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전투, 첫 승리 (4)
여전히 오늘도 주변이 황폐하다. 하지만 이 황폐한 곳에서 그나마 버텨낼 수 있는 건 내가 처음으로 '적'을 해치웠다는 것이고. 그 증거로 UDF 소속의 회색 조종기였던 '도미네 확장형'의 잔해가 눈에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이기도록 도와주었던 그 형이 오기 전까지 정신을 차려두기로 했다. 그 날로부터 어느새 한 달이나 지나버린건가..
"흐아암.."
가볍게 기지개를 폈다. 어느새 흙먼지가 쌓인 이불도 가볍게 털고 나서 대충 걸어두고 엑사베리온 쪽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어느새 그 곳에는 푸른색의 단발 머리를 한 사내.. 시훈이 형이 서 있었다. 그 옆에는, 가동중이지 않아 주변 공기의 색깔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족보행형 조종기, '칼로베리프'가 놓여있었다. 기다려줬다는 거겠지.
"일어났나. 수혁."
"시훈이 형. 역시나 여기에 있었군요."
"요즘 들어 일찍 일어나게 된 모양이군."
"덕분에 말이죠."
"조금은 생각이라는 걸 좀 하게 되었나?"
"하하.. 농담은 적당히 해주시죠."
"그럼. 슬슬 준비해라."
저 말은. 아침 운동 겸, '훈련을 가장한 실전'의 시간이 시작하는 걸 의미하는 것이다. 오늘도 가볍게 한번 움직여볼까.
-"후우.."
-"오늘은 여기까지. 드디어 지형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나."
-"날아서 움직이는 상대를 향해서 지형을 이용해봤자 말이죠."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건 가능하다."
여전히 한마디도 져 줄 생각을 않으시는구만. 스크린에 나타난 'Auto Recovery'라는 메세지가, '훈련을 가장한 실전' 시간이 끝났음을 알려주었다. 식사용 테이블을 꺼내, 그 안에 위치한 작은 컨트롤 패널을 조작해 빵과 에이드를 만들어두도록 해 두었다. 빵이 완성되고 나자, 고생한 시훈이 형에게 빵과 에이드를 갖다준 뒤, 나 역시 엑사베리온으로 돌아와 에이드를 하나 뽑아놓고 빵만 우걱우걱 먹기 시작했다. 반쯤 먹고 에이드가 나와 가볍게 들이키고 있던 중. 시훈이 형이 식사를 다 마쳤는지 먼저 말을 걸었다.
-"오늘도 아무도 안 올 모양이다. 수혁."
-"그런가요. 소속불명의 조종기가 나타난 것 빼고는.. 확실히 그것들은 오지 않네요."
-"슬슬 이 지역에서 벗어나도 될 것 같다고 생각한다."
드디어. 이 답답한 피탄지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건가? 그동안의 고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다만,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4일 전의 그 조종기들은 뭡니까? UDF 소속은 아닌 듯 했는데.. 6일 전에 온 녀석들과 같은 부류인 것 같았는데요. 3기가 브레이커에 1기가 블래스터 타입이었으니."
-"UDF 소속은 확실히 아니다. 내가 추가로 보내준 정보도 읽었나 보군."
-"현재 그 조종기들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못 구한겁니까?"
UDF, United Dominance Force. 지배 연합의 군사조직. 한 달 전에 시훈이 형으로부터 이 소속의 기체에 대한 정보를 받아. 1기를 완벽하게 제압했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갑자기 4일 전에 'The top'으로 제압했던 부류와 같은 녀석들이 나타났다. 그것도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그것들이 온다는 정보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어찌 보면 운이 좋았지."
-"아, 그날 받은 버거 맛있었습니다."
-"그래. 골고루 먹어야 키가 큰다."
-"하.. 알았다니까요."
그들은 이번에 브레이커 3기를 투하, 블래스터 타입으로 추정되는 1기를 들고와. 시훈이 형이 전에 없던 고전을 벌이는 걸 목격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스스로가 너무나 원망스러운 순간이었다. 브레이커 타입의 3기가 시간차로 시훈이 형의 발목을 묶는 행동을 벌였고. 간신히 브레이커를 행동정지시킨 후 눈엣가시인 블래스터 타입을 빠르게 처리하고. 그제서야 여유가 생겼는지 머지않아 하나 둘 터져나갔었다. '소속 불명'의 기체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뭔가 큰 문제가 일어난 것이 틀림없다.
