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1)
드넓은 대륙의 땅은 두 개의 제국과 수십 개의 왕국, 수백 개의 공국으로 쪼개져 있었다. 그 중 북쪽 제국, 코시카의 황제인 옐렌 파블로비치는 삼 년 전 아버지인 파블 이바노비치 대공을 유폐하고 조부 이반 3세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올랐다.
새로 옥좌에 앉은 그는 온 세상에 피를 흩뿌리고 다녔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유폐하고, 오촌 숙부와 육촌 남동생 둘을 죽였다. ‘자비롭게도’ 오촌 숙모는 추방했다. 사생아 이복형제의 목을 매달아 효수했다.
역시 사생아인 이복누나들은 이미 시집 간 뒤였는데, 그는 그녀들이 시집간 나라들에게 누이들의 신병을 내놓으라고 겁박했다. 사생아라곤 해도 코시카 황제의 은덕으로 유리예프스카야 공녀로 봉해진 그녀들은 각각 공비와 왕비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죽을 것을 알면서 쉽게 내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삼 개월 뒤, 그 누이들이 열흘 차이를 두고 사망했다. 병이라고 했지만 누가 보아도 황제의 짓임이 자명했다.
옐렌 1세는 그러한 공포로 나라를 휘어잡았다. 애초에 그는 몇 안 되는 정통성 있는 후계자였고, 다른 후계자들을 자기 손으로 없애버렸으므로 즉위 초기의 혼란은 길지 않았다.
그에 반해 루이 오귀스트 황제가 병으로 누워있는 동안 아들 네 명이 차기의 보위를 대놓고 다투며 시끄러웠던 남쪽 제국 로렌은 식민지에 터진 전염병과 흉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황녀는 휘하 대공가 중 하나에 시집간다는 관례를 깨고 세스가 이 북쪽에 시집오게 된 것이다.
세스는 코시카 황궁이 황도 안에 있는 것에 한 번 놀라고, 그 황궁의 규모가 소박한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정원은 꽤 넓었으나 건물은 황궁을 통틀어 단 네 채 뿐, 황실 가족과 그 시중을 드는 자들이 아니면 전부 황도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세스가 지금까지 살던 이블린은 수도인 렌에서 마차로 한참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발루아의 성을 지닌 황족들뿐만이 아니라 여러 귀족들도 같이 살고 있어서 건물이 열 개도 넘었다.
준비해놓았다는 방에 도착하자, 훈기가 실핏줄 선 뺨을 감쌌다. 황제의 말에 의하면 오늘은 별로 추운 날이 아니라는 것 같았는데 난로에 불이 있다니 이상했다. 전령을 먼저 보내 불을 켜놓으라고 시킨 걸까? 세심한 사람이로구나.
귀마개와 무거운 모피 망토와 장갑을 벗어 시녀에게 맡기는 동안 황제는 멀뚱하게 옆에서 손을 내민 그대로 서 있었다.
“어머나, 폐하. 제가 준비가 다 끝나면 다시 손을 주셔도 괜찮은데요?”
“그럼 편히 쉬시오.”
같이 차라도 마시려고 올라온 게 아니었던가? 그는 먼저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언뜻 보인 옆얼굴이 어쩐지 불퉁했다.
세스는 자리에 앉아서는 쿡쿡 웃었다. 생각한 것과 많이 다른 사람이었다. 짐을 정리해준 시녀가 아닌 다른 시녀가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손에 쟁반을 들고 있는데도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는 동작에 한 치의 어색함도 없었다.
“황후 폐하 되실 분께 인사 올립니다.”
황제의 인사와 마찬가지로 매끄러운 갈리아 어-로렌에서 사용하는 언어-였다. 세시안은 생긋 웃었다. 아마 미리 가르친 것이거나, 할 줄 아는 사람을 데리고 온 거겠지.
“일어나세요.”
