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권태 속에서도 히키가야 하치만은 여전히 아내를 사랑한다.
8월도 다 끝나고 계절도 이제 곧 가을로 접어드는 시기. 치바의 밤은 여전히 무더웠지만, 에어컨이라는 문명의 이기를 누리고 있는 우리 집 거실의 온도는 쾌적하기 그지없었다.
시즈카와 나란히 소파에 앉아 얼음을 동동 띄운 냉커피를 홀짝이며 TV를 보고 있는 도중 문뜩 일전에 유키노와 유이와 나눈 약속이 떠올랐다.
"아, 시즈카, 나 토요일에 유키노네 집에 갔다 올건데 괜찮지?"
"음? 유키노네 집에?"
시즈카가 내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 유이한테 요리 가르쳐주는 걸 이번 주는 유키노네 집에서 하기로 했거든."
"아, 저번에 약속했던 그건가……."
요전에 유키노와 유이를 집으로 초대해서 자랑스럽게 요리 솜씨를 선보인 결과, 나는 유이와 요리를 가르쳐준다는 약속을 반강제로 나누게 되었다.
유이도 집에서 독립해 자취를 시작한 지 10년은 됐는지라 이제는 그럭저럭 먹을만한 음식을 만들게 되었지만, 그래 봐야 좋게좋게 봐줘서 초등학교 급식 수준의 미묘한 맛. 아직 배움이 더 필요한 건 사실이다.
집까지 찾아가 요리를 가르쳐주는 건 솔직히 귀찮지만, 유이가 자신의 맛없는 요리에 질려 인스턴트 음식만 먹다가 건강을 잃고 몸매도 잃게 내버려두는 건 오랜 친구로서 바람직한 행동은 아닐 것이다.
"……흠, 그런데 그 요리를 가르쳐주는 건 이렇게 매주 가르쳐주기로 약속한 건가?"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닌데. 매주 꼬박꼬박 가르쳐주러 가는 건 나로서도 귀찮고."
"……그런 것치고는 요즘 들어 툭하면 유이랑 유키노를 만나러 가는 것 같다만……."
시즈카가 TV로 시선을 되돌리며 말했다. 담담하게 말은 했지만, 내가 그녀들과 자주 만나는 게 내심 신경 쓰였던 건지, 미묘하게 섭섭한 감정이 담겨있었다.
"……어, 역시 유이나 유키노랑 자주 만나는 건 불편해?"
평일이나 휴일이나 큰 차이가 없는 전업주부다 보니 미처 실감하지 못했지만, 시즈카의 처지에서 생각해보면 남편이 주말만 되면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셈이니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심지어 성별도 여자고.
"아, 아니,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딱히 그런 건 아니다. 그냥 요즘 들어 부쩍 자주 만난다 싶었던 것뿐이다. 난 그렇게 속 좁은 여자가 아니라고. 게다가……."
으흠 하고 한 차례 헛기침을 한 시즈카가 잠시 뜸을 들이고는 장난스럽게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여자니까 만나지 말라고 해버리면 남편의 친구 수가 단숨에 반으로 줄어버리게 될 테고 말이지."
"……내 인간관계가 좁은 걸 디스하는 건 그만둬주실래요?"
그야 지금까지 연락하는 친구라고는 넷밖에 없으니까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아무튼, 괜찮다. 어차피 그날은 나도 친구 딸의 결혼식 때문에 나갔다 올 예정이니까."
"그래? 같이 안가도 괜찮겠어?"
"너하고는 안면도 없으니 굳이 같이 갈 필요는 없겠지. 결혼식이 끝난 후엔 친구들끼리 뒤풀이도 할 예정이니 그냥 나만 다녀오마."
"그런가. …………아니, 잠깐."
조금 전에 뭔가 터무니없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너무 충격적인 나머지 순간적으로 뇌가 받아들이는 걸 거부할 정도로…….
"…………누구의 결혼식에 간다고?"
"어? 어, 친구 딸의…… 결혼식이다만……."
그리고 거실은 정직에 휩싸였다.
나도 모르게 입이 떡 하고 벌어진다. 냉방을 해서 시원한데도 얼굴에서 땀이 줄줄 흐른다. 그런 나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시즈카도 살짝 굳은 얼굴로 움찔움찔 어깨를 움츠린다. 나는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어, 어어…… 그, 그렇군……."
침묵을 깨고 간신히 대답은 했지만, 너무 충격적인 나머지 뒤로 가면서 저절로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내 친구인 유이와 자이모쿠자는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시즈카의 친구는 벌써 자식이 결혼할 나이란 말인가……. 충격과 공포로 온몸에 소름이 돋는구먼…….
"아니, 그, 그 뭐냐…… 친구 중에 결혼을 일찍 한 친구가 있는데 걔 딸도 제 엄마처럼 결혼을 일찍 하게 되어서 말이다. 아하하하하!"
전율하고 있는 내게 시즈카가 변명하듯이 과장스러운 목소리로 주절주절 말하다 어색한 웃음을 터뜨린다.
"……덧붙여서, 친구 딸의 나이는?"
"어? 어, 걔가 몇 살이더라…… 아마 23살인가 24살인가 그럴 거다."
"호오, 24살이라……."
혹시 아직 학생인데 사고를 쳐서 속도위반으로 결혼하는 건가 생각했지만, 딱히 그런 건 아니었군. 결혼 평균연령이 점점 늦어지고 있는 걸 생각하면 빠른 편이긴 하지만, 나 같은 경우는 그보다 어린 나이에 결혼했으니까 말이지.
내 나이가 지금 37. 친구 딸의 나이가 24이라고 하면 13살 차이가 나는 셈이다. 그리고 13살 차는 나와 시즈카의 나이 차……. 그렇게 생각하면 아내 친구의 딸이 아니라 내 배우자여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 차군……. 뭐, 그럴 능력이 있을 때의 얘기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새삼 13살 연하의 제자와 결혼한 아내가 대단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오오, 우리 시즈카 능력자야! 영계 킬러! 완전 쩔어!
나는 존경 어린 미소를 지으며 시즈카의 어깨에 탁 하고 손을 얹었다.
"으음? 뭐냐, 그 묘한 미소는……."
"아니, 나도 참 능력 있는 여자랑 결혼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갑자기 뭔데…… 칭찬해도 아무것도 안 나온다고……."
전혀 예상치도 못한 말이었는지 시즈카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으음, 시즈카가 어느새 얼굴에 잔주름이 많이 늘었군…… 내년 여름방학 땐 주름제거 수술을 받아보라고 권해볼까…….
친구 딸의 결혼식이란 얘기를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나와 시즈카는 띠동갑 정도로 나이 차가 나니 이런 일이 생기는 건 오히려 당연하다. 그런 건 결혼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고, 충분히 각오한 일이다.
그러니까, 아내에게 폐경기가 왔다고 해서 권태를 느끼는 것도 웃기는 일이겠지…….
× × ×
주말의 오후 3시.
미묘한 시간대다 보니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전철을 이용하는 승객 수는 많지 않았다.
휴대폰으로 소설을 읽는데 정신이 팔린 나머지 역을 지나칠 뻔한 위기도 있었지만, 다행히 문이 닫히기 전에 내린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개찰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이 역에서 내려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대단히 멀지는 않지만 가볍게 찾아올 정도로 가깝지도 않은 거리. 이 역 근처에 유키노가 사는 집이 있다.
점점이 이어지는 사람들의 물결을 따라 전철역 동쪽 출구로 내려오자 출구 앞에 서 있던 유이가 보였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미소를 지으며 손을 작게 흔들어 오는 유이. 나는 유이에게 답하듯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이며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여어……."
"응, 오랜만! 잘 지냈지?"
계절은 가을로 접어들었지만,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새하얀 오프숄더 블라우스에 꽃무늬가 프린트된 파란 스커트를 입은 유이에게선 아직도 여름의 향기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37살의 아줌마가 입기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이는 복장이었지만, 30대 초로밖에 안 보이는 동안이라 그런지 나이에 안 맞게 무척 잘 어울린다.
"뭐가 오랜만이냐. 저번에 만나고 아직 일주일밖에 안 지났거든?"
과장된 그 말에 내가 쓴웃음을 짓자 유이가 에헤헤~ 하고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내 바로 옆에 선다. 날도 더운데 너무 가까운 거 아닌가 싶었지만, 은은하게 풍겨오는 플로럴 향기가 좋았기 때문에 굳이 거리를 벌리진 않기로 했다.
음음, 우리 시즈카도 이렇게 향수도 좀 뿌리고 다니면 좋을 텐데 말이지. 하치만은 아내가 외모관리에 너무 소홀한 거 같아서 걱정인 고야!
"유키농 기다리겠다. 빨리 가자."
"어. 여기서 가는데 얼마나 걸리냐?"
"별로 안 멀어. 걸어서 한 10분 정도?"
집에서 전철역까지 걸어서 10분 거리라니 나쁘지 않군.
굽높은 구두를 신은 유이에게 발걸음을 맞추며 낯선 길을 천천히 걷는다. 유키노네 집에 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한 마음은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유키노는 우리 부부나 유이와 달리 집들이 같은 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통 구경할 기회가 없었다. 친구라곤 해도 남자인 내가 남편도 있는 여자의 집에 놀러 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이혼하고 혼자 사는 지금에 와서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는 유키노의 전남편에게 괜한 오해를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감히 가볼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그렇다기보다, 유키노와 둘이서 만나는 일 자체가 없었다. …….뭐, 대화는 문자로 매일같이 나눴지만.
"그건 그렇고 왜 이런 애매한 시간대에 만나자고 한 거냐? 점심은 진작에 먹었을 거 아냐?"
"요리 배우는 거야 저녁때 하면 되지 뭐. 오늘은 그보다는 오랜만에 셋이서 놀려고 부른 거야."
"아니, 지난주에도 셋이서 놀았잖아……."
찜통더위에 에어컨이 고장 난 집에서 반나절이나 있었더니 더워 죽을 뻔했단 말이지……. 너무 더운 나머지 참다못해 결국 샤워실까지 빌리고 말았다.
고등학교 시절의 나였다면 아무리 본인이 먼저 권유했다고 해도 애인도 아닌 여자 집에서 샤워 같은 건 하지 않았겠지만, 30대도 꺾여버린 지금은 마음의 부끄러움보다 육체의 더위가 더 무거운 것이다. 부끄럽다든가, 쑥스럽다든가, 그런 쓸데없는 자존심은… 버리겠어!
"자주 보면 좋지 뭘.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보고 셋이서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났잖아?"
"뭐, 그건 그렇지."
불과 석 달 전까지만 해도 유키노를 만나는 건 1~2년에 한 번이 고작이었다. 유키노는 일이 바쁜 것도 있겠지만, 남편의 눈을 신경 써서인지 나와 만나는 걸 피해왔었다. 나는 남자고 유키노는 여자였으니까.
남녀인 이상 우리에게 그럴 마음이 없더라도 배우자나 제삼자에게 괜한 오해를 살 수 있는 거다. 시즈카처럼 이해심 많은 배우자는 흔치 않다.
그러니까 더는 예전처럼 셋이서 만날 수 없더라도, 유키노와 유이가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산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랬는데…… 유키노는 이혼하고, 유이는 아직도 남자 경험이 없는 노처녀인 상황. 예전처럼 셋이서 만날 수 있게 된 건 기쁘지만, 정말 이걸 기뻐해도 괜찮은 건지 잘 모르겠단 말이지…….
뭐, 그래도 유키노는 이혼하고 오히려 살맛이 난 모양이니까…… 예전에는 다함께 모인 즐거운 자리에서도 때때로 침통한 미소를 숨기지 못했던 유키노 씨가 지금은 볼때마다 얼굴에 웃음 꽃이 피어있단 말이지요. 죠셉의 피를 빨고 최고로 HIGH! 해진 DIO처럼 자유의 몸이 된 게 즐거워서 참을 수 없는 모양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걷고 있던 유이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치며 말한다.
"아, 맞다. 힛키 며칠 전에 유키농이랑 같이 영화 봤다며?"
"엉? 뭐, 그렇지.
수요일 네 시쯤이었던가, 뜬금없이 유키노에게서 오늘 저녁에 같이 영화 보자는 전화가 왔었다. 혼자서 영화 보기가 좀 그렇다나 뭐라나.
혼자서도 잘만 보던 애가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지만, 오늘이 상영 마지막 날이라는 절박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승낙해버렸다. 게다가 유키노가 아직 퇴근 전일 그런 시간대에 전화를 건 것도 처음이었으니까.
"좋겠다~ 나도 보고 싶은 영화 있었는데…… 무슨 영화 봤어?"
"60주년 기념 극장판 팬돌이 팬."
"팬돌이 팬?!"
유이가 으엑~ 하고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다 큰 어른 둘이서 애니메이션이라니……."
뭐, 유이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무슨 영화 볼 거냐는 내 말에 유키노가 손가락으로 판다 판 포스터를 가리켰을 땐 솔직히 나도 좀 깼거든.
그리고 동시에 왜 유키노가 내게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한 것도 이해가 갔다. 팬돌이 팬 같은 유아용 애니메이션을 30대 아줌마 혼자서 보거나 여자 둘이서 보는 건 확실히 허들이 높지……. 그런 점에서 나라면 남편처럼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닐 테니 아이에게 영화를 보여주러 온 부부를 가장해 자연스럽게 입장하는 게 가능하다.
아니, 잠깐만. 아이 역이 없었잖아? 이거 의미가 있었던 거냐?! ……뭐, 영화도 공짜로 봤고 밥도 공짜로 먹었으니까 상관없지만.