그런가 하면, UDF(United Dominance Force), UMS(Uni-Military Special), STP(Stride-Trooper Prime) .. 등. 기존에 날 찾아오던 그런 소속들의 조종기는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게 되었다. 그러니까. 4일 전에 급습한 녀석들이 마지막이라는 소리다. 이걸 내 나름대로 이렇게 결론지어봤다. 오라드를 발사한 녀석들은 더 이상 이 지역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으며, 한 달 전에 공격해온 게 마지막이었다는 것이고, 그러니까 더 이상 이렇게 숨어 있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여차하면 칼로베리프나 엑사베리온이나 불가시화 기능이 존재하니까 문제는 없다는 거군요"
-"불가시화 기능은 피격 시에는 해제된다."
-"그런것 쯤은 알고 있습니다"
시훈이 형이 화면 너머로 크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슬슬 이 곳을 벗어나도 되겠다는 확신이 든다."
-"드디어 여기를 벗어날 수 있는 겁니까."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이 적막한 환경과 먼지투성이 공기를 마시지 않아도 된다는 거니까.
-"통신은 유지. 불가시화 기능을 켜둔 상태로 피탄지역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을 우선시 한다."
-"알았습니다."
-"수복 완료까진 얼마나 걸리나?"
진행도는 표기되지 않지만, 하도 많이 대파되어봐서 이제는 어림짐작은 가능한 수준까지 되었다. 보자, 15분 전에 빵을 갖다줬으니까.. 90-30+15.. 정도인가.
-"45분 뒤에는 출발 가능할 것 같은데요."
-"그럼 50분 뒤에 출발하도록 하지."
기본적으로 불가시화.. 투명화.. 나는 투명화라고 부르는 쪽이 편하지만 굳이 시훈이 형은 불가시화라고 말한다. 여튼 이 기능은 자동 수복이 끝나면 특별한 조작 없이도 알아서 작동하는 기능이라, 전투할 때는 수동으로 해제해야 하지만.. 저기서부터 거꾸로 생각해보면 내가 적에게 위치를 발각 당하는 순간은 오로지 자동 수복에 들어갔을 때만이고, 다시 말해 그러니까 적의 습격이 일어나게 되는 원인을 사실상 직접적으로 제공한 건 매번 자동 수복으로 몰아넣는 시훈이 형 때문이라는거지. 알고는 있었지만. 생각하니 내심 짜증난다.
-"뭔가 불만이라도 있나?"
-"아, 아닙니다."
딱히 불만인 건 아니다. 내가 자동 수복 상태에 놓여있는 상황에서 정신을 잃어 그대로 갇혀있을 때도 시훈이 형이 적을 대파시켜주었기에.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그 점은 고마워하고 있다. 매일같이 훈련시켜준 덕분에 강해지기도 했고. 그래. 저렇게나 강력한 아군이 내 곁에 있다. 마음이 든든해졌다. 다시 말해 절대 적으로는 돌리고 싶지 않은 상대이기도 하다. 하는 짓거리를 보면 솔직히 적인가 싶기도 했지만.. 뭐, 어디까지나 '훈련을 가장한 실전' 이라고 했던가. 하하. 오늘도 새로운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칼로베리프의 단궁에서 나오는 푸른 화살은 충전식이 확실하다는 게. 오늘 총 7발이나 날아왔으니까. 이젠 확신할 수 있다. 한번에 3발밖에 쏘지 못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쏠 수 있는 것.
자동 수복이 완료된 것을 확인했다. 탄산이 조금 빠져버린 에이드를 깔끔하게 원샷하고. 수거함에 집어넣었다.
-"이동 가능합니다."
-"그럼. 혹시라도 녀석들이 오기 전에 이 곳에서 벗어나도록 하지."
