데 카메라에 뭡이 뵈지 안다!"
외계어와도 근접한 목소리. 나는 다시는 이 기술을 쓰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저절로 멈추기를 기다렸다. 스크린에 메세지가 한 줄씩 올라올 때 마다 스크린 전체가 알파벳으로 도배되는 듯한 느낌이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시이이이이이후우우우우우우니이이이이이이이이이혀어어어어어"
내 입이 내 입같지 않다. '아, 시훈이 형!' 을 외치려고 했는데..
-"수역! 당즈아앙 멈추어라!"
등쪽에서 느껴지는 격렬한 통증에 눈을 뜨자 스크린에는 현재 상태를 알려주는 메세지들이 가득했다.
[System : Auto Recovery]
[Leg 1 : No Control]
[Leg 1 : Auto Recovery]
[Leg 2 : No Control]
[All : Emergency mode]
[Transformation - Default]
[... Next 20]
동시에 띄울 수 있는 알림의 한계를 뛰어넘었는지 'Next 20'라는 문장이 날 더욱 괴롭게만 할 뿐이었다. 반발력을 다시는 무시하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하고 또 다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내 손은 부르르르 떨리고 있었고 상체는 축 늘어져 척 보기에 얼마나 격하게 안마를 받았는지 짐작하기조차 힘든 정도였다. 뭐, 나는 안마기에서 안마를 받은게 아니라 조종석 등받이에 의해 원치 않은 안마를 받게 된 꼴이지만 말이다. 스크린은 먼지로 더럽혀져 있어서 떨리는 손을 한쪽 손으로 붙들어 잡고 스크린 리붓을 시도했다.
[Screen Reboot]
잠시 후, [Done]이라는 메세지와 함께 바깥의 시야가 좌라라락 펼쳐지는데, 여전히 먼지가 붙어있는걸 보아 안에서 격하게 회전하다가 일어난 먼지로 더럽혀진 모양이다.. 직접 손으로 닦아내는 수 밖에는 없어보이기에.. 그냥 포기하고 등받이를 눕혀 그대로 드러누웠다. 잊지 못할 추억이 하나 더 생겼다..
[Connected]
-"수혁, 정신이 드나"
정신을 차리고 나서 들려오는 반가운 목소리는 역시 시훈이 형의 것이었다.
-"아 시훈이 형.. 힘이 좀 많이 빠지네요"
-"탈수기에라도 들어갔다 온 것 같군"
-"뭐.. 비슷합니다.."
-"이제야 정상화가 된 모양이군, 내 목소리는 잘 들리나?"
-"그야 들리니까 이렇게 대답하는거 아니겠습니까"
-"이제야 정상으로 돌아온 게 확실하군"
첫 실전. 훌륭하게 대패.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컨트롤 패널을 꺼내, 뭐라도 먹기로 했다. 목록을 살펴보니 'Toast'가 있어, 나도 모르게 그걸 눌러버렸다. 분을 기다려야 한다고 해서, 그냥 플레이트만 꺼내놓고 아무런 생각 없이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Toast is ready'
[1. Battle OK]
[2. Battle OK]
목록을 확인해봤으나 'Battle OK'라는 이상한 문구가 하나씩 추가되어있다. 뭔지는 모르겠으니 나는 2번, 'Battle OK'를 탭하였다. 그러자 [Number] 라는 문구가 올라오고, 0~3까지 표기된 숫자 옆에 슬라이드 바가 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아래에는 'STOP'이라는 버튼이 추가되어 있다. 뭐야 이게. 0이 걸리면 1개를 습득할 가능성 조차 잃어버리는건가? 토스트 하나 먹는데 뭐 이런 복잡한 기능을 집어넣었다냐. 아무 생각 없이 'STOP'에 검지를 갖다댔다.
숫자는 2에서 멈추었다. 뭐냐. 2장이 나오는건가. 다음에는 ㄴ자 그림에 대각으로 막대가 하나 위 끄트머리에서 아래 끄트머리까지 현란한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 그 옆에 표기된 숫자 역시 0에서 90까지 현란하게 움직인다. ..각도 설정? 이런게 왜 필요해. 대체 무슨 기능을 집어넣은 건지는 모르겠으나 역시나 [STOP]버튼이 놓여있기에. 아무 생각없이 눌러버렸다.
'STOP' 버튼을 누르자, 동시에 메세지 알람 소리까지 들려왔다. 뭐야. 시훈이 형이 통신을 건 모양이다. 바는 서서히 속도를 늦춰가더니, 57, 52, 49, 47, 45, 44.. 42에 멈추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조종석 내부 어딘가에서 카운트를 세는 소리가 들려왔다.
-'3'
-'2'
-'Go'
갑자기 뭔가 툭 튀어나와 플레이트를 들어 바로 막아냈으나. 빠른 속도로 사출된 그것은 어림짐작으로 내 얼굴보다 조금 위쪽, 그러니까 대충 60도 정도로 날아왔고, 플레이트에 막혀 공중에 붕 떠 있었다. 그게 토스트인걸 확인한 나는 빈 오른손으로 그것을 캐치하고 나서야 '갓 구운 토스트' 라는 사실을 깨닫게 만드는 엄청난 온기에 당황해 토스트를 떨어뜨릴 뻔 했지만. 플레이트를 잠깐 내리려고 하는 사이에 두번째 빵이 날아왔다.
재빨리 플레이트를 들어 두번째 토스트를 쳐 내려고 했으나, 미처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날아온 그것은 플레이트를 급하게 내리다가 갈 길을 잃어버린 첫번째 토스트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 플레이트로 막을 수 있는 범위를 빗겨간 뒤, 그대로 깔끔하게 목표물을 적중시켰다. 그리하여 그 결과, 눈 앞이 깜깜하고 얼굴은 뜨겁고, 새로운 힘을 받은 무언가가 어깨를 툭 치는 감각이 느껴지더니, 손에 안착했다. 완벽한 패배였다.
-"수혁, 뭐하고 있나."
-"식사 한번 하기 힘드네요."
-"빵은 왜 덮어쓰고 있는거지? 큭.."
글쎄요. 아마 제가 멍청한 짓을 해서겠죠. 웃음소리는 무시해버리고. 갓 구워진 따끈따끈한 빵을 잘근잘근 씹어나갔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다시는 'Toast'를 누르지 않으리라.. 시야에 컵의 형체가 보이기 시작해, 플레이트를 내려놓고 왼손으로 컵을 집어 탄산의 짜릿함을 느끼면서 나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토스트 항목은, 위대하신 우리 신 우혁 박사님의 거대한 함정이었다. 덕분에 옛날 추억도 나고 뭐.. 기분은 나쁘지 않았지만. 갓 구워진 따끈따끈한 빵은 무기로도 쓸 수 있다는거.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지금 저기 화면 너머로 킥킥대는 소리를 내는 저 인간에게 던져버리고 싶을 만큼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