"유키농이 팬돌이를 좋아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영화관에서 애니메이션은 좀 깬다……."
"애니 무시하지 마라. 지금 흥행 1위를 달리고 있는 영화도 애니거든?"
4주만에 100만 관객을 넘어선 『극장판 러브라이브! 스토너 선샤인』.
러브라이버도 프로듀서도 제독도 옛날옛적에 졸업한 나는 당연히 보러 갈 생각이 없지만, 인터넷 정보에 의하면 40~50대의 남성 관람객도 적지 않은 모양이다.
으음…… 50이 넘는 아저씨가 영화관에서 아이돌 애니메이션을 보며 "최고다! μ’s 쨩!"하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아무리 그래도 소름이 끼치는군. 젊은 놈들에게 '할배 척추서요?'하고 놀림당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런 아무래도 좋은 생각을 하는 내게 유이가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쉰다.
"그건 그럴지도 모르지만 팬돌이 팬은 유아용이잖아……."
"유아용이라고 해서 어른이 보지 말란 법은 없거든? 오히려 어른 관객이 더 많을 정도라고. 출처는 나."
유아용 애니메이션이라는 건 보통 보호자가 함께 보는 법이니 어른 관람객이 아이 못지않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몸은 어른이지만 마음은 아이인 어른이 친구들도 있고.
내 말에 유이가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린다.
"힛키는 아직도 유아용 애니메이션을 보는 거구나…… 그런 점은 정말 변하질 않네……."
음음, 확실히 나는 변하지 않았지. 지금도 일요일 아침이면 꼬박꼬박 일어나 전대물과 애니를 보고 있거든. 외모도 젊은 시절에서 변하지 않았다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지요.
그렇게 덧없는 세월을 안타까워하며 망연히 하늘을 바라보며 걷고 있는데, 나란히 걷고 있던 유이가 갑자기 내 어깨를 톡톡 쳤다. 고개를 돌리자 유이가 손을 꼼지락거리며 조심스럽게 내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있잖아, 나도 보고 싶은 영화가 있는데……."
"뭐야, 너도 극장판 팬돌이 팬이 보고 싶은 거냐?"
"아니거든! 얼마 전에 개봉한 호러 영화가 보고 싶은데 혼자서는 좀 그래서……."
"야야, 너희 날 영화관 도우미로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니냐?"
머리를 박박 긁적이며 그렇게 대답하자 유이가 살짝 곤란하다는 듯이 웃는다.
나나 유키노와 달리 친한 사람이 많은 유이지만, 장르가 호러인 걸 생각하면 내게 부탁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싫어하는 사람은 정말 질색을 하는 게 호러라는 장르니까. 유키노도 겉으로는 태연한척하지만 실은 유령이나 귀신 같은 건 질색을 하니까 말이지.
"뭐, 어때. 힛키는 전업주부니까 한가하잖아?"
"……전업주부를 무시하지 말아 줄래? 나도 이것저것 할 일 많거든?"
드라마를 본다든가, 애니메이션을 본다든가, 독서를 한다든가, 운동한다든가, 게임을 한다든가 이것저것 많거든요?
게다가 주말이 되면 아내에게 평일에는 차려주지 않는 점심까지 차려줘야 한다. 어찌나 바쁜지 말하기가 민망할 정도군.
유이가 가늘게 뜬 눈을 내게 향하며 말한다.
"어차피 집에서 TV를 보거나 책을 읽거나 게임을 한다든가 하는 거겠지."
오오, 과연 이십 년 지기 친구. 나에 대해 무서울 정도로 잘 알고 있군. 이건 뭐라고 감탄 한마디라도 해줘야겠는걸.
"……어떻게 집에서의 내 모습을 그토록 잘 아는 거니? 혹시 스토커? 민폐 방지 조례라고 아니?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고 싶은 모양이지?"
"아하하하! 힛키가 유키농 흉내내는 거 진짜 오랜만에 듣네. 뭐, 지금은 그런 소리 안 하겠지만."
마지막으로 유키노의 흉내를 내본 게 거진 17년 전이다 보니 잘할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유이가 이렇게 빵 터진 걸 보니 나도 아직 죽지 않은 모양이군.
"아무튼, 같이 보러 갈 거지?"
"글쎄다? 요즘 들어 나 너무 자주 외출하는 것 같은데……."
딱히 싫은 건 아니지만 요즘 들어 외출이 잦았던 건 사실이다. 시즈카가 학교에 있을 평일 오전이나 낮이라면 상관없겠지만, 평일 저녁이나 주말에 자꾸 시즈카를 혼자 두고 놀러 나가는 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그러지 말고 같이 보자~ 나 개교기념일이라 다음 주 수요일은 쉬거든."
"그래? 으음……."
수요일 낮에 보는 거라면 만나는 것 자체는 문제없겠지만, 지금까지의 패턴을 생각하면 영화만 보고 바로 헤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뭐, 그래 봐야 일이천 엔 정도 더 쓰겠지만 요즘 들어 돈 쓰는 일이 잦다 보니 금전적으로 좀 부담이 된단 말이지…….
"요리 가르쳐주는 것도 있으니까 영화는 내가 쏠게."
"어디서 볼까?"
공짜로 보여주는 거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팝콘까지 사달라고 하는 건 좀 그러려나?
손바닥 뒤집듯 태세를 전환하자 유이가 조금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본다.
너무 그러지 마라. 시즈카와의 노후를 생각하면 되도록 돈을 아낄 수밖에 없다고. 아이가 없다 보니 시즈카가 벌어오는 돈만으로 집도 사고, 노후 자금도 어느 정도 모을 수 있었지만, 평균 수명이 길어진 걸 생각하면 여유를 부릴 순 없다. 이렇게 한 푼 두 푼 아껴두는 게 다 평온한 노후로 이어지는 거다.
으음…… 벌써 노후 걱정을 하는 건 좀 그런가? 아직 37살밖에 안 됐고……. 아니지, 시즈카는 50살이니까 걱정해야겠군.
게다가 비단 노후 자금이 아니더라도 돈을 많이 저축해둬서 나쁠 건 없다. 인생이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으니까. 어느 날 갑자기 뜻밖의 재난을 당하지 말란 법도 없는 거다.
하지만 10년도 넘게 이어져 온 이 평온한 일상이 무너져내리는 모습은 좀처럼 상상하기 힘들었다.
× × ×
번화가를 가로질러 조금 더 걷자, 고급 단독주택이 쭉 늘어서 있는 골목에 접어들었다.
유키노가 사는 단독주택은 그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건물이었다. 건설회사 사장인 아버지가 결혼선물로 해준 집이니 좋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현관문 앞에 멈춰선 유이가 거침없이 초인종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현관 벨도 고급품인 건지, 선명한 클레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잠시 말없이 기다리고 있자 자물쇠가 열리는 전자음 소리가 들리고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어서오렴."
어깨가 살짝 드러나는 검은색 캐주얼 드레스를 입은 유키노가 싱긋 웃으며 우리를 반긴다. 얘는 집에서 뭘 그렇게 차려입고 있는 거람……. 뭐, 보는 입장에선 후줄근한 티셔츠나 츄리닝 차림인 것보다는 훨씬 낫지만.
유키노가 안내하는 대로 통로를 지나 거실로 들어선다. 현관에 들어설 때부터 예감은 했지만, 우리 집과는 차원이 다른 호화로운 실내 인테리어에 저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그야말로 드라마 속 부잣집 같은 집이다.
"힛키, 어때? 유키농네 집 진짜 좋지? 2층 테라스에 잔디도 깔려 있어!"
"그래, 대단하네……."
근데 왜 네가 자랑스럽게 말하는 거냐? 너희 집이 아니라 유키노네 집이거든?
거실 옆에 있는 계단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2층만 있는 게 아니라 지하도 있는 모양이다. 다 합치면 100평은 확실하게 넘을 것 같다.
"시원한 차라도 내올 테니 거기 앉아있으렴."
"아, 나도 도울게~"
그렇게 말한 후 유키노와 유이는 거실을 뒤로했다. 여기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아무래도 통로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간 곳에 주방이 있는 모양이다.
거실에 있는 4인용 소파에 앉아있으니 정면에 설치된 대형 벽걸이 TV가 눈에 들어온다. 최신 모델은 아닌 것 같지만 크기를 생각하면 적지 않은 돈이 들었을 거다. 저 정도 크기라면 영화나 애니메이션도 한층 더 생생하고 박진감 넘치게 감상할 수 있겠군. 유키노는 팬돌이 팬을 비롯한 디스티니 애니메이션 감상이 취미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하려나.
뜻밖이었던 건 디스티니 애니메이션으로 가득 차있을 거로 생각했던 TV 진열장이 내 예상과는 달리 휑하니 비어있었다는 거다. ……흐음, 방에 따로 보관하고 있는 건가?
"뭘 그렇게 두리번 거리는 거니?"
소파에 앉은 채로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고 있었더니 어느새 주방에서 돌아온 유키노가 달각 소리를 내며 소파 앞 테이블 위에 컵을 내려놓았다. 커피 속에 든 얼음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갈증을 자극한다.
"아니, 뭐, 원래 남의 집에 처음 오면 그러는 거 법이잖냐."
유이도 우리 집에 처음 왔을 땐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이것저것 둘러봤거든. 예전엔 짜증 나게 뭘 그렇게 만져보고 둘러보는 건가 싶었지만, 막상 나도 유이네 집에 가니까 여기저기 살펴보게 되더란 말이지요.
그렇게 마음속으로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는데 유키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위로하듯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긴 넌 다른 사람 집에 가본 적이 거의 없을 테니 신기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구나."
"……한손으론 다 세지 못할 정도로 많이 가봤거든?"
애당초 친구가 적은 건 너도 마찬가지니까 그런 소리 해봐야 누워서 침 뱉기밖에 안된다고 생각합니다만? 뭐, 유키노는 회사생활을 오래 했으니 내가 모르는 친한 직장동료도 한두 명쯤은 있을 테고, 집에 가본 적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 봐야 도토리 키재기일 것이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구시렁거리고 있는 나를 보며 유키노가 피식하고 작은 소리로 웃는다. 그리고는 내 옆으로 다가와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보고 싶다면 자유롭게 둘러봐도 괜찮아."
"오, 그래?"
이따가 한번 둘러봐야겠군. 그렇지 않아도 한번 둘러보고 싶었는데 본인의 허가가 떨어졌으니 사양할 필요는 없겠지. 안방 같은 건 2층에 있는 것 같고, 지하실은 역시 주차장이랑 창고 같은 거려나?
"그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방의 서랍이나 옷장을 함부로 열지는 말렴."
"아니, 말 안 해도 안 열거든?"
RPG의 주인공도 아니고, 남의 집 옷장이나 서랍장을 뒤지는 상식 밖의 짓은 당연히 하지 않는다. 남자인 자이모쿠자라면 몰라도 일단은 여자고 말이지.
"근데 유이는?"
"유이는 잠시 화장실에 갔단다."
"그래?"
나는 테이블 위의 컵을 손에 들어 차가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우유와 연유를 넣은 것인지 흡사 MAX 커피 같은 내 취향의 단맛이 났다. 맛있어서 단숨에 들이키니 차가운 커피에 몸 안에 남아있던 열기가 단번에 씻겨내려 가는 기분이 들었다.
"맛있네. 드디어 너도 이 단맛의 훌륭함을 깨달은 거냐?"
"그럴 리가 없잖니. 네 것만 특별히 달게 한 거란다. 한잔 더 마실래?"
"아니, 지금은 됐어."
집이 넓다 보니 다시 주방까지 가게 하는 것도 좀 미안한 기분이 든다. 갈증도 가셨으니 커피는 이따가 저녁을 먹은 후에 부탁해도 충분하겠지.
컵 안에 남아있는 얼음을 으적으적 씹어먹고 있는데 뭔가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뭔데?"
아무리 20년 지기 친구라지만 유키노의 경우 유이와 달리 그동안 거의 만나지 못하기도 했고, 그렇게 옆에서 흐뭇한 미소로 쳐다보고 있으면 신경이 쓰인다. 내 말에 유키노가 싱긋 웃으며 늘씬하게 뻗은 새하얀 다리를 천천히 고쳐 꼰다.
"그냥 네가 이 집에 있다는 게 신기해서."
"……뭐, 나도 너희 집에 오는 날이 올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이렇게 예전처럼 셋이 모이는 일은 더는 없을 거로 생각했다. 나도 유키노도 결혼해서 각자 가정이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매일 같이 주고받는 메시지도 점점 뜸해져, 언젠가는 완전히 끊겨버리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 자신을 타이른들 가슴 한편의 쓸쓸함과 안타까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는 아련해진 그 시절처럼 또 셋이서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은 계속 존재해왔다.
그러니까, 사실은 이런 생각은 하면 안 되지만…… 친구 실격일지도 모르지만…… 유키노가 이혼한 걸 기쁘게 생각하는 내가 있다.
× × ×
셋이서 시시껄렁한 잡담을 나누고 이어지는 유키노의 요리 강좌가 끝났을 때는 어느새 저녁이 되어있었다. 초가을의 하늘은 아직 노을에 물들지 않은 채였지만, 저녁 식사를 하기에는 적당한 시간이다.
한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유키노와 유이가 만들어댄 요리의 개수는 상당해서, 주방 옆에 있는 6인용 식탁을 가득 채울 정도였다. 갓 만들어진 요리들에서 풍기는 향기로운 냄새가 식욕을 자극한다.