이동을 시작한 지 한 30분쯤 지났지만 여전히 주변 환경은 황폐했다. ORAD.. 대체 얼마나 광범위한 지역을 파괴시키는 병기인거냐.. 이런걸 맞고 살아남은 나도 신기하다. 나 살아있는게 맞긴 한걸까. 아니. 확실히 살아있다. 한 달 전에는 지배 연합의 개에게 복수까지 했다. 그 감각은 지금도 손에 남아있다.
-"조금 아플 수도 있다. 이해해라."
-"예?"
갑자기 뭐라는거냐. 갑자기 레이더에 무언가가 접근해왔다. 이상하다.
-"뭡니까. 갑자기!"
-"미안하게 됐군. 수혁"
갑자기 '미안하다'니 뭐니.. 무슨 의미인가. 그리고 시야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푸른 빛을 뿜는 기체. 그리고 본 적도 없은 검은 빛의 칼날.. 이어 스크린에 피격 알람이 올라왔다. 저 검은 칼날은 대체.. 대체 뭐란 말인가?
[Leg 4 : Damaged, 52%]
[Leg 2 : Damaged, 30%]
[Leg 1 : Damaged, 41%]
이동하다가 말고 자세가 불안정해진 내 엑사베리온이, 뒤로 기우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보이는 시야가 뿌연 하늘로 옮겨졌다. 하.. 이 감각은. 설마. 뒤집히는건가?
[Controller, Damaged : 50%]
처음 보는 메세지다. 그와 동시에 강력한 통증이 느껴졌다. 젠장. 이거 뭐야! 저 검은 칼날이 반짝이는 순간 순간마다 한줄씩 메세지가 새로이 올라왔다. 뭐야.. 뭐야 이거. 하.. 하하.. 믿고 있었는데. '인정받았다' 고 멋대로 기뻐한건가. 난? 처음부터 날 이렇게 끌고 가려는게 목적이었던건가? 피격 지점을 벗어나서야 전투 불능으로 만들었다고?.. 하.. 하하하. 어리석다.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짜증난다.
[Auto Recovery - Activated]
저렇게나 얻어터지는데 이게 안터질리도 없고.
'Leg 1 - No Control'이라는 메세지가 올라왔다. 첫번째 다리의 이동이 멈추고, 조종이 불가능해졌다. 동시에 조종석에서 느껴지는 진동. 이 감각.. '그때'와 같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맞기만 하고 있던 그 때와.. 젠장!
-"뭐하는 짓입니까! 설명이라도 좀 해주시죠?"
-"미안하다"
뭐가 미안하다, 냐! 미안하면 당장 그만 두라고.. 대체 왜 움직이다 말고 이런 짓을 하는건데!
[Disconnected]
그리고는 일방적으로 통신이 끊겨버렸다. 곧, 'any Control'이라는.. 어떠한 조종도 불가능한 상태에 돌입하고 난 뒤, 시야에서 푸른 조종기가 멀어져갔다. 예상치 못한 충격에 머리가 흔들거린다. 충격의 여파로 다리도 떨려오고, 여기서 탈출해야겠다는 생각이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던 그때, 하늘에서 뭔가가 가까이 내려왔다. 스크린에 표기된 숫자.. 평소에는 0에서 200까지만 오르고 있어서 신경쓰지 않았는데, 갑자기 빠른 속도로 올라갔다. 200. 500. 700.. 동시에 무언가가 몸을 짓누르는 감각이 느껴진다.
"뭐야 이거!"
가까이 내려온 무언가로부터 철 막대기같은게 튀어나오더니, 그대로 자동 수복중인 내 엑사베리온에 부딪혔다.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나도 모르게 '억'소리가 났다.. 영 기분이 안좋다. 그리고는 아래를 향해 무언가가 들려온다. 누군가에게 하는 말인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건 내가 아는 목소리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포획 완료! 수고하셨습니다!"
그런 말이 들려오더니 시야에 푸른 빛을 뿜는 무언가가 슥 하고 지나갔다. 아아. 저 검은 칼날.. 칼로베리프다. 그래. 그렇다. 저 칼날에 의해 난 지금 이 지경이 되어버렸다.
"일단 이 지역을 빠르게 벗어난다."
