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겉모습만 꼬맹이
"팀 배틀로 하세요. 난 색깔이 없는 것 보다는, 색깔이 있는 쪽이 좋으니까."
레지에 카첸나, 이 연구소의 연구소장.. 다시 말해 최고 책임자. 눈앞에 있는 여성의 정체다. 다만, 솔직히 겉모습에서는 전혀 그렇게 높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영락없는 어린 애의 모습이다. 이유가 따로 있겠다고 생각은 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저 모습을 보고 누가 서른 둘이라고 생각이나 할까.
"알았다."
하나하나 귀찮게 한다. 일단 계속 뒤에 서서 뭐라뭐라 말하고 있는 열 두살쯤 되어보이는 서른 둘의 여자가 말하는 대로 컨트롤 패널에 손을 대어 설정을 하기로 했다. 저 입을 다물게 하려면 당장에라도 시작을 해야겠다.
[Battle Mode : Team]
[Battle Type : 1 shot / 1 Hit]
[Weapon Type : Custom]
[Armor Type : Custom]
[Field : Sky]
중요한 설정만 대충 확인하고.. 색깔이 있는 쪽이 좋다고 굳이 팀 모드로 매번 설정하게 만드는 것도 귀찮지만, 커스텀 타입의 갑옷과 무기를 보면 더 답답해진다. 도저히 눈으로 보고 참을 수 없는 광경이 눈 앞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뭐.. 됬다. 일단 팀 컬러는 랜덤으로 해뒀으니.. 저 여자가 좋아하는 색깔 따위 내가 알게 뭐고 설정해줄 이유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스크린 하단의 'Start'를 탭..
-'Please Customize your equipment'
하도 많이 봐서 익숙해진.. 장비를 설정해달라는 안내문이 나오고,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차피 말 안해도 저 여자도 대충 장비 장착은 완료한 것 같고, 커스터마이즈에는 오랜 시간이 들지 않을테니.. 슈츠 모양을 설정하고, 줄무늬는.. 그리기 귀찮다. 패스하자. 무기는.. 아무래도 익숙한 칼로베리프의 주 무기, 'Frost bowgun'을 기초로 한 데이터.. 근접용 무기로는.. 'Discharger'를 기초로.
-'Reading Your memory'
내 전용기의 주 무기중 하나로, 푸른색의 투사체가 나가는 프로스트 보우건의 데이터를 왼손에 인식.. 이어서 두번째 칸에는 보조무기인 디스챠져의 데이터를 오른손에 인식. 이걸로 무기 설정도 끝났고..
-"준비는 되었나"
-"여전히 빠르군요! 좀 기다려봐요 시훈!"
여전히 준비에 시간을 오래 잡아먹는 답답한 여자다. 그 결과는.. 도저히 눈 뜨고 못 볼 모습이다. 열 두살의 어린애라고 해도 조금 뒷걸음질 칠 것 같은 느낌.. 게다가, 겉모습은 어린 애인데 실제 나이가 서른 둘인 저런 여자가 저런 모습을 하면.. 대체 뭐라고 받아들여야 할까.
기다리는 것도 슬슬 지루해질 쯤..
-'Please check 'Ready'
이제야 다 끝난건가. 하아.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내가 저런 겉모습이 꼬맹이인 여자한테 꼼짝 못한다는 걸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다.
-"다 되었습니다. 슬슬 시작하죠."
-"대체 사람을 언제까지 기다리게 하려는건가."
-'3'
내 주 무기인 프로즌 보우건은 3발까지 연사를 하는 게 가능하다. 어디까지나 실전에 입각한 훈련이기 때문에 무기 데이터도 실전용의 것을 참조하여 설정해두었다. ..뭐. 저 여자가 이번에 어떻게 설정했을지는 모르겠지만.
-'2'
내 몸 전체가 칼로베리프가 되었다고 인식한다. 손에 쥔 것은 동그란 모양의 컨트롤러. 이동, 무기의 장착, 사용..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것을 양손에 꽉 쥐었다. 지금 나는, 칼로베리프에 탑승하고 있다. 내가 보는 시각은.. 칼로베리프 안에서 봤던 시야와 같다.. 그렇게 인식한다. 그리고 주위를 바라본다. 서서히 하늘이라는 느낌으로 바뀌어간다. 구름도 나타나고.. 이곳에, 땅은 없다.
