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보 퀘시에[Labo Quesie] (1)
그 다음 날부터, 지옥의 시뮬레이션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일찍 자라고 했는지.. 잘 알 수 있는.. 이 시간들은 기억하고 싶지 않았기에 떠올리는 것 조차 두렵다..
"수혁아! 뭐하냐! 시속 50키로에도 흔들릴 정도면 넌 절대 이걸 다룰 수 없다!"
"아.. 수혁아? 거기 그렇게 흔들리면 안되거든? 너 체육밖에 할줄 아는게 없는 애 아니었니?
할아버지는 반 협박조.. 심지어 윤이 누나마저 나를 말로 공격한다.. 무.. 무서워..
"미... 미안해! 말이 너무 심했나?"
이건 사실상 노동력 착취야. 젠장! 시뮬레이션 룸이라는 데에 가둬놓고 밖에서 막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는데 16살 중학생이 할만한 것들이 아니잖아 보통 이런거!
"수혁아! 즐겁지? 이제 너 마음껏 운동할 수 있다!"
할아버지의 저 말이 왜 비꼬는 것처럼 들릴까.. 팔을 위로 움직이라느니, 발을 최대한 높이 들어보라느니 별의별 지시를 다 내리고.. 심지어 제자리에서 돌아보기까지. 어지러워 쓰러질때까지 돌아보기도 했다.. 왜 이런 걸 시키는걸까 의문이 생겼지만.. 무서워서 그냥 잠자코 했다.
시뮬레이션이 끝나고 나오자, 할아버지가 말을 걸었다.
-"여기서 몸에 익힌거 다 써먹을 수 있는거다 수혁아"
-"정말 이게 다 필요한 일인가요.. 살아가는 데에?"
-"그럼! 이녀석아. 이 할아버지 못 믿냐?"
암.. 암요 할아버지. 맨날 손자 놀려먹기 급급하신 분의 말을..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할아버지는 그 말을 외치고 팔을 툭 치면서 엑사베리온을 가리켰다.
-"그리고, 너 이거 하나만 있으면 어디 가더라도 굶어 죽지는 않을거다!"
어지럽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다. 충격에 대한 시뮬레이션.. 이라는 소리는 윤이 누나한테 들었었는데. 너무 심하잖아. 엑사베리온을 슬쩍 바라봤다. 겉보기에는 그다지.. 탑 같은 느낌이지만. 팔아도 엄청나게 돈이 될거같고.. 내 선물인데 팔 생각을 먼저 하고 있는거냐 난.
-"네.. 여기서 했던 것들만.. 반복해도.. 몸이 더럽게.. 강해질 것 같네요 할아버지.."
-"수혁아!"
윤이 누나가 내 이름을 연이어 부르는 걸 끝으로 나는 정신을 잃었다.
으으.. 못 버티겠어.. 피곤해.. 좀 자고싶어..
"..혁. 신 수혁. 응답해라."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에 익은 목소리다. 일단 그 악몽같은 시뮬레이션을 회상하는 부분에서 깨워줬으니 다행이라고 해야겠지.. 그런데, 들어본 적 없는 앳된 목소리가 따로 들려왔다.
"그런 거였군요. 유저의 생명을 우선시 하도록 프로그래밍이 되어있는 건.. 이런 꼬맹이가 타고 있었기 때문이라니."
꼬맹이? 울컥해서 눈을 확 뜨고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봤다. 여기가 어딘지보다도 먼저 그 자식을 찾아서 한방 먹이지 않으면.. 그런데 팔이 움직이질 않는다.
항상 내 몸을 보호하는 용도인 슈츠가. 이럴 때 하필 내 발목을 잡는다. 잠깐. 여기는 분명 밖인데.. 왜 자동으로 분해가 되지 않았지?
"아아, 무리하게 움직이려고 하면 안됩니다. 꼬맹이."
"누가 꼬맹이야. 이 자식아!"
눈을 떠 보니 익숙한 푸른 머리칼의 남자와 본 기억이 없는 작은 꼬맹이가.. 아니. 이게 키도 작은게. 지가 더 꼬맹이잖아. 군데군데 머리카락이 녹색으로 칠해져있다는 느낌이 드는 사람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16살. 신 수혁. 이정도면 꼬맹이가 아닙니까?"
카드를 짤랑거리면서 일단 그렇게 반박해오는 걸 보고 할 말은 없었지만.. 어디선가 많이 본 광경인데. 그건 그렇고 말이지. 군데군데 녹색으로 칠해진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 열살 남짓 되어보이는 작은 몸. 누가 봐도 저쪽이 꼬맹이잖아?
"아니 그쪽이야말로 나보다 얼핏 보기에도 키가 작고 어려보이는데 꼬맹이 꼬맹이 거리고..."
'수혁. 살고싶다면 말을 아끼거나 입을 닫아라.'
