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무서워.. (5)
정말 체감 이상의 기간이었던 3일간의 휴가도 끝났다. 내가 사용한 금액을 보자, 아무리 내 돈이 아니라고는 해도 리치에게 저절로 미안해질 수 밖에 없었다. 이후의 처우에 불이익을 받더라도 할 말 없는 수준. 대부분은 유니스 그 여자의 탓이지만 어쩔 수 없다. 그 여자한테 카드를 건네준건.. 다름 아닌 나였거든.
지금 이렇게 서서 셔틀에 하나씩 짐을 싣고 있는데. 그 대부분이 유니스의 짐이다. 분명 통근이라고 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뭔가 이것저것 많이도 챙기고 있다. 디시브는 뭐가 그렇게 좋았는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다음에도 휴가는 여기로 오자"는 소리나 하고 앉아있다. 난 결단코 사양이다. 리더 권한을 남용해서라도 막아내겠어. 고개는 끄덕여줬지만.
결국 디시브에게 신경쓰이는 건 많았지만 그날 저녁, 즐거운 표정으로 돌아온 녀석을 추궁하기 뭣했고. 확정적인 증거가 있는 게 아니었으므로 괜히 분위기를 어지럽힐 필요는 없다고 판단해서 그냥 웃음으로 맞받아쳐줬다.
일단, 유니스의 지인이라는 모양이기도 하고 말이다. 루리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그 여자는 예상대로 요리를 못했다. 그래서 디시브가 데려가서 이것저것 사먹인.. 모양이다. "료스케 오빠" 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걸 보면.. 아마 저 여자가 그 실루엣의 주인공이었던 모양. 그 순간만 떠올리면 여전히 팔이 아파온다. 유니스. 무서운 여자.. 그 악력. 보통이 아니야.
"짐은 다 실었어요?"
셔틀의 엔진이 가동되는 소리와 함께. 16살의 여자아이.. '루스터', '카토 유즈키'라는 소녀가 모두에게 말을 걸어 확인했다. 그냥 변장을 하면 좋았을텐데. 오늘 보기 전까지는 다들 남자로 착각하고 있었는데.. 저래놓으니 후미카 누나가 오히려 더 늙어보인다고 해야할까? 이런 말을 본인에게 했다간 아마 한번 더 놀아줘야 할지도 모르니까.. 이 생각은 마음속에 깊이 묻어두도록 하자. 변장을 하고 난 겉모습과는 달리 실제로는 나이 차이가 4살이나 나는 어린 남자한테 "오빠", "오빠" 붙여가면서 찰싹 달라붙는 모습은 솔직히.. 동정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후미카 누나에 대한 감상은 이정도 쯤 해두자. 본인은 그 날 데이트라는 거에 나름대로 만족한 모양이니까. 셔틀의 운전 담당.. 이라기엔 열 여섯이라는 나이는 너무 어린가 싶지만, 전용 컨트롤러를 갖고 있는 나 역시 열 여섯이니까..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다만 세상은 넓고 인재는 많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는 점 정도일까.
후미카 누나한테 더 들었던 바로는 메카 드라이브도 꽤나 플레이해왔던 모양이고. 나를 롤모델로 삼아서 열심히 노력했었다는 모양이다.. 그 결과, 노력을 인정받아 이렇게 셔틀 운전 담당으로 스카웃되었다고 한다. 저 과정에서 리치 아저씨가 뭔가 하긴 했을지는 의문이긴 하지만.
-"탑승자 전원은 벨트를 착용해주세요."
확실히 여자아이 치고는 조금 굵은 느낌의 목소리. 성별을 몰랐다면 남자아이로 착각하는게 당연한가 싶을 정도로 중성적인 목소리다. 이른바 변성기라는건가.. 나는 어떤가 하면, 일단은 지났다. 게다가 말을 할 일이 많았으니 더 빨리 지나버린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렴 뭐 어때. 중요한 것도 아니고.
안내방송실에는 후미카 누나와 그 기기에 관심이 많은 유니스 누나가 들어갔다. 디시브는 여전히 헤벌레하고 있는데, 어째서냐고 한다면 루리카라는 이름의 금빛이 섞인 갈색머리의 여성이 그 옆에 앉아있었기 때문이겠지.. 생각보다 꽤 괜찮은 그림이다. 디시브쪽이 과도하게 긴장하지만 않았다면.
