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지기 위해 (1)
강해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했다면 솔직히 막연한 느낌이 강했다. 확실히, 강해지는 데에 이런 과정은 필요하다.
다만.. 그게, 첫 훈련에 실패해서 비웃음 당하는 과정도 포함하느냐 묻는다면 그건.. 아닐거야.
아니겠지.
쓸데없이 오기를 부린게 잘못이었다.
제대로 답변이 안오면 그만큼 더 끈질기게 물어봤어야 했는데 말이다.
라이아나 누나가 릴리즈를 해주고 난 뒤에, 시간이 이미 점심때가 되어버려서 제대로 된 장착법은 점심부터 먹고 배우기로 했다.
저 차갑다못해 항상 냉정한 태도, 거기에 성격이 배배 꼬인 저 인간이 저렇게까지 망가지면서 폭소하는 건 처음 봤다. 그야, 무브는 계속 바꿔가면서 해야하는 것 따위 내가 알리가 없잖아. 처음 하는거라고. 처음. 플로트는 붕 떠서 중력에 의해 원래대로 돌아오지만, 무브는 그게 아니었다는거다. 이동하면 이동한 만큼 반대로 움직이게끔 해야 속도가 멈추는 거였고..
그래. 결론적으로 나는 계속 붕 떠 있었던거다. 그러니까 계속 뱅글뱅글 돌고 있는 셈이 되었고. 그 상태로 웨폰을 눌렀다면 발 위에 턱하니 생겨서.. 발가락에 힘을 주고 휘둘러야 하는 상황이 왔을지도 모른다. 라이아나 누나가 날 구해준거지.
그렇다고 릴리즈를 하는 부분에서 또 터질건 뭐냐. 그래. 무브 기능이 어떤식으로 작동하는지 몰랐으니까 이런 실수는 당연한거다. 당연한 거라고..
라고, 장문의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눈앞의 꼬맹이조차 그 말을 듣고 웃고 앉아있다. 밥이 제대로 안넘어간다고 그걸 라이아나 누나한테 징징대고 있다. 아니. 이런 인간을 내가 누나라고... 레지에 카첸나. 겉으로 보기엔 열두살 남짓한 꼬맹이로밖에 보이지 않는 소녀. 실제 나이는 서른 둘.. 150cm가 될까 말까한 작은 키에, 얼룩덜룩 녹색으로 칠해진 머리에, 강렬한 핑크색의 앞머리.. 물론, 앞에서 보면 이렇다는 거지만, 전체적으로 핑크색의 머리가 메인인 것 같다.
이런 그녀를 보고 느끼는 점은 뭘까.. 라고 한다면, 하는 행동.. 웃는 소리, 딱 '성장이 멈춰버린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사람의 진심을 이끌어내는 묘한 행동을 하고, 꼬맹이라고 생각하면 가차없이 독설을 내뱉는 여자. 일단 이 연구소에서 제일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라보 퀘시에', 레지에의 수수께끼 연구소.. 자기의 이름이 붙은 만큼.. 다시 한번 라이아나 누나에게 확인해 보기도 했지만, 괜히 레지에 누나의 붙은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최근의 행동으로 미루어 보아 쉽게 알 수 있었다.
이 여자에게는 확실히 '카리스마'가 존재했다. 누군가를 따르게 할 수 있는 카리스마가. 어쩌면 나 역시 그 카리스마에 제압되어 버린 건 아닐까 깊게 생각해봤지만.. 그건 아니야.
사실, 겉모습과 하는 행동만 놓고 보면 도저히 그런 생각은 안 들거든.