-'1'
시작하는 순간, 바로 비행을 시도한다. '땅'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3초 이상 머무르게 되면 자동적으로 패배하는 조금은 하드한 조건.. 실전이라면 가능할 지 어떨지 모르지만, 극한의 상황을 가정해보자면 일어나지 않을 일도 아니겠지.. 이런 생각은 접어두고. 눈에 신경을 집중하자. 컨트롤러 버튼의 위치를 확인하고, 내가 익숙한 방향으로 컨트롤러를 돌려서, 다시 손에 쥔다.
-'Go'
서서히 상대의 모습이 드러났다. 예상대로.. 눈을 감고 싶을 정도로 끔찍한 그녀의 모습. 하지만 똑똑히 바라봐야 한다. 단 한순간이라도 놓치면 사라질 수 있다. 아직 상대가 어떤 무기를 들고 있는지 모른다. 무기를 어떤 식으로 장착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탐색전에 돌입해야겠지.
-"시훈! 뭡니까! 나는 핑크색이 좋단 말입니다!"
일일히 시끄럽군. 나는 이미 완전히 집중하고 있는 상태란 말이다.
-"이미 시작했다."
이동 방식은 자유.. 그러기에 나는 실제로 조종하는 것 처럼 설정해두었다. 중력 설정이 0. 무중력. 배경은 하늘인데 느낌은 우주인가.. 정말이지 저 여자다운 설정이다. 일단은 뒤에서 말하는 대로 했지만.. 생각해보면 말도 안되는 배경이다.. 중력 설정이 0, 다시말해 무중력 상태이므로 중력에 의한 영향은 받지 않는다. 최근 출격하면서는 느끼지 못한 감각이다.
그리고, 이런 형태의 필드를 구현하는 능력을 가진 그녀의 모습이 더 가까워질수록 솔직히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다. 토끼 인형같은걸 양손에 꼭 쥐고.. 설마, 저게 주 무기라고 할 셈인가. 양손에 하나만 들었다고?.. 어깨에는 곰돌이 장식이 양쪽에 두개.. 정말 뭐 하자는거냐. 연녹색 슈츠군. 저 진지하지 못한 모습에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뭐가 나올 지 모른다. 동요하지 말자. 상대는 엄청난 실력자이다. 세간에 이른바 '천재'라고 불리는 타입의 여자다. 이론의 구현이라면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눈을 피하지 말자. 모습을 똑똑히 바라본다. 그리고.. 타점에 근접했다고 느껴졌다.
프로스트 보우건을 장착. 특성상 한번에 3발까지 쏠 수 있고, 오토챠지 딜레이(자동충전시간)가 존재하는 원거리 타입의 무기. 한방, 한 발에 전투가 끝나도록 설정해 놨으므로 방심할 수 없다. 그건 저 여자도 마찬가지겠지.
자연스럽게.. 손을 올린다. 타점에 맞았다고 생각했다. 재빠르게 3발.. 가벼운 반동이 느껴진다. 이걸 맞았을 리는 없다.. 그건 확실하다. 그 정도는 알고있다. 그러니까 턴을 하고 다시 위로 올라간다. 저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현혹되지 말자. 저 여자는 상당한 실력자다.
예상대로, 몸에 들고있던 저 토끼 인형에서 무언가가 날아왔다. .. 뭐. 토끼 귀인가? 분홍색? .. 못봐주겠군 정말. 나 역시 지속적으로 움직여서 맞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지만, 저 토끼인형에서는 쉴 새 없이 탄환이 날아오고 있다. 아까부터 저 어깨 장식으로만 생각했던 곰돌이 인형이 조금 신경쓰이긴 하지만.. 기우겠지. 더 높은 고지를 점령해서 한눈에 바라보려고 했지만 저 여자는 금새 그걸 쫓아온다.