짐을 정리하고 온 시녀도 무릎을 꿇었다. 북쪽에서는 오갈 때마다 일일이 무릎을 꿇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땐 과장도 심하다고 생각했는데. 낮은 사람이 먼저 인사를 한다는 것도 진짜, 노크가 없다는 것도 진짜였다. 시녀는 공손한 태도로 일어나 소리 없이 차를 따르고 뒤로 세 발짝 물러났다.
주홍색 찻물에 얇게 저민 레몬이 동동 떠 있었다.
“오, 북쪽에서는 레몬이랑 차를 같이 먹나 봐요?”
“그러하옵니다. 혹여 기호에 맞지 않으신다면 다른 차를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맞장구로 시작되는 수다를 기대했던 세스는 머쓱하게 웃으며 찻물을 머금었다. 새큼한 향이 났다. 독특했지만 아주 달았다. 세스는 단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 찻잔을 다시 내려놓았다.
방은 널찍했다. 대체 여긴 누가 꾸민 걸까. 한동안 안주인이 없었다고 들었는데 그런 티가 조금도 나지 않을 만큼 화사했다.
수 덕분일까? 의자나 가구 위에는 수를 놓은 천을 주로 씌워놓았다. 여러 색실로 섬세하게 기하학적 무늬를 그려 압도될 지경이었다. 숙녀로서 부끄럽지 않을 만큼은 교양을 쌓아왔다고 생각했고, 그 중에는 자수도 있었지만 이런 걸 만들 자신은 없었다.
“깔개에 놓은 수가 참 아름답네요.”
“마음에 드신다니 폐하께서도 흔흔해하실 것입니다.”
안 돼. 또 다시 대화가 끊겼다. 시녀 둘은 눈을 바닥으로 내리깔고 음전하게 서 있었다. 과연 저 얌전함은 그녀들의 원래 성격일까, 아니면 강요된 예법일까.
세스는 서사시의 귀부인들이 흔히 그렇듯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옛날에는 무도회라든가 연회가 흔히 열리지 않았으며 여자들이 성 밖으로 나가는 것이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귀부인들은 시녀라든가 딸들을 거느리고 창가에 앉아 찾아오는 손님 품평을 하는 것이 몇 안 되는 유희였다고 한다.
“무언가 필요하신 것이라도 있으신지요.”
“아니요. 없어요.”
서사시와는 달리 정원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이라곤 시녀나 시종, 로렌에서 온 손님들 정도가 다였다. 말을 끌고 바쁘게 돌아다니거나, 마차를 정리하거나, 거한 짐을 들어 옮기고 있었다. 흥미를 끄는 점이라곤 아무도 외투를 걸치고 있지 않다는 점 정도일까. 검을 빗겨찬 아름다운 미모의 청년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지루함을 이기지 못한 세스는 고개를 들어 더 먼 곳을 바라보았다.
꽃 한 송이 없는 선명한 초록빛 정원과 보들보들한 잔디밭, 흰 돌들의 정원 너머에 황도가 있었다. 황도는 조금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어서 도시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흰 도시’라고 느꼈던 건 이상한 감상이 아니었다. 세워진 지 이백 년도 안 된 도시라고 했던가? 오래되어 케케묵은 렌(로렌의 수도)이나 이블린(렌 근교에 있는 로렌 황궁)과는 달리 건물 벽이 희기만 했다. 손톱보다도 작게 보이는 범선들은 알록달록했고, 그 멀리로 바다가 있었다.
“방에서 바다가 보이는군요? 신기해라.”
“예.”
세스가 배를 타고 올 때 항구가 북동쪽에 있었으니, 저 쪽은 아마 남서쪽. 옅은 분홍색이나 주황색이 아니라 파르스름한 새벽빛을 머금은 고아함과 지난밤을 흡수한 질척함이 뒤엉켜 있었다.
이블린은 내륙에 있었기 때문에, 세스는 이번 혼행길에 나서면서 바다를 처음 보았다.
“왜 굳이 사 층에 방을 잡았을까 했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군요.”
