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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경기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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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언젠가 끝나버리더라도 지금은 이 평온한 일상을……


 비가 부슬부슬 내리며 창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창문에 부딪힌 빗방울이 뿌옇게 김이 서린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린다. 
 이파리가 떨어져 앙상했던 나무들은 어느새 새싹을 피웠고, 우산을 쓰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전보다 훨씬 얇아져 있었다. 비가 내려 온도가 떨어진 오늘은 보일러를 돌리고 있지만, 최근에는 난방하지 않아도 괜찮을 정도로 날이 풀렸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찾아온 것이다.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도록 자신이 어떻게든 하겠다고 유키노가 말한지 한 달이 지났다. 
 그녀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건지,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란 게 정말로 있긴 한 것인지 지난 한 달간 내 나름대로 생각해봤지만 결국 이렇다 할 것은 떠오르지 않았다. 
 궁금한 마음에 물어봐도 유키노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며 두리뭉실한 대답만 돌려줄 뿐이었다. 
 유키노와 유이가 특별히 뭔가를 하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는다. 유키노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말했지만,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생길 것 같지는 않다. 
 결국, 사태는 무엇 하나 호전되지 않았다. 아니, 유이뿐만 아니라 결국 유키노와도 선을 넘어버렸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 악화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마음은 그전보다 한결 편해졌다. 전에는 한 지붕 아래서 아내 몰래 이성 친구들과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이, 나 때문에 그녀들이 불행해졌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지만, 지금은 그 정도로 괴로운 것은 아니다.
 유키노시타 유키노라면 분명 뭔가 생각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마음의 부담을 덜어주고 있는 거다. 

 "이제 봄이 다 됐네."

 창문 너머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던 유이가 문득 깨달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어제 지나가면서 봤는데 벌써 개나리꽃이 노랗게 폈더라고."

 유이가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려 옆에 나란히 앉아있는 유키노와 시즈카를 향해 말했다. 그 말에 유키노와 시즈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친다.

 "그러네. 나도 지나가는 길에 봤어."
 "그래, 어제 보니까 벚나무도 슬슬 꽃이 피려고 하더구나."
  
 창밖을 보고 있던 시선을 돌려 그녀들을 바라보자 때마침 내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 유이와 시선이 마주친다.

 "그렇죠? 요즘은 날도 그렇게 춥지도 않고, 이젠 진짜 봄인가 봐. 안 그래? 힛키?"

 딱히 대화에 끼어달라는 의도로 쳐다본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꼭 집어 물으신다면 대답해드리는 게 인지상정. 

 "어, 벌써 꽃이 폈냐? 빠르네."
 "어? 힛키는 꽃핀 거 못 봤어? 역으로 가는 길에 잔뜩 피어있는데."  
 "요 며칠은 밤에 장 보러 갈 때나 밖에 나갔으니까. 뭐, 이젠 3월이니까 봄이긴 하지."

 애가 없는 전업주부인 내가 집 밖으로 나갈 때는 장을 보러 갈 때나, 운동하러 갈 때나, 여동생과 친구를 만나러 갈 때 정도다. 
 애당초 밖으로 나가는 일이 적었는데 그나마 만나던 친구 둘마저 같은 집에서 살게 되다 보니 밖으로 나갈 일이 더더욱 줄어버렸다. 게다가 이 집에는 유이가 가져온 러닝머신도 있다 보니 운동도 굳이 밖에 나가서 할 필요가 없어졌고 말이다.

 "힛키, 진짜로 히키코모리 같아…… 장도 밤에 보러가고."
 "음, 하치만은 집 밖으로 잘 안 나가니까 말이지. 배우자로서는 밖에 나가서 사고치고 다니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지만, 확실히 바람직하진 않군."
 
 유이가 질렸다는 듯이 말하자 시즈카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한다.

 "야야, 사람을 히키코모리 취급하지 마라. 난 밖으로 못 나가는 게 아니라 쓸데없이 나다니지 않는 것뿐이라고. 오히려 요즘 같이 인터넷으로도 장을 볼 수 있는 시대에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직접 장을 보러 가는 주부 정신을 높이 샀으면 좋겠다만."

