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프롤로그
2. 여파
3. 노도카의 본모습
4. 린의 선택
5. 시작의 장소
[character file]
후기
프롤로그
가즈히로는 꿈을 꾸고 있다.
6년간 정든 검정 란도셀을 매고 친구들과 같이 걸어가는 하굣길. 길가에 핀 민들레나 뱀밥을 잡아 뜯으며 천진난만하게 논다. 지금 보면 별것 아닌데 그 시절엔 뭐든지 다 재미있었다.
그런 초등학교 시절의 추억이 잠든 가즈히로의 머릿속에서 맥락도 없이 펼쳐져 간다. 그리고 마무리는 초등학교의 마지막 날…… 졸업식이었다.
학교에서 교문까지 30미터 정도 뻗은 길가에 늘어선 벚나무들이 일제히 흰색으로 흐드러지게 피어나 부드러운 봄바람에 꽃잎이 나풀나풀 파란 하늘에 흩날렸다.
가즈히로는 벚꽃이 좋았다. 왜 벚꽃을 좋아하냐면 세노에 일가는 가족이 다 함께 꽃구경하는 게 연례행사였기 때문이다. 수많은 꽃잎이 춤추는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먹는 어머니의 도시락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맛있었다.
내년에 또 오자, 내후년에도 올 수 있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그게 어머니의 입버릇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 어머니 손에 이끌려 벌써 6년 동안 이 길을 다녔다. 그리고 지금 같은 길을 걷고 있다. 함께 졸업식을 맞이한 반 친구들과 함께.
입학식 날이 그랬듯, 파란 봄 하늘 아래 벚꽃 눈이 내리고 있었다. 다만, 입학식 날과 다른 점은 그날 가즈히로의 손을 잡아줬던 어머니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는 것뿐이었다.
이제 곧 중학생으로서의 나날이 시작된다. 기대로 부푼 가슴을 안고 같은 중학교에 다니게 된 반 친구들과 6년 동안 공부한 학교를 뒤로했다.
앞으로도 즐겁게 지낼 수 있을 거야……. 지금까지처럼. 가즈히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교문을 나서자 당장에라도 달려 나가고 싶은 마음이 부풀었다. 하지만 가즈히로는 뭔가가 부족한 느낌에 발을 멈추고 돌아봤다.
“왜?”
가즈히로를 사이에 두고 걷던 같은 야구부원들이 이상하다는 얼굴로 갑자기 걸음을 멈춘 가즈히로를 들여다봤다.
“아하! 오노가 없어서 그러는구나?!”
속마음을 들킨 가즈히로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오노는 가즈히로와 유난히 더 친한 반 친구였다. 아니, 그냥 친구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아이’는 남자와는 말도 못 나눌 정도로 소심하지만 왜인지 야구에 관심이 많았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리는 야구 연습에도 이따금 모습을 드러내고 운동장이 한눈에 보이는 둑에 앉아 질리지도 않고 연습하는 모습을 바라보고는 했다. 그리고 교실에서는 짝꿍인 가즈히로에게 신나게 감상을 떠들었다. 누가 잘했다, 이 플레이가 굉장했다, 등등.
남자와는 잘 지내지 못하는 ‘그 아이’였지만 옆자리라 그런지 가즈히로와는 편하게 말을 나누었다. 어쩌면 그 아이에게는 야구부의 중심 선수였던 가즈히로가 특별한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그건 가즈히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 아이’가 있었기에 /투수가 되겠다는 특별한 마음/을 품게 됐으니까.
그런 ‘그 아이’는 오늘 여기에 없었다. 졸업식 얼마 전부터 몸이 안 좋아졌다고 했다.
게다가 부모님의 재혼과 직장 관계로 다른 지역 중학교로 진학하게 됐다. 졸업식이 끝나면 이제 만날 수 없겠지. 뭔가 부족하다고 느낀…… 원인은 명백했다.
가즈히로는 여자를 좋아한대요~ 라거나, 오노는 가즈히로 여자래요~ 와 같은 친구들의 놀림이 이어졌다. 참다못한 가즈히로는,
“아니랬잖아! 오노랑은 상관없어!”
라고 반론했지만 그 말을 순순히 믿는 반 친구는 한 명도 없었다.