-"30초 후에 현재 위치에서 이탈합니다."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 나뭇잎 하나 하나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내 귀를 파고든다. 나뭇잎이라기보다, 나뭇가지나 큰 나무 전체가 흔들거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거대한 진동음도 울려퍼진다. 다른 사람들은 신경을 쓰고 있지 않은건지 모르겠지만. 리치 아저씨는 등을 바짝 기대고 가만히 눈을 감고 있다. 아마 자는 모양이다.
공기와의 마찰음이 강해짐과 동시에,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서서히 줄어들어. 그 잡음에 신경쓰지 않을만한 정도가 되자 몸을 가볍게 내리누르는 감각이 느껴진다. 창문 바깥을 바라보니 울창한 나무에 뒤덮여 제대로 보이지 않던 푸른 하늘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길고도 길었던 휴가도 이걸로 끝이다. 임무 결과 보고도 해야 할거고. 스카웃은 성공.. 인거지. 아무래도 좋은 비밀도 알아버렸지만.
-"중간지점인 제 4 통신지구 스퀘일런 지점에 곧 도착합니다."
"아, 료스케 오빠. 나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아."
"어. 그래 루리카. 조심해서 들어가고.. 나중에 또 나오게 되면 연락 줘. 건강히 잘 지내고."
"응. 료스케 오빠도 건강히 잘 지내고. 루리카는 이만 일하러 가볼게~ 태워줘서 고마웠어요. 운전수 양. 바이바이~"
"
머뭇거리며 가만히 서 있는 디시브. 저렇게 안절부절하면 보는 사람이 다 답답하다. 등을 밀자 비틀대면서 앞으로 나가더니, 머리를 긁적이면서 그제서야 말을 한다. 이건 뭐 완전히 그냥 커플이네.
"그.. 어.. 일단 내려서 마중해줄게."
"상냥하네. 하지만 괜찮아. 혼자서도 잘 돌아갈 수 있으니까. 애가 아니라구."
"그래도 걱정되니까 일단 같이.."
"오빠가 생긴다는건 이런 면에서 참 좋네♪ 그럼, 부탁할게."
요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완벽한 '신사'의 매너를 익힌 디시브. 이제야 어른이라는 느낌이 든다. 지금이라면 '후루야마 형'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단 말이지. 안 부를거지만.
리치 아저씨는 그런 둘의 모습을 아련한 눈빛으로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그야, 나이가 나이니까 아저씨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들지만 말이다. 다행히도 그 입에서 항상 나오던 쓸데없는 말은 단 한마디도 나오질 않았다.
창문 너머로 두 사람이 말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건 아무리 청력이 좋은 나라도 그렇게 잘 들리진 않네. 셔틀에서 퍼지는 마찰음이 꽤나 방해다. 아니 뭐. 그렇게 궁금하진 않다.
"빨리 안오면 놔두고 가버릴거야!"
창문을 살짝 열어놓고 트윈테일을 한 여성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걸 보니 후미카 누나는 뭔가 단단히 불만이 쌓였나보다 싶다. 어째서인지 저 여자를 향해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하고.. 여러모로 질투가 심한 여자인 것 같다. 창문을 열어놓은 덕분에 두사람이 하는 말이 조금씩 들려왔다.
"들어가. 일 열심히 하고."
"그래.."
금빛 머리칼을 휘날리는 여성이 말을 하다 말고 검은 머리의 신사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그에 응해 그 역시 금빛의 머리칼을 휘날리는 여성을 가만히 끌어안고 있다. 후미카 누나쪽을 슬쩍 바라보자, 방금전까지 불만을 품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은은하게 미소를 띠며 그 둘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30초 후에 이륙합니다. 탑승자 전원은 벨트를 착용해주세요."
창문을 닫으려고 슬쩍 바라보자, 햇빛을 받아 유난히 금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여성이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디시브가 팔을 뻗어 인사를 하자. 그와 동시에 셔틀이 서서히 이륙하기 시작했다.