“혹여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다른 어느 방을 사용하셔도 좋다는 폐하의 명령이 계셨습니다.”
“아뇨, 이 방이 마음에 들어요.”
한참을 바다 구경을 한 세스는 아쉬움을 갈무리한 채 돌아섰다.
바다가 아름답긴 하지만, 이 방을 쓴다면 앞으로도 계속, 아마 죽을 때까지 볼 풍경이었다. 그렇다면 아껴놓고 조금씩 봐야지. 너무 일찍 봐서 질려버린다면 그것도 비극이었다.
“조금 답답해서 그런데, 정원에라도 나갈까요?”
기껏 벗은 망토를 다시 입은 세스는 코시카 황궁 정원을 거닐면서 도리어 불편해졌다. 침엽수와 돌로 이루어진 정원은 분명 이블린과는 다른 맛이 있었고 꽤나 아름다운 것도 사실이었지만 지나갈 때마다 마주치는 모든 사람이 무릎을 꿇어대는데 신경 쓰지 않고 경치 구경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남쪽의 로렌 황제 장녀인 마담 르와이얄, Son Altesse Impériale(Her Imperial highness)로 호‧지칭 될 수 있는 만큼 온 세상을 통틀어 그녀보다 높은 여자가 드문 삶을 살아온 세스에게도 이런 예는 부담스러웠다.
그저 지나가는 길에 한 쪽 무릎을 땅에 대고 고개를 숙이는, 이토록 숨 막히는 경의. 모후인 오를레앙의 마르그리트 안 황후도 이러한 대우는 받지 못 했다. 부황이나 겨우 받을까. 아니, 세스의 아버지인 로렌 황제도 산책 한 번 나갔다고 이렇게 많은 인사는 받아보지 못했을 것 같다.
세스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자꾸만 자꾸만 깊은 정원으로 들어갔다. 정원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슬슬 돌아다니는 것도 질리고, 높은 구두를 신은 발끝도 멍든 것처럼 아플 때였다. 누군가 등 뒤에서 말을 걸었다. 희한할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네가 소문의 그 로렌 공주인가?]
세스는 유행이 지난 부채 대신 손으로 입을 가리고 생긋 웃으며 돌아보았다.
“안녕하세요?”
로렌이었다면 세스에게 먼저 말을 걸 수 있는 이는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빌어먹게 친애하는 형제들 뿐. 하지만 여긴 코시카였고, 세스의 상식이 적용되지 않는 땅이었다.
“하지만 공주가 아닌 걸요. 마담 르와이얄이라고 불러주시겠어요? 아직 결혼은 안 했으니 차리나(코시카 황후, 혹은 여제. 정식명칭이 임페라토라로 바뀐 뒤에도 사람들은 차리나를 애용했다)는 너무 이를 것 같군요.”
[놀라지 않는군?]
흰 짐승이 재미없다는 듯 꼬리를 흔들었다. 그렇다. ‘짐승’이 말을 했다.
그 짐승은 세스가 여태껏 본 어느 짐승과도 달랐다. 온 몸을 덮고 있는 비늘은 따스한 흰빛을 띠었고, 발톱이 달린 발은 굵고도 튼튼했다. 게다가 등에는 두 장의 날개까지 달려 있었다. (파닥이지 않는데도 하늘에 떠 있어 쓸모는 없어 보였지만.)
그렇다. 용이었다. 용이 아니면 이런 동물이 있을 리 없었다. 북쪽 황궁에 용이 있고, 용이 말도 하고, 심지어 그 말이 남부 갈리아 어이며, 저 무거워보이는 몸이 하늘에 동동 떠있었다. 신기하다. 평생을 걸쳐 당연하듯 쌓아온 예의가 아니라면 만지게 해달라고 청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놀랐다.
“아뇨. 놀랐답니다. 뒤에서 갑자기 누가 말을 걸면 누구든 놀라지요.”
[그것 말고.]
