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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싹


월담 (3)


     

젊은 황제와 황후의 월담. 세속적인 소설이나 오페라에서라면 변장을 한 두 귀인은 즐겁게 시내를 돌아다니며 꼬치에 꿰어 구운 음식 등을 사먹고, 보석상을 들르든 의상실을 들르든 아니면 축제에 끼어들어서 춤을 추든 야시장 구경을 하든 해야 마땅할 터였다. 세스도 그를 기대해 마지않았다. 옐렌은 제법 월담을 많이 해본 눈치였고, 뒤따라오는 '제냐'라는 청년 역시 탈주하는 황제의 뒷덜미를 채어다 제자리에 앉혀놓는 데에 익숙해보였다. 그런데, 어째서,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북쪽의 황제와 그 젖동무와 남쪽의 황녀는 지금 넓은 사거리 한가운데에 갇혀있었다. 셋의 주변을 마차들이 죽 둘러쌌다. 마부는 물론이요 그 안에 타고 있던 상대적으로 덜 귀하신 몸들이 마차 문에 흠집이 날 것을 감수하고 낑낑대며 내린 뒤 무릎을 꿇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는 예가 아니라 양쪽 무릎과 손바닥을 전부 바닥에 대고, 손등 위에 이마를 붙이고 있었다. 세스는 느긋하게 그 정수리들을 훑어보았다. 확실히 남쪽보다 북쪽에 금발이 많았다. 대충 열 중 하나는 금발인 듯했다.

마차를 타고 가던 귀족 모모 자작-세스는 코시카에 자작 작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모모 자작은 황제의 결혼식을 핑계로 시골에서 황도로 올라왔다. 결혼식에서 하례 인사를 드린 뒤 나와서 황도에 있는 친척집이나 친구의 집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라? 마차의 창문을 내다보고 있는데 눈에 띈 저 곱상한 얼굴의 사내분은 어디서 많이 뵌 것 같지 않은가? 어디 가서 잊어버리기도 힘든 미모를 당당히 내놓고, 혼례복인 붉은 옷을 입은 채 거리를 활보하고 계시는 분이 우리 제국의 폐하가 아니면 대체 누구시라는 말인가? 모모 자작은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권력에 가까워지고 싶어 하는 것은 대부분의 인간이 가진 본성이다. 그러나 자작쯤 되는 이들은 권력에 아부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 그런데 저기에 황제가 걸어가고 있지 않는가! 이것은 주님이 내게 비추어 주신 후광이나 다름없다! 일단 멈추자!

그리로 모모 자작과 노노 백작과 오오 남작과 포포 자작 등이 타고 있는 약 열 대의 마차가 갑자기 급정거를 시도했고, 마침 사거리인지라 양쪽에서 달려오던 마차는 차곡차곡 예쁘고도 복잡한 모양으로 꼬여버렸다. 황제와 황후 될 여자는 그 꽃술이 된 채로 허허허 헛웃음을 흘렸다.

세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굉장한 교통 체증이군요. 대회의 날 센 궁도 이렇게 마차가 밀리지는 않을 거예요."

황제가 이마를 짚었다.

"저번에 나왔을 때에는 괜찮았소만.“

“그 때도 옷을 그렇게 입고 나오셨나요?”

“그건 아니오……. 후.”

"폐하. 소신이 한 말씀 올리자면 일단 의복을 정제하러 다시 돌아갔다 오시는 게 어떠하신지."

"한 번 들어가면 다시 나올 수는 있고?"

"쳇."

갈리아 어로 진행된 대화였으나, 코시카 귀족 중에 갈리아 어에 소양이 있는 자가 있었는지 마른 풀에 불붙듯 주변이 술렁였다. 폐하, 폐하, 폐하, 소신이 불충하고 어쩌고저쩌고. 세스는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흘려들으며 누구인지도 모를 선조에게 감사했다. 신분 높은 자가 반드시 먼저 말을 걸어야 신분 낮은 이가 입을 열 수 있는 로렌의 예법은 소중한 것이었다. 금세 시끄러워졌다.

"황후 폐하 되실 분. 놀라지 마소서."

제냐가 속삭였다. 이내 황제가 세 번 박수를 쳤다.

짝, 짝, 짝.

"정숙하라!"

제냐의 목소리는 미리 경고를 받았는데도 움찔할 정도로 크고 우렁찼다. 단숨에 주변이 초토화되며 정리되는 듯했다. 옐렌 황제가 입술을 달싹여 소곤거렸다.

"통역이 필요하오?"

"해주신다면 좋지요."

눈 앞에서 사람들이 모르는 언어로 대화하는 것이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세스는 생긋 웃었다.

"폐하께서 불편하지 않으시다면요?"

제냐가 또 소리 질렀다. 황제가 작은 목소리로 통역해주었다.

"감히 신하된 자로서 황제 폐하의 앞길을 가로막고도 살아남길 바라는가."

순순히 번역을 해주던 옐렌은 미간을 찌푸렸다.

"말해두지만, 길을 가로막았다고 사람 죽인 적 없소."

세스는 소매로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다.

"그럼요. 안답니다."

제냐는 이어서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어서 길을 열라."

"그런데 제가 보기에 이거 마차 빼려면 골치 아플 것 같은데요."