다만, 요리의 구성은 꽤 편중되어있어서 저녁 식사라기보다는 술안주로 먹기에 적절한 요리들뿐이었다. 유키노가 냉장고에서 꺼내온 술들로 보건대 아무래도 처음부터 마실 작정이었나 보다. 저 술을 마실 거라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 말이지요…….
"뭐야, 오늘 술 마시는 거였어?"
"저번에 우리 집에서 모였을 때나 힛키네 집에서 모였을 땐 안 마셨잖아? 그러니까 오늘은 오랜만에 셋이서 달려보려고~"
하기야 셋이서 술을 마시는 건 실로 오랜만이긴 하다. 마지막으로 셋이서 마신 게 언제였더라…… 흐음, 시즈카와 결혼하기 직전에 마신 게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는 건 무려 15년 반 만에 셋이서 마시는 셈이군. 어쩐지 유이에게 요리를 가르쳐주는 것치고는 과하게 만든다 싶었다.
"미리 좀 말해주지 그랬냐. 술 마실 줄 알았으면 숙취해소제라도 준비했을 텐데."
술에 강한 편도 아닌 데다가 술에 취해 대형사고를 친 적도 있다 보니 술을 많이 마실 때는 항상 숙취해소제를 같이 마시고 있다. 만약 술을 마신다는 걸 알고 있었다면 미리 숙취해소제를 준비해왔을 것이다.
"우리끼리 유키농네 집에서 마시는 건데 뭐 어때~"
"그래, 오늘은 그런 건 신경 쓰지 말렴."
"그것도 그런가……."
자신의 주량은 알고 있으니 위험할 것 같으면 그만 마시면 될 일이다. 이제 와서 편의점으로 사러 가는 건 너무 번거롭고, 이 동네는 지리도 잘 모르니 오늘은 그냥 마셔야겠군.
"우선은 한잔 씩 받고 건배부터 하자꾸나."
그렇게 말하며 유키노가 병따개로 맥주병을 딴다. 뽕 하는 경쾌한 소리가 기분좋게 귓가를 스친다. 옆에 앉은 유이가 유리잔을 쥐고 옆으로 손을 내밀자 유키노가 두손으로 병을 쥐고 조심스럽게 맥주를 따랐다.
"하치만도 한잔 받으렴."
"어, 고맙다."
유리잔을 앞으로 살짝 기울이며 내밀자 유키노가 유이에게 그랬던 것처럼 잔 가득 맥주를 따라준다. 노란 맥주 위로 올라오는 하얀 거품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꿀꺽 침을 넘어갔다. 역시 더운 여름에는 시원한 맥주지! 시즈카가 워낙 술을 좋아하다 보니 예전에는 여름만 되면 밤마다 둘이서 한 잔씩 마셨을 정도다.
뭐, 사실 나는 맥주보다는 달콤한 칵테일을 더 좋아하지만, 칵테일이라는 게 기본적으로 맥주보다 훨씬 비싸다 보니 자주 마시지는 않고 있다. 그래, 돈 때문에 그런 거지 결코 시즈카와 자이모쿠자에게 여대생 같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잔을 식탁 위에 내려놓자 유키노가 말없이 맥주병을 내게 건넨다. 나는 병을 받아쥐고 유키노가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에게 맥주를 따라줬다.
세 명의 잔에 맥주가 다 차자 유이가 자신의 잔을 들어 올리며 활기차게 말한다.
"그러면 다 같이 건배하자!"
녀석도 참…… 그렇게 신나니? 하긴 친한 친구들끼리 이렇게 맛있어 보이는 요리와 맛있을……지도 모르는 요리와 함께 마시는 술이니 마음이 들뜨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유키노도 즐거운 듯이 웃고 있고, 나 역시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갈 정도다.
나와 유키노가 맥주잔을 들어 올리자 유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한다.
"그러면 음…… 조금 늦었지만, 우리 세 사람의 재회를 기념하며 건배!"
"건배."
"오, 건배."
잔을 뻗어 유키노와 유이의 잔에 가볍게 부딪힌 후 차가운 맥주를 꿀꺽꿀꺽 들이켠다. 맥주를 반쯤 비운 나는 만족스러운 한숨과 함께 식탁 위에 잔을 내려놓았다.
시즈카와 같이 마실 때는 취기가 오른 시즈카의 강요로 원샷을 하기 일쑤였지만, 오늘은 유키노, 유이와 셋이서 마시는 거니 천천히 즐겨도 문제없을 것이다.
입가에 묻은 맥주를 손등으로 쓱 닦아낸 나는 젓가락으로 내 자리 앞에 놓인 카라아게를 하나 집어 들었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은 유이가 그런 내 모습을 힐끔힐끔 쳐다본다. 호오, 아무래도 이건 유이가 만든 카라아게인 모양이군.
"이 카라아게는 네가 만든 거냐?"
"아하하…… 눈치챘어?"
"뭐, 보면 알지."
숙련된 요리사가 만든 것 같은 잘 만든 요리들 속에 다소 어설픈 요리가 섞여 있으니 그야 눈에 띌 수밖에.
하지만 유키노의 요리가 너무 뛰어나서 그런 거지 유이의 요리가 못 먹을 정도로 형편없는 건 아니다. 조금 과하게 노릇노릇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겉보기엔 합격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요리에서 가장 중요한 건 결국 맛. 암컷이든 수컷이든 맛있으면 그만 아닐까?
나는 카라아게를 입에 넣고 천천히 음미했다.
"맛은 좀 어때……?"
"흐음……."
솔직히 미묘하구먼. 맛없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맛있다고 할 정도도 아니다. 좋게 말해도 나쁘게 말해도 평범한 맛이다. 그래도 학생 시절의 처참했던 요리 실력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이라 할 수 있겠다.
유이가 살짝 긴장한 얼굴로 내 말을 기다린다. 유이에게 요리를 가르치는 건 유키노가 혼자서 다 했기 때문에 굳이 말하자면 오늘의 나는 맛을 보는 심사원역이다. 내가 좋아하는 요리들이 많은 것도 아마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한 전략이겠지.
솔직히 맛은 그저 그렇지만 유이의 노력을 평범하다고 말 한마디로 일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흠~ 뭐라고 말하는 게 좋으려나…… 유이의 자신감 상승을 위해 요리만화에 나오는 것처럼 화려한 리액션을 펼치며 칭찬을 쏟아낼 수도 있겠지만…… 친구 사이에 그런 겉치레는 필요 없겠지.
"가게에서 파는 것 같은 맛이네."
"어? 진짜!?"
가게에서 파는 것 같다는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였는지 유이가 활짝 미소를 지어 온다. 하지만 말이란 건 끝까지 들어봐야 하는 법.
"어. 주변에 다른 카라아게 가게가 없다면 아쉬운 대로 가끔 사 먹을 것 같은 맛이다."
"……칭찬한 거 아니었어!?"
"미묘한 평가구나……."
유이가 에휴 하고 한숨을 쉬며 어깨를 살짝 늘어뜨린다. 아니,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하는 법이래도.
"……뭐, 엄청나게 맛있는 건 아니지만, 돈 주고 사 먹을 수 있는 정도는 된다는 거지. 그래도 예전보다는 훨씬 나아졌으니까 계속 연습하면 점점 더 맛있어지지 않겠냐?"
머리를 긁적이며 그렇게 말하자 유키노가 내게 호응하듯 유이에게 따스한 시선을 보낸다.
"그래, 나나 하치만이 앞으로도 도와줄 테니까 분명 더 잘 만들 수 있을 거야."
"……그렇겠지?"
유이가 수줍은 듯 에헤헤 웃고는 잔에 남아있는 맥주를 기분 좋게 들이킨다. 그 모습에 나와 유키노도 남아있는 맥주를 마저 들이켰다.
평소 마시던 것과 똑같은 맥주일 텐데도 오늘의 맥주는 유난히 맛있게 느껴졌다.
× × ×
시간의 흐름은 다르지 않을 터인데도 즐거운 시간은 빠르게 지나간다. 문뜩 시간을 확인해보면 어느새 술을 마시기 시작한 지 두 시간이나 지나있었다. 식탁 아래에 적당히 내려놓은 빈 병과 캔도 어느새 제법 쌓여있다.
집에 돌아갈 걸 생각해서 무리하지 않고 느긋하게 마셨는데도 이제는 혀가 살짝 꼬이는 느낌이다. 술에 강한 유키노는 여전히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나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주량을 가진 유이는 취기에 뺨과 귀 끝이 살짝 붉어져 있다. 얼굴에서 느껴지는 열기를 생각하면 아마 내 얼굴도 크게 다르지 않겠지.
그러나 실시간으로 취해가는 유이와 달리 멀쩡하다가 한순간에 확 가버리는 타입인 내 정신은 아직 말똥말똥한 상태다. 이대로 계속 마시다가는 내 안에 잠들어있는 또 하나의 내가(주정뱅이) 깨어나 버릴 가능성이 있지만 아직은 안전권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내 주량은 둘째 치더라도 이제는 배가 꽉 차버렸다. 무리하면 더 못 마실 것도 없겠지만, 기분 좋게 적당히 취기가 오른 이쯤에서 끝내는 게 개인적으로는 최고라 할 수 있겠다.
"야, 이제 슬슬 끝내는 게 좋지 않겠냐?"
내가 그렇게 말하자 유키노가 눈살을 찌푸리며 어이없다는 듯이 말한다.
"이제 겨우 8시밖에 안 됐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그래!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고!"
"너희는 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술을 좋아하게 된 거냐……."
유이는 그렇다 치고, 유키노시타 양은 제가 알기로 딱히 술을 좋아하지 않았던 거로 기억하는 데 말이지요. 제대로 만나지 못했던 지난 15년간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걸까요…….
회사생활을 하면서 회식 등에서 어쩔 수 없이 마시는 사이에 술맛을 알게 된 걸까, 아니면 술로 마음을 달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일들이라도 있었던 걸까.
매일 같이 메일을 주고받았다고 해서 유키노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고민이 있는지를 훤히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얼굴도 보이지 않는 메일로 주고받는 대화로 알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내게는 말해주지 않은 괴로운 일도, 힘든 일도 분명 셀 수 없을 만큼 있었겠지.
"아니, 이미 충분히 마셨잖아. 이 이상 마시면 멀쩡하게 집으로 돌아갈 자신이 없다고……."
"아직 더 마실 수 있다는 거 다 안다고! 이렇게 오랜만에 셋이서 마시는 건데 이러기야?"
"그래, 술은 아직도 잔뜩 남아있단다."
그런 말을 들으면 마음이 약해진다. 1, 2년 정도라면 모를까 무려 15년 반 만에 셋이서 마시는 거니까. 요리와 술을 이렇게 잔뜩 준비한 걸 생각하면 유키노도 유이도 오늘 이렇게 마시는 걸 기대하고 있었던 거겠지. 배도 부르고 취기도 올랐지만, 오늘 하루 정도는 무리할 수밖에 없겠군.
"알았다 알았어. 더 마시면 되잖아."
"좋아~! 오늘은 밤새도록 달리는 거야~"
내가 머리를 긁적이며 답하자, 유이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오코노미야키를 집어 입에 넣는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밤새도록은 무리겠지…….
나는 밤새도록 술을 마셔본 적이 없다. 시즈카가 워낙 술을 좋아하다 보니 나도 덩달아 자주 마셨지만, 나 자신은 특별히 술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애당초 주량이 많지 않기 때문에 밤을 새우기 훨씬 전에 뻗어버린단 말이죠. 아무리 도수가 높지 않은 맥주라고 해도, 지금 같은 페이스로 계속 마신다면 10시쯤에는 확실하게 한계에 다다를 것이다. 이제부턴 유키노와 유이의 페이스에 맞추지 말고 좀 더 천천히 마셔야겠군.
"……그러고 보니 오늘을 위해 준비해둔 특별한 술이 있었구나. 이것저것 준비하다 보니 깜빡 잊고 있었어."
"어라? 그런 게 있었어?"
헤에, 오늘을 위해 준비한 술까지 있는 건가. 오늘은 생각지도 못하게 호강을 하는군.
준비해둔 술이라는 게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유키노가 특별하다는 말을 할 정도니 값싼 술은 아닐 것이다. 특별히 술을 좋아하는 건 아닌 나지만, 값비싼 술을 마실 기회가 좀처럼 없는 일반서민인지라 조금 흥미가 동하는군.
"이거란다."
유키노가 냉장고에서 꺼내온 차가운 술병과 샴페인 잔 세 개를 차례차례 식탁 위에 내려놓는다. 검게 빛나는 술병에 붙어있는 포도잎을 닮은 금색 라벨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아…… 이거……."
유이가 조금 놀란 표정으로 두세 차례 눈을 깜빡이고는 조심스럽게 시선을 유키노 쪽으로 돌린다. 호오, 어떤 건가 했더니 이거였나. 놀랄 정도의 술은 아니지만, 확실히 특별하다면 특별한 술이다.
"돔 페리뇽인가. 옛날 생각나네."
대학교 시절, 유키노의 맨션에서 그녀의 생일을 축하하며 마셨던 술.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셔본 한 병에 2만 엔이 넘어가는 고가의 샴페인. 물론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기억하고 있었구나."
"응? 어, 그야 기억하지. 네 생일에 같이 마셨던 거니까."
유키노가 의외라는 듯이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기쁜 것처럼 희미하게 웃는다.
"……그런 옛날 일, 너는 진작에 잊었을 거로 생각했어."
"그럴 리가 있겠냐. 난 기억력이 꽤 좋다고."
