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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변조종기 엑사베리온


투고 | alphase

라보 퀘시에[Labo Quesie] (4)


 "오늘부터 여기서 지내면 될 거에요."

 식사를 마치고, 라이아나 씨가 '207'이라고 적힌 방의 문을 열어주었는데, 누가 쓰던 곳이었는지, 생각보다 꽤나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있었다. 방에 들어가, 대충 주머니에 있는 거만 풀어헤치고 주위를 슥 둘러봤다.
 전체적으로 밝은 파랑색으로 칠해진 벽면.. 을 바라보다 익숙한 침대 매트가 보이기에 자연스레 그쪽을 향해 갔다. 보자마자 피로감이 몰려와 그대로 쓰러지다시피 엎드려버렸다.

 누워서 가만히 생각해봤다.

 오늘 하루 너무나도 많은 일이 있었다. 개중에는 그 자리에서 따지지 못한 일들도 있었고.. 특히, 시훈이 형에 대한 느낌은 너무나 애매하다. 폭심지를 떠나는 도중에, 갑자기 공격을 하고는 통신을 끊고.. 그 뒤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이상한 무언가에서 막대기 같은 게 내려오고, 내 엑사베리온에 붙는다 싶더니.. 그대로 끌려가다시피 붕 떠서 거의 빈사상태가 되어...
 고작 몇 달 전에 일어난 일들을 떠올렸었다.. 학교에서의 일들. 친구 녀석들과의 기억. 소연이.. 윤이 누나.. 그리고, 메카 드라이브에 대해서도 말이지. 그 당시는 정말 좋은 기억밖에 없었는데.. 점점 사람들이 줄어든다 싶더라니, 이상한 조종기들이 나타나고..

 일단 이 부분에 대해서는 떠올리지 말자.

 소연이랑 윤이 누나를 다른 곳으로 가도록 한 건.. 옳은 판단이었다. 
 학교도 무너진 마당에, 언제까지나 우리 집에 머물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설마, 머지 않아 오라드가 떨어질 줄은 솔직히 생각도 못했었지만 말이다.

 떠올리기 싫은 걸 굳이 떠올릴 필요는 없다. 사람이 어떤 고난을 딛고도 살아나갈 수 있는 건.. 무언가를 잊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할아버지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정작 그렇게 말해주신 분이 지금은 어디 갔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정말 어디로 가신 건가요 할아버지.. 하."

 그래. 다시 한번 눈을 뜨고 나서부터 생각해보자. 눈을 뜨고 나서는 의외로 재밌는 일들이 가득했다. 레지에 아주... 핑크색이 기본인지 군데군데 물들어있는 녹색이 기본인지 모를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단발 머리의 '레지에 카첸나' 씨는 생긴건 완전히 어린애인데 나이가 서른 둘.
 삐죽삐죽 솟은 푸른색 머리에 키가 큰 '진 시훈' 형은 나이가 스물 둘. 이 곳은 분명 자기 집 같은 곳일텐데, 풀어지거나 하진 않았고.. 다만 식사시간때는 즐거워 보였지. 시훈이 형과 비슷한 키인 것 같은 라이아나 씨는.. 아까는 전혀 신경조차 안 썼지만, 그 정도로 자연스러운 연한 갈색의 흔들거리는 머리카락을 갖고..

 솔직히 처음엔 그 둘이 돌아왔나 했지만 아니었지.. 당황해서 제대로 파악도 못하고.. 말은 들리는데 완전 멍해져서 말이야.. 그러고 보니, 이런 말도 했던가.

 '어라. 네가 우리가 싣고 온 조종기에 타고 있던 애구나?..'

 ... 어?
 싣고 온?. 아까는 전혀 신경조차 안 썼지만 이 여자 엄청 중요한걸 말했었잖아. 다시 말해, 라이아나 누나가 아까 날 끌고간 그 무언가를 조종하고 있던 유저였다는 거고.. 난 어떻게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거지? 대체 왜 슈츠는 부자연스럽게 부풀어 있었던 거고, 밖에 나와도 자동으로 분해가 되지 않았던 걸까?
 의문점이 너무나 많다.. 일단 생각만 해 둘까..