 나는 히키코모리 같은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인도어파일 뿐이다. 밤에 장을 보러 가는 것도 폐점시간이 가까워지면 식품류를 할인해서 팔기 때문이다. 결코, 되도록 사람이랑 마주치고 싶지 않다든가 하는 이유에서가 아니다. 

 "힛키는 너무 집에만 있다고. 비타민 C는 자외선을 받아야 활성화되니까, 일주일에 1, 2시간 정도는 햇빛을 받아줘야 해."
 "그게 아니라 비타민 D겠지. 넌 교사라는 애가 비타민C랑 비타민D도 구분 못 하냐?"
 "자, 잠깐 헷갈린 것뿐이라고!"

 해박함을 뽐내려다가 도리어 실수를 저지르고 지적받은 게 부끄러웠는지 유이가 얼굴을 붉히며 뚱한 표정을 지었다. 

 "암튼 힛키는 좀 더 바깥 활동을 하는 게 좋다고 봐. 사람도 좀 만나고."
  
 유이의 말에 답하려는데 유키노가 내 말을 가로막듯이 유이의 어깨를 톡톡 두들겼다. 그리고는 씁쓸한 미소로 말했다. 

 "하치만은 딱히 만날 사람도 없는데 그런 말은 너무 잔인하지 않을까? 유이, 조금 더 배려해 주자."
 "너야말로 좀 더 날 배려해라. 그리고 나도 만날 사람 많거든?"

 코마치라든가, 자이모쿠자라든가, 토츠카라든가, 토츠카라든가, 토츠카라든가. 

 그런 내 말에 유이와 유키노가 안쓰럽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렇게 허세 부릴 필요 없는데…… 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이다. 쓰라린……
 그런 우리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시즈카가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너흰 정말 여전하구나. 뭐, 이렇게 넷이 같이 살기 전까지는 하치만도 너희를 만나러 자주 밖에 나갔었는데 말이지."

 확실히 자주 만나긴 했다. 유이와는 원래부터 한 달에 한두 번씩은 얼굴을 봐왔지만, 유키노가 이혼하고 다시 셋이서 뭉치게 된 후로는 한 달에 네다섯 번씩은 만나게 되었다. 같은 동네에 살았던 것도 아닌데 이 나이에 한 달에 네다섯 번이면 상당한 횟수다. 
 게다가 그중 반은 유이네 집에서 보는 거였다. 그때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 녀석들 그때부터 명백하게 날 유혹하고 있었군…….

 "……그렇네요. 하치만이 히키코모리가야가 된 건 저와 유이의 잘못도 있었네요. 미안해. 본의는 아니었지만 네가 외출할 이유를 없애고 말았구나."

 유키노는 어째선지 흡족한 미소를 짓더니 장난스럽게 내게 고개를 숙였다.

 "에헤헤, 미안해 힛키."
 
 그 모습을 본 유이도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아니, 그렇게 사과를 하셔도 말이죠…….

 "뭐, 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난 용무도 없는데 굳이 혼자 외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호오, 같은 인도어파라서 그런지 유키노는 뭘 좀 아는군."

 괜히 밖으로 나가봐야 피곤하고 돈만 나갈 뿐이다. 역시 휴일에는 집에서 쉬는 게 최고지. 뭐, 휴일이 아니어도 온종일 집에 있긴 하지만.
 
 "하치만은 이 집의 ​좌​부​동​(​자​시​키​와​라​시​)​ 같은 거니까."
 "……."

 공감한 게 아니라 추진력을 얻기 위해 무릎을 꿇은 것뿐이었습니다.
 좌부동이라니, 변질자에, 좀비에, 이제는 요괴냐……. 뭐, 좌부동은 요괴라기보다는 집 안에 복을 불러오는 수호신에 가깝지만. 