어찌나 기억력이 좋은지 중학교 시절의 흑역사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을 정도다. 이젠 슬슬 잊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하지만 뭐, 딱히 기억력이 좋지 않았더라도 그날의 일은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을 거로 생각한다. 그날은 내가 실제로 만나서 유키노의 생일을 축하해줄 수 있었던 마지막 날이었으니까.
"너야말로 15년도 전에 샀던 걸 잘도 기억하고 있네."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니까. 그날의 일은 무엇 하나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어."
"…….응, 그러네."
한참을 말없이 술병을 바라보고 있던 유이가 유키노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차분한 목소리로 말한다.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젊은 날의 추억을 그리고 있기 때문일까, 그녀들의 미소는 아까까지의 들뜬 분위기 대신 어딘가 침통한 느낌이 담겨 있었다.
으음, 즐거운 추억이었을 터인데 이 무거운 분위기는 뭐람……. 하기야 가는 세월이 덧없긴 하지요.
"……그러면 어디 오랜만에 샴페인 맛 좀 볼까."
"그, 그렇네……."
그 말에 유이가 어색한 분위기로 쭈뼛쭈뼛 대답하더니, 무거워진 분위기를 수습하기라도 하듯이 유키노 쪽을 쳐다보며 밝은 목소리로 말한다.
"이야~ 난 그때 이후로 처음 먹는 거라 어떤 맛이었는지도 잊어버렸지 뭐야~"
"나도 이걸 마시는 건 그때 이후로 처음이구나."
보기보다 돈에 깐깐한 유이가 저런 말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유키노까지 그때 이후로 처음이라는 건 조금 의외인데…… 이 녀석, 제법 높은 직급이니까 돔 페리뇽 정도의 술을 마실 기회는 충분히 있었을 것 같은데 말이지.
하기야 단순히 취향이 아니라서 안 마셨던 것뿐일 수도 있다. 이번에 이 술을 준비한 건 어디까지나 우리 세 사람에게 있어 추억이 담긴 술이기 때문이리라.
유키노가 코르크를 덮고 있는 포장재를 벗긴 후 케이지의 매듭을 푼다. 그리고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둥글게 말아 코르크 윗부분을 감싸고는 왼손으로 샴페인 병 아랫부분을 잡고 역방향으로 돌려 간단히 코르크를 뽑아낸다. 이렇게 간단히 코르크를 뽑아내는 걸 보니 아무래도 샴페인 병을 따는 게 익숙한 모양이다.
"샴페인이니까 뽕~ 하고 코르크가 날아갈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네."
유이가 조금 아쉽다는 듯이 그렇게 말하자 유키노가 유키노가 피식 웃으며 부드럽게 말한다.
"그래선 비싼 샴페인을 흘려버리잖니. 일부러 코르크가 날아가지 않게 딴 거란다."
"하긴 그것도 그렇군. 그건 그렇고 샴페인 코르크를 따는 방법도 여러 가지 있나 보네."
케이지를 잡아당겨서 코르크를 뽑는 게 아니라 병을 돌려서 뽑는 걸 보니 와인을 따는 방법은 내 생각 이상으로 여러 가지가 있는 모양이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유키노가 장난스러운 톤으로 말을 잇는다.
"하긴 너는 맥주 정도나 마시는 모양이니 모르는 게 당연하겠구나."
"맥주만 마시는 건 아니거든? 맥주보다는 KGB 같은 걸 더 좋아하거든?"
"KGB……? 러시아의 정보기관을 말하는 건 아닐 테고……."
유키노가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자, 옆에서 보고 있던 유이가 쓴웃음을 짓는다.
"KGB라고 과일 맛 나는 보드카가 있어. 아무튼, 힛키는 진짜 단 걸 좋아한다니까."
"뭐, 그렇지. 인생은 쓰니까 커피랑 술 정도는 달게 먹고 싶거든."
썩은 미소로 의기양양하게 말하자 유이와 유키노가 미간을 찡그리며 차가운 시선으로 나를 쳐다본다.
"우와…… 그게 힛키가 할 소리야?"
"기둥서방처럼 편하게 살고 있으면서 잘도 그런 말을 하는구나."
으음, 이런 차가운 모습을 보는 것도 참 오랜만이군……. 확실히 제가 할 말은 아니었네요. 부모님이나 시부모님을 모시는 것도 아니고, 아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나가서 돈을 벌어오는 것도 아니니까요.
아침저녁으로 시즈카의 식사를 차려주고, 청소와 빨래만 하면 나머지는 기본적으로 자유시간인 이지 모드의 전업주부인 거다. 어찌나 편하게 사는지 종종 이래도 괜찮은 건가 싶을 정도란 이 말씀!
"그보다 빨리 마시기나 하자고~"
굼벵이 앞에서 주름을 잡은 민망함에 내가 말을 돌리자 유키노가 피식 웃음을 지으며 샴페인 병을 들어 올린다.
"그래, 먼저 받으렴."
"오, 오오. 땡큐."
나는 가까이에 있는 샴페인 잔을 하나 들어 따라주기 좋게 앞으로 내밀었다. 유키노가 천천히 샴페인을 따르자 어두운 금색 액체가 톡 쏘는 소리를 내며 새하얀 거품이 일으킨다.
"뭔가 꼭 파티라도 하는 것 같구먼."
유키노에게 샴페인 병을 건네받아 그녀의 잔에 천천히 따르며 말하자 유키노가 싱긋 웃으며 말한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구나."
"그렇네. 케이크라도 하나 사올 걸 그랬나? 아, 힛키, 나도 따라줘~"
"그렇게 먹고도 아직 케이크가 들어갈 자리가 있는 거냐? 너 그러다 살찐다."
이렇게 많이 먹어놓고선 그런 소리가 나온다는 게 감탄스럽기도 하고 어이가 없어서 그렇게 말하자 유이가 뾰로통하게 뺨을 볼록 부풀리며 나를 째려본다.
"스포츠 클럽에서 꾸준히 운동하고 있으니까 괜찮다고!"
그것도 그런가. 뭐, 애초에 먹는 게 전부 가슴으로 가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인 가하마 씨니 하루 이틀 과식을 했다고 해서 돼지가 되는 일은 없겠지.
"우선은 건배부터 하자."
나와 유이의 대화가 우스웠는지 유키노가 훗 하고 엷게 웃음을 지으며 샴페인 잔을 들어 올린다. 유키노를 따라 나와 유이도 식탁에 내려놓았던 잔을 들어 올렸다.
"아, 모처럼이니까 건배의 말이라도 하자! 으음~ 앞으로도 우리 세 사람이 계속 함께할 수 있기를 바라며…… 건배!"
"건배."
"오오, 건배."
잔을 내밀어 유키노와 유이의 잔 끝에 살짝 부딪힌 후 그대로 입가로 가져간다. 브리오쉬와 꽃향기가 한데 어우러진 듯한 좋은 향기가 코를 간질이고, 새틴과도 같은 부드러움이 혀를 사로잡는다. 천천히 음미하며 한 모금 꼴깍 삼키자, 레몬처럼 톡 쏘는 맛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혀를 자극한다.
음음, 과연 돔 페리뇽. 2, 3천엔 하는 저가의 샴페인과는 차원이 다르군. 이 술을 처음으로 마셔본 대학생 시절에는 아직 술맛을 잘 몰랐기 때문에 제대로 된 감상조차 말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이 술의 훌륭함을 알 수 있다.
"완전 맛있네. 매일같이 마실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문뜩, 오래 전에 읽은 어린 왕자에 나오는 주정뱅이와 왕자의 대화가 떠올랐다.
'술은 왜 마셔요?'
'잊기 위해서'
'무엇을 잊으려고요?'
'슬픈 것을 잊어버리려고.'
'무엇이 슬픈데요?'
'술이 줄어드는 게 슬퍼!'
어린 시절엔 어이없고 한심할 뿐이었던 주정뱅이의 마음을 지금은 알 것 같구먼. 근데 내용이 저게 맞던가?
그런 생각을 하며 반 이상 비어버린 잔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는데 피식하고 작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니 어느새 잔을 내려놓은 유이와 유키노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게 마음에 들어? 옛날엔 덤덤한 반응이었는데 의외네."
"뭐, 그때는 술맛 같은 건 잘 몰랐으니까."
그 무렵에 내게 돔 페리뇽 같은 고급술은 아까운 것이다. 편의점 츄하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뭐, 츄하이도 달곰하니 맛있으니까 나쁘지 않지만.
청주 같이 쓴 술은 질색이지만 달곰한 과실주 같은 건 싫어하지 않는다. 이 돔 페리뇽 정도로 맛있는 술이라면 오히려 매일같이 마시고 싶을 정도다.
"매일은 무리지만 그렇게나 마음에 들었다면 또 맛보여 줄 수도 있단다."
"오, 진짜로!?"
생각지도 못한 발언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지고 만다. 이 녀석, 2~3만엔 하는 술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줄 정도로 돈이 많은 건가…….
하기야 유키노는 기본적으로 연봉이 높은 데다가, 집도 결혼 선물로 부모님께 받은 거고, 아이가 없어서 양육비로 들어간 것도 없으니 지금까지 모은 돈이 적지는 않을 것이다. 연중행사로 한 번씩 쏘는 거라면 딱히 부담스러운 일도 아니겠지. 이야~ 내가 정말 친구 하나는 잘 뒀구먼!
"그래. 물론 네가 하는 걸 봐서지만."
"……엥? 그거 전형적인 악덕 업주의 대사 아니냐?"
공명정대한 유키노 여사니 인터넷의 흔한 사연들 속 악덕 업주처럼 결과물이 시원치 않다며 약속했던 급료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일은 없겠지만, 돔 페리뇽 가격에 상응하는 요구를 할 것 같아서 솔직히 무섭단 말이지.
"걱정 마렴. 무리한 요구한 요구를 할 생각은 없으니까. 그저 지난번처럼 내가 나오라고 부를 때 잘 나오기만 하면 된단다."
"……아니, 충분히 무리한 요구인데요. 저도 예정이라는 게 있으니까 자꾸 그렇게 갑자기 나오라고 불러대면 곤란하거든요?"
이 녀석, 그렇게 만날 사람이 없는 건가……! 대학교 시절엔 나와 유이 외에도 친구가 있었고, 사회생활을 한 지도 꽤 됐으니 사적으로 친하게 지내는 직장 동료도 한둘쯤은 있을 법한데 말이지.
뭐, 대학교 시절의 친구는 나도 연락이 끊긴 지 오래니 남 말 할 처지는 아닌가. 게다가 연락이 끊기지 않았더라도 지금쯤이면 애 엄마가 되어있을 가능성이 크니 나나 유이처럼 마음 편히 호출하기는 힘들지도 모르겠다.
"힛키가 예정이라고 해봐야 시즈카 선생님의 식사를 차려주는 것 정도잖아."
"야야, 밥 차려주는 걸 무시하지 말라고. 아침저녁으로 남편한테 컵라면만 차려줬다가 이혼당했다는 사연 못 들어봤냐?"
학생 시절 땐 곧잘 전업주부가 돼서 일 안 하고 편하게 살고 싶다고 말했던 나지만, 열심히 일하고 돌아온 아내의 식사마저 대충 차려줄 정도로 일하기 싫었던 건 아니다. 일하지 않고 편하게 먹는 밥도 맛있지만, 역시 조금은 일을 하고서 먹는 밥이 더 맛있는 법이다. 이렇게 편한 생활을 보낼 수 있게 해주시는 아내님을 위해 식사 정도는 정성을 들여 차려주지 않으면 양심에 찔리는 거다.
뭐, 이렇게 말하는 나도 결혼 초기에는 매일같이 카레만 만들고, 시즈카가 집에 돌아왔을 때도 소파에 누워 게임을 하면서 왔냐고 건성으로 고개만 까딱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러다가 어느 날 결국 시즈카가 폭발해서 주저앉아 울어버렸단 말이지요……. 그때 일은 정말이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
"식사야 미려 차려두고 가면 되잖니. 매일 같이 나오라고 부르는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유난을 떠는 걸까."
"아니면 힛키는 우리랑 자주 만나는 게 귀찮은 거야?"
"아니, 그런게 아니라…… 그 뭐냐, 나도 일단 유부남이고……."
유키노나 유이와 만나는 게 귀찮다든가 싫다든가 하는 건 아니다. 귀찮은 마음이 조금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즐거운 마음이 더 크다. 하지만 아내가 있는 몸으로서 그녀들과 너무 자주 만나는 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아…… 그렇네……."
"……하긴, 그것도 그렇구나."
유키노가 짧게 한숨을 쉬며 남은 샴페인을 들이키고, 옆에 있는 유이도 뺨을 긁적이며 쓴웃음을 짓는다.
본인들에게 그럴 생각이 없더라도 결혼한 몸으로 이성 친구와 자주 만나면 주변 사람들에게 바람을 피운다는 오해를 사기 십상인 거다. 유키노가 결혼한 이후로 나와 둘이서 만나는 걸 피했던 것도 그 때문이니 내 입장은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시즈카 선생님이 힛키가 우리랑 만나는 걸 신경쓰시는 건 조금 의외네."
"시즈카 선생님도 선생님이기 이전에 여자인 모양이구나."
"너희가 여자라서 신경 쓴다기보다는 자기만 혼자 두고 자꾸 놀러 나가는 게 불만인 모양이지만."
우리 시즈카가 겉보기엔 남자답고 호쾌해 보여도 은근히 마음 여리고 외로움이 많단 말이죠. 다른 집 아내들은 남편이 휴일에 온종일 집구석에 박혀있는 걸 보고 있으면 열불이 터지는 모양이던데 우리 시즈카는 싫어하긴커녕 오히려 옆에 있어 주는 게 좋은 모양이다.
