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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싹


숲 (4)


 아아아아아아.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세스는 만지기 무서울 만큼 수가 빽빽하게 놓인 이불에 얼굴을 묻고 몸을 뒤챘다. 첫날의 불안이라든가 익숙지 않은 잠자리에 대한 불편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한 가지의 말만이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

-진심이시라면 키스해주세요.

스스로도 대담한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억지로 받아낸 대답이라는 건 알지만 예쁘다고 해준 게 기쁘고 좋아서 조금 골려주고 싶을 뿐이었다. 아니, 돌아서면서는 조금 아쉬웠던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아, 그래도 키스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하고 생각하며 틈을 내비쳤던가?

그 허점을 한 눈에 간파한 입맞춤이었다. 그건.

처음에는 제대로 각도가 맞지 않아서 입술은 애매하게 아랫입술과 턱 사이에 닿았다. 미지근한 입술이 미끄러져 올라가 제대로 된 곳에 도달했지만, 혀를 얽고 숨을 마시기는커녕 그렇게 잠시 있다가 바로 떨어졌다. 그렇게 어설픈 키스였는데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떨어진 다음에도 입술 사이의 거리는 머리카락 한 올 정도였다. 파르르 진저리 한 번만 쳐도 다시 닿아버릴 거리를 두고, 한참을, 한참을 발이 아픈 줄도 모르고 달리아나 맨드라미로 변해버린 자신과 눈을 마주치며 서 있었다.

-바람이 차니 들어가는 게 좋겠소.

역시 붉게 달아올랐지만 세스와 달리 청초한 분홍색의 장미 같은 황제가 눈을 피하며 그렇게 말하기 전까지.

대체 어떻게 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다. 밤 인사, 했던가? 평소처럼 부드럽게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했을까? 아니면 좋은 꿈꾸세요, 라고 했을까?

숱 많은 머리카락을 아무리 쥐어뜯어보아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기억의 한 뭉텅이가 툭 잘려나가, 어느 순간 침대에 잠옷 차림으로 누워있는 세스가 있었다.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세스는 머리카락을 쥔 손을 놓고 몸을 돌려 등을 대고 누웠다.

쿵, 쿵, 쿵, 침대에 맥박이 뛰었다.

통, 통, 통, 가슴에 기억이 튀었다.

“하아아아아아.”

잔소리 할 시녀들도 없어 마음껏 한숨을 쉬었다. 미셸이 보면 처음도 아니면서 뭘 그렇게 내숭을 떠느냐고 팔을 찰싹 찰싹 때리며 웃을까?

시선이 희미하게 보이는 천장의 무늬를 정신없이 훑었다. 손가락이 보들보들한 입술을 쓸었다. 소름이 돋았다.

키스는 말할 것도 없고 남자와 밤을 보낸 적도 한두 번은 아니었다. 이블린에서 순결은 남녀 모두에게 농담이나 다름없었다. 세스는 개중 얌전한 편이라는 평을 들었는데도, 연회에서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나면 시트가 질척해질 정도로 키스하고, 뒹굴고, 살을 섞곤 했다.

그런데 왜…….

날이 밝으면 무슨 얼굴로 보면 좋을까.

 

남쪽 나라 황녀가 괴로워하고 있을 바로 그 시각, 북쪽 나라 황제 역시 자신의 침실에 누워 후회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세스와 옐렌이 다른 점은 옐렌에게는 이야기할 용 한 마리가 있다는 것. 옐렌은 달빛에 비쳐 새파랗게 빛나는 용을 앞에 두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아.”

아직 입술에 그 감촉이 남아있었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짜릿했다. 세스의 도발은 지나치게 효율적이었다. 자그마한 여자가 ‘장난이었다’고 말하며 야살스레 눈웃음치던 그 순간,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멍청한 짓을 했어…….”

분명 멈출 수 있었는데, 멈추지 않았다. 잠시 주춤거린 탓에 빗나가기까지 했다. 얼마나 한심해보일까. 그는 다시 한 번 후회를 뱉었다.

​“​하​아​아​아​아​아​아​.​”​

[그러니까 왜 그랬나. 장난이라고 할 때 그냥 넘겼으면 됐잖나.]

“비웃지 마. 그리고 남이 키스하는 장면 따위를 보고 있는 건 관음증이야.”

[넌 도마뱀 짝짓기를 보면 발정하나보지? 인간들이 키스를 하든 섹스를 하든 내겐 전혀 감흥이 없어. 어린 마법사.]

어린 마법사. 세스의 앞에서 말하지 못하게 했던 그 호칭이 용에게서 흘러나왔다. 옐렌은 용의 이마에 손가락을 튕겼다. 용은 항의하듯 날개를 퍼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크아앙, 하고 입을 벌리자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났다.

[하지 마.]

“파피야말로 하지 말라면 하지 마.”