 짧은 멜로디와 함께 문이 스르륵 열렸다. 

 "피곤했나 보네. 잠옷은 여기 둘테니까 갈아입고 자."

 갈색의 긴 머리를 찰랑거리며 이제는 눈에 익숙해진 여성이 등장했다. 라이아나 누나다. 침대 매트 옆에 서랍장 같은게 놓여있었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가벼운 옷가지가 놓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이왕 의문이 생긴거 곧장 물어보기로 할까.

 "라이아나 누나가 아까 그.. 엑사베리온 째로 걸 끌고 간거 맞죠?"
 "응? 아.. 그래, 아까는 왜 안묻나 했었는데 말이야. 자세한건 내일 알려줄테니까, 일단 푹 자두는게 좋아."
 "아.. 네. 알았어요."

 "무슨 일 있으면 머리맡에 있는 음.. 동글동글하게 생긴 거 있지? 거기에 206이라고 누르고 위에 가장 큰 버튼을 꾹 눌러. 아, 아침에 일어나면 반드시 해야할거야.. 안그러면 좀 귀찮아질 거거든?"
 "귀찮은 일이요?"
 "음, 아니야. 그냥 일어나서 문 옆에 버튼 하나 있을거야. 그거 누르고 나와도 돼. 부엌이 어딘지는 기억하지?"
 "네."

 라이아나 누나는 돌아서면서 "그래, 그럼 그쪽으로 가 있어" 라고 전하고는 방을 나갔다. 그나저나.. 잠옷이 꽤나 부드러운게 감촉이 좋네.
 피곤했지만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서 방에 빨래 수거통이 없나 좀 찾아봤지만 딱히 그런 건 없었다. 대충 방문 앞에 던져두곤 그대로 매트로 가서 드러누웠다. 일어나면 빨래는 어디에 둬야하나 좀 물어봐야겠다.
 일어나서 할게 많네..




 아.. 젠장. 생각하기 싫었는데 꿈으로 나오는 건가..

 "이 놈들이 메인에서 떠드는.. 요즘 들어 고 랭커들이 자꾸 하나씩 사라진다고 하는 사건의 범인인가."
 "무슨 소리냐 아준아."

 아준이가 내 어깨를 툭 치면서 스키넥의 화면을 보여주었다. 공식 페이지의 메인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는 '사건-사고' 소식이다.

 "단순히 루머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최근 엑사베리온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최근 말이야, 랭커들의 접속량이 뜸해졌다고 생각은 했거든. 접속시간 통계글 같은거 올라와도 그다지 신경은 안 썼고.. 너나 나나 일단 랭커잖아. 그런데 넌 학교에 잘만 나오길래 루머겠거니 싶었는데.. 일단 읽어봐라."
 "제 3 통신지구 거주자로부터 불만 속출, 신호가 제대로 잡히지 않는 이 현상에 대해 지구회의 결과 불만을 가진 모든 시민이 속히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게 대책을 세우고 있으며.. 뭐냐 이게 아준아."

 그러고 보면, 자기 전에 가끔씩 메카 드라이브를 하려고 할 때 마다 접속불량 현상이 일어났던 게 떠올랐다. 접속을 시도하면 서버와 통신이 되지 않는다는 메세지가 나타나길래, 별 수 없이 다른 게임이나 했었는데.

 길거리나 학교에서, 가끔씩 통신 신호 상태가 '매우 안 좋음' 으로 뜨면서 사용할 때 마다 조금씩 오류를 일으키는 현상을 볼 수 있었다. 집 안에서는 잘만 돌아가는데, 밖에만 나오면 이상하게 신호가 잘 안잡힌다던가. 학교에서도 아준이 녀석이랑 결투나 할라 치면 항상 통신이 끊기는 바람에 답답하다고 짜증을 냈었는데, 통신이 잘 안 잡히게 된 날 이후로 사람들이 조금씩 이 마을을 떠나는 게 눈에 보였었다. 

