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파 (3)
“그, 그런데 그 ‘언니님’이라는 호칭은…… 빼 주면 안 될까?”
“어머나, 왜요?”
“아니, 그게… 왠지 좀 간지러워서, 응?”
“어머나, 의외로 부끄럼을 많이 타시나 봐요.”
사야카는 흐뭇한 구경거리라도 발견한 듯 우아하게 웃었다.
“그럼 조금 버릇없어 보일지도 모르지만 다음부터는 ‘언니’라고 부를게요.”
‘그게 그거잖아!’
그저 ‘님’ 하나 빠졌을 뿐이다. 하지만 이미 주도권은 사야카가 쥐고 있었다. 잇따라 질문이 날아들었다. 좋아하는 동물, 좋아하는 음식, 그리고 좋아하는 연예인은 누구인가…… 등등.
가즈히로는 ‘린의 기억’에 의지해 어떻게든 대답은 하고 있지만 과하게 기억을 더듬은 탓에 대화가 끝날 무렵에는 지혜열이 다시 도질 지경이었다. 다만 그 대답을 하는 사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 틈엔가 사야카의 왼팔과 ‘린’의 오른팔이 붙어 있었다. 마치 사야카가 ‘린’에게 몸을 꼭 붙이고 있는 것처럼.
여자들끼리는 남자보다 스킨십에 저항이 없는 걸까. 그래도 이건 너무 적극적이잖아…… 라고 생각했다. 옆에서 보면 이미 ‘친구’라기 보다 ‘연인’이었다.
‘으아아, 좋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고…….’
부드러운 팔의 감촉이 기분 좋았지만,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았다. 이대로는 비도덕적인 세상으로 끌려가고 말리라. 그런 생각이 들자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길과 나란
히 흐르는 개천을 가리키며 어색하게 소리를 높였다.
“와아― 잉어가 있네, 저기 봐!”
힘차게 개천을 헤엄치는 잉어가 한 마리 보였다. ‘린’은 자연스럽게 사야카에게서 떨어져 가드레일을 짚고 개천을 바라봤다.
“린 언니, 물고기 좋아하세요?”
사야카는 이상한 생물체라도 본 듯한 눈으로 ‘린’을 쳐다봤다. 역시나 관심이 없는지 같이 개천을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그, 그런 건 아니지만…… 어, 엄청 크길래. 아하하…….”
“우후후, 남자 같은 면도 있으시네요. 좀 의외예요.”
애초에 ‘린’의 알맹이는 ‘세노에 가즈히로’니까, 남자 같은 게 당연했다. 다만 사야카는 그런 사정을 모르니 의외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잉어는 가즈히로가 걷는 속도에 맞춰 따라왔다. 그리고 작은 다리 옆에서 참방, 하고 깊이 들어가 더는 보이지 않았다.
“언니. 제 집은 저쪽이에요.”
사야카는 개천에 있는 작은 다리의 건너편을 가리켰다. 개천을 경계로 반대쪽은 비교적 새로운 집들이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신흥주택가였다. 사야카의 집은 그 중 하나이리라.
사야카는 일부러 멈춰서 인사를 했다.
“그럼 저는 이쯤에서 실례할게요. 내일 언니의 하복 모습도 기대되네요.”
“엥?”
얼빠진 ‘린’의 목소리가 주위에 울려 퍼졌다.
“어머, 혹시 잊고 계셨어요? 내일부터 하복이잖아요…….”
가즈히로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생각이 났다. 그래, 내일부터 6월이었지……, 호메이 고교는 정해진 날부터는 반드시 교복을 바꿔 입어야 했다.
큰일 날 뻔했네. 그대로 모르고 있었으면 내일은 ‘린’ 혼자 동복으로 등교해서 망신을 당했으리라.
“무, 물론이지! 이, 잊긴 누가 잊었다고! 아, 하하하하…….”
황급히 손을 내두르며 부정했다. 사실은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알겠습니다. 그럼 그런 걸로 해 드릴게요.”
사야카는 여유만만한 미소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가즈히로는, 쪽 팔려……, 라고 자조하며 멋쩍음을 감추기 위해 손을 흔들었다.
“으, 응. 그럼…… 조심해서 가.”
“고맙습니다. 이렇게 다정하시기까지!”