너무나도 변칙적이라, 파악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다. 쉴 새 없이 날아오는 분홍색 귀. 딜레이가 조금씩 체감된다. 보고 피하는 것도 슬슬 버거워진다. 짧게 숨을 토하고, 내뱉는다. 땀이 흐른다. 하지만 계속 이동하면서 일어나는 역풍에 의해 그 땀은 다시 또 식어버려 몸의 온도가 내려간다. 이런 환경에서 계속 있다간 감기 걸리기 좋겠군. 그 탓에 조종실의 온도는 항상 평상으로 유지되는건가. 그러기에 슈츠가 필요한건가..
설정 하나를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더니. 그 설정이었다. 슈츠 온도의 설정.. '보온'이 아닌 '일반'으로 해둔 것이 이렇게 답답한 상황을 연출하게 되었다.
어쩌면, 저 여자보다도 내가 더 마음속에 '방심'을 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오히려 내쪽에서 접근해서 이 전투를 빨리 끝내는게 좋겠군. 저 여자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난 지금 '시간 제한'이 존재하는 전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최대한 몸을 눕혀, 적어도 정면에서 날아오는 탄환은 다 피할 수 있도록 자세를 잡았다. 이동하면서 자세를 잡으려면 그 순간 몸에 받는 저항을 최소한으로 해야 영향이 거의 없기에.. 속도가 자연스럽게 늦춰질 수 밖에 없다. 저 여자는 당연하는 듯 그걸 읽고 나타났다. 잠깐 근접했다고 생각했더니..
기분 탓이 아니다. 저 곰돌이야말로 두번째 무기. 양 끝에 달린 팔이 길어져서 공격을 하는 방식이다. 정말로 방심했던 건 내쪽이었던 것 같군. 하지만 저쪽에서 근접해온다는 건 나 역시 공격할 기회가 생긴다는 것.. 거리를 다시 벌리면서 3발을 발사한다. 이동거리를 예측해서.. 조금씩 차이가 가도록, 위로 올라갈 수도 있으니 위에 한발, 아래에 한발. 정면으로는 디스챠져를 휘두를 준비를..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젠장. 쬐끄매서 잘 보이지도 않는다는 점을 잘 이용하고 있군.. 투사체가 날아오는 소리.. 위험했다. 몸을 살짝 꺾어서 피할 수 있었다. "쳇" 하는 입을 차는 소리가 들려온다.. 호흡이 조금씩 가빠진다. 이대로라면 내 스테미너가 먼저 다 달아서 자멸하게 될 지도 모르겠군..
일단 고도를 낮췄다. 가능한 한 아래를 향해 내려갔다. 당연히 상대적으로 위보다 아래가 공기가 가득하므로 조금 편하게 호흡할 수 있다. 자꾸만 탄환이 내 주위를 스치다시피 지나간다. 위기를 느끼지만 일단은 어쩔 수 없다. 조금의 여유를 찾기로 했다.
확실히 외모에 현혹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지만 그렇지도 않다. 주변의 상황이 나에게 압박을 가한다고 했지만 그렇지도 않다. 방심하고 있었다. 저 겉모습에. 현혹되어 버린 것은 오히려 내 쪽이었다. 정말이지 천재란 것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끔 알 수가 없다.
이론을 구현하는 데에 천재라는 건, 다시말해 허점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거겠지. 다시 또 근접을 시도하는걸 확인했다. 굳이 근접하는 척 하면서 저렇게 계속 어깨에 매달린 곰돌이의 팔을 휘두를 필요가 있을까.. 설마, 저게 조건인가. 장탄의 조건.
'상대 근처에서 곰돌이 인형의 팔을 휘두르는 것'? 그렇다고 하면 또 이상하다. 근접.. 근접 조건의 반경이 어느정도인가. 적어도 무제한이 아니라는 건 확실하다. 의도적으로 디스챠져를 휘두르면서 지나가보았다. 당연히 맞지 않겠지. 당연히..
그 순간, 작은 타격음.. 디스챠져를 휘두른 것이, 곰돌이의 팔에 맞았다.... 그리고, 날아오는 탄환.