 "아니, 그거 말고. 아래에 있는 거."
 "'M'게임 랭커가 실종 직전에 보낸 한 장의 사진..?"

 애초에 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지도 몰랐지만. 일단 읽어보기로 했다.
 "나 역시 별일 아니겠거니 싶었는데, 루머로 퍼지고 있는 인상착의와 똑같은 놈들을 봤다는 사람들이 늘고 있어.. 그 뒤로 전혀 소식이 없고, 최종 접속시간도 갱신이 되질 않고 말이야."

 글의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최근 M게임의 랭커들의 접속시간이 갱신되지 않는다는 글을 본 상황에서, 상위 20위 안에 드는 랭커인 친구 녀석이 보내 온 사진이라고.. 친구는 제 3 통신지구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 날 이후로 전혀 연락이 안된다고 걱정하는 글이었다. 아준이 녀석이 설명해준 바에 따르면, 검은색의 쫙 달라붙는 느낌의 전투복 같은 걸 입고 나타난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아준이 녀석도 랭커인데. 나 역시 그렇고.

 "일단 연락을 주기적으로 하든가 하자. 혹시라도 녀석들을 보게 되면 바로 사진을 찍어 보내는걸로."


 인상착의와 똑같은 놈들이 학교에까지 나타난 것은, 그 다음날이었다.
 그 날 체육 수업이 있어 쉬는 시간에 체육복으로 갈아입던 중 갑자기 창문을 깨고 나타난 녀석들은 주머니에서 뭔가 꺼내 우리들을 향해 마구 쏘아댔다.. 반 전체가 아수라장이 되려던 찰나.. 교실 문 앞에서 검은색의 전투복을 입은 사내들이 교실 밖으로 나가려는 아이들을 차례차례 제압했다.

 눈을 뜨자, 여전히 교실 안이었고.. 나랑 아준이밖에 남지 않았다. 여전히 몸은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고 얼굴 곳곳에 흉터가 나 있는 나이가 좀 되어보이는 대장 격인 남자가 우리를 향해 다가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니 녀석들이 꽤나 실력 있는 드라이버라고 들었다. 쓸데없는 저항을 하지 않는다면.. 실력자에 걸맞는 대우는 해 주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지."

 그 말에 입을 먼저 연 것은 아준이었다.

 "질문이 있습니다." 

 "뭐지?" 하면서 조금 눈을 매섭게 치켜뜨는 그를 향해, 아준이는 담담히 자기 할 말을 했다.

 "반 친구들은.."
 "아아, 니 녀석들 이외에는 볼 일이 없으니까, 제압하고 안전한 곳에 모셔뒀다. 그 점은 걱정하지 말아도 된다."
 "뭐.. 예. 저항은 그만두겠습니다.. 다만 한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좋다. 들어주지."
 
 아준이는 그 사내가 든 패널을 가리키며 이어서 말했다.
 
 "그 리스트 말입니다. 거기에 ​돌​격​_​스​트​라​이​크​라​는​ 녀석은 빼는게 좋습니다. 녀석은 실력자라고 하기에는 전투 방식도 자기 멋대로고.. 무슨 목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전투 같은 거에 써먹을 거라면 데려가봤자 쓸모가 없으니까요."

 그 뒤에 서 있던 한명이 나를 가리키자, 아준이는 애써 침착하게 "뭐.. 그러면 말이죠. 일단 저만 데려가는 걸로 어떻게 좀 안되겠습니까?" 라고 말한다. 뭐라는 거야 임마. 넌.. 이 녀석들한테 순순히 잡혀가겠다는거냐?

 곧, 몇명이 다가와 우리 둘을 묶고 있던 줄을 풀어주었다. 아준이는 흉터가 가득한 사내랑 같이 가기로 한 모양인가?.. 뭐야. 젠장.

 "아준이 너 임마.."
 "우리도 가급적 평화적인 방법으로 일을 해결하고 싶긴 하지. 소중한 전력을 낭비하고 싶진 않으니까 말이야. '엠퍼러'. 니 녀석이 추측한 대로 일단 전투같은 거에 써먹을 생각이긴 하다."
 "그렇군요.. 마지막으로 저기 있는 친구녀석에게 인사라도 하고 가겠습니다."

