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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싹


혼례식 (3)


 “금비를! 금비를! 금비를!”

모두가 열창했다. 세스는 배에 힘을 주고 토끼를 안아 올렸다. 아니, 안아 올리려고 했다.

꿈쩍도 하지 않잖아!

세스는 낑낑거리며 다시 힘을 주어보았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지만 ‘토끼’의 발은 바닥에서 잠시 떨어졌다가 다시 바닥에 내려앉았다. 아니, 뭐 이래?

세스는 승마도 춤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산책은 좋아하지만, 꽉 끼는 구두를 신고 오래 걸으면 발이 엉망이 된다. 무거운 것을 들지 못하면 결혼식에 큰 애로사항이 생긴다고 알려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변이 조금씩 술렁였다. 세스는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았다. 누가 봐도 추한 꼴이었다. 이게 뭐란 말인가. 세상 온갖 까다로운 인간들의 기준이란 기준은 다 맞추며 살아왔지만, 설마하니 소녀 한 명을 못 들어서 결혼식에서 웃음거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세스는 두리번거리다가 저 단상 위에 앉아 있는 황제와 눈이 마주쳤다. 페란트 시절 콜로세움에서 노예검투를 관람하는 데에 썼다는 망원경의 렌즈 같은 연초록빛 눈이, 세스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황제가 일어섰다. 세스는 숨을 들이켰다.

그는 우아한 걸음걸이로 계단을 내려왔다. 붉은 허리띠에 고정시켜 늘어뜨린 긴 금속 장신구가 찰랑였다.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내려올 때마다 입이 말랐다. 세스는 스스로를 꾸짖어보았다. 세스, 정신 차려! 방금까지 옆에 앉아 웃고 있던 사람인데, 평생 볼 사람인데, 대체 못 본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헤벌쭉하게 구니!

하지만 딱히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세스는 지금껏 사귀다가 헤어진 남자들이 자신에 대해 내린 평을 돌이켜보았다. 문학적 수사를 다 빼고 요약하면, 상냥해 보이지만 사실 선이 분명하고 차갑다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그녀 자신도 그런 평에는 대체로 납득했다. 결혼할 남자가 아닌 이상 선을 긋는 건 당연한 일이라 별로 신경 쓰지도 않았다. 그리고 천성이 차가우면 뭐 어떻단 말인가. 그게 숙녀의 덕목에 어긋나 구설수에 오를 항목인 것도 아니건만.

이윽고 마지막 계단을 밟고, 옐렌이 세스의 앞에 섰다. 그 순간 심장이 화끈, 달아올라 저도 모르게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그 사이로 열기가 새어나왔다. 세스는 속으로, 과거의 남자들에게 보내는 진심어린 사과의 말을 읊조렸다.

다들 미안해요. 나는 사실 어리고 잘생기고 귀엽고 지위 높은 남자에게 약한가 봐요. 내가 당신들을 매몰차게 걷어찼던 건 그냥 당신들이 코시카 황제만큼 어리고 잘생기고 귀엽고 지위 높지 않아서였어요.

세스는 다시 한 번 힘을 주려고 했다. 다시 말해, 아직 힘을 주지는 않았을 때였다. 황제는 미지근한 손을 세스의 손등 위로 겹쳤다. 소녀가 깃털처럼 가볍게 떠올랐다. 세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리 애를 써도 들리지 않던 소녀를, 황제는 너무나도 손쉽게 들어 올린 것이다.

장내가 고요하게 둘을 주목하고 있었다. 창백한 입술이 달싹였다.

금, 비, 를.

“금비를 내려라!”

세스가 외치자 폭죽이 터지고, 한 발 늦게 주변에서 아이들이 쏟아져 나와, 바구니에 가득 담긴 금화를 흩뿌렸다. 반짝이는 동전이 허공을 별처럼 수놓았다. 세스는 여전히 토끼의 허리를 붙잡은 채 얼이 빠졌다. 사람이 해일처럼 주변을 휩쓸었다.

예의바르게 잘 차려입은 남녀가 술에 벌겋게 취한 채 금화를 주워 다시 허공에 던지며 놀고 있었다. 그리고 세스는 그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누군가가 다시 발을 구르기 시작했고, 또 다른 누군가가 노래를 불렀다. 한 쪽 구석에서 가느다랗게 시작한 노래는 순식간에 부풀었다. 당장이라도 허공으로 치솟을 것처럼 음이 쌓여갔다. 북과 나팔이 반주를 맞추기 시작했다. 공기가 진동하는 것이 허리에 저릿하게 느껴질 지경이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대체 이게 뭐지.