6학년이나 되면 다들 사춘기 초입에 들어선다. 여자와 친하게 지내는 남자아이를 놀리는 일은 흔했다.
몇몇 여자아이들은 지금부터 집으로 문병을 간다고 했다. 가즈히로에게도 같이 가자고 했지만 단칼에 거절했다. 보나 마나 친구들이 또 놀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 미련은 남았지만, 그날은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봄방학이 시작됐다. 중학생이 되기 전의 짧은 휴식. 지금까지 함께 야구를 해 온 친구들과 중학교에 가서도 같이 야구하자고 맹세하고 매일 초등학교 운동장에 가서 야구를 즐겼다. 그 모습이 꽤나 즐거워 보였는지 며칠 뒤에는 야구부가 아닌 반 친구들까지 몰려왔다.
에이스 가즈히로가 전력으로 던지면 재미가 없으니 적당히 조절했다. 에러, 폭주, 장난기 가득한 비장의 플레이까지…… 허물없는 친구들과 배꼽이 빠져라 웃으며 즐기는 야구놀이.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었다. 저물어 가는 태양이 주위를 오렌지색으로 물들일 무렵, 운동장에 ‘그 아이’가 나타났다.
“야! 오노가 왔어!”
“진짜네!”
모두의 웅성거림에 가즈히로도 ‘그 아이’가 와 있다는 걸 알았다. ‘그 아이’는 여전히 둑에 앉아 가즈히로와 친구들을 보고 있었다.
오렌지빛을 띤 ‘그 아이’의 옆얼굴. 그 모습은 묘하게 슬퍼 보였지만 가즈히로는 오랜만에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사실만이 기뻤다.
교정 외벽에 달린 대형 괘종시계를 보니 시곗바늘은 벌써 오후 다섯 시를 지나고 있었다. 이제 곧 해산할 시간이었다. 그럼 야구 시합이 끝난 뒤에 말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 아이는 그 전에 자리를 떴기 때문이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그날이 이사 가는 날이었고,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운동장에 들른 것이라 했다.
그때 ‘그 아이’의 슬픈 표정이 잊으려야 잊히지 않았다. 가슴이 죄어 왔다.
왜 그 아이가 이렇게 마음에 걸리는 걸까?
그 의문의 답이 ‘첫사랑’이었기 때문에…, 라고 이해한 건 중학생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가즈히로는 꿈에서 깼다.
“또 그 꿈이네…….”
천천히 눈을 뜬 ‘린’은 침대 위에서 깜빡 졸았던 듯했다. 머리맡에 놓인 시계는 오전 6시 5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5분 후면 알람이 울리겠지.
‘되게 오랜만이네…….’
가즈히로가 이 꿈을 꾼 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해 꾼 꿈이었다. 그때마다 가슴이 저릿했다……. 그립고 가슴 아리는 꿈. 오랜만에 그 꿈을 꾼 건 분명히 어제 야구대회에서 마음껏 야구를 즐겼기 때문이리라.
‘그때 난 어떻게 하는 게 좋았을까?’
이 꿈을 꾸고 난 뒤에는 항상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단 한 마디… 새로운 곳으로 향하는 그 아이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면 이렇게 안타까운 감정을 질질 끄는 일도 없었을 텐데.
하지만 그건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그날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그때 알람이 띠리리리 울리기 시작했다. 그 바로 옆에는 낡은 연식 야구공이 놓여 있었다. 그건 E반과의 시합에서 마지막 타자를 삼진으로 물리쳤을 때의 공……. 바로 위닝볼이었다. 포수였던 오무라가 기념으로 ‘린’에게 준 공이었다.
마음껏 맛본 충실감을 되새기자 얼굴이 배시시 풀리는 게 느껴졌다. 한 번 더 그런 시합을 하고 싶어. 그렇게 생각하며 ‘린’은 알람을 끄기 위해 시계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온몸에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으윽……!’
팔, 어깨, 배, 엉덩이……. 숨 쉬는 것조차 잊을 정도의 날카로운 통증이 ‘린’의 전신을 덮쳤다. 가즈히로는 이 통증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 흔히 말하는 ‘근육통’이라는 녀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