 그리고 아준이 녀석이 내 손을 꽉 잡고 말했다.

 "신경쓰지 마라. 어차피 이 녀석들은 랭커들을 모으러 오는 것 뿐인 것 같고, 가기로 한 건 내가 선택한 거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임마! 대신 넌 말이다.. 이 곳에서 빨리 벗어나는 게 좋을 것 같다. 가능한 한 빨리.. 말이야."
 "좋은 친구를 뒀군. 신 수혁이라고 했나.. 다음에 오게 되면 너도 데려갈 예정이긴 하다. 그러니까, 친구의 부탁대로 빠른 시일 내에 이 곳을 빨리 벗어나는 게 좋을거다."

 흉터가 난 사내를 향해 힘껏 주먹을 날리려고 했으나, 곧 두 명이 가까이 다가와 굵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쓸데없는 저항을 하면.. 네 친구의 노력이 헛수고가 될 거다."

 그저 아준이 녀석이 가는 걸 바라보고만 있을 수 밖에 없는건가..? .. 

 "하하, 중학생이 무기같은걸 소지하고 있을 리 없잖습니까? 상식적으로."
 "가끔, 상식에 벗어난 놈들이 있기 마련이거든.. 혹시나 해서 확인하는 거다. 귀찮지만 말이지."
 
 아준이 녀석의 모토.. '피할 수 없다면 즐기는 것'.. 이런 상황을 즐기고 있는거냐.. 너란 자식은 진짜..

 "엠퍼러, 너 또한 좋은 친구를 둔 것 같군."
 "이야, 칭찬 고맙습니다. 당신도 좋은 부하들을 뒀네요.. 평범한 중학생인 전 어째서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손가락 하나, 신호 하나에 이렇게나 완벽하게 움직여주는걸 보면 말입니다."
 "그래.. 위협이 될 만한 물건은 없군. 그럼.. 슬슬 가도록 할까.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나?"
 "뭐.. 그럼. 잠깐만 시간을 주시죠."
 
 아준이 녀석이 이쪽으로 몇 발자국 걸어오더니, 그저 가만히 서 있는 나를 향해 외쳤다.

 "임마! 그냥 멀리 여행 같은거 가는 거니까.."

 곧, 검은 색의 비행형 물체가 날아왔다. 프로펠러가 도는 소음이 창문 너머로 들려온다.. 그리고 녀석이 외쳤다.

 "..또 보자! 수혁아!"

 그리고, 얼굴에 상처가 난 중년 남성이 날 향해 다가오더니 말했다. 

 "일주일 후에 다시 올 예정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네 친구의 부탁대로 이 곳을 빠르게 벗어나거나, 혹시라도 네 친구랑 함께 하고 싶다면.. 이 곳으로 와라."


 



 이보다 더 한 악몽이 있을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눈 앞에서 친구를 잃어버렸다.
 기억하지 않으려고 생각했는데 그 순간이 떠올라버렸다.

 그때의 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이용하기로 했다. 강해지기 위해서 이용하기로 했다. 알고 보니 이용당한 쪽은 나였고, 결국 여기에 잡혀왔다. 하지만.. 같이 살게 될 거라고 했다. 그러면 여기서 다시 강해질 수 있다는 거겠지.. 
 말도 없이 사라진 할아버지.. 또 보자는 인사를 하고 가버린 친구 녀석.. 둘 다 찾아낼 거다.

 그리고 '미확인 물체'.. 내 엑사베리온을 노리고 온 놈들에게도 복수할거다. 오라드를 쏘기로 협의한 국제 회의인가 뭔가 하는 놈들에게도 복수할거다.  대피 권고? 그런건 들은 적도 없었다고.. 전혀. 기억에 없어.

 대충 생각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곳에서라면 강해질 수 있다. 그러니까.. 강해질거다.
 일단은 그 두 사람처럼 움직이는 걸 목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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