처음 봤을 때의 느낌은 '공포'에 가까운 감정. 이 사람 앞에서는 말을 가려가면서 해야 할 것 같다는 느낌. 잠깐, 이거야말로 카리스마인가? .. 애초에 카리스마가 뭔지 난 잘 모르겠다. 그것보다도, 종이 뒤집듯 달라지는 말투.. 사람에 따라 대하는 태도가 너무나도 달라진다. 일단 나에게는 자꾸 '꼬맹이', '꼬맹이' 하면서 업신여기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어제 느꼈던 레지에 누나의 감정. 그 '죽지 마라'라는 말은.. 절대 나를 업신여기는 게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누구보다도 외로움을 타고 있었을 어린 아이. 그래, 어쩌면 겉모습과 다른 게 아니라.. 적어도 나를 꼬맹이라고 생각하니까 나름대로 '어른의 위엄'이라는 녀석을 보여주려고 한 거겠지.
다시 말하자면, 그런 뻔히 보이는 행동을 함으로써 그야말로 어린애라는 느낌을 받는다고..
내가 왜 굳이 이렇게 정리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본다면.. 억울해서일거다. 아아. 울고싶다. 저 여자는 옆에서 "미스토 꼬맹이, 너무 기죽지 말라고!" 하면서 등을 툭툭 두드려주고 있긴 하지만.. 방금 전까지 실컷 웃던 여자한테서 듣고 싶지는 않은 말이다.
사람이 살면서 한두번 실수는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실수가 웃음거리가 되면 자신감도 낮아지고.. 아.. 으.. 으아아아.. 뭐 여튼 그런 거다. 어쩌면 아까 전에 내가 시뮬레이션 룸에서 했던 행동은 여기 살게 되는 동안에는 엄청난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레지에 누나.. 전 괜찮으니까.. 자꾸 웃으면서 등 토닥이지 마세요.."
울 거 같아. 아니 진짜로 울고 싶다. 어쩌면 눈에서 눈물이 나오고 있는 지도 모른다고.
"뭐 그래! 사람이.. 한 두번 실수할.. 크읍.. 수도 있지 뭐.. 호호호.."
멍하니 시훈이 형 쪽을 바라봤다. 일단 오늘의 점심 메뉴 역시 .. 레지에 누나가 한 탓에, 모양이 엉망진창인 프라이드 에그에, 내 엑사베리온에서 만들어 온 에이드가 한잔씩.. 그리고 빵. 역시 엑사베리온에서 만들어 온 거다. 15분 들여서 말이지. 그 동안에 아까 시뮬레이션 룸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세명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라는 거겠지.
... 그 결과다. 이 건방진 여자애.. 아니, 누나가 내 등을 두드리며 웃고 있는 상황이 된 것은.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미스토, 뭘 그런걸로 크게 한숨을 쉬고 그래."
"왠지 슬퍼서요."
"사람은, 한 두가지 실수는 하는.. 법이지."
갑자기 먹다 말고 시훈이 형.. 이 사태를 일으킨 원흉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쪽으로 향했고, 시훈이 형은.. 제자리에서 한두바퀴 빙 돌더니, 그대로 나가버렸다.
... 아, 그래.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놀려 먹을 셈이라는 건가.. 적어도 한두번으로 끝날 것 같지가 않다. 지난 번 토스트때도 그랬으니까 말이야. 반드시 한방 먹여주겠어..
"자, 미스토. 아까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하나하나 잘.. 배워 나가야겠지?"
"네. 쓸데없이 오기 부리지 않을게요.."
모르는 건, 묻자.. 아마.. 그 인간.. 진 시훈은 내가 이렇게 나올 걸 알고 저렇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야, 맨날 똑같은 패턴으로만 공격했던 인간이 아닌가..
쳇.
"그럼, 잠깐 쉬고 1시에 306호로 오면 돼."
"네."
"미스토 꼬맹이! 열심히 해!"
레지에 누나는 나랑 키 차이가 조금 나지만.. 그래도 굳이 등을 토닥여주는 걸 보면.. 착한거겠지. 그만큼 감정에 솔직하다고 해야 할까. 뭐 그런거겠지.
3층 복도에 있는 푹신한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가만히 떠올려봤다.