결혼한 지 15년이나 지났음에도 이렇게 변함없이 사랑해주는 건 기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아이가 없어서 더 그러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 씁쓸한 기분도 든다.
"아무튼, 요즘처럼 자주 보는 건 힘들다 이거다.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만나는 게 적당하겠지."
"정말 매정하구나. 시간도 많으면서 일주일에 몇 시간 시간을 내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니?"
"그래, 한 달에 한두 번은 너무 적다고!"
"아니, 그러다 내가 집에서 쫓겨나면 너희가 책임이라도 져줄 거냐?"
지금도 살짝 불만이 쌓인 모양인데, 이대로 주말마다 유키노와 유이를 만나러 나가는 생활을 계속했다간 언젠가는 시즈카의 불만이 폭발해 날 집에서 쫓아내고 말 거다. 설마 이혼하자는 말까지는 하지 않겠지만, 이제는 그립기까지 한 시즈카의 말살의 라스트 블릿은 틀림없이 맛보게 되겠지.
아내를 소홀히 하고 놀러 다니다 화가 난 아내에게 쫓겨났다는 사실을 들키는 날엔 부모님이 날 죽이려고 들 테니 친가는 무리고, 토츠카네도 유도 선수 출신의 무서운 형수님이 허락해줄 리 없으니 무리고, 이건 도쿄에서 혼자 사는 자이모쿠자의 집에 신세 지는 수밖에 없겠군.
하지만 신세를 지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4일쯤 지나면 언제든지 자고 가도 괜찮다고 했던 자이모쿠자 녀석도 이젠 그만 돌아가는 게 어떻겠냐고 말할 게 틀림없다. 그리고 돈도 없고, 갈 곳도 없는 나는 제발 용서해달라며 시즈카에게 도게쟈를 하게 되겠지. 음음, 안 봐도 뻔하군.
그런 나의 입장은 아랑곳도 하지 않는 건지 유이는 생글생글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인다.
"정 갈 데가 없으면 우리 집에서 며칠 재워줄 수도 있는데?"
"아니, 너희 집 남는 방도 없잖아……."
"남는 이불은 있으니까 내 침대 옆에 깔아줄게."
얘는 또 뭐라는 거야……. 그냥 별 생각 없이 한 말이겠지만 쑥스러우니까 그런 미묘한 말 좀 하지 말아 줄래?
"멍청아,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지만 내가 여자인 너랑 같은 방에서 잔다는 게 말이나 되냐?"
"괜찮아. 난 힛키를 믿고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방긋 웃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감동하게 된다. 이것이 20년간 쌓아올린 신뢰라는 건가……. 그 신뢰에 답하기 위해 나도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답한다.
"아니, 네가 나를 덮칠까 봐 걱정된다고……."
"아, 그런 뜻…… 이 아니라 실례거든?! 아, 안 덮칠 거거든?!"
"걱정 마렴. 빈방이라면 우리 집에 많으니까."
어머, 진짜!? 그렇다면 언제 집에서 쫓겨나도 안심! ……일리가 있겠냐.
"야야, 너희랑 너무 자주 만나는 것 때문에 싸워서 쫓겨난 판국에 너희 집에서 신세라도 지는 날에는 이혼 루트 확정이거든? 누구 인생 망칠 일 있냐."
"실례잖니. 이혼 한 번 했다고 해서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니란다."
유키노가 눈살을 찌푸리며 조금 토라진 것처럼 그렇게 말한다.
"아, 미안……. 근데 너랑 나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고. 너야 집도 있고 모아둔 돈도 있지만 난 15년 동안 살림만 하다가 맨몸으로 사회에 뛰어들게 되는 거니까."
"확실히 막막할 것 같긴 하네. 위자료도 많이 못 받을 것 같고."
대학 졸업과 동시에 취집을 했기 때문에 모아둔 돈도 없고, 나이는 많은데 경력이라고 할만한 게 없다 보니 제대로 된 회사에 취직하는 것도 막막한 상황이다. 요리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지만, 전문적으로 배운 사람들에 비할 바는 아니니 당장은 동네 식당의 주방보조 정도가 한계겠지. 이혼이라도 당하는 날에는 정말로 답이 없는 거다.
"……뭐, 그렇지 않다고 해도 이혼 같은 걸 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시즈카는 내게 있어 여동생인 코마치만큼이나 소중한 존재다. 금전적인 어려움을 떠나서 이제 와서 시즈카가 없는 인생은 상상할 수가 없는 거다.
"헤에~ 추호도 없는 거구나."
"응? 뭐야 너. 내가 시즈카와 이혼하길 바라기라도 하는 거냐?"
그럴리야 없겠지만 어쩐지 의외라는 듯이 말하는 유이의 대답에 내가 얼굴을 찡그리자, 유이가 당황한 얼굴로 황급히 손사래를 친다.
"엑? 그, 그럴 리가 없잖아. 그냥 요즘은 3명 중 1명은 이혼을 한다는데 힛키네는 정말 사이가 좋구나 싶었던 것뿐이야."
"그렇네. 진작에 애정이 식었지만 아이 때문에 마지못해 같이 사는 부부도 많다더구나."
확실히 아이를 생각해서 이혼을 참는 경우는 적지 않다. 자녀들이 모두 독립할 때까지 참고 살다가 60이 넘는 나이에 이혼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 만약 유키노에게 아이가 있었다면 유키노 역시 아이를 생각해 마지못해 참고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뭐, 예전처럼 설레고 그러는 건 없지만 시즈카랑은 성격도 맞고, 취미도 잘 맞는 편이니까. 지금도 일요일 아침이면 곧잘 나란히 소파에 앉아서 애니를 보고 있고."
"그거 시즈카 선생님도 같이 보는 거였어!?"
"50살이나 됐으면서 일요일 아침에 애니메이션이라니…… 나이를 드셔도 어린애 같은 구석은 변함없으시구나."
유이가 경악하는 얼굴로, 유키노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각각 한숨을 흘리고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키득키득 웃는다.
유루유리라고 부를 나이는 진작에 지나버렸지만, 변함없이 사이가 좋으신 두 분을 보고 있으니 제 마음도 훈훈해지네요. 근데 나이 36살에 유아용 애니를 보러 극장까지 간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않을까요?
"아, 근데 뭐랄까~…… 결혼한 지 15년이 지났는데도 변함없이 화목한 것 같아서 참 부럽다. 나도 그런 결혼생활을 보내고 싶었는데……."
"……그렇구나. 확실히 부러워."
유이와 유키노의 표정에서 진한 쓸쓸함과 회한이 엿보인다. 아라포를 바라보는 이 나이가 되도록 결혼은커녕 연애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유이와 원치 않은 결혼 끝에 결국 이혼한 유키노다. 이른 나이에 결혼해 행복하게 살아온 나로서는 감히 이해하지 못할 고통과 아픔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건배나 하자."
"아, 응. 이번에는 내가 따라줄게."
'언젠가 너희도 분명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런 근거도 없는 막연한 위로의 말도 어쩌면 조금은 위로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힘을 내서 쥐어짜 내려고 해봐도 목소리로는 나오지 않았다.
좋아하는 남자에 대해서, 결혼에 대해서, 남편에 대해서. 지난 15년간 그녀들에게 무엇 하나 묻지 않았던 내게 이제 와서 그런 말을 내뱉을 자격은 없겠지.
"아, 맞다. 다음에는 시즈카 선생님도 불러서 넷이서 만나는 건 어떨까?"
"……그렇구나. 그거라면 시즈카 선생님도 큰 불만은 없으실 것 같아."
"음? 어, 그거라면 시즈카도 좋아할 것 같네."
조금 전까지의 쓸쓸함은 온데간데없는 활기찬 목소리와 환한 시선이 우울한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지금은 그저 셋이서 즐겁게 마시자고 말하는 것 같다.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오랜 의문과 무거운 기분을 잊기 위해, 나는 샴페인 잔 안의 내용물을 모두 목구멍으로 삼켰다.
× × ×
이젠 정말로 한계다. 자꾸 멋대로 눈꺼풀이 감기려드는 걸로 보건대 틀림없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졸음이 쏟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긴장을 풀어버리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곯아떨어져 버릴 테지. 어쩌면 필름이 끊겨버려서 술주정을 부리는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잔뜩 마신 건 장인어른의 장례식 후 시즈카와 둘이서 마신 이후로 처음인 것 같군……. 그때는 우리 집에서 마신 거다 보니 뒷일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고 마셨었지만, 유키노네 집에서 마시고 있는 오늘은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가까운 거리도 아니니 아직 몸을 가눌 수 있는 이쯤에서 끝내는 게 현명한 판단이겠지.
"아, 더는 못 마시겠다. 이젠 진짜 한계야."
몸을 뒤로 젖혀 의자에 기대고, 한계까지 꽉 찬 배를 어루만지며 그렇게 말하자 유이가 불만스럽게 뺨을 볼록이며 입술을 삐죽인다.
"벌써~? 힛키, 주량이 너무 약한 거 아냐?"
"밤은 아직도 긴데 벌써 항복이니? 여전히 술에 약하구나. 집에만 박혀있어서 그런 걸까?"
"니들이 너무 강한 거거든? 취하는 거 이전에 이젠 배가 터질 것 같다고……."
뭐, 정확히는 술에 강한 건 유키노뿐이고, 유이의 얼굴은 딱 봐도 술에 취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빨개져 있는 상태다. 눈도 살짝 풀려있는 게 이미 제정신은 아닌 것 같다. 돌아갈 걸 생각하면 이쯤에서 그만 마시게 하는 게 좋겠지만, 유이야 여차하면 여기서 자고 가면 될 테니까 별 문제는 없겠지.
"벌써 9시 반인가……. 유이, 너는 어쩔 거냐? 유키노네 집에서 자고 갈 거야?"
"어? 아, 내일은 일요일이니까 이대로 유키농네서 자고 가려고."
"그러냐. 그럼 나 혼자 가야겠군."
그렇게 말한 후 내가 식탁 의자를 뒤로 빼자 유이와 유키노가 당혹함이 섞인 목소리로 나를 붙잡는다.
"어?! 벌써 가는 거야? 좀만 더 있다가 가자~!"
"아직 전철 끊길 때까지 시간이 남아있잖니. 신혼도 아닌데 왜 이렇게 일찍 돌아가려고 하는 걸까."
"아니, 여기 온 지 6시간이 넘었다만……."
이 정도면 충분히 오래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이 녀석들 설마 진짜로 밤새도록 마실 생각이었던 건가? 몇 시간이나 마셨는데도 떨어질 줄을 모르고 계속 리필되는 맥주를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힛키, 조금만 더 같이 마시자~ 응?"
"그래, 모처럼 셋이서 마시는 거잖니."
유이와 유키노가 애원하는 목소리와 섭섭한 목소리로 나를 붙잡는다. 니들 나를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냐…….
유이야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만 유키노까지 이렇게 조르는 건 굉장히 드문일이다 보니 또 마음이 약해질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로 한계다. 이 이상 마셨다간 혼자서 무사히 전철을 타고 돌아갈 자신이 없다. 이제는 정말 한계라고 오랜 경험이 경종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다른 날이었다면 시즈카에게 데리러 와달라고 하는 비장의 수단을 쓸 수 있었겠지만, 오늘은 시즈카도 친구들과 술을 마셨을 게 분명하니 그럴 수도 없다. 그렇다고 콜택시를 부르자니 돈이 너무 아깝다. 아이가 없다 보니 돈에 쪼들려 살지는 않지만, 그래도 소설책 3, 4권은 살 수 있을 돈을 택시비로 내는 건 쓰라린 지출이다. 유이와 유키노에게는 미안하지만 이젠 그만 돌아가 봐야겠다.
"이젠 진짜 한계다. 더 마셨다간 무사히 돌아갈 자신이 없다고."
필름이 끊겼다고 해서 설마하니 공원에서 알몸으로 난동을 부리다가 경찰에게 끌려가는 추태야 일으키지 않겠지만, 길거리나 전철역에서 곯아떨어져 버릴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아직은 따스한 날씨니 밖에서 잔들 추위에 입이 돌아가는 일은 없겠지만, 이 나이에 그런 쪽팔린 경험은 사양이다.
내가 거절의 의사를 보이자 유키노와 유이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아직 포기할 생각은 없는지 이번에는 상냥한 목소리로 다시 나를 어른다.
"……내일은 주말이기도 하니 같이 더 마시다가 오늘은 그냥 우리 집에서 자고 가는 게 어떻겠니?"
"그거 좋네! 힛키도 같이 자고 가자~"
예전이라면 있을 수도 없는 대담한 발언에 말문이 턱 막히고 만다. 오래전 시즈카까지 넷이서 유키노네 맨션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했을 땐 만취해서 몸도 제대로 못 가누던 나를 시즈카에게 맡겨서 기어이 돌려보냈었는데 말이지. 이젠 나 같은 건 이성으로 느껴지지도 않는다 이건가…….
하기야 요전에 유이네 집에서 모였을 땐 덥다면서 속옷 차림이나 다름없는 꼴로 있었던 두 사람이다. 요즘은 곧잘 섹드립도 치고 있고, 겉모습은 젊어 보여도 속은 아줌마가 다된 것이다. 알고 지낸 지도 벌써 20년은 지났는데 그런 말에 일일이 얼굴을 붉히는 게 더 이상한 걸지도 모르겠다.
"……말씀은 고맙지만,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봐야 하는 애니가 있으니까 그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뭐~? 애니 같은 건 유키농네 집에서 보면 되잖아!"