그렇게 봐서 그런지 사야카는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그리고 수줍은 미소를 보이며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라고 재차 인사를 하며 작은 다리를 건너갔다. 작은 다리를 다 건넌 사야카가 뒤를 돌아 또 손을 흔들었다. ‘린’도 손을 흔들어 주자 사야카는 그제야 주택가 골목으로 사라
졌다.
‘아이고, 죽겠네…….’
‘린’은 피로감에 젖어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히 얌전하고 예의 바른 아이였다. 무엇보다 얼굴도 귀여웠다. 다만 감성이 너무 달랐다. 그래서 이렇게 진이 빠진 것이리라.
‘뭐, 됐어. 가끔은 이런 일이 있어도…….’
이것도 구기대회의 여파임에 분명했다. 입부 권유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여파가 나중에 성가신 일을 불러오게 되리라고는 이때의 가즈히로는 상상도 못했다.
현관 거울에 전신을 비춰 봤다. 거울 안에는 여름 세일러복을 입은 ‘린’이 있었다.
“응응! 역시 우리 린은 뭘 입어도 잘 어울려어~! 역시 우리 딸이야!”
‘린’을 칭찬하는 건지 자화자찬인지 알 수 없었다. 거울 맞은편에서 ‘린’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생글생글 웃는 코토미의 모습에 가즈히로는,
‘역시 코토미 씨야…….’
라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코토미의 자화자찬은 이어졌다.
“호메이는 아무리 봐도 하복이 훨씬 더 예쁘다니까. 순백의 세일러 블라우스에 깃과 소매 커프스의 연지색이 진짜 멋져!”
‘아, 예에…….’
“거기다 반팔이다 보니까 우리 딸의 탄탄한 팔에 어찌나 눈이 부신지! 꼭 엄마 젊었을 때를 보는 것 같지 뭐니~!”
‘그, 그러신가요…….’
그냥 내버려두면 영원히 계속되리라. 가즈히로는 이쯤에서 비장의 수단을 쓰기로 했다.
“그런데 출근 안 해도 돼?”
“앗! 나 좀 봐! 오늘은 서둘러야 하는데!”
코토미는 종종 뭔가에 몰두하면 그 외의 일은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이렇게 한 마디 던져 현실로 돌아오게 하면 된다. 예상대로 코토미는 항상 드는 핸드백을 쥐고 서둘러 현관을 빠져나갔다.
금세 시동 거는 소리가 들리고, 곧 차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출발했다. 그렇게 주위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가야사카 가 아침 일상의 한 장면이었다.
조용해진 집에서 가즈히로는 다시 거울을 들여다봤다. 스커트 원단은 바람이 잘 통하는 천으로 바뀌었지만 색은 학교를 상징하는 연지색 그대로였다. 하지만 세일러 블라우스는 흰색으로 바뀌었다. 아까 코토미가 말한 것처럼 ‘린’의 신체는 이 서머 세일러를 정말 잘 소화하고 있었다.
오늘부터 호메이 고교는 일제히 하복으로 바뀐다. 여자는 앞서 말한 서머 세일러복으로, 남자는 가쿠란이 아닌 칼라에 호메이 고교의 엠블럼이 수놓인 여름용 와이셔츠로. 이미 땀이 나는 날이 계속되고 있었기에 기다려 마지않던 교복 교체라고 할 수 있었다.
현관을 나선 ‘린’은 오른손에 가방을 든 채로 양손을 쭉 올려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요 며칠 계속 파랗던 하늘이 오늘은 구름으로 가득했다. 구름 사이로 흐릿한 햇살이 비춰서인지 금방 비가 쏟아질 것 같진 않았다. ‘린’은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한 아침 일기예보를 믿고 우산 없이 집을 나섰다.
‘아― 오랜만에 조깅이라도 하면 좋겠다…….’
근육통도 완전히 나아 그런 기분이 마구 샘솟았다. 구기대회에서는 겨우 4이닝을 던지고 근육통에 시달렸다. ‘세노에 가즈히로’일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유연성과 탄력에는 불만이 없었지만, 문제는 체력이었다. 그렇다면 달리기는 절대 빼놓을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학교로 이어지는 길을 걷고 있는데 백 미터 정도 앞에 눈에 익은 모습이 보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보자 흰 서머 세일러복 앞의 녹색 스카프와 함께 특징 있는 트윈테일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서 있는 장소는 어제의 작은 다리였다.
결론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 모습의 정체는 ‘무라노 사야카’였다.
‘으윽! 설마 아침부터 지키고 있을 줄은…….’
