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담 (2)
무사히 식장을 빠져나온 세스는 그리웠던 바깥 공기를 한껏 들이켰다. 그러나 북쪽의 공기는 차갑고, 혼례복은 얇아서 금세 으슬으슬 추워졌다.
“폐하!”
옐렌보다 반 뼘쯤은 큰 남자가 다가와 세스의 어깨에 덥석 털외투를 씌웠다. 세스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대체 신부까지 그냥 식장에 놔두시고 살금살금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오면 잘해주겠다고 그렇게 별러놓으시고선 그새 질리셨습니까? 아니 그건 그렇다고 하더라도, 알현을 기다리는 사람이 저 바다까지 닿을 지경이온데 소신에게는 업무를 산처럼 맡겨두시고선 폐하께서는 홀로 즐기시는 망중한(忙中閑)이 그리 달콤하신지요.”
연둣빛 눈이 깜빡임도 없이 고정되었다. 세스는 정말이지 남자가 다다다 쏘아대는 말을 단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모습이 바뀌면 언어 능력도 같이 습득이 되면 얼마나 편할까! 검은 머리에 눈도 새카만 남자였다. 그는 세스를 잡아먹을 듯이 사나운 말투로 쏘아붙였다.
“폐하, 듣고 계십니까?”
그녀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고 발끝을 모았다. 키가 큰 소년이 수줍은 처녀 같은 자세를 취하자 검은 눈에 의심이 섞여들었다.
“폐하?”
“어……. 송구하옵니다?”
세스는 하녀들이 하던 말 중 하나를 따서 읊조려보았다. 그 순간 남자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는 다급히 세스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감히 황후 폐하 되실 분께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부디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기를 청합니다.”
거의 비슷한 눈높이에 있던 얼굴이 푹 아래로 꺼졌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부드러운 남부 갈리아 어였다.
“어머나, 제가 폐하가 아닌 걸 어떻게 아셨……, 푸흡.”
변성기가 갓 지난 사내 목소리로 ‘어머나’ 따위의 여성스러운 감탄사를 내뱉으니 너무나도 우습게 들렸다. 세스는 거울이 없어서, 검은 머리의 남자는 엎드려 있어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발갛게 얼굴을 붉히고 있는 북쪽 황제의 모습이 얼마나 가관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일이 되었다.
“일어나세요. 날이 찬데 땅바닥에 무릎 꿇고 있으면 몸이 상한답니다.”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하온데 마담 르와이얄. 무례를 무릅쓰고 여쭙건대 저희 폐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여기에 있다, 제냐.”
맑은 여자 목소리였다. 흡사 지저귀는 새소리나 돔 모양의 천장에 부딪혀 울리는 목관악기처럼 귀에 박혀들었다. 허공에서 한 처녀가 나타났다. 단정하고 순하게 생긴 얼굴에 키가 작았다. 그녀의 뒤로 흐릿하게 일렁이던 풍경이 그녀가 땅을 밟자마자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세스는 옐렌 황제의 몸으로, 자신의 육체를 가늠하다가 눈을 둥글게 떴다. 이만큼이나 작게 보이는 건가. 냉랭하고 새초롬한 표정을 얹은 자신의 얼굴은 한참이나 아래에 있었다.
일어난 지 채 일 분도 되지 않았건만 검은 머리의 남자가 정중하게 무릎을 꿇었다.
“카나예프의 예브게니가 폐하를 알현합니다. 폐하, 카나예프는 코시카의 것이고, 코시카는 키옌의 것입니다.”
“일어나라, 내 신의는 카나예프의 것이니.”
제냐, 혹은 카나예프라고 불린 남자는 세스의 몸이 입은 혼례복 옷자락을 끌어다 입술을 대었다. 세스는 자신의 용모가 연출하고 있는 풍경에 괜히 귀가 뜨뜻해졌다.
“황녀, 내 몸을 하고 그리 앙증맞은 행동은 삼가주었으면 하오.”
“어머나, 죄송해요, 어머나, 또, 푸흡.”
세스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무너지듯 웃었다. 남자의 헐떡거리는 웃음소리가 정원을 울렸다.
“도망갔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제냐.”
“앞으로 이런 장난은 삼가시겠다고 약속해주신다면 답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폐하.”
“생각해보지.”
“감읍하옵니다. 신의 짧은 생각으로는 몸을 원래대로 바꾸시면 모든 일이 해결될 것 같나이다.”