"그래, 우리 집에서 보렴. 자랑하려는 건 아니지만, 우리 집 TV는 너희 집 TV보다 훨씬 크니까 감상하기 더 좋을 거야."
호오, 그건 귀가 솔깃해지는 제안이군. 확실히 유키노네 커다란 TV라면 같은 애니를 봐도 박진감이 다를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애니를 봐야 한다는 건 어디까지나 농담으로 한 소리일 뿐이다. 이렇게 잔뜩 술을 마셨으니 어차피 내일은 아침 일찍 일어나지도 못할 거다.
"아, 그래. 내일 아침은 해장도 할 겸 라멘으로 하려고 하는데 둘 다 그걸로 괜찮니?"
"라멘인가~ 난 미소 라멘!"
"그래, 알았어. 하치만은 돈코츠면 되지?"
내가 자고 가는 건 확정인 거냐……. 술을 마셔서 졸리기도 하고, 이대로 여기서 자고 가고 싶은 마음도 없는 건 아니지만…….
"미안하지만 난 사양하마."
"에이~ 그러지 말고 힛키도 같이 자고 가자~"
"오랜만에 셋이서 마시는 거기도 하고, 이번 한 번 정도는 괜찮지 않겠니?"
이런 제안을 할 정도로 친구로서 나를 신뢰하고 소중히 여겨주는 건 솔직히 기쁘다. 하지만 제안에 따를 수는 없다. 왜냐면 내게는 아내가 있으니까.
"야야, 난 유부남이라고. 아무리 그래도 여자인 너희 집에서 자고 갔다간 시즈카한테 욕을 바가지로 먹을 거다."
그렇지 않아도 두 사람과 너무 자주 만난다고 내심 불만스럽게 여기는 판국이다. 설마하니 불륜으로 오해해서 더는 두 사람과 만나지 말라는 소리는 하지 않겠지만, 내심 속상하게 생각할 건 분명하다. 반대의 입장이었다면 나 역시 그랬을 테지.
아무리 20년 지기 친구라고 해도, 시즈카에게 있어서도 소중한 제자라고 해도, 남자인 내가 여자인 유키노네 집에서 자고 갈 수는 없는 거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나와 유이랑 마시는 거니까 전화로 잘 말씀드리면 선생님도 이해해주시지 않을까?"
턱에 손을 얹으며 담담하게 말하는 유키노. 반면 유이는 뺨을 뾰로통하게 부풀리며 불만스럽다는 듯이 나를 쳐다본다. 취해서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노려보는 모습이 나이에 안 어울리게 귀여워서 무심코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예전에 자이모쿠자가 귀염 떠는 목소리와 함께 비슷한 표정을 지었을 땐 나도 모르게 주먹이 날아갈 뻔했었는데 말이지. 역시 츤데레도 도짓코도 귀여운 여자애가 하니까 용서가 되는 거다. 뭐, 유이는 귀여운 여자애는커녕 귀여운 여자애가 자식으로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지만!
"…………."
"한 침대에서 자자는 것도 아니잖니. 시즈카 선생님은 이해심이 많은 분이니 이정도는 충분히 이해해주실 거라고 생각해."
"그래! 시즈카 선생님이라면 분명 이해해주실 거라고~"
뭐, 상대가 유키노와 유이니 전화로 사정하면 시즈카도 아마 허락해줄 거라고는 생각한다. 허락받는 것 자체는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어디까지나 마지못해 하는 허락일 거라는 점이다. 얼마 전 내게 넌지시 불만을 토했던 걸 생각하면 내심은 못마땅하게 생각할 게 틀림없다. 아내인 시즈카를 속상하게 만들면서까지 자고 가고 싶지는 않은 거다.
"글쎄다. 안 그래도 요즘 너무 자주 나다니는 거 아니냐는 얘기를 들은 판국이라……. 게다가 오늘 밤은 시즈카가 우울한 상태일 가능성이 크거든."
"응? 시즈카 선생님하고 무슨 일 있었어?"
"혹시 부부싸움이라도 한 거니?"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실은 시즈카가 오늘 친구 딸의 결혼식에 갔거든."
다소 모호한 설명이었지만 시즈카가 불임이란 사실을 알고 있는 두 사람에겐 그걸로도 충분했는지 유키노와 유이가 아아… 하고 짧게 말을 흘린다.
겉으로 내색은 안 해도 시즈카는 자신이 불임이라는 사실을 내심 담아두고 있다. 지금은 그런 얘기가 나와도 쓴웃음으로 넘겨버리고 있지만, 한때는 이러다가 우울증이라도 걸리는 거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아마도…… 아니, 틀림없이 이번에도 우울해져서 집으로 돌아올 테지.
자신은 불임의 몸이라 아이도 가져보지 못했는데 친구는 벌써 딸이 결혼식까지 올리고 있는 거다. 결혼식에 참석해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복잡한 심경일 텐데, 그 후엔 친구들과의 모임에까지 참석해야 한다. 나이 50 먹은 여자들의 모임이니 자식 얘기가 안 나올 수가 없겠지. 시즈카에게 있어선 오랜만에 친구들과 만나는 즐거운 자리임과 동시에 듣고 싶지 않은 얘기들을 들을 수밖에 없는 가시방석 같은 자리이기도 한 것이다.
"시즈카 선생님, 아직도 신경 쓰고 계시는구나…… 어? 잠깐만, 지금 친구 딸의 결혼식이라고 했어?!"
"응? 어, 친구 딸의 결혼식."
유이가 입을 떡 벌린 채 경악으로 가득 찬 얼굴로 아연실색하고, 유키노도 놀란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며 나를 쳐다본다. 뭐, 나 역시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땐 충격과 공포로 온몸에 소름이 돋았으니까 충분히 이해한다.
"……놀랐어. 하지만 시즈카 선생님의 나이를 생각하면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겠구나."
"뭐, 그렇지. 우리 부부는 나이 차가 적지 않으니까."
시즈카와 나는 무려 띠동갑도 넘는 13살 차이인 거다. 시즈카가 중학교 1학년일 때 나는 이제 겨우 세상에 태어났을 정도니 이런 일이 생기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치만, 혹시 그 친구 딸의 나이는 알고 있니?"
"어. 우리보다 13살 어린 24살인 모양이다."
보통은 얼굴도 모르는 아내 친구 딸의 나이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만, 이번에는 나와 시즈카의 나이 차이와 똑같다 보니 기억을 못 하려야 못할 수가 없었다.
그 말을 들은 유키노가 흐음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깨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훗 하고 웃는다.
"정확히는 너와 유이보다 13살 어린 거고, 나보다는 12살 어리단다. 난 빠른 생일이니까."
"……대충 좀 넘어가라."
예전에는 이렇게 1살 차이에 연연하는 애가 아니었는데 말이지……. 하기야 겉모습은 젊어 보여도 유키노도 이제는 30대 중반의 아줌마다. 나이를 신경 쓰는 것도 어쩔 수 없겠지.
"24살이 결혼…… 난 아직 경험도 없는데……."
아무래도 좋은 사소한 일에 승리의 미소를 짓는 유키노와 달리 유이의 표정은 어둡다. 아니지, 어둡다기보다는 오히려 하얗군.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새하얗게 불타버려 있다. 으음,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이건 터무니없는 오폭을 해버렸군.
"아무튼, 오늘은 친구 딸 결혼식에 참석한 데다가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자식 자랑까지 듣느라 시즈카의 기분이 우울할 가능성이 크다는 거다. 그러니까 오늘은 무리다."
"…………그래. 그러면 오늘은 어쩔 수 없겠구나."
날 여기서 재우겠다는 생각을 포기했는지 유키노가 긴 한숨을 흘린 후 잔에 남아있던 맥주를 들이켠다. 유이 역시 에휴 하고 한숨을 흘리며 빈 잔에 거칠게 맥주를 들이붓는다. 저기요, 마음이 불편하니까 그렇게 대놓고 실망하지 말아 주실래요? 너무 노골적이어서 살짝 기쁘기까지 하거든요.
즐거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꼴이 된 게 미안한 나머지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두 사람의 시선을 피한다. 자이모쿠자의 부탁을 거절할 때는 일말의 미안함도 안 드는데 유이와 유키노의 부탁에는 나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진단 말이지.
뭐, 오늘만 날인 건 아니다. 두 사람과는 늦어도 다다음 주엔 또 만날 수 있다. 유키노가 허락한다면 다음에는 시즈카도 데려와 밤늦게까지 마신 다음 자고 가는 것도 괜찮겠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불현듯 유이가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역시 힛키는 상냥하네."
"엥?"
뜬금없는 칭찬에 일어나려던 걸 멈추고 갑자기 뭔가 싶어 고개를 돌리자 유이가 턱을 괸 자세로 나를 따스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시즈카 선생님이 우울해 할까 봐 집에 가서 위로해 주려는 거잖아?"
"어, 그야 뭐……."
"결혼하지 15년이나 지났는데도 그렇게 세심하게 챙겨주고…… 역시 힛키는 상냥해~ 그치?"
유이가 쌩긋 웃으며 동의를 구하듯이 유키노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 시선에 유키노는 한순간 눈을 내리깔며 쓴웃음 지었지만, 이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네. 시즈카 선생님이 부러울 정도야."
그 한 점의 거짓도 없는 본심이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에 멋쩍어져서 나도 모르게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만다.
"갑자기 뭔데…… 칭찬해도 아무것도 안 나온다."
"걱정하지 말렴. 이 나이 먹도록 용돈을 타서 쓰는 네게 뭔가를 사달라고 할 생각은 없으니까."
"……아니, 용돈은 오히려 내가 시즈카한테 주고 있거든?"
월급 관리는 내가 하고 있으니까. 뭐, 돈을 벌어오는 건 시즈카니까 엄밀히 따지면 딱히 틀린 말도 아니지만!
"아하하~ 그냥 그렇게 생각한 것뿐이라고. 부끄러워하긴~"
유이가 헤실 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한다. 아, 아니거든? 딱히 부끄러워하는 거 아니거든? 그전에 얼굴이 새빨개진 녀석한텐 듣고 싶지 않다고.
"……하긴 뭐, 내가 상냥하고 좋은 남편이긴 하지. 아내가 주말에 집에서 뒹굴고 있어도 잔소리 안 하고, 회식이 있다면서 집에 늦게 들어와도 잔소리 안 하고, 나이 먹고 애들처럼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어도 하나도 잔소리도 안 하거든."
"아니, 집에서 뒹구는 거랑 만화 보는 건 힛키도 마찬가지잖아!"
"좋은 남편의 기준이 너무 낮은 거 아니니……."
유키노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하는 말에 나는 집게손가락을 척 세우며 자랑스럽게 말을 이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고. 종종 시즈카한테 스포츠 마사지도 해주고 있다."
"어? 힛키, 스포츠 마사지 같은 것도 할 줄 알았어?"
"어. 인터넷 강좌랑 책으로 공부했거든."
유이가 의외라는 듯 헤에~ 하고 감탄사를 흘린다. 뭐, 무리는 아니다. 내가 생각해도 안 어울리니까.
하지만 내가 스포츠 마사지란 리얼충 냄새가 나는 기술을 익힌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어머, 확실히 그건 칭찬할만하구나. 시즈카 선생님에게 해주려고 배운 거니?"
"뭐, 그렇지. 어떻게 하면 돈 안 들이고 시즈카를 기쁘게 해줄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이거라면 건강까지 일거양득이다 싶었거든."
"……괜히 감동했어."
유이와 유키노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이유가 좀 구두쇠 같으면 어떠냐? 아내만 만족하게 하면 그만이지.
초로의 아내가 피곤함에 절어서 돌아오는 모습이 안쓰럽고 미안해서 해주기 시작한 스포츠 마사지였지만, 실은 이게 돈만 안 들지 은근히 중노동이다. 시즈카가 워낙에 좋아해서 처음에는 매일같이 해줬었지만, 너무 힘들고 귀찮아서 지금은 시즈카가 부탁할 때만 해주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귀찮아서 거절하다가 시즈카가 애교를 부리기 시작하면 마지못해 해주고 있다.
신혼 시절 땐 시즈카도 아직 30대 중반이었고, 이성으로서의 설렘도 남아있었기 때문에 나이에 안 어울리는 애교도 귀엽게 느껴졌었지만, 지금은 솔직히 소름이 돋는다. 요컨대 정신적인 고통보다 육체적인 고통을 택했다고 할까…….
"……하치만, 혹시 내게도 스포츠 마사지를 해줄 수 있겠니?"
"아, 나도~!"
유키노가 긴 머릿결을 조용히 쓸어 올리며 그렇게 말하자 유이가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맞장구친다.
"엥? 엉덩이랑 다리도 주무르는 건데 아무래도 좀 그렇지 않겠냐?
확실히 우리는 반 속옷 차림을 보여줄 정도로 친한 사이지만, 보여주는 것과 만지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머리를 만진다든가, 손을 잡는다든가, 어깨를 두들기는 정도의 스킨십은 해봤지만, 우연한 사고로 두 사람을 가볍게 끌어안아 본 적도 있긴 하지만, 그녀들의 엉덩이나 다리에 손을 대본 적은 한 번도 없는 것이다.
"별로 상관없어. 네게 불순한 의도가 없다고 믿고 있으니까."
"나도 힛키라면 딱히 상관없어."
뭐, 본인들이 괜찮다면 상관없겠지…….
유키노와 유이에게는 얻어먹은 게 많고, 그 보답도 할 겸 해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이 두 사람이라면 시즈카도 분명 흔쾌히 허락해줄 테고.