 ​"​좌​부​동​이​라​…​…​.​"​
 "좌부동?"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는 듯이 쓴웃음을 짓는 시즈카. 유이는 잘 이해가 안 되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힛키는 좌부동이니까 집안에만 있는 것도 어쩔 수 없겠네."
 "그래, 나가버리면 오히려 곤란해. 좌부동이 나가면 집이 망해버리니까."

 그런 유키노와 유이의 말에 나도 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걱정하지 마라. 아무 데도 안 갈 테니까."

 달리 갈 곳도 없을뿐더러, 눈물로 가지 말라고 매달리는 집주인들을 버리고 떠날 정도로 나는 모질지 못하니까.
 
 "그러고 보니 요즘은 자이모쿠자랑 잘 안 만나는 모양이던데, 자이모쿠자가 요즘 많이 바쁜가 보지?"

 만나는 사람 얘기가 나와서 생각난 것인지 시즈카가 자이모쿠자의 안부를 물어왔다. 
 자이모쿠자는 작년 여름까지만 해도 유키노와 유이 이상으로 자주 만났었고, 유키노네 집에 신세를 지게 되기 전까지는 이따금 우리 집에 와서 자고 가기도 했다. 게다가 시즈카가 애청하고 있는 애니메이션의 주연 성우로 활약 중이니 안부를 궁금해할 만도 하다.
    
 "딱히 그런 건 아니고, 나도 일단은 가정부로 고용된 몸이니까 일을 우선시한 것뿐이야."

 자이모쿠자는 성우 일 때문에 도쿄에서 살고 있다 보니까 가볍게 만나는 건 쉽지 않다. 날을 잡고 내가 도쿄까지 가거나, 자이모쿠자가 치바로 와서 만나는 식이다. 그렇다 보니 만나서 같이 술을 마시다 보면 차가 끊겨버려서 서로의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기도 한다. 뭐, 이제는 재워주는 건 불가능하지만.
 아무튼, 명목상이라고는 하나 돈을 받고 일하는 가정부로서 아내인 시즈카는 그렇다 쳐도 유이와 유키노의 식사 준비를 팽개치고 한가하게 자이모쿠자를 만나러 가는 것도 좀 찝찝한 일이다. 최근에는 유이와 유키노 때문에 자이모쿠자를 만나러 갈 틈이 없기도 했고. 조금이라도 나와 같이 있으려고 하는 게 뻔히 보이다 보니까 아무래도 그녀들이 집에 있는 시간에 다른 사람을 만나러 가는 건 힘들다.

 "그럴 것까진 없는데……."

 미안한 생각이 들었는지 유키노가 복잡한 얼굴로 작게 말했다.

 "안 그래도 자이모쿠자랑은 조만간 한번 보기로 했어. 그날은 저녁 못 차려줄 것 같은데 괜찮겠냐?"

 사이버 세계에서는 곧잘 만나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벌써 3개월 이상 만나지 못했으니까 말이지. 이번에 치바에 있는 친가로 내려와서 이틀 정도 자고 갈 생각이라니 오랜만에 만나서 술이나 같이 할까 생각 중이다. 토츠카까지 셋이서 말이다. 히히힛~

 "괜찮아.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자이모쿠자랑 만나거든 내가 연기가 한층 더 좋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고 전해줘라."
 "응, 밥이라면 내가 하면 되니까 힛키는 신경 쓰지 말고 놀러 가."

 마지막 유이의 말이 좀 신경 쓰이긴 하지만 4개월 가까이 출장 방문해가며 요리지도를 해준 덕에 초등학교 급식 수준의 맛은 보장하게 되었으니까 아마 괜찮을 거다. 유키노도 있고.

 "아, 맞다! 힛키, 자이모쿠자랑 만나면 싸인 좀 받아와 줄래?
 "싸인? 자이모쿠자의?"
 "응, 히나가 사나게? 사나다? 아무튼, 자이모쿠자가 맡은 무슨 캐릭터의 팬이라고 힛키랑 만나면 대신 부탁 좀 해달라고 했었거든."