“탁월한 해답이구나.”
남쪽 황녀의 얼굴에는 북쪽 황제 특유의 거만함이 뿜어져 나왔다. 키가 작아진 그녀, 아니 그 옐렌은 자신의 모습을 한 세스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황녀. 괜찮다면 여기 좀 보겠소?”
“하핫, 하하하하핫. 예?”
“셋을 세면 원래대로 돌아가는 거요. 하나, 둘, 셋.”
앙증맞은 손이 손가락을 탁 튕겼다. 그런데 몸이 바뀌질 않았다. 옐렌은 곤혹스러운 듯이 미간을 문질렀다.
“안 되는데요?”
“이 자식이…….”
“폐하, ‘그 분’께서 장난을 도우신 겁니까? 그럼 가서 풀어달라고 하심이 어떠신지.”
“지금 베일 쓰고 신부 노릇 하고 있을 텐데? 가면 마법을 풀어주긴 하겠지만 두 번은 안 걸어줄 테지. 안 통한다, 제냐.”
남자는 자그맣게 욕설을 지껄였다.
“이런 마법에 조건을 안 걸었을 리는 없고. 가만.”
세스는 항상 거울 앞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턱이 갸름해 보이는 각도로 가장 완벽해 보이는 자신의 얼굴만을 보고 살았다. 초상화를 그리기는 했지만 화가들은 약간의 아부를 섞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바로 눈앞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자신의 얼굴을 보고 시무룩해졌다. 저것보단 조금 더 예뻐도 괜찮았을 텐데.
눈앞의 세스가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황녀. 잠깐 허리 좀 숙여주시오. 제냐, 넌 뒤돌아 있어라.”
“예? 왜…….”
“잠시 실례하겠소.”
그리고 그녀가 와서 입술을 부딪혔다. 세스는 깜짝 놀라 뒤로 피하려다가 긴 다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자빠지고 말았다. 그녀는 옷소매로 입술을 문질렀다.
“폐하, 대체 이 무슨……. 어머나, 몸이 다시 바뀌었네요.”
큼직한 남자의 손이 아니라 작은 여성의 손이었다. 그리고 엉덩방아를 찧은 세스의 앞에 서있는 것은 단정하고 특징 없게 생긴 여성이 아니라 키가 크고 눈부시게 잘생긴 소년이었다.
머리카락의 길이, 생김새, 피부색, 키, 몸집, 모든 것이 진흙으로 빚은 듯 순식간에 바뀐 뒤였다. 검은 머리카락에 유순한 여성의 모습으로 돌아온 세스는 카나예프가 걸쳐준 털외투만을 그대로 걸친 채 눈을 깜빡였다.
“어머나. 몸이 다시 바뀌었네요.”
“몸을 바꾼 게 아니라 외형에 환상을 씌웠다가 환상을 푼 거요. 그 열쇠가 입맞춤이었던 거고.”
“코도모 님께서 정하신 건가요?”
“아마도. 짐승의 악취미지.”
“아쉽네요.”
세스는 옐렌 황제의 도움을 받아 금세 바닥에서 일어났다.
“무엇이 말이오?”
“저는 또 폐하께서 제게 흑심이라도 품으신 줄 알고 좋아했지 뭐예요.”
사내 호릴 때 쓰는 말을 읊으면서도 속으로는 약간 자신감이 떨어졌다. 세스는 황제의 손을 놓고 살랑살랑 뒤돌아 걸어가면서 속으로 투덜거렸다. 저 남자 사실 눈이 삔 것 아닐까. 내 얼굴을 보면서 곱다는 소리를 했다니. 못생긴 얼굴은 아니긴 하지만…….
그런데 왜 안 쫓아오는 거람?
세스가 흘끔흘끔 뒤를 돌아보며 신경을 쓰는 사이, 북쪽의 황제와 황제의 젖동무는 카트 어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제냐. 안 가고 왜 따라오는 거냐.”
“폐하와 폐하 되실 분을 시중드는 일이야말로 소신의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구경하고 싶으면 그렇다고 솔직히 말해.”
“그럼 꺼지라고 하실 것 아닙니까.”
“잘 아네.”
“소신이 폐하를 정성껏 모시겠습니다. 맡겨만 주시옵소서. 시내로 나가실 것이옵니까?”
“좀 꺼져라.”
그러나 카나예프는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오붓한 신혼부부의 월담에 안내원이자 호위라는 명목으로 불청객이 한 명 따라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