정돈하여 하나로 주도하고 이끄는 사람이 없는데, 불협화음 하나 없다. 모두가 당연한 듯 하나로 뭉치고 우르르 열을 토한다. 이게 뭘까. 심장이 난데없이 동조해서는 바르르 떨었다. 살면서 온갖 화려한 연회는 물리도록 겪었는데, 북쪽의 연회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결혼식이라서 그런 걸까.

세스가 생각한 결혼식은 생 아델라 성당에서 세스의 형제들이 치렀던 그런 결혼식이었다. 점잖은 음악에 맞추어, 신랑과 신부가 추기경 앞으로 걸어와 반지를 포함한 일곱 가지의 장신구를 나누고, 성사를 드린 뒤 마지막에 신의 앞에서 입을 맞추어 결혼 계약서에 서명하는.

이런 떠들썩한 분위기라니. 신기하게도 세스와 황제의 주변에는 아무도 다가오지 않았다. 마치 투명한 벽이라도 있는 듯했다. 바늘 하나 비집고 올만한 틈도 없어 보이는데, 사람들은 잘만 지나다녔다.

발 구르는 소리가 몇 번이나 났을까, 그리고 노래가 몇 곡이나 지나갔을까.

“황녀.”

그 날 밤, 미지근하던 그 입술이 움직였다.

“이제 공녀는 내려놓는 게 좋을 것 같소.”

불붙은 가슴에 물을 끼얹듯 차가운 목소리가 세스를 일깨웠다. 한순간 키스라도 해주지 않을까 기대한 것이 머쓱했다.

아이는 세스가 바닥에 내려주자마자 한 쪽 무릎을 꿇었다. 무어라고 인사를 나누고는 일어나, 잘도 밟히지 않고 인파 사이로 빠르게 사라졌다. 세스는 아이가 사라지자마자 물었다.

“왜 갑자기 내려오셨나요?”

“사람 많은 곳에서 다른 생각을 하면 위험하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제가 세스를 부드럽게 당겼다. 세스가 서있던 자리에 웬 남자가 비틀거리며 지나갔다. 하마터면 부딪힐 뻔 했다. 황제는 눈썹을 찌푸리며 그를 불렀다.

“루드비히 왕자!”

새된 목소리에 그가 돌아보더니, 무릎 꿇는 대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는 그의 가문이 코시카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회색 머리칼에, 회색 눈. 아주 신경질적으로 생긴 남자였다. 세스는 머리를 잠깐 굴린 끝에 그가 누구인지 알아챘다.

“혼인을 축하드립니다, 코시카의 황제 폐하, 그리고 로렌의 마담 르와이얄.”

매끄러운 중부 말로 남자가 인사했다.

“갈리아 어로 이야기해주었으면 하는군, 친애하는 사촌.”

“아니에요, 이대로도 괜찮답니다. 참석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작센의 왕자님.”

세스 역시 중부 말로 인사하며 사교용 미소를 얼굴에 덧씌웠다. 방금까지의 서운함이나 두근거림이, 파도가 밀려온 모래사장의 발자국처럼 지워졌다.

작센은 저 중부 지방에 있는 꽤 큼지막한 왕국이었다. 옐렌 황제의 둘째 고모가 전대 왕에게 시집가 저 왕자를 비롯한 삼형제를 낳았다. 그 때까지 작센은 왕국이 아니라 공국이었는데, 분가들의 맥이 하나하나 끊어져 땅들이 차츰차츰 뭉칠 시기였다. 제국 여대공이 시집가 후계자를 낳은 덕에 작센은 왕국으로 인정받았다.

세스는 저 가문에 대한 가십거리를 절로 몇 가지 떠올렸다. 한 개의 황실과 여섯 개의 대공국으로 이루어져, 내부에서의 가십거리가 떨어질 날이 없는 이블린 숙녀들도 가끔은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싶어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때 으레 구설수에 오르는 몇몇 가문 중 하나가 저 작센의 위튼 가문이었다.

그리고 그 ‘소문’들은 절대 입에 올려 좋을 일이 없는 것들이었다.

