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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싹


혼례식 (1)


     

무정한 해는 제 시간에 떴다. 세스는 한껏 치장하고 식당으로 내려갔지만 황제는 식사자리에 나오지 않았다. 피곤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잔뜩 긴장한 보람도 없이 맥이 빠졌다. 적당히 배를 채우고 방으로 돌아온 세스는 시중을 받아 북쪽 옷을 걸쳐보면서 까르륵 웃었다.

선대의 황실 여인들이 입었다는 옷은 세스의 체구에는 너무 커서, 어린애가 어머니의 옷을 훔쳐 입은 듯했다. 팔도 길고, 치마도 길고, 어깨는 계속 흘러내렸다.

시녀들은 재단사를 불러서 옷을 전부 새로 맞춰야겠다고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잘 뒤져보니 그럭저럭 몸에 맞는 옷도 있었다. 가슴 밑에 끈을 하나 묶는 것만 빼면 몸을 조이는 부분이 없어 아주 헐렁한 민소매 옷이었다. 스토마커도 없이 천 자체에 수가 자잘하게 놓여 있었고, 안에는 흰 셔츠를 받쳐 입어야 했다. 원주인이 아담하였는지 적어도 이 사라판이라는 옷만큼은 치마가 땅에 끌리지 않았다.

옐렌 황제의 누이 중 하나가 입던 옷이라고 했다. 그 누이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자 시녀들은 눈치를 보다가 시집을 가셨노라고 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이복누이들도 다 죽인 황제였지만 친누이만은 죽이지 못하였나보다.

세스는 고개를 끄덕이곤 옷에 맞는 보석을 대보는 데에 열중했다. 처음에는 사실 인형이 아닐까 의심스러웠던 시녀들도 조금씩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코시카 황실이 소유하고 있다는 보석들을 전부 가져오라고 시키고, 세스 개인이 소유한 보석들도 전부 엎었다. 이런 저런 방식으로 가공한 다이아몬드며, 옛날에는 다이아몬드보다 귀했다는 붉은 루비, 노란색 분홍색 초록색 파란색의 사파이어들, 둥그런 진주, 그밖에도 제각기 찬란한 빛을 발하는 귀한 돌들이 천 위에 하찮은 색유리처럼 굴러다녔다.

적당한 옷을 고르고 보석을 몸에 걸친 다음, 시녀들이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며 옷과 보석을 정리하는 동안, 세스는 홀로 앉아 종이를 가져오라 했다.

사실 세스는 시녀들의 조심스러운 농담에 배가 아프도록 웃는 도중에도 속으로는 의기소침해 있었다. 혀 대신 칼을 품고 다니는 이블린에서 평생을 살아온 세스에게 우울해하면서도 웃는 것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닌 잔재주였다.

역시 화가 난 걸까.

세스는 황제의 딸이었다. 꼭 남편과 좋은 감정을 유지할 필요는 없다는 것 정도는 사람보다는 짐승에 가깝던 세 살이나 다섯 살 때부터 알고 있었다. 죽고 못 사는 연애를 해서 결혼한 것도 아니고, 한순간의 단순한 호감, 아무런 약속도 없었다. 각자 정부를 두고 살면서 아이만 낳고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삶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머릿속의 생각과는 다르게 시무룩해졌다. 그 예쁜 남자에게 미움 받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웠다. 정말 아무 것도 없었는데, 손등에 입맞춤 한 번, 진지한 말 한 마디에 홀라당 넘어갔다.

「오를레앙의 잔느 미셸 루이즈 프랑수아즈, 앙주의 아가씨.

안녕, 내 사랑하는 친구. 있잖아. 나 드디어 코시카에 도착했어.」

그 다음은 없었다. 턱을 괴고 앉아 고민해봤지만 미색의 종이가 너무 광활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한 마디도 떠오르지 않았다. 배에서는 오늘 어느 항구에 들렀다 따위의 잡담만으로도 족히 세 장은 넘게 채울 수 있었는데.

「남편, 아니 남편 될 사람을 만났어. 키가 아주 커. 로렌에서 본 사람들 중에 제일 큰 것 같아. 그리고 너랑 나랑 했던 이야기 기억해? 황제는 아주 아주 무시무시하게 생겼을 것 같다고 했잖아. 그런데…….」

간신히 짜내서 몇 줄 썼지만 며칠 뒤 남편 될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펜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 잉크웰에 쏟아놓은 잉크가 말라붙을 정도로 고민해도 마음을 가득 채운 생각은 단 한 줄도 쏟아낼 수 없었다. 결국 세스는 종이를 치우고 차와 ‘어떤 책’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하아.”

설탕을 넣지 않은 따뜻한 차를 마시고 입을 벌리자 흰 김이 한숨처럼 피어올랐다. 한 잔을 다 마실 무렵 심부름을 갔던 시종이 돌아왔다. 세스는 그에게 잔을 치우라고 시키곤, 책을 넘겨보았다.

최근 출판되었다는 책은 생각 외로 두꺼웠다. 송아지나 어린 양의 가죽이 아닌, 펄프로 만든 질 좋고 얇은 종이를 썼는데도 두께가 새끼손가락 길이 정도는 되는 듯했다.

상념에 젖은 채로 성의 없이 페이지를 넘기던 손가락이 한 곳을 짚었다.

이거다.

 

사흘은 빨리도 지나 금세 혼례식 날이 밝았다. 그간 세스는 책에서 찾은 대화 소재를 활용하기 위해 황제가 나타날 만한 길목에서 기웃거렸지만 황제나 용의 코빼기도 볼 수 없었다.