저 목소리는 아는 목소리다. 나를 향해 하는 말은 아닌 것 같고.. 저 비행형 조종기에 대고 말하는 것 같은데..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거냐!! 뒤를 얻어맞았다는 정신적인 충격과, 나를 짓누르는 압박.. 답답함을 이겨내기 위해서라도 그저 소리라도 질러보는 수 밖에 없었다. 증폭기를 켜고 외쳤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 젠장! 뭐야 이게 대체!"
어느새 1600이라는 숫자에서 크게 변동이 없는 화면의 숫자는 가만히 1590과 1610 사이에서 흔들거리고만 있었다. 몸의 압박은 자연스럽게 풀어졌다.. 하지만 'Auto Recovery', 'any Control'이라는 두 메세지를 보아,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저 조용히 누군가에 의해 운반되는 짐 덩어리일 뿐..
바깥으로 보이는 풍경이 먼지투성이 잿빛에서 그나마 하늘이라고 부를만한 색깔을 띠게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 모습을 즐길 수 있을 만한 상태가 아닌 나는 그저 멍하니 앉아만 있어야 했다. 그나마 중력의 압박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졌지만, 여전히 자동 수복 상태임을 나타내는 알림 메세지가 오늘따라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다.
"젠장.. 다. 속인거냐! 속인거냐고!!!"
악을 쓰고 분노를 표출했지만, 그들은 꿈쩍도 않고 조용히 제 갈길을 가고 있다. 애초부터 날 포획해서 끌고가는 게 목적이었다면, 당연하다면 당연한 태도겠지.. 소리를 질러대고 나자 악으로 버티고 있던 상태마저 풀렸는지, 급격하게 피로감이 몰려왔다.
"하. 하하. 빌어먹을.. 대체 이게 무슨.."
듣는 이 아무도 없을 조종석에 가만히 앉아, 하늘 위로 붕 떠서 끌려가는 꼴이 참으로 우습기만 하다.. 처음부터 나 혼자만 '인정받았다'니 뭐니 들떠있던 나날들이 너무나 화가 난다. 젠장. 이 몇달동안 '속여왔다' 인가. 그런데 '미안하다'는 말은 뭐냐고. 그리고 아무것도 못하게 만들어놓은 상황에서 끌고 가는건가..
현기증이 밀려왔다. 검은 칼날이 엑사베리온에 닿던 순간 순간이, 마치 내 팔이 베이고 다리가 끊어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만큼 정신적으로 크게 충격받았다는걸까. 그래. 믿고 있었는데. '동경'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 끝은, 그렇게나 동경하던 사람한테서 배신당하는 결과인가. 우습다. 정말로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스피커 아이콘을 비활성화시켰다. 그냥. 가만히 웃고 있을 수 밖에 없어서. 이 허탈한 웃음소리를 저들이 듣길 원치 않아서.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가만히 눈을 감고 웃었다. 웃기만 했다. 하.. 하하.
"비참하다. 정말이지 너무하잖아. 이거. 하.. 하하하.. 으하하하하!! 어리석었다. 어리석었다고. 젠장!"
애초에 날 파괴하기 위한 목적으로 왔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포획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조금은 된다.. 그래. 내가 완벽히 당하는 시나리오가 말이야. 우습다. 정말이지. 지금 내 꼴이 너무나 우스운데. 화가 나고 짜증도 나는데. 어째서인지 눈물 한방울 나오지 않는다. 내가, 우는 법을 잊어버린건가. 아니. 언젠가부터 눈물을 흘린 기억이 없다.. 언제부터였을까. 모르겠다. 오라드 폭격 이후? 아니, 그 전부터였을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지금은 그저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 뿐이었다.
눈을 감았다. 이렇게 죽는건가 싶으니, 예전의 기억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그래. 차라리 잠이나 잘까.. 몸 곳곳이 찢어질 듯이 아프지만. 어쩔 수 없다.. 그냥. 잠이나 자자. 잠이나 자면서 이 기억들을 가만히 떠올려보자. 사람이 괴로우면 현실도피를 한다고 어디선가 들었던 적이 있다. 그만큼 난 괴로워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 이왕 하는 현실도피라면. 꿈이라도 꾸자.
그 전까지 즐거웠던 기억들. 하루 하루 소중했던 기억들을 가만히 떠올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