"그러니 마차 빠질 때까지 기다리면 안 되는 거요. 지금 도망 안치면 황도 경비대가 달려올 텐데 그러면 정말로 골치 아파지지. 어차피 내가 읽을 서류를 써야 한다면서 사칭자를 잡았다느니 하고 야단법석을 떠는 걸 보는 심정이 꽤나 착잡하오."

가까스로 멎은 웃음이 다시 터졌다. 분명 경험담이었다.

"뭐 옥새나 그런 증명할 거리가 하나도 없으세요? 폐하의 인상착의도 모르나요?"

"황녀는 지금 남쪽 황제의 장녀라고 증명할 것을 요구받는다면 아무런 잡음 없이 증명할 수 있소?"

남쪽 황제. 세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가리키는 여상한 평대에 움찔했다. 그렇다. 세스보다 다섯 살 어린 이 아름다운 남자는 세스의 아버지와 동등한 지위에 앉아있는 사람이었다.

"음, 글쎄요. 물론 문장(紋章) 같은 걸 지닌 게 없긴 하지만 이블린에서 저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서요. 이블린 바깥으로 나갈 때는 시녀와 호위를 데리고 다니지요."

"데리고 오지 않았소, 저 뒤에. 그런데 그 시종까지 사칭이라고 의심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소. 국새가 가지고 다닐 크기도 아니거니와 기껏 가지고 있어봐야 모조품이라고 우기면 그만일 테고."

"어머나, 자기 나라 황제의 인상착의도 모르나요?"

"회랑의 초상화가 아닌 이상에야, 사람 손으로 그린 초상화는 인상이 다를 수밖에 없지. 금발에 초록빛 눈이야 찾아보면 얼마든지 있을 테고. 금발 녹안에 큰 키, 여자 같은 얼굴, 이것만으로 황제라는 주장을 그대로 믿어주는 팔푼이들이 황도를 지키면 그것도 곤란한 노릇이지 않겠소."

"그것도 일리 있는 말씀이시군요."

"나중에는 자기들끼리 조용히 처리해야 하나, 고급 장교를 호출해야 하나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리는데 그 기분이, 썩 다시 하고 싶은 경험은 아니오만. 제냐!"

앞으로 나아가 나무 쪼는 딱따구리와 같은 속도로 단어를 내뱉으며 숫제 연설을 하고 있던 검은 머리의 청년이 몸을 돌렸다. 세스는 잠시 감동받았다. 이 북쪽의 남자들은 하나 같이 키가 크고 용모가 단정했다. 곱상하고 선이 여린 황제와는 달리 제냐는 선이 굵직굵직해서 남성미를 풍겼다. 저런 얼굴에, 저런 목소리인데 잔소리꾼이라는 게 조금은 흠이지만.

그가 거대한 사냥개처럼 정중하게 무릎 꿇었다.

"분부 하소서, 경애하는 폐하."

어머나, 연기도 잘 하네. 세스는 생긋 웃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봐야 말씀 하소서, 듣고 있습니다, 뭐 이런 이야기겠지. 무척이나 충성스러워 보였다. 괜찮은 남자다. 굳이 따지자면 혼전에 사귀던 남자들은 저런 쪽에 가까웠다. 저런 남자들이 영리하다. 딱 자르면 말을 잘 알아듣고 구질구질하게 굴지 않는다.

하지만 세스는 슬며시 황제의 손끝을 잡아끌었다. 다행히도 옐렌은 꼬리 밟힌 고양이처럼 튀어 오르지 않았다. 귓바퀴가 금세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취향이 바뀌었나보다. 말귀 잘 알아듣는 남자보다 귀여운 남자가 더 마음에 들었다.

“무얼 그리 말을 길게 늘어뜨리느냐. 그저 이 자리를 뜨면 될 것을. 비켜라.”

황제는 명령했다. 그리고 황제의 연녹색 시선이 닿은 곳에 무릎 꿇고 있던 남자들이 재빨리 일어나 비켰다.

“나가는 게 좋겠소.”

옐렌은 세스에게 잡혀있던 손을 슬며시 뺐다. 그리고 세스가 서운해 할 틈도 없이 다시 세스의 손을 쥐었다. 키가 큰 사람이라 그런지 손도 컸다. 세스의 손이 폭 파묻혔다.

세스는 그 손에 이끌려 시장으로 향했다. 의상실에 들러 미리 만들어놓은 몇몇 옷을 갈취해서 갈아입었다. 세스는 남부인의 특징이나 다름없는 녹색 눈동자를 빛냈다. 평생 귀하게 자라왔으나 도전을 마다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세스는 눈앞에 놓인 꼬치구이를 집어 들었다. 양을 꼬치에 꿰어 마늘로 양념한 구이는 핏물이 살짝 남게 구운 양갈비와는 또 다른 맛이 났다. 옐렌은 주의 깊게 그녀를 지켜보다가, 세스가 생글생글 웃어보이자 안심한 듯 술을 따랐다.

남쪽의 황녀는 그런 그의 서툰 시선을 충분히 알아차릴 정도로는 눈치가 빨랐다. 그리고 세스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서투르다면 익숙하게 만들면 그만, 모르는 것은 가르쳐 주면 그만, 그리고 구질구질한 끝이 걱정된다면 끝을 내지 않으면 그만인 것이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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