"알았다. 오늘은 배도 꽉 찼으니까 다음에 유이네 집에서 모일 때 해줄게."
"그래, 기대할게."
"와아~ 고마워 힛키!"
……어이쿠, 어느새 시간이 또 5분이나 지나가 버렸군.
"그럼 난 이만 간다."
이번에야말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니나다를까 이번에도 두 사람은 나를 붙잡았다. 다시 자리에 앉으라고 파닥파닥 손짓하며 유이가 말한다.
"있잖아, 딱 한 시간만 더 있다가 가면 안 될까?"
"아니, 충분히 오래 있었잖아."
"아직 전철 끊길 때까지 시간도 있고……. 실은 나 힛키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거든. 그러니까 술도 깰 겸 딱 한 시간만 더 있다가 가면 안 될까?"
물어보고 싶은 거라니, 반나절을 함께 있었으면서 여태 뭐하고 집에 간다니까 이제서야 물어보려는 건데…….
하지만 뭐, 전철이 끊길 때까지 시간적 여유가 있는 건 사실이다. 한 시간 정도라면야 안 될 것도 없긴 하지만…….
"나도 동감이야. 게다가 오늘은 시즈카 선생님도 친구분들과 모임이 있으니 집에 늦게 들어오시지 않겠니?"
……그것도 그렇군. 유키노의 말대로 친구들과의 모임에 나간 시즈카는 보통 밤 11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온다. 요즘은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그보다 빨리 들어오는 경우가 늘어났지만, 그래도 아직은 돌아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설령 이미 집에 돌아와 있다고 해도 딱히 문제 될 건 없다. 시즈카는 내가 자기보다 늦게 들어왔다는 이유로 화를 낼 정도로 속이 좁지 않으니까. 유키노네서 자고 가는 건 문제가 되겠지만, 조금 늦게 들어가는 정도는 괜찮을 거다. 늦어봐야 자정이 되기 전엔 집에 도착할 테고.
"……알았다 알았어. 한 시간만 더 있다 갈게."
의자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그리 말하자 유이가 앗싸~! 하고 기쁜 듯이 웃고, 유키노도 미소를 짓는다.
하여간 자이모쿠자 놈도 그렇고 얘네도 그렇고 내 친구들은 날 너무 좋아한다니까……. 정작 붙잡아줬으면 하는 토츠카는 언제나 쿨하게 보내주고 있는데 말이지…… 토츠카가 붙잡았다면 나 얼마든지 더 남았을 텐데…….
"그래서 나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뭐냐? 미리 말해두지만, 카드 비밀번호 같은 건 안 말해준다."
"벼룩의 간을 내먹는 것도 아니고 그런 건 안 물어본다고!"
벼룩의 간이라니 정말 너무하네. 그래도 지갑 속 체크카드에 10만 엔 정도는 들어있거든요……?
"…………아니, 그…… 별로 대단한 건 아니고……."
유이가 부끄러운 듯 몸을 비비 꼰다. 그리고 망설이듯이 뜸을 들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즈카 선생님이랑 요즘도 섹…… 부부관계는 하고 있어?"
"…………뭐?"
× × ×
확실히 대단한 질문은 아니다. 그저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다.
"너 겨우 그런 걸 물어보려고 가지 말라고 한 거였냐……."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렇게 말하자 유이가 허둥지둥 손을 내저으며 변명하듯이 말한다.
"아, 아냐, 원래는 밤이 더 깊어지고 나서 물어보려고 했던 건데 힛키가 생각보다 일찍 돌아간다고 해서 이렇게 된 거라고!"
"……남의 부부관계 같은 건 들어서 어쩌려는 건데……."
"딱히 어쩌려는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유이가 빨갛게 익은 뺨을 긁적이며 쓴웃음을 짓는다. 아까보다 더 빨개진 것처럼 보이는 건 딱히 기분 탓은 아닐 것이다.
"힛키랑 유키농도 알다시피 난 독신이고…… 경험도 없고……. 그래서 전부터 남들의 부부관계 같은 게 궁금했거든."
섹스가 궁금한 거라면 그냥 AV라도 빌려보면 되지 않을까요? 설마 그런 음란한 몸을 하고 계신 주제에 포르노 한번 안 보셨습니까?
뭐, 유이가 궁금해하는 건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몇 번 정도 하는지, 얼마 동안 하는지, 어떤 식으로 하는지 같은 걸 거다. 아마 인터넷이나 TV, 잡지 등에서 볼 수 있는 것보다 주위 사람의 실감 나는 얘기가 듣고 싶은 거겠지.
"근데 그런 건 나 말고 미우라나 에비나한테 물어보는 게 낫지 않겠냐?"
"유미코한테 그런 걸 물어봤다간 빨리 결혼하라고 잔소리할 게 뻔하고, 히나는…… 자기 얘기 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하니까."
으음, 확실히 그래선 물어보기가 힘들겠군…….
미우라야 친구인 유이를 진심으로 걱정해서 하는 소리겠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선 쓸데없는 참견이고 고통일 뿐이다. 노처녀가 결혼 언제 할 거냐는 말을들었을 때 받는 스트레스는 상당한 것이어서, 시즈카의 경우는 나와 사귀게 되기 전까지만 해도 거의 노이로제 상태였다고 한다. 나와 결혼한 후에도 너는혹시라도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당부했을 정도니 그 고통을 대충 알만하다. 에비나는………… 20년을 사귀었는데도 여전하다니 걔도 참 대단하군.
유키노에게는…… 역시 물어보기 힘들겠지. 저번에 얘기 듣기로는 계속 각방을 썼을 정도로 전남편과 사이가 나빴던 모양이고.
어찌 보면 유이가 이런 걸 내게 묻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군. 나나 유키노와 달리 사교성이 좋아 친구가 많은 유이지만, 부부 관계 같은 은밀하고 사적인 얘기를 마음 편히 물어볼 정도로 친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 게다가 딱히 무성애자인 것도, 골드미스를 지향하는 것도 아닌데 어쩌다 보니 노처녀가 된 유이로서는 이런 걸 묻어보는 것 자체가 자존심 상하는 일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상대가 나라면 결혼하라는 잔소리를 들을 일도 없고, 무시당하고 비웃음당하는 일 없이 마음 편히 물어볼 수 있다. 무엇보다 부부 사이가 좋다. 그러니 유이가 나를 선택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나로서는 유이에게 이런 질문을 받는 게 솔직히 당혹스럽다. 자이모쿠자와는 만나서 곧잘 야한 얘기를 나누고 있지만, 솔직히 여자인 유이나 유키노와 그런 얘기를 나누는 건 아무래도 좀 쑥스러운 기분이 든다. 그런 것에 일일이 부끄러워할 나이도 아니고, 딱히 그녀들을 이성으로 의식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녀들과 함께 보낸 학생 시절이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일까, 그런 음탕한 얘기를 나누는 것은 역시 좀 저항감이 든다. 아니, 별로 나랑 시즈카가 음탕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건 아니고…….
"흐음, 하치만의 부부 생활이라면 나도 흥미가 있어."
"넌 또 왜 그러는데……."
유이야 본의 아니게 순결을 지킨 것뿐이니까 억눌려온 성욕과 미지의 호기심에 다른 사람의 성생활에 대한 관심이 넘치다 못해 폭발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지만, 진작에 경험을 끝마쳐서 알 거 다 아는 너는 또 왜 그러는데…….
"너와 달리 난 마음에도 없는 사람과 결혼했었잖니. 부부관계는 배우자의 의무 중 하나니까 최소한의 부부관계는 가졌었지만, 그것을 좋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거든. 그러니까 서로 사랑해서 결혼한 너희 부부는 어떻게 다른지 궁금한 거야."
"어, 어……. 그러냐……."
그런 말을 들어버리면 할 말이 없어진다. 아무래도 유키노의 결혼생활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불행했던 모양이다.
배우자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최소한의 부부관계는 가졌었다는 유키노다운 고지식한 그 말은 그녀의 부부생활이 얼마나 불행한 것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인간인 이상 유키노도 전남편과 부부관계를 가지며 어느 정도는 육체적 쾌감을 느꼈겠지만, 분명 그 쾌감 따윈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정신적인 고통을 느꼈던 거겠지.
유키노는 이혼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그런 사실을 말한 적이 없었다. 말해주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는 일이고, 말해줬다 한들 내게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겠지만, 그래도 그녀가 힘들었을 때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는 사실은 내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조금 민망한 질문에 대답해주는 거로 그녀들에게 미약하게나마 위안을 줄 수 있다면야…….
"…………뭐, 말해준다고 해서 딱히 닳는 것도 아니니까 다 대답해주마. 시즈카랑 부부관계를 얼마나 하는지를 말해주면 되는 거냐?"
"응! 신혼 때야 물어볼 것도 없이 자주 했을 테고, 결혼한 지 15년이나 지난 요즘은 어떤지 궁금했거든."
앞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이며 초롱초롱 빛나는 눈망울로 흥미진진하게 나를 쳐다보는 유이. 예쁘장한 외모와 성숙한 나이로도 감출 수 없는 그 동정력에 유키노와는 또 다른 의미로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잠은 같이 자지만 요즘은 부부관계는 거의 안 했다. 아마 6월 초에 한 게 마지막일 거다."
"어머, 의외로 적구나.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할 거로 생각했는데."
"그러게. 의외네~"
유키노가 턱에 손을 얹은 채 흥미롭다는 듯이 말하고, 유이도 헤에~ 하고 흥미진진한 분위기로 맞장구를 친다. 말해주는 입장으로선 멋쩍을 뿐이지만, 듣는 입장으로선 즐거운지 두 사람 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다.
"권태기…… 라기보다는 섹스리스 부부구나."
"섹스리스 부부?"
"특별한 사유가 없이 한 달 이상 성적 관계를 갖지 않는 부부를 뜻하는 말이야."
"섹스리스 부부라…… 틀린 말은 아니군……."
말끝을 흐리며 그렇게 말하자 유키노가 묘하게 따스한 시선과 함께 후우 하고 안쓰럽다는 양 한숨을 흘린다.
"친구로서 조금 안타깝구나. 설마 하치만이 그 나이에 벌써 발기부전증에 걸렸을 줄이야……."
"야야, 발기부전증 같은 거 안 걸렸거든? 그래서 안 한 거 아니거든?"
10대나 20대 때처럼 아침마다 탄탄하게 텐트를 치는 건 아니지만, 하치만 주니어는 지금도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거든요?
"농담이야."
그렇게 말하며 유키노가 키득 하고 작게 웃는다.
"뭐, 시즈카 선생님이랑 결혼한 지도 15년은 지났으니까 어쩔 수 없는 거 아닐까?"
"동감이야. 게다가 시즈카 선생님은 벌써 50대니까 30대인 하치만이 선생님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해."
"그러네. 같은 30대였다면 힛키도 섹스리스까진 아니었으려나?"
"그랬을지도 모르지……."
확실히 시즈카가 지금도 30대였다면, 아니, 하다못해 40대 초반만 됐어도 섹스리스 상태까지는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너무 많이 했다 보니 질려버린것도 있겠지만, 내가 섹스리스 상태가 돼버린 가장 큰 이유는 늙은 아내에게 더는 이성으로서의 매력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니까.
젊은 날의 내가 좋아했던 나이에 안 어울리게 귀여운 얼굴도, 밤마다 푹 빠져 살았던 아름다운 몸매도 더는 없다. 화장으로도 감출 수 없는 얼굴의 주름살과 늘어난 뱃살, 그리고 노년기의 시작이라는 폐경기. 13살 연상의 아내는 나보다 몇 발이나 앞서서 50대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될 거라는 건 결혼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막상 현실로 닥쳐오니 역시 씁쓸한 마음이 들고 만다.
"아무튼, 요즘은 시즈카랑 부부관계는 거의 안 하고 있다는 거다. 더 궁금한 거 있냐?"
유이의 성격을 생각하면 지금처럼 얼큰하게 술에 취해있지 않고서는 이런 질문을 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두 사람과 일상적으로 성생활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싶진 않으니까 차라리 오늘 다 끝내두는 게 나을 것 같다.
"조금 전 얘기를 듣고나니 한가지 궁금한 게 생겼는데……."
유키노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으로 턱에 손을 얹으며 말한다.
"그러면 하치만은 평소 성욕은 어떻게 해결하는 거니?"
"…………."
아니, 그야 다 대답해주겠다고 말은 했지만……. 그보다 그거 부부관계랑 관계없지 않냐?
"어떻게 해소하긴……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게 해소하고 있다만……."
그 말에 유키노가 흐음 하고 잠시 무언가 생각하더니, 묘한 미소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남들처럼이란 건 혹시 윤락업소를 말하는 걸까?"
"……저기요. 전 돈 받고 몸을 팔 수는 있어도 돈 주고는 안 하는 사람이거든요?"
"……어?! 힛키는 돈 주면 몸을 팔 거야?"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돈을 내면서까지 나랑 하고 싶어하는 여자는 없을 테니까."
한참 운동하던 시절에 이따금 느낀 아줌마들의 끈적끈적한 시선을 생각하면 혹시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연상의 누님들은 이쪽에서 사양이다. 뭐, 연상의 아줌마가 아니라 연하의 아가씨라고 해도 사양할 거지만.
"글쎄, 혹시 모르지. 전 재산을 줘서라도 널 사고 싶어하는 별난 여자가 있을지도."
"없다고. 있어도 안 판다."
전 재산을 줘서라도 사고 싶을 정도면 대체 날 얼마나 좋아하는 건데……. 애당초 결혼 15년 차의 유부남 앞에 그런 여자가 나타나 봐야 곤란할 뿐이다.