“물론 말씀하시는 것에 대해서도 충분히 놀랐어요. 코시카 황제가 용을 데리고 있다는 소문은 유명하지만 진짜라곤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항상 느긋하게 웃는 얼굴을 타고난 덕분에 겉가죽으로는 티가 나지 않았지만, 세스는 자신이 서사시집에라도 들어와 있는 듯 얼떨떨했다.
용이 멸종한 것은 팔백 년 전으로 알려져 있었다. 카페 왕조의 선조이자 당시 올랑 지방의 공작이었던 미남왕 앙리는 천사에게 ‘푸른 장미’를 전해 받고 그 계시를 통해 여섯 명의 동료를 모았다. 그리고 일곱 명의 용사들은 당시 남부 지방을 황폐화하던 폭룡을 해치운 다음 일곱 나라를 합쳐 7인의 맹세를 통해 한 나라를 세웠다.
세스의 가문인 발루아 가문은 카페(capet) 왕조의 방계 가문이었고, 카페 왕가의 남성 직계 후손이 단절되자 로렌 황위를 계승했다. 세스는 귀가 따갑도록 ‘미남왕 앙리가 해치운 용이 마지막 용’이라고 듣고 자랐다. 그 뒤로 나타났다는 용에 대해서는 들은 적도 없었고, 렌에는 마지막 용의 뼈로 만들었다는 검이 보관되어 있으니 그냥 그러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과거로 돌아가거나, 다시 태어나지 않고도 눈앞에 용이 날고 있지 않은가. 뼈를 다듬어 검을 만든 죽은 용 말고, 생생하게 눈을 빛내는 용이.
용은 팽 콧방귀를 뀌었다.
[전혀 놀란 것 같지가 않은데.]
“언제나 웃는 우아한 얼굴은 숙녀의 덕목이니까요. 하지만 이래봬도 정말로 놀랐어요.”
진심이었다. 이 북쪽은 도착한 지 세 시간도 안 됐는데 온통 놀랄 일투성이. 어디서부터 놀라야 할지 부디 순서라도 가르쳐주었으면 좋겠다.
“제가 조금만 분별력이 없는 나이였다면 그 비늘이 닳도록 쓰다듬어봤을 걸요.”
[참 쉽게 믿는군. 가짜라는 생각은 안 해봤나?]
“가짜셨나요?”
세스는 남부인 특유의 과장된 표정을 지어보였다. 즉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용케 지금까지 없는 듯 이 대화를 구경하고 있던 시녀 중 하나가 침음(沈吟)을 흘렸다.
[아니라고 하면 믿을 건가?]
“아니라는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생각해봐야겠지요.”
용이 꼬리를 흔들었다.
[요즘 남쪽 애들은 용이 멸종했다고 믿는다고 하던데.]
“물론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눈앞에 있잖아요.”
얇은 막이 안구를 덮었다가 금세 눈꺼풀 밑으로 들어갔다. 용의 눈은 유령의 불꽃처럼 새파란데다 동공이 길쭉하게 찢어져 있어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러고 보면 북쪽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파란 눈이 많았지. 연관이 있는 걸까?
“제 눈과 제 생각을 안 믿으면 대체 무얼 믿을 수 있겠어요? 남들이 용은 멸종했다고 떠든다고 해도 내 눈앞에 용이 있는 걸 본 순간 지금까지의 ‘상식’은 모조리 수정해야 마땅하지요.”
[감각은 지식의 시작이요, 첫째 단계이다?]
“어머나, 용이면서 책도 읽나요?”
[다 아는 방법이 있지. 그건…….]
“거기까지.”
날개 위로 손이 뻗어 나왔다. 부러울 정도로 희고 고운 손이 용의 뒷덜미를 덥석 쥐었다. 딱딱해보였는데, 은근히 가죽이 유연했다.
코시카의 옐렌 파블로비치 황제는 인상을 찌푸리고는 인기척도 없이 나타났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