하지만 잘 생각해 보니 함께 하교했던 만큼 함께 등교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적어도 사야카에게는.
재빠르게 ‘린’을 발견한 사야카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린’을 향해 달려왔다.
“안녕하세요, 린 언니.”
아침 인사와 함께 기쁜 듯 미소 짓는 사야카. 가즈히로는 속으로 마음의 준비를 하며 사야카의 페이스에 휘말리지 않고 차분히 대응하고자 시험 삼아 인사를 건넸다.
“안녕, 무라노.”
“세상에…… 그럼 안 돼요.”
“어, 뭐…… 가?”
“저는 꼭 ‘사야카’라고 불러 주셨으면 해요!”
묘한 지적에 가즈히로는 온몸의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왜인지 사야카의 안에서 ‘린’은 사야카를 그렇게 불러야만 하는 듯했다.
“그, 그럼 사야카……?”
“꺄아! 기뻐요! 언니가 이름을 불러 주시다니!”
“아, 하하…….”
사야카의 페이스에 휘말리지 않겠노라…… 했던 맹세도 잠시, 순식간에 사야카의 페이스에 휘말리고 있었다. 애초부터 사야카에겐 악의가 없었다. 그런 사야카를 차갑게 대하다니 가즈히로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걸 ‘다정함’이라고 부를지 ‘우유부단함’이라고 부를지는 의견이 나뉘겠지만.
“언니, 역시 하복 잘 어울리세요.”
나란히 걷기 시작하자마자 사야카는 그렇게 말을 시작했다. 확실히 하얀 세일러복 쪽이 반팔이라는 점도 한몫해 더욱 활동적으로 보였다. 특히 동복일 때는 가려져 있던 희고 가는 팔이 눈부셨다. 스포티한 ‘린’의 이미지에도 딱 맞아 떨어졌다. 그건 집에서 전신 거울로 확인하고 온 가즈히로도 동감이었기에 부정은 하지 않았다.
“그, 그래……. 그런데 너도 잘 어울리는데?”
당연하지만 사야카도 어제와 달리 하복이었다. 흰색을 바탕으로 한 세일러복에 산뜻한 녹색 스카프의 대비. 분명히 어제보다 더 눈부시게 보였다.
“정말요? 기뻐요!”
‘린’의 대사가 꽤나 기뻤는지 사야카는 눈을 반짝였다. 그런 시시한 이야기를 나누며 나란히 걷고 있는 둘이었지만 오늘도 역시 사야카의 몸이 차츰 달라붙기 시작했다. 의식하고 그러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부자연스러운 거리였다.
또 어제처럼 얼버무리자……, 하고 생각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오늘은 개천에 잉어가 보이지 않았다.
“이, 있잖아…….”
“네! 왜요, 언니?”
“조금만…… 떨어져 걸으면 안 될까?”
‘린’은 사야카를 자극하지 않도록 웃으며 조심스레 말했다……, 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사야카는 충격을 받은 모습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는 멈춰 버렸다.
“왜, 왜 그래……?”
움찔대며 묻는 ‘린’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사야카의 어깨가 작게 흔들렸다. 그리고 아래를 향하고 있던 사야카의 얼굴이 천천히 올라왔다. 지금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언니는 제가 싫으세요……?”
사야카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가즈히로는 동요를 감출 수 없었다. 도움을 청하듯 올려다보는 눈망울은 사정없이 죄책감을 불어넣었다. 가즈히로는 그 죄책감을 이겨낼 수 없었다.
“아니, 저기…… 그러니까 딱히…… 싫은 게 아니라…….”
누가 들어도 종잡을 수 없는 변명이었지만 사야카의 눈은 갑자기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싫으신 건 아니죠?! 다행이다……. 저 정말 기뻐요!”
그리고 사야카는 ‘린’의 팔을 꼭 끌어안았다. 결과적으로 아까보다도 밀착도가 증가하고 말았다.
기이하게도 팔짱을 끼게 된 ‘린’이었지만 물론 뿌리치고 싶어도 뿌리칠 수 없었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사야카가 무슨 소리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린 언니의 팔, 탄탄해서 정말 멋있어요.”
“그, 그러니……? 고마워…….”
뽀얗고 호리호리한 데다 살도 적당히 붙은 ‘린’의 팔은 안고 있으면 굉장히 기분 좋으리라. 사야카는 ‘린’의 팔에 볼이라도 비빌 듯한 기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