익숙한.. 꼭 한방 먹여주고 싶은 목소리의 주인이 내 귀에 대고 뭐라뭐라 말을 했다.. 당신때문에 정신을 잃고 주마등까지 보고 왔는데.. 게다가 이런 이상한 데까지 끌려와서는..
하지만, 1분도 지나지 않아 그 경고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갑자기 그 꼬맹이가 얼굴을 확 들이대는 것이 아닌가?
"일체형이라면 굳이 이런 건방진 꼬맹이를 쓸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저 큰놈을 대충 분해해서 재조립하면 기존 프로세스와는 별개로 운용하는 게 가능해질텐데 말입니다. 이봐요. 듣고 있습니까 시훈?"
"우리에게 그럴 시간이 없다는 건, 당신이 가장 잘 알고있을텐데 말이지. 레지에"
가까이서 보니 앞머리는 핑크색이다. ..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많은 핑크색인걸 보니, 원래 머리색깔은 핑크색이었던 모양이다. 어쩌다가 저렇게 된걸까. 눈동자는 푸르게 빛나고 있다. 목소리만 들었을 땐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여자아이가 확실하다. 좀 더 크면 정말 엄청난 미인이 될 거 같은데..
그런데.. 시훈이 형에 버금가거나 그 이상으로 성격이 더러운 꼬맹이다. 정말이지..
"덤으로, 저는 올해 12년째 청춘을 맞고 있는 숙녀입니다. 말을 조심하세요. 꼬맹이."
'이해해라. 이해하지 않으면 넌 여기서 버틸 수 없다.'
머릿속으로 여러개의 의문을 떠올리던 난, 곧 생각을 멈추고 작게 말했다.
"12살이라는 거 아닙니까?"
아주 짧고, 작은 소리로.. 빠르게 한 문장이 귀에 쏙 들어왔다.
'20에 12를 더해봐라.'
20 더하기 12.. 32... 으엑. 말도 안돼. 어떻게 서른 둘의 나이에 저런....
"시훈. 쓸데없는 말은 삼가세요. 안그러면 다음 출격에 지장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다음 날 눈을 뜨고 일어났더니.."
나이를 헛으로 먹은 건 아닌 모양이다. 손에 이상한 도구같은걸 빙빙 돌리면서 저렇게 말하는거 보면 누구라도 기겁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계속 뭐라뭐라 말하고 있는데 점점 작아져서 잘 들리지 않는다.. 무.. 무서워. 우리 할아버지와는 다른 느낌으로 무서워..
".. 그보다도 먼저, 사과하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시훈이 녀석은 가만히 서 있다가, 갑자기 나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아주 무미건조하게.
"아. 그렇지. 미안하다."
"진심이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있는 힘껏 생각하고 있는걸 그대로 내뱉어버렸다. 이 인간아. 사람을 정신을 잃을 정도로 충격을 줘놓고 무미건조하게 미안하다가 뭐냐!
내가 지금 포로의 입장에 놓여있을 가능성같은건 전혀 생각도 안한 채, 할 말 안할 말 가리지 않고 그냥 마구 내뱉어버렸다.
"화를 낼 수 있을 만큼 다 내도록 하세요. 오늘부터 이곳에서 살아야 할 테니까 말이죠."
저 아줌마. 무슨 소리 하는거야.. 이곳에서 살아야 한다니.. 그것보다도, 잠깐.. 서른 둘이라고 했지.
"저기. 혹시 결혼은.."
"안 했 습 니 다!"
"사귀는.."
"아직 없 습 니 다! 저 고철덩어리랑 같이 당신도 분해해드릴까요!?"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 푸른 빛의 눈동자가 붉게 타오르는 것 처럼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게다가 가까이서 보니까 진짜 영락없는 꼬맹이인데.. 32... 게다가 말 한마디 한마디에 엄청난 박력이 느껴진다.. 이.. 이런. 무려 16년의 차이..
".. 내가 대신 사과하지. 미안하다."
이번엔 정말로 진심이 느껴지는 사과였다.
히스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던 찰나, 갑자기 톤이 바뀌면서 제대로 된 말이 들려왔다.
"아아. 그러고보니 앞으로 같이 살아야 할 꼬맹이한테 실수를 했군요."
말 끝마다 꼬맹이, 꼬맹이 하는게 거슬려서, 아줌마라고 대응을 하려다가 '아닙니다!' 라는 그 박력 넘치는 사운드를 또 듣게 될 것만 같아서.. 참았다.
"그나저나, 같이 살아야 된다는게 무슨.."
"라보 퀘시에에 온 걸 환영합니다. 꼬맹이. 아, 잡혀온거였나요?"
그 뒤로 호호호 하고 웃는 소리가 정말 귀에 거슬릴정도로 짜증나서.. 목소리가 이상한 건 아니었지만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해야 할까. 여튼 정말이지 저렇게 어려보이지만 않았어도 머리를 한대 쥐어박을텐데 말이다.