 에비나 히나인가…… 지금은 결혼해서 다른 성(姓)으로 바뀌었겠지만, 취미는 여전한 모양이군. 
 하기야 휴덕은 있어도 탈덕은 없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중증의 부녀자였던 에비나가 '난 이제 BL 안 좋아해.'라며 일반인 행세를 하고 있으면 그거야말로 놀랄 일이다.
 팬이라는 사나뭐시기는 아마 얼마 전에 방영했던 심야 애니메이션의 주연 남캐를 말하는 걸 거다. 부녀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인기라고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곤 해도 그 에비나가 자이모쿠자의 싸인을 원하게 될 줄이야……. 그 혐오스럽던 고등학교 시절의 모습을 잊었을 리도 없을 텐데 잘도 자이모쿠자를 빨 생각을 했군. 뭐, 지금은 살도 안 쪘고, 결혼하고 싶다고 줄 서는 여성팬이 100명은 될 정도로 나름 잘나가는 성우다만……. 

 "엉, 하나 받아다줄게."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유이의 친구기도 하니까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자이모쿠자가 스태프에게 받아서 집 책상 서랍에 대충 보관하고 있는 굿즈에다가 싸인을 해서 주면 아마 대만족할 거다. 받은 걸 버리기도 뭣해서 가지고 있다고 했었으니까 아마 괜찮겠지.

 "흠, 에비나인가…… 졸업한 이후로 한 번도 못 봤군. 에비나는 잘 지내고 있나?"

 오랜만에 이름을 들은 옛 제자의 근황이 궁금해졌는지 시즈카가 유이에게 물었다.

 "네, 잘 지내고 있나 봐요. 딸이 이번에 초등학교에 입학한대요."
 "그, 그렇군……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딸이 있는 건가……."

 시즈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13살 연하의 제자에게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딸이 있다는 게 조금 쇼크였나 보다. 
 사실 이 나이가 되도록 자식이 없는 우리가 특수한 거지 보통은 초등학교 입학이 아니라 졸업을 앞둔 자식이 있어도 이상할 것 없는 나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빠른 결혼 태크를 탔다면 고등학교에 다니는 자식도 충분히 가능하다. 

 "예전에는 아이 낳을 생각 없다고 했었는데 막상 낳으니까 귀여운가 봐요. 같이 코미케라는데도 가고 그런데요."
 "……."
 "그, 그런가…… 잘 지내고 있다니 다행이군……."
 "코미케……?"

 초등학교에도 안 들어간 애를 코미케에 데려간다고……? 대체 딸에게 무슨 영재교육을 하려는 거냐…… 악영향밖에 안 될 것 같은데……
 유키노는 코미케라는 말이 생소한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직접 가 본 적은 없어도 코미케가 뭔지 잘 알고 있는 나와 시즈카는 부녀자인 에비나가 어린 딸을 코미케에 데려간다는 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건 그렇고 딸인가……. 코미케는 에러지만 딸과 함께 놀러 가는 건 조금 부러울지도 모르겠다. 사진으로 본 시즈카의 어렸을 때 모습은 상당히 귀여웠으니까 만약 우리 사이에 딸이 있었다면 딸도 엄마를 닮아 귀요미였을 거다. 
 시즈카에겐 자식 같은 건 필요 없다고 몇 번이나 말했었지만, 길을 걷다 아빠의 손을 잡고 걷는 어린아이들을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불임인 시즈카 앞에선 도저히 할 수 없는 얘기지만…….

 "하치만은 에비나가 부러운 모양이네. 딸이 있었으면 좋겠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유키노가 돌연 지뢰를 터뜨렸다. 

 "…………." 

 야야, 시즈카 앞에서 자식 얘기는 금기라고 했잖아…….
 아니나다를까 딸이 있었으면 좋겠냐는 얘기에 시즈카의 얼굴이 살짝 경직됐다.

 "갑자기 뭔 소리를 하는 거냐?"
 "부럽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티가 났나…… 시즈카와 일대일로 대화할 때는 표정에도 주의하고 있지만, 지금은 나와 대화를 나눈 게 아니다 보니 표정관리가 안 됐던 모양이다.