루리카를 배웅하고 셔틀로 돌아온 디시브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있다가 후미카 누나를 향해 한마디를 내뱉었다.
"후미카, 답답하니까 이거 이제 원래대로 좀 해줘."
"잘 어울리는데, 굳이 왜?"
"그냥. 이 안에서 변장 푸는 것도 너라면 가능하지?"
"'시밀러'라는 코드네임이 괜히 붙은게 아니라구. 이런 것 쯤이야 굳이 내가 아니어도 누구든지 다 할 수 있는거지만."
"오늘따라 겸손하네."
"오빠, 오늘따라 이상해."
"그야. 너무 쉬어서 나른해진 거 아니겠냐. 후미카 너야말로 오늘따라 고분고분하다?"
굳이 나 말고도 거기 앉은 모두가 그 둘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유니스는 뭔가 그리워하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고. 리치 아저씨는 내가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게 가만히 관찰하고 있다는 느낌.
"영혼 없는 칭찬 아닌 칭찬은 됐어. 그나저나. 그대로 쭉 가도 괜찮을 것 같은데?"
"아니. 뭐.. 이 차림도 슬슬 귀찮아져서."
그 말에, 후미카 누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람이 그렇게 쉽게는 변하지 않는 법이구나."
"슬슬 사람을 상대로 인형 놀이를 하는 건 적당히 해 달라고."
"오빠야말로. 집엔 언제 돌아올거야?"
"집 이야기는 됐다.. 그나저나 넌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거냐."
한숨을 푹 내쉬더니, 자기보다 한참 작은 키의 트윈테일 여자아이를 향해 디시브가 주먹으로 머리를 쥐어박았다. 꽁 하는 소리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살짝.
"아파! 왜 머리를 때리는거야? 자꾸 그러면 키 안큰다니까."
"하여간 건방진 녀석 같으니. 예전하고 하나도 안 변했잖아. 키는 그정도로도 괜찮고. 넌 이미 다 컸어. 더 안자란다."
"으으으.. 키 이야기는 됐어! 그만!"
후미카 누나가 디시브를 가만히 노려보더니 뒤를 돌아보고 걷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가는 디시브는 뭔가 발걸음이 가벼워보였다. 디시브는 왜 가출을 했던걸까 하는 작은 의문이 든다. 뭐.. 나랑은 상관 없지만.
유니스 누나가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저런 남동생이 갖고 싶었는데~" 하고 한탄하는 걸 시작으로, 리치가 그 말에 맞장구를 치면서 아무래도 좋은 언쟁이 시작되었다. 동생인가.. 하긴, 있으면 꽤 재밌긴 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래도.. 난 외동이고 하니까.
오늘따라 가족이 그립다. 다들 뭐하고 지내고 있을까? 연락이 안 닿은지 벌써 반년은 지나가는 것 같다.. 그다지 좋은 추억은 없지만, 그래도 없는 것 보단 나았지.
본부에 도착하고. 베개가 든 봉투를 한 손에 든 채 그녀를 찾아나섰다. 엔마이트 에리카라는 금발의 주근깨 소녀. 아마 어딘가서 자고 있겠지. 3층에 도착하자 내가 찾고 있던 금발의 여성이, 날 향해 바로 달려왔다.
"에리카. 돌아왔어. 별 일 없었지?"
개별 임무 기간으로 내려가 있는 동안 푹 쉬었을 그녀를 향해 인사차 질문했다.
"응. 임무는 잘 하고 온거야?"
임무라.. 그래. 리치 그 아저씨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그게 임무라고 하면 임무겠지.. 그 순간을 생각하자. 이젠 화가 난다기보단 어이가 없어 그냥 웃음밖에 나오질 않는다. 진짜로 당황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었고.. 좋은 구경이었지.
"그래. 생각보다 오래 쉴 수 있어서 좋았지. 아차. 이건 선물. 돌아오는 길에 들러서 사왔어."
임무 첫날에 바로 산 거지만.. 부스럭거리면서 봉투에서 포장된 두 개의 베개를 양 손에 들려주자 싱긋 웃는 모습이 정말 귀엽다.
"베개?"
"최근엔 잘 자는 모양이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어서.."