아니지. 한대 쥐어박기라도 했다간 정말로 저 본적 없는 도구들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질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하니 몸이 공포로 떨려온다.
이곳은 '라보 퀘시에'라고 해서, 현재 22살의 '칼로베리프'의 유저 진 시훈과 32살의 '레지에 카첸나'를 중심으로 운영하고 있는 연구소라는 모양이다.
총 8층으로 이루어진 이 건물에서 지금 내가 잡혀있는 곳은 3층이라고 한다. 덤으로 3층에는 시뮬레이션 룸... 도 함께 존재한다고.
"시..뮬레이션.. 룸.."
"꼬맹이? 시뮬레이션이라는 이름이 생소한가?"
그럴리가 없지. 보름 넘게 지옥을 겪었었는데. 그 이름을 까먹을리가.. 여기에도 있는건가. 시뮬레이션 룸이라는 거.. 끔찍한 지옥의 나날들이 스쳐지나가는 것만 같다.
'신수혁! 이러니까 픽픽 쓰러지고 그러는거지!'
'수혁아, 수고 많았어.'
난 그 때 윤이 누나의 이중적인 성격을.. 똑똑히 보았었다..
"뭐, 일단 구조는 이정도만 알려주기로 하고. 나머지는 시간이 나면 알아서 탐험을 하든 뭘 하든 해보란 말이지. 꼬맹이."
회상하느라 설명을 제대로 못 들은 것 같지만.. 아. 뭐 어차피 탐험하라고 했으니 상관 없나.. 그나저나 저 아줌마가 말 끝마다 진짜.. 가만히 보니 핑크빛 앞머리를 손으로 계속 넘기는 모습이, 알고 보니 너무 길어서 눈을 가리는 탓에 어지간히도 답답했었나보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귀엽.. 아니. 아무리 봐도 겉보기엔 그냥 애인데.
"꼬맹아. 탐험하는건 자유다. 아무도 말리지 않지. 시간이 남는다면 말이야."
그 뒤로 또 신나게 웃는데.. 자꾸 웃으면서 뭐라고 말을 하긴 하는데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저 웃는게 이번엔 짜증나기보다는..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여기 어디야. 무서워. 젠장.
죽을 고비 넘겼더니 1년도 안지나서 또 죽을 고비가 찾아온거냐. 기구한 내 인생.
"..그렇다고 길 잃고 이 '레지에 누나'를 찾거나 그러지는 마려무나."
시훈이 형이 뭔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면.. 지금 여기서 내 유일한 편은 시훈이 형일지도 모르겠다. 시훈이 형의 말을 들은 '레지에' 아줌마는 신경질을 내면서 받아치는 게 아닌가. 이야.. 저걸 다 받고 산건가. 왠지 존경스럽다.
"닥터 레지에. 그만하고 일이나 하지."
"시끄럽군 시훈. 모처럼 사람이 즐거운데 말이야. 취미생활도 가끔은 즐겨야 삶이 쾌적해지는거야."
이봐요 아줌마. 지금 날 괴롭히고 있는 이걸 갖고 취미라고 우기는 겁니까?
"자기 반밖에 안 산 녀석을 놀려먹는게 취미생활인가?"
어.. 역시 다 받고 사는 건 아니었나 보다.. 이봐요 당신, 거기 진 시훈씨! 스위치 잘못 건드린 것 같은데요! 그 말에 이어, 다시 푸른 눈동자가 붉게 타오르는 듯한... 분명 파란색으로 빛나고 있는 눈인데.. 아, 분홍색 앞머리가 흔들거리는 게 비치기때문에 불타오르는 것 처럼 보인거였나!
머리가 흔들리고 있나? 바람 한 점 안부는 이 공간에? 화가 나서 머리가 흔들리나 보통?
"시훈! 그 건방진 말투.. 오늘은 봐주지 않을겁니다!"
"바라던 바다. 레지에. 나이가 많다고 다가 아니라는걸 똑똑히 보여주지."
"저기.. 이봐요? 저기 두 분? 어디 가시는건가요?"
내 의견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결국 누운 채 그대로 꼼짝도 못하는 날 내버려두고, 둘은 자동문인지 뭔지 드르륵 열고는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그저 실루엣만 보이는데.. 그 방향은.. 아까 말한 '시뮬레이션 룸' 방향이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뭔가 싸울 분위기인데.. 말려야 하는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서 몸을 움직이려고 보니 아, 전혀 움직여지지 않는다. 팔 뿐만이 아니라 몸 전체가. 슈츠가 이상하게 부풀어있어서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다.
저기요. 이봐요. 두 분 어르신? 이거나 좀 어떻게.. 저 움직일 수가 없는데요?
"저기요! 이거 좀 어떻게 해주고 가라구요!"
공허한 방 한 구석에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내 분노에 가득찬 외침이 메아리처럼 울려퍼질 뿐이었다.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 것 같아. 그건 확실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