갑자기 오기가 타올랐다. 결혼할 사이에 덮친 것도 아니고 입맞춤 한 번 해달라고 했다고 이렇게 사람을 피하는 게 말이 된단 말인가! 아직 결혼식도 하지 않은 마당에 바쁜 사람을 다그쳐봐야 좋은 반응은 기대하기 힘들 듯하여 결혼식 전날은 얌전히 방에서 보냈지만, 그 동안 세스의 머릿속은 이런 저런 반응으로 부르르 끓어오르고 있었다.

세스는 새벽부터 일어나 자연적으로 흐르는 샘이라는 황궁 뒤편에 있는 샘에 들어가 몸을 씻었다. 원래 의복은 신부의 어머니가 입혀주는 것이지만, 세스의 어머니인 오를레앙(로렌의 여섯 대공가 중 하나)의 마르그리트 안은 로렌의 황후였으므로 당연히 저 먼 로렌의 이블린에 있었다.

신랑의 어머니는 유폐 생활 중 사망했고 신랑의 당숙모는 추방당했으므로 이 황궁에 세스의 시중을 들어줄 만한 여자가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황제는 근처 공국의 공비들을 불러올렸다.

그녀들의 도움을 받아 붉은 혼례복과 베일로 한껏 치장한 신부는 가마를 타고 식장으로 이동해서 앉았다.

붉은 시야를 사이에 두고, 벌써부터 떠들썩한 식장에 앉아 세스는 비장하게 마음을 가다듬었다. 황제가 아무리 세스를 피하고 싶다고 해도 신랑이 결혼식장에 안 나타나지는 않겠지.

아니나 다를까, 홍백으로 치장한 그는 어김없이 나타나 세스의 옆자리에 앉았다.

세스는 몇 겹이나 둘러놓은 붉은 베일 사이로 황제를 훔쳐보았다. 세스가 피처럼 붉은 비단 위에 황금실로 무늬를 수놓은 희한한 의상을 입은 것처럼, 그도 적백이 조화를 이룬 의상을 걸치고 있었다. 검은색 옷만큼이나 붉은색 옷도 잘 어울렸다.

그는 눈앞에 차려진 호화스러운 만찬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고, 고기를 둥글게 뭉쳐놓은 고기 경단만 가끔 한두 개 집어먹었다. 아래 식장의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처럼 보였다.

세스의 자리는 단상의 가장 위였으므로, 모두들 술을 물처럼 퍼마시며 고기를 뜯는 모습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아예 다리뼈를 통째로 들고 호쾌하게 입을 직접 대서 먹는 사람을 찾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세스는 또 하나의 ‘신기한 북쪽 풍습’을 머릿속에 새겨 넣고는 다시 남편 쪽을 돌아보았다.

마침 경단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고 있던 옐렌이 세스를 돌아보았다. 베일을 통해 눈이 마주쳤다. 옐렌은 입에 든 음식을 꿀꺽 삼켰다.

“어디 불편한 것이라도 있소?”

“예.”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을 기대했을 그가 눈에 띄게 움찔했다. 세스는 그 순간 굉장히 안도했다. 그는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세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절대로 화난 사람에게 보이는 반응이 아니었다.

매끈한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슨 일이오?”

“폐하께서 제게 화나셨으니까요.”

“화나지 않았소.”

예. 안답니다. 방금 그 한 마디로 알았지요. 짜증나는 사람을 계속 돌아보면서 확인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잖아요. 특히 황제 폐하쯤 되는 사람이라면 말이에요.

“정말요……?”

“물론이오.”

“저는 또, 그 날 밤 제가 장난이 심해서 화나신 줄 알았지요.”

“아니오. 그건 화낼 일도 아니고, 황녀가 잘못한 일도 아니오.”

사실 그렇다면 사흘 동안 식사 자리에도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세스를 피한 이유가 설명되지 않지만, 굳이 그런 걸 물어서 기껏 나온 황제를 포르르 도망치게 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다행이네요.”

세스가 확연히 밝아진 목소리로 생글거리자 옐렌의 얼굴도 따라 안심한 듯 풀렸다. 정말이지 알기 쉬운 사람이었다. 미리 알고 있었더라면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진 않았을 텐데.

“폐하, 폐하의 흰 용은 어디에 있나요?”

“글쎄.”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영 확신이 서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식사라도 하고 있지 않을까 싶소만. 할 말이 있소?”

“예. 제가 부를 이름을 정했거든요.”

“이름?”

“설마 제 맘대로 붙여도 된다는 말씀을 철회하는 건 아니시겠지요? 도감을 열심히 찾아서 정했는걸요.”

“아니, 아직 그 말은 유효하오만. 정한 이름이 뭐요?”

눈앞에서 도감이 펼쳐지는 듯했다. 새하얀 종이에 화가가 정성들여 그린 그림 중에서 가장 재미있던 네발 짐승이 떠올랐다. 날개는 없지만, 끔뻑끔뻑하는 졸린 눈이 당장이라도 깜빡일 듯했다.

혹시 용이 그 짐승의 이름도 알고 있을까?

세스는 쿡쿡 웃었다.

“코모도라고 정했답니다.”

고백하지만 저는 코모도왕도마뱀을 ​'​코​도​모​'​왕​도​마​뱀​으​로​ 알고 있었답니다. 이번에 소설 쓰면서 찾아보고 깜짝 놀랐어요. 이 도마뱀의 이름은 코모도 섬에서 따온 것이지만 소설 속 세계에 코모도 섬이 있는지는 미지수지요. 가볍게 넘어가주세요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P.S. 앞부분에 독자 프렌들리한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기존 여름 눈송이 독자가 아니시라면 2화를 재독하시면 조금 더 이해가 편하실거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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