용, 파피는 목을 죽 빼곤 꼬리를 휘둘렀다.

[네 심박수가 그만큼 올라가면 나로서는 보러 갈 수밖에 없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해라. 아니면 그냥 죽든 말든 놔둘까?]

침대 여기저기에 널려 있던 베개 중 하나가 갑자기 붕 떠오르더니 자기 혼자 움직여 파피를 후려쳤다. 파피는 뒤로 재빨리 물러나더니 입으로 텁 베개를 물었다. 솜씨 좋게 물어 베개가 터지지 않았다. 베개를 물고 있는 동안에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대꾸할 말이 없을 때 폭력을 쓰는 것은 역으로 상대의 옳음을 인정하는 행위라고 하지.]

옐렌은 귀를 막았다.

용의 말은 성대를 공기가 울려 나오는 말이 아니라 잘 다듬은 의지의 전달이었으므로, 인간의 언어에 구애받지 않았다. 그래서 귀를 막아도 용의 잔소리를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걸 세상 누구보다 잘 아는 옐렌이 귀를 막는 것은 단순한 항의의 표시였다.

힘을 거두자 용의 입에서 벗어나기 위해 팽팽하게 당겨졌던 베개가 축 늘어졌다. 파피는 고개를 휘둘러 입에 문 베개를 던졌다. 넓은 침대 한 구석에 거위 깃털 베개가 떨어졌다.

“작작 해. 설마 침실에도 쳐들어올 셈이야?”

[위험이 없을 거라고 확신한다면 나야 상관없지만 확신할 수 있나?]

옐렌은 어릴 적부터 수많은 위험에 휩싸여왔다. 그 중 파피가 없었더라면 도저히 살아 숨을 쉴 수 없었을 만한 위협도 있었다. 그 말을 듣자 갑자기 어둠을 견디기 힘들었다.

손가락을 튕기자 방 안에 있는 촛불 전체에 불이 붙어 환하게 밝아졌다.

“물론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정도라는 게 있잖아.”

[어차피 귀한 인간들은 입회인을 두잖아?]

“그건 어디까지나 첫날밤뿐이고, 더군다나 수백 년은 된 옛날이야기라고! 요즘 세상에 입회인은 무슨 입회인이야!”

신경질적으로 소리친 옐렌은 몸에 힘을 뺐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 곁방은 시중인 없이 비워두었다. 호위가 필요하다는 말에, 옐렌은 ‘용보다 나은 호위가 있다면 수용하겠다.’는 말로 일관했다. 있을 리가 없었다.

“흥분해서 심장이 뛰는 것과 무서워서 뛰는 것도 구분 못하는 거야? 무능하네.”

[그야 네 반응에 차이가 없으니까. 나는 마음을 읽는 게 아니다. 네 신체의 변화를 읽는 거지.]

옐렌의 빈정거림에도 파피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외모와 애칭에서 추측할 수 있는 것과 달리, 그는 이미 천 년도 넘게 살아온 용이었다. 그는 동면을 하고 있다가, 가까이 다가온 옐렌을 느끼고 깨어났다. 옐렌에게 파피가 중요하듯, 파피에게도 옐렌은 목숨을 이어나갈 마법을 공급해주는 소중한 존재였다.

농담에 장단을 맞춰 반응하는 거라면 몰라도, 겨우 열몇 살 먹은 인간의 ‘어린’ 아이에게 진심으로 화를 낼 일은 없었다. 옐렌이 인간들 사이에서 피를 흩뿌리는 황제로 아무리 악명을 떨쳐도 파피에게는 눈밭에서 무릎이 까져 울상 짓던 아기일 뿐이었다.

“그래서. 대답은?”

[좋아, 당분간은 눈을 떼고 있도록 하지. 네 심장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부르기 전에는 찾지 않겠다.]

그렇게 말하는 파피의 눈은, 지상 위의 다른 어떤 생명체도 가질 수 없는 기이한 청색을 띠었다. 속에서 빛이 흘러나오는 듯 아름다웠다.

파피가 선선히 그리 하겠다고 말하자 옐렌의 가슴이 따끔거렸다.

물론 황궁은 근위대에 의해서 엄중하게 보호받고 있다. 나갈 때는 적어도 다섯 명 이상의 사람들을 데리고 가는 데다, 자신의 힘을 생각한다면 위험이 있으리라는 생각은 희박하다. 무엇보다 위협할 만한 사람들은 저 멀리 작센의 삼형제를 제외하면 전부 쓸어버리지 않았던가.

하지만 어쩐지 불길했다. 그러나 옐렌은 아직 열여덟 살이었고, 그의 몸에는 아직 저릿한 두근거림이 남아있었다.

어차피, 부르면 오겠지.

그는 귀를 붉히며 옆으로 돌아누웠다.

“마음대로 해.” 

자정에 올릴까 하다가 그냥 써지는대로 올립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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