“왕자. 부디 주의하게. 부딪힐 뻔 하지 않았나.”

“예에. 취해서 그랬습니다. 위대하신 코시카의 폐하께서는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시길.”

“내가 아니라 황후에게 용서를 구하게.”

황후. 그 말에 채 설레기도 전에, 세스는 정면으로 마주한 남자의 인상에 깜짝 놀랐다. 왕자씩이나 되어 곱게 자란 사람이 왜 저렇게 갈망에 찌든 얼굴일까?

루드비히 왕자는 꾸벅 허리를 숙여보였다.

“실례했습니다, 폐하.”

“아무 것도 아닌 일이랍니다. 마음에 두지 말아주세요.”

왕자의 버석한 입술이 손등에 닿았다가 떨어졌는데, 불쾌할 지경이었다. 그는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이고 황제의 허락을 받아 물러갔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에도 주변에는 광란의 연회가 펼쳐지고 있었다. 정말이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금화를 흩뿌리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이블린이었다면 구경꾼이 저 정원까지 줄을 섰을 텐데. 신기해라.

황제가 갈리아 어(남쪽 로렌에서 쓰이는 말)로 물었다.

“듀츠 어(중부 국가들에서 쓰이는 말)도 할 줄 알았소?”

“네, 그 쪽으로 시집갈지도 몰라서 배워뒀답니다.”

로렌 여자들은 보통 국외로 시집갈 일이 별로 없었다. 지참금이 거하게 들어가는 풍토 때문에 가문 내에서 결혼하거나 겹사돈을 맺는 일이 잦았다. 그러나 간혹 동부나 중부로 시집가는 일이 있었고, 세스는 필요에 의해서 동부와 중부의 언어를 열심히 배웠다.

페란토(외교용으로 쓰이는 고대 페란트 제국의 언어)는 배우지 않았다. 숙녀로서 필수적으로 배워야 할 교양은 막대한 양이었다. 평생 사용할 일 없을 외국어에 시간을 낭비할 수 있을 정도로, 세스는 한가하지 않았다. 같은 이유로 북쪽 말과 서쪽 말은 배우지 않았다.

조금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구에게나 쓸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있는 법이다. 캬트 어를 배웠다면 조금 더 편했겠지. 하지만 그걸 배우고 익힐 시간에 세스가 배운 다른 것을 잃었을 것이 아닌가. 앞으로 배우면 되는 일이었다.

황제가 손을 내밀었다. 손을 잡자 폭 감싸였다. 황제의 손은 크고, 미지근했다. 그가 세스를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서툴지만 최선을 다하는 정중함이 묻어있었다. 세스는 얼결에 그를 따라갔다. 황제는 능숙하게 사람을 헤치며 세스를 이끌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전부 무릎을 꿇으려고 할 때마다 그건 되었다 거절하랴 인사를 받아주랴 바쁜 와중에도 세스는 옷깃 하나 다른 사람에게 스치지 않았다.

계단을 올라가는 도중에, 황제가 사과했다.

“황녀, 사촌이 저지른 실수에 마음 상하지 않았으면 하오.”

“아까 말씀드렸듯, 정말로 괜찮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여쭈어보아도 될까요?”

“말씀하시오.”

“왜 내려오셨나요?”

 발걸음이 잠깐 멈추었다가, 이어졌다.

“돕지 않는 편이 좋았겠소?”

“아뇨, 단지 신부가 혼자 하는 의식에 신랑이 참여해도 되는지 궁금해서 여쭈어보았답니다. 제가 살던 곳이었다면 아마 이 일로 천 명쯤은 수군거렸을 걸요.”

“수군거릴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신경 쓸 것 없잖소. 아랫사람들의 입이란 언제나 가벼운 법이고, 곤경에 처한 신부를 돕는 일보다 하찮은 구설수가 중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소.”

대체 이 남자는 세스의 가슴을 몇 번이나 들었다 놔야 만족할 셈일까. 세스는 목까지 붉어져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다. 자리에 돌아와 앉을 때까지 황제의 단아한 옆얼굴에서는 조금의 생색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세스가 뭐라고 대화를 나누려고 시도하기도 전에 다시 인사가 줄을 이었다. 결국 세스는 다시 말을 거는 대신 결혼식의 신부답게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손님들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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