그런거였나. 이거야 원.. 시간이 갈수록 힘이 빠지는 게 당연한 거였다. 오히려 내 탄환이 한정적이었다는 점에 감사를 표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론상의 무기'에 대한 최대의 카운터 방식.. 저 곰돌이에 맞으면 '흡수'가 되어버려 그것이 상대의 힘이 되어버린다는 것인가..
젠장, 의도적으로 근접했던 게 저런 의도였나..
이렇게 되면 하는 수 없다. 내 쪽에서 접근해서 결판을 내는 수밖에.. 어느쪽이든 길게 끌면 오히려 내쪽이 위험해진다. 이에 힘을 주고, 저항을 무시하다시피 돌진했다.
'Limit off - 3:00' 이라는 메세지를 확인했다. 대파당할 각오를 하고 덤벼들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장비한 무기는 오로지 두종류. 전탄 발사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없다. 그리고 그랬다간 오히려 역으로 흡수당해서 그만큼 반격이 올 지도 모른다..
일단은 상대를 혼란시킨다. 동작을 바꿔, 여태까지 이동했던 원거리 형의 전투방식에서, 초근접의 전투방식으로 바꾼다. 굽혔던 몸을.. 조금씩 편다. 예상대로다. 저쪽에서 초조해져서 접근한다. 그리고.. 디스챠져를 휘둘러서 막았다. 디스챠져라는 이름이 괜히 붙은게 아니다. 이 타격으로 저쪽은 한쪽 곰돌이의 기능을 당분간 사용할 수 없게 될..
파직, 하는 소리와 함께 느껴지는 아픔.. 난 분명 막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순간, 시선을 놓쳤다. 그야말로 한 순간이었다. 그 작은 몸을 가볍게 돌려, 저항을 최소화해서 내 오른쪽을 가격한.. 왼쪽의 곰돌이 손. 그것이 내 몸에 닿는 그 순간이 말이다. 나 역시 몸을 돌리는 게 가능했지만, 몸이 커서 빠르게 돌 수가 없었다. 저항을 최소화하지 못했다. 디스챠져가 타격되는 순간 일어나는 반동, 그 반동이 내 회전을 멈추었다.
-"Win. Lezie"
하늘 배경은 서서히 흩어져, 원래대로 306호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내려와서 보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검은 머리의 소년,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아. 그 방에 두고 잊고 있었던.. 신 수혁이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 그 옆에는 키가 큰 갈색 머리의 여성.. 라이아나도 서 있다. 그래, 그녀가 데려온건가.
저 여자는 승리의 기쁨을 완벽하게 만끽하고 있었다. 그 한 순간. 한 순간이었다. 어쩌면 디스챠지로 한쪽의 기능을 마비시키고 곰돌이의 팔을 돌아서 피했더라면.. 저 여자가 내 키보다 작아서 저항을 적게 받았기에 회전이 빨랐다는 점이 패배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분하다.
".. 쬐그만 게, 요리조리 잘도 피해다니기는.."
어차피 아무도 듣지 않았겠지. 가장 짜증나는 점을 내뱉고 나니 조금은 기분이 나아졌다. 하지만 분한 걸 어쩌겠는가. 바보같이 내가 설정을 잘못해서 일어난 일이다. 방심한 것은 오히려 내 쪽이었던거지. 겉모습에 현혹되지 않겠다니 뭐니 쓸데없는 생각이나 늘어나다가 거기에 발목을 잡혀 상대의 기량을 파악하지 못했다.
실전이었다면 분명 그 한방에 목숨을 잃을 수 있을 만큼의 치명상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짧게 숨을 내뱉었다. 앞으로는 더이상 그 모습에, 진지함이 결여되어보였던 그 행동에 절대 현혹되지 않으리라.. 마음에 새겨둔다. 그리고 이러한 실수는 하지 않겠다고.. 또. 새겨두었다.
그나저나. 슬슬 배가 고프군.. 수혁에 대해서 완전히 잊고 있었다. 인사라도 해야겠군. 라이아나가 때마침 도착한 덕분에 몸이 풀려 같이 온 모양이지만. 그나저나 레지에 저 여자는 호호호 웃는 소리가 정말이지, 영락없는 어린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