라이아나 누나. 갈색의 긴 머리가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어찌 보면 기억 속의 윤이 누나랑 매우 비슷한 인상이다. 그다지 미인이라는 느낌은 아니지만, 항상 노력하려고 하는 게 보인다고 해야할까. 성격도 서글서글하고, 먼저 접근해준단 말이지. 그러니까 레지에 누나의 머리를 쥐어박는다든가, 시훈이 형을 때린다는가 하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서글서글하니까 가능한 건가?.. 진 시훈, 레지에 카첸나 이 두 사람은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인간 맞나' 싶을 정도로 무서운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의 관계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느껴지는게 이 여자, 라이아나이다. 음.. 역시 진짜 이름은 들어본 적 없다. 그렇지만 그다지 궁금하지는 않고 말이야. 그러고 보면 시훈이 형.. 진 시훈이라는 이름도 액세스 네임이라고 했던가. 레지에 누나는 본명인 모양인데, 굳이 액세스 네임을 쓸 필요가 없다는 모양이고.. 이유는 모르겠다.
아아. 생각이 꼬였다. 다시 라이아나 누나에 대해 생각해보자. 눈이 그다지 매력적인 것도 아니고.. 차라리 눈이 매섭게 생겼다면 그 점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겠는데.. 정말로, 서글서글한 성격이 그 누나의 바탕이 되는걸까. 솔직히 하는 행동만 놓고 보자면 소연이랑 가까운 느낌을 받는다. 키는 시훈이 형과 비슷하고, 아.. 그래. 몸매가 윤이 누나랑 상당히 비슷해. 적당한 나이의 남자애라면 누구나 동경할 듯한 그 아름다운 라인.. 어..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한.. 하지만 레지에 누나를 챙겨주는 것 보면 소연이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이것도 부드럽게 받아준다는 느낌이라.. 윤이 누나랑 비슷한 것 같고..
"일어나, 이런데서 자고 있었구나."
귀에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음.. 그러고 보니 왠지 상큼한 느낌의 향도 났던 것 같고 말이야. 그래. 지금 느껴지는 이 향.. 몸이 그 향에 의해 흔들리는 듯 하다... 몸이 손으로 밀리는 것 처럼 흔들거린다. 인상이 서서히.. 사라져가서. 눈을 뜨자.
"일어나 미스토. 1시야."
"어.. 어어.."
떠올리고 있자니 나타난 그녀... 1시라고? 아크를 꺼내 시간을 확인해봤다. 아. 아차, 사람을 향해서는 쏘지 말라고 했었지. 바로 뒤쪽의 벽을 향해 비젼(Vision)을 켰다. 선명하게 나타나는 숫자.. 1:30. 이런, 30분이나 지난건가.
"아크를 통해서 계속 말을 걸었는데도.. 피곤했나보네."
지금 내가 손에 쥐고 있는 아크, 액세서블 레지스터드 카드.. 이 카드에는 여러가지 기능이 존재한다. 관리자 전용 공간의 문을 열기 위한 키로도 쓰이고.. 방금 했던 것 처럼 시계로도 쓰이고. 그 아크 중앙에는 'Mistletoe' 라고, 여기서 받게 된 내 새로운 이름이 쓰여있다. 미슬토라고 부르는 모양인데. 레지에 누나가 발음하기가 귀찮다고 '미스토'라고 부른 바람에, 여기에서의 이름은 '미스토'가 되어버렸다.
"아.. 꽤 피곤했는지도 모르겠네요."
대충 얼버무리고, 부드러운 등받이와 팔걸이를 뒤로 하고.. 자리를 떴다.
306호로 들어가자, 라이아나 누나가 그 갈색의 긴 머리를 찰랑이며 하나하나 설명해주었다. 그래. 최고의 매력포인트가 이 머리일지도 모르겠는걸..
".. 듣고 있니?"
"아.. 음.."
쓸데없는 생각을 했었다.