 "아니, 그냥 딸이 있으면 당당하게 프리큐어 극장판을 보러 갈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한 거뿐이다."

 그렇게 적당히 반농담으로 둘러대자 유이가 못볼걸 봤다는 듯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힛키 징그러워…… 그보다 프리큐어 아직도 해!?"
 "진작에 끝났었다가 이번에 초대 프리큐어의 리메이크가 새로 방영하고 있다."

 세일러문처럼 언젠간 프리큐어도 리메이크될 거라고 나 믿고 있었으니까……!

 "하치만, 아무리 그래도 그 나이에 여아용 애니메이션을 보는 건 어떨까 싶은데……."

 유키노도 질렸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 나이에 팬돌이 팬 인형을 가지고 있는 네가 할 소리냐?"

 유키노는 지금도 팬돌이 팬을 좋아하는지 낡아빠진 팬돌이 인형을 자기 방에 고이 모셔두고 있다. 오락실 크레인에나 들어갈 법한 싸구려 같던데 그런 인형까지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는 걸 보면 팬돌이에 대한 애정이 조금도 식지 않은 모양이다.

 "어머, 팬돌이 팬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는 캐릭터야. 일본 내수용에 여아용인 프리큐어와 나란히 비교하는 건 어떻까 싶은데." 
 "네가 몰라서 그렇지 프리큐어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거든?"

 프리큐어 이벤트에 가면 커다란 친구들이 1/3은 되거든? 전 세계의 커다란 친구들이 프리큐어를 생각하며 뽑은 맨쥬스를 한데 모으면 호수를 이룰 수도 있거든? 프리큐어는 그 정도로 사랑받고 있는 작품이라고. 이런 얘기 유키노나 유이에겐 도저히 말 못하지만.

 "하치만, 프리큐어를 좋아하는 건 뭐라고 할 생각 없지만 프리큐어 에로 동인지를 사오는 건 슬슬 자제했으면 좋겠다만."
 "……그건 내가 산 게 아니라 자이모쿠자가 멋대로 보내준 거라고 했잖아!"

 당황스러운 나머지 마시고 있던 물을 뿜을 뻔했다. 유키노랑 유이도 있는 앞에서 그런 얘기는 좀 봐주시죠…… 음란물은 원래 아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법이라고요…… 다 아실만한 분이…….

 "흠, 그런 것치고는 즐겁게 봤던 걸로 기억한다만."
 "아니, 그건 보내준 성의를 생각해서 본 것 뿐이라고……."

 애당초 나는 음란물은 실물로 소장하지 않는 주의다. PC로 음란 사이트를 봤다가 검색 이력 때문에 어머니에게 걸려서 털렸던 몹쓸 아버지를 교훈 삼아 음란물은 언제나 휴대폰으로 보고 있다. 당연히 자이모쿠자에게 에로 동인지 같은 걸 부탁한 적도 없다. 그런 걸 잔뜩 보내줘도 민폐일 뿐이다. 자이모쿠자가 보내준 에로 동인지를 봤던 것도 어찌 됐건 나를 생각해서 보내준 건데 읽어보지도 않고 돌려주는 것도 뭣해서 한번 본 것뿐이다. 그 이전에 한 손에 책을 쥐고 한 장 씩 넘기면서 하는 건 너무 불편하다고…….

 "…………."
 "…………."

 수치심에 빨갛게 달아오를 것 같은 얼굴을 진정시키며 옆을 봤더니, 유키노와 유이가 안쓰럽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상냥함마저 깃든 그 표정에 얼굴이 한층 더 달아올라 버렸다. 동정하지 말고 차라리 매도를 해! 

 "아…… 그…… 아까 TV 보다가 생각났는데 봄이기도 하고 다 같이 꽃구경이라도 가면 어떨까요?"

 민망한 분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차라도 내올까 하던 찰나에 다행스럽게 유이가 화제를 전환했다. 

 "꽃구경인가. 그러고 보니 이렇게 넷이서는 한 번도 가본 적 없군."