"잘 쓸게.. 음."
발을 살짝 들더니, 내 눈 앞에서 사라진 에리카. 잠시 뒤에 볼에 미묘한 감촉이 느껴졌다... 뭐.. 뭐뭐.. 뭐야 이거. 어? 이 감촉은.. 그때 그..?.. 머리가 빙빙 도는 기분이다. 당황해서 그녀의 이름을 불러버렸다. 이야. 음이탈 장난 아니다 나..
"에.. 에.. 에리카!?"
"고마워, 잘 쓸게! 푹 쉬어!"
그리고는 양 손에 베개를 쥐고 재빨리 복도를 달려 떠나는 그녀의 모습은 유난히 예뻐보였다. 으.. 으어어.. 이건, 이건 사고가 아닌거지?.. 그건 일종의 사고였지만.. 이건... 어? 그때의 감촉이 되살아나서 순간 위험할 뻔했다. 에리카가 재빨리 도망쳐줘서 그나마 다행일지도..
아, 아차. 결과 보고..
결과 보고를 하기 위해, 마이스터의 집무실로 향했다. 아마 사용 금액을 보면 그 마이스터라도 조금은 놀랄 수 밖에 없겠지.
-"엠페러입니다."
-"아아. 들어와라."
"임무는 성공. 스페셜리스트 클래스의 두뇌전을 담당하게 될 새로운 유저를 스카웃하는데에 성공했습니다."
"오랜만에 푹 쉬었나?"
그 말에 어쩌면, 마이스터 역시 다 알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니. 아무나 의심하는 건 그만 두자. 어차피 그다지 중요한 사안도 아니야.. 하는 일은 변함이 없고. 리치는 여태까지랑 같은 대우를 받게 될 거다. 결과적으로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아.. 예. 신경써주신 덕분에."
"가끔은 머리를 식히는 것도 중요하지. 개별 임무라면 부담갖지 않아도 되고 말이다. 실패는 빨리 잊어버리는 편이 좋다. 이 바닥에서 오래 일하려면 말이지.."
그렇게 말하는 그의 시선은 내가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 과거의 경험이라거나. 뭐 그런 부류의 기억이라도 떠올리는 게 아닐까.
"예. 그러면 총 비용에 대해서입니다만.."
"사용 금액에 대해서는 나한테 굳이 알릴 필요까진 없다. 그 부분은 개인의 역량으로 알아서 커버하도록."
청구 대상이 되는 그 대표님은 아마 거품을 물고 쓰러지지 않을까 싶다. 그 반이라도 리치한테 갚아주든가 해야할 것 같은 죄책감이 조금은 든다. 생각보다 너무 많이 써서 다는 못내주겠지만..
"예.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이런 것도 괜찮지 않았나?"
곳곳에 흉터가 난 그 겉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미소가 그 얼굴에 붕 떠 있었다. 그 미소의 의미는.. 그런 거였나. 나 역시 웃음으로 화답해주었다.
"가끔은 괜찮군요."
"어때, 머리는 좀 식었나?"
"충분히 식혔습니다. 조금 상쾌하기까지 합니다."
"하하. 그래. 크게 신경쓰지는 말고. 사람마다 이런저런 비밀 하나정도는 있는 법이니까."
역시, 직접적으로 이야기해주진 않는 건가.. 뭐. 무슨 의미인지는 알았다.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게 있는 법인가 싶습니다. 건방진 질문일지도 모르겠지만.. 마이스터는 어땠습니까?"
"살다보면 누구나 한번은 겪는 문제지. 넌 아직 그렇게 심오한 것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일방적으로 부탁한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말을 하다 말고 등을 기대고 가볍게 기지개를 펴는 마이스터.
"스스로를 소중히 여겨라."
그 말이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당부처럼 들렸다. 조금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럼.. 들어가보겠습니다. 쉬십시오."
나 역시, 한창때의 아들이 아버지에게 할 만한 말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푹 쉬어라."라는 말이 들려와, 뒤로 돌아 고개를 살짝 숙이고. 문을 닫았다.
생각해본다면 굳이 흩어진 가족을 그리워 할 필요도 없다.
여기, 이 곳에 있는 모두가 내 새로운 가족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