"자, 여기 스크린에 뜨는 게.. 지금은 하나하나 설명해도 잘 모르겠구나~ 어디 보자, 이 패널을 위로 올리면 말이지, 여기. 세팅이라고 뜨지~? 이 세팅도 종류가 다양한데.. 일단은, 아까 시훈 씨가 했던 거에서 좀 바꿔보면.. 자, 스탠다드라고 다 좋은 건 아니야. 그리고 아까는. 여기, 보이지?"
넓은 화면의 'Message Setting' 이라는 부분을 가리킨다. 그걸 눌러보이는 라이아나 누나.
"자, 이걸 누르면.."
"어. 어어.. 다양하네요."
"자, 아까 시훈씨는 에러 설정 부분을.. 아예 꺼버렸어. 에러가 있어도 알려주지 않도록. 기본 설정에는 없는 기능인데, 굳이 엑스퍼트 세팅을 해서.."
... 말이.. 갑자기 이해하기 힘들어졌다.
".. 자, 여기에 Voice라는 부분을 On으로 해두는거야. 그러면 착용하기 전이나, 착용 후에도 소리가 나지. 아까는 이게.. Off로 되어있어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은거야~"
이건 이해할 수 있다. 예컨대, 그 인간은 저걸 꺼놓는 바람에 내가 잘못 착용했든 말든 상관이 없다는 거였다는 거다..
"다음으로.. 이 파란색의 버튼을 눌러서 메인으로 돌아가고, 거기에서 두번째 아래에 있는 'E q u i p m e n t'라는 부분을 눌러. 그러면 이제 장비 설정으로 들어가는거야. 그리고 화면이 바뀌면.. 다 스탠다드로 설정되어 있었던거네~ 역시."
뭔가를 깨달은 듯, 중얼거리지만 아직 난 도저히 무슨 소린지 이해하질 못하겠다.
"그래.. 뭐, 일단은 이동부터 익혀야겠지."
"네. 제대로 알려주세요.. 부탁합니다."
조만간 저거 설정하는 것도 잘 익혀둬야 할 것 같지만 말이다.. 아직까진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저 알록달록한 버튼의 사용방법도 익혀둬야겠고 말이지.
덤으로, 팔에 끼는 것과 다리에 끼는 것의 차이는.. '메인 패널'의, 버튼 바로 위쪽에.. A와 L이 적혀있었다는 것 정도였다. 그 앞의 영어는 왼쪽과 오른쪽.. 그러니까, LA은 왼쪽 팔, RA은 오른팔, LL은 왼쪽 다리, RL은 오른쪽 다리.. 끝으로, 등에 매는 하얀 상자같이 생긴 건 B.. Box인가?.. 아니, Back이겠지. 생각해보니 저거는 Equip이라는 버튼 자체가 없었는데.
"저기, 등에 매는 저거는 왜 이큅이라는 버튼이 없어요?"
"아, 저기에서 아머가 만들어지는 거거든.. 그러니까 저걸 매지 않고 세팅을 완료 해봤자 아머가 조금도 형성이 되지 않아.. 아,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가?
네. 조금이 아니라 대부분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내가 이해한 내용만 대충 다시 물어보자.
"어, 그러니까.. 그 아머라는게.. 이큅을 누르면 몸에 서서히 감겨오는 그 하얀 천같은 느낌의 녀석을 말하는 건가요?"
"그래, 그것도 경도를 설정할 수 있는데.. 이를테면.."
이것저것 모르는 것 하나 하나 질문하고 답을 듣고 하느라 엄청나게 시간이 걸렸다. 아직까지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것들 뿐이라.. 하아, 차차 하다보면 알게 되겠지. 결국 이동 훈련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된 건.. 체감상 한 세시간 쯤 지나서였을까.
진 시훈 그 인간은 뭐냐. 내가 무슨 수재나 천재도 아니고.. 저런 걸 슬쩍 보기만 해서 다 이해할 수 있을리가 없잖아.. 당신의 그 일방통행인 패턴을 맞받아치는데도 엄청나게 오래 걸렸다니까!
하아.
나는 아무래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멍청한 녀석이었던걸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강해지기 위해서는 먼저 똑똑해질 필요가 있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