 꽃구경이라면 여기 있는 멤버들과 몇 번 가본 적이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넷이 전부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대학교 시절엔 시즈카가, 나와 시즈카가 결혼을 한 후론 유키노가 없었다.

 "그래, 괜찮아. 날짜는 언제쯤으로 생각하고 있니?"
 "웅― 벚꽃이 피는 시기를 생각해보면 이달 말이나 다음 달 초가 적당하지 않을까?"
 "음, 나는 학교 선생님들과 가게 될지도 모르니까 말이지…… 아니지, 이젠 슬슬 빠져도 괜찮으려나……."
 "나도 빠지면 안 될까? 꽃구경 가면 사람이 북적거려서 싫은데……."

 예전에 꽃구경을 갔을 때도 여기 있는 여자들에게 반강제로 끌려가다시피 갔었다. 꽃을 보는 건 좋지만, 사람이 북적거리는 게 싫단 말이지. 뭐, 막상 가면 나름대로 즐거울 것 같긴 하다만. 

 "어머, 너는 이 집의 가정부니까 마님들 나들이 가는데 당연히 따라와야지."
 "언제부터 가정부가 바깥 시중까지 들게 된 건데……" 

 그보다 시즈카도 있는데 마님이라는 미묘한 단어선정 좀 어떻게 안 되냐? 마님이라고 하니까 셋 다 부인인 것 같잖아……. 
 
 "당연히 힛키도 가야지! 여자 셋만 갔다가 무슨 일이라도 당하면 어떡하라고."
 "아니, 니들 반올림하면 나이가 4……."
 "…………."
 "…………."
 "……사랑하는 아내와 친구가 가자는데 당연히 가야지. 이야~ 벌써 기대되는군. 아, 코마치랑 토츠카도 불러도 될까?"

 "사이랑 코마치? 웅― 그러네. 오랜만에 다 같이 모이는 것도 괜찮겠네."
 "네 친구인 자이모쿠자는 부르지 않아도 괜찮은 거니?"
 "자이모쿠자는 주말에 일할 때도 있으니까 될지 안될지 확실히 모르겠는데. 물어봐야지."

 성우라는 직업 특성상 쉬는 날이 불규칙해서 될지 안 될지 잘 모르겠다. 기왕이면 다 같이 보고 싶지만, 만약에 자이모쿠자가 안되더라도 토츠카와 코마치가 있으니까 괜찮아 문제없어.

 "다 같이 어딘가에 가는 건 정말 오랜만이네." 
 "그러네. 예전에는 몇 번이나 같이 갔었는데……."
 "그렇구나. 옛날 생각이 나는구나……."

 갑작스러운 제안이었지만 유키노와 시즈카도 다 함께 놀러 가는 게 기대가 되는 모양이다. 시즈카도, 유이도, 유키노도 모두 그리운 미소를 띠며 얘기를 주고받는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으면 마치 세 사람이 사이좋은 가족 같아서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 된다. 마음이 평온하다.  
 파탄밖에 없을 거로 생각했던 미래에 희망이 생겼기 때문일까, 시즈카의 눈을 피해 그녀들과 몰래 사랑을 나누는 것이, 이렇게 거실에 모여 담소를 나누는 시간이, 지금은 괴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죄책감이 서서히 풍화되고 있는 거다. 사실은 그러면 안 되지만, 감정이란 것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차라도 타올까 하는데 뭐로 할래?"
 "난 홍차로 부탁할게."
 "나도 홍차―!"
 "음, 나는 커피로 부탁한다."
 "OK."

 의자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한다. 세 사람은 여전히 미소를 띄운 채 어디로 꽃구경을 갈지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눈을 감고 귀를 닫음으로써 얻은 평온함. 거짓말 위에 세워진 일상. 거짓말은 언젠가 들통 나고, 이 평온한 일상은 분명 거짓말처럼 끝나고 말 테지.
 하지만 언젠가 끝나버리더라도 지금은 이 평온한 일상을 즐겨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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