미안해…… 하앗…… 나…… 이젠 시즈카가 없이는 살 수 없는 몸이 돼버린 고야…… 그러니까…… 미안해……!
"……이야기가 탈선했구나. 그래서, 호스트가야는 어떻게 성욕을 해결하고 있는 거니?"
"하치만이라는 이름으로는 라임이 안 살디? 성욕을 어떻게 해결하는지는 물어볼 것도 없이 뻔하잖아."
내가 어이없다는 듯이 실눈을 뜨고 쏘아보자 유키노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미소를 짓는다.
"어머, 미안해. 그런 쪽의 지식은 별로 없거든. 그러니까 돌려 말하지 말고 제대로 가르쳐주겠니?"
"아~ 미안해 힛키! 나도 경험이 없어서 힛키가 뭘 말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
"…………."
저질스럽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장난에 저절로 말문이 막히고 만다. 이거 성별이 반대였으면 고소감 아니냐?
"……마스터베이션으로 해결하고 있다. 됐냐?"
"에이~ 영어로 말하니까 별로 느낌이 안 산다. 그치?"
"그렇구나. 솔직히 실망했어."
실망한 건 오히려 접니다만…….
처음 만났을 땐 나와 함께 있으면 신변의 위험을 느낀다며 몸을 사렸던 유키노가 지금은 이렇게 날 성희롱해대고 있다니……. 고등학교 시절의 유키노가 지금의 자신을 본다면 분명 기절초풍하겠지…….
"근데 남자들은 결혼했는데도 자위 같은 걸 하는 거야?"
"보통은 그럴 걸? 아내랑 하는 것보다 혼자서 자위하는 게 더 낫다는 사람도 있고."
섹스할 때는 아무래도 상대방을 배려해야 하는 데다가, 만족하게 해줘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으니까 말이지. 반면에 자위는 그럴 필요 없이 자기 멋대로 할 수 있기 때문에 섹스보다 나은 점도 있다. 게다가 상대방이 아내로 고정된 섹스와 달리 다양하게 딸감을 선택할 수 있고.
"아, 그건 좀 싫다~ 뭐랄까, 여자로서 무시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야."
"뭐, 사랑하는 사람이 나와 하는 것보다 혼자서 자위하는 걸 더 좋아한다면 확실히 기분이 좋지는 않겠구나."
"으, 으음……."
그런 말을 들으니까 시즈카에게 미안해지는군. 자이모쿠자가 선물로 보내준 C115 동인지들도 한 번씩 다 반찬으로 써먹었겠다, 조만간 날 잡아서 시즈카랑도 한 번 하는 게 좋으려나…….
"아, 맞다. 나 힛키랑 시즈카 선생님이 어떤 느낌으로 부부관계를 하는지도 궁금한데……."
아, 역시 그것도 물어보는 건가……. 뭐, 어느 의미론 메인 디쉬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후우 한숨을 내쉬고 유이의 물음에 되묻는다.
"구체적으로 뭘 말해주면 되는 건데?"
"어? 음, 그럼…… 체위라든가……?"
유이가 자신의 옆머리를 꼼지락 꼼지락 만져대며 어색한 미소로 말한다.
이거 설마 시즈카랑 어떻게 부부관계를 하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말해줘야 하는 건가? 수치 플레이가 따로 없군…….
술기운에 붉어진 얼굴에서 열기를 느끼며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평범하게 정상위나, 후배위, 기승위 정도다. 신혼 때는 69 같은 것도 자주 했는데 최근엔 거의 한 적 없군."
"헤에~ 의외로 평범하네."
"그러게. 하치만은 좀 더 매니악한 걸 선호할 줄 알았는데."
"대체 날 뭐로 보는 거냐……."
서로가 서로의 첫상대기 때문일까, 우리 부부의 성생활은 지극히 평범한 것이었다. SM이나, 노출, 스캇 같은 특수한 플레이는 시도조차 해본 적 없다.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간 마음으로 교복을 입고 교사와 제자플레이는 해본 적 있지만, 우리는 실제로 사제관계고, 그 정도는 평범한 축에 속하겠지. 파이즈리나 페라도 다들 하고 사는 걸 테고. ……맞겠지?
흐음. 생각해보니 정말 평범한 것들밖에 안 해봤군. 젊었을 때 좀 더 이것저것 도전해볼 걸 그랬나?
사실 지금도 늦은 건 아니지만, 시즈카가 50대에 가까워짐에 따라 점점 시들시들해지기 시작한 의욕이 폐경기를 기점으로 완전히 꺾여버렸는지라 이제 와서는 무리일 것 같다. 시즈카가 원한다면 굳이 거부는 하지 않겠지만, 아마 이제는 내가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는 일은 없겠지.
게다가 시즈카도 벌써 50대다. 30대 때 절정에 이르렀던 성욕도 이제는 거의 줄어들었겠지. 실제로도 벌써 3달 이상 하지 않았는데 아무 말 없고.
뭐, 부부관계가 시들해졌다고 해서 사랑하는 마음마저 시들어진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마음이니까…….
사랑하는 마음만 지켜내면 설령 순결을 빼앗기더라도 NTR이 아닌 것이다. 출처는 자이모쿠자.
× × ×
그 후로도 두 사람의 질문은 계속되었고, 약속했던 한 시간보다 20분 늦게 출발하게 된 나는 자정이 다 돼서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밤공기를 마시며 걷는 동안 어느 정도 술기운 깬 머리로 돌이켜보니 민망함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설마 그녀들과 그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말이지…….
결국, 나는 유키노와 유이의 공세에 못 이겨 내 성적 취향부터 거시기 사이즈까지 말해주게 되었다. 그 대가로 그녀들의 쓰리사이즈 같은 걸 들을 수 있었지만, 솔직히 수지가 맞는 장사는 아니다. …………그렇다고 할까…….
우와아아아아! 아무리 술에 취했다지만 나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너무 오버했잖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런 걸 묻는 그녀들이나 대답해주는 나나 셋 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만약에 그 상태로 술을 더 마셔서 완전히 맛이 가버렸다면 학생 시절 그녀들을 딸감으로 썼던 것도 말해버렸으려나…….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군. 술이라는 게 이렇게 무섭다.
"다녀왔어~"
언제나처럼 현관에서 귀가를 고했으나 대답하는 목소리는 돌아오지 않는다. 현관에 놓여있는 구두나 거실 불이 켜져 있는 걸 보면 집에 돌아온 건 분명하고, 씻고 있거나 방 안에 있어서 듣지 못한 모양이다.
"시즈카, 방에 있어?"
그렇게 말하며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방바닥에 앉아있는 시즈카가 보였다.
그제야 내가 돌아온 걸 깨달은 시즈카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천천히 입을 연다.
"아, 하치만. 늦었구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결혼식이랑 모임은 잘 다녀왔어?"
화장대 앞에 놓인 의자에 앉으며 그렇게 묻자 시즈카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뭐, 그렇지……." 하고 말끝을 흐린다. 보아하니 우려했던 대로 그다지 즐거운 자리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건 아무래도 같이 맥주라도 한 캔 마시는 게 좋을 것 같군. 아직 배가 꽉 찬 상태긴 하지만 한 캔 정도라면 괜찮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문득 시선을 돌리자 시즈카가 앞쪽으로 널브러져 있는 책들이 눈에 들어온다. 읽는 것도 민망한 음란한 제목들과 표지들. 자이모쿠자가 선물로 보내준 에로 동인지들이었다.
"엑…… 그건……."
"어, 아까 서재에서 우연히 찾았다. ……자이모쿠자가 보내준 책들이라는 게 이건가 보지?"
"어, 뭐, 그렇지……."
에로 동인지 같은 걸 떡하니 책장에 보관하는 건 저항감이 있다 보니 자이모쿠자가 보낸 택배 상자에 그대로 넣어서 안 보이게 구석에 잘 박아놨었는데 그걸 찾아낸 모양이다.
뭐, 자이모쿠자가 다 본 상업지나 동인지 등을 내게 선물해주는 건 예전부터 있었던 일이고, 시즈카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 딱히 큰일이 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가족에게 음란물을 들키는 건 역시 부끄럽다. 심지어 저거 순애물도 아니고…….
"…………남자들은 역시 어린 여자가 좋은가 보군."
"엥? 딱히 그런 건 아닌데……."
그야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연하가 더 좋지만, 여기서 그 사실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정도로 나는 눈치 없지 않다. 예전에는 연상의 미인 누나도 완전 좋아했지만, 지금의 나보다 연상이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아라포니까.
"그런 것치고는 나오는 여자들이 하나같이 어린 학생들인 것 같다만."
"그거야 만화나 애니에 나오는 히로인들이 대부분 10대니까 그런거고……."
"그렇다고 해도 중학생은 좀 심했다고 본다만."
"그건…… 프리큐어 동인지니까……."
프리큐어는 중학생이 되는 거니까……. 드물게 여고생 프리큐어도 나오긴 하지만 보통 중학생들이니까…….
프리큐어 멤버들의 어머니가 출연하는 동인지도 은근히 있는 모양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자이모쿠자가 내게 보내준 건 악의 제국에 패배한 프리큐어 멤버들이 조리돌림을 당한 끝에 생명을 잉태한다는 동심파괴물이었다.
으아…… 솔직히 동인지 내용물은 시즈카한테 들키고 싶지 않았다…….
"뭐, 늙은 아내보다 젊고 어린 여자들에게 관심을 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저기요, 다른 사람이 들으면 오해할만한 말은 그만둬주실래요?"
그렇게 말하면 제가 바람이라도 피우는 것 같잖아요. 게다가 그거 자이모쿠자가 멋대로 선정해서 보내준 거라 딱히 제 취향에 직격인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훗, 농담이란다. 이런 거로 뭐라고 할 생각은 없다. 상대가 2차원 여성이라면 바람을 피우더라도 얼마든지 용서해주마."
시즈카가 부드러운 미소로 그렇게 말하며 바닥에 흐트러져있는 책들을 주섬주섬 한곳에 쌓는다.
"…………그보다 좀 전엔 왜 그렇게 축 처져 있었던 건데? 모임에서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딱히 그런 일은 없었다. 그저……."
친구는 머지않아 손주까지 생길 텐데 자신은 손주는커녕 자식조차 볼 수 없다는 현실이 비참하고 슬펐던 거겠지…….
무엇 때문에 시즈카가 기운 없어 하는지 뻔히 짐작하면서도 나는 굳이 그 이유를 물었다. 말없이 어깨를 다독여주는 것보다 제대로 이유를 듣고 나서 위로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테니까.
아이가 없어도 너와 둘이서 오손도손 사는 거로 충분하다고 했던 말은 거짓이 아니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괜찮더라도 시즈카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
불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지 13년이나 지났는데도 시즈카는 아직 마음의 상처와 열등감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사실에 때때로 풀이 죽는 아내의 모습을 보고 있는 건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그런 아내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아이가 없어도 너만 있으면 난 행복하다고 웃어주는 것 정도겠지.
"……나랑은 벌써 몇 달째 안 하고 있는 남편이 야한 만화나 AV를 보며 자위는 꾸준히 하고 있다고 걸 생각하니 기운이 빠진 것뿐이다."
"…………엑?"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길고 긴 침묵이 드리운다.
얼빠진 것처럼 입을 벌린 채 눈만 계속 깜빡이는 나를 시즈카가 살짝 삐친 것처럼 올려다본다.
그, 그런가…… 시즈카는 그렇게나 쌓여있었던 건가…….
"미, 미안하다……. 그런 거였다면 담아두고 있지 말고 진작 말을 하지……."
"그게…… 이 나이에 하자고 조르는 것도 좀 그런 것 같아서……. 모처럼 야하게 차려입고 신호를 보냈을 때도 결국 안 했고……."
아, 그러고 보니 그날 낮에 폭딸을 한 탓에 안 서서 결국 안 했지……. 다음에 하자고 생각만 하고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시즈카가 부끄럽다는 듯 살짝 시선을 피하며 손을 꼼지락거린다.
"그러니까 하치만…… 그…… 말이 나온 김에 오랜만에 하지 않겠는가?"
"어, 아, 네."
도저히 거스를 수 없는 흐름에 내가 얼떨떨하게 대답하자 시즈카가 후우~ 하고 크게 심호흡했다. 그리고는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들뜬 목소리로 말한다.
"좋아! 주말이기도 하고 오늘은 밤새도록 달리는 거다!"
"……20대 시절도 아니니까 밤새도록은 무리라고 생각하는데요."
어쩐지 두려워져서 그리 말하자 시즈카가 먹이를 눈앞에 둔 육식동물 같은 눈으로 씨익 웃음 짓는다.
"걱정할 거 없다. 똥구멍을 핥아서라도 세워줄 테니까."
"…………."
× × ×
사랑하는 마음은 식지 않았으니까 부부관계는 없어도 괜찮다니, 참으로 안이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었다. 50살이 되었어도, 폐경기가 왔어도, 시즈카는 아직 여자던 거다.
앞으로는 한 달에 두세 번씩은 꼭 부부관계를 가지도록 하자. 설거지도, 음식물 쓰레기도, 아내의 성욕도, 귀찮다고 쌓아뒀다간 결국 곤혹을 치를 뿐이다. 쌓이고 쌓여서 넘쳐흐르기 전에 그때그때 처리해두는 게 현명하다. 쏟아지는 졸음과 피로와 쾌감 속에서 그렇게 생각했다.
아내가 밤에 야하게 차려입고 있으면 두렵다는 중년 남성의 심정을 지금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