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철문을 나오자 방공호를 연상케 하는 복도가 눈앞에 펼쳐졌다.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갈 정도로 폭은 넓었지만, 덩굴이 만연해 이동하는 건 쉽지 않았다.
지하 복도 끝에 있는 방인 듯했다. 복도로 나서고 정면에 위치한 긴 통로는 엘리베이터 바로 앞에서 끊겨있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봤지만, 가연의 말대로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옆에는 5구역이라 적힌 이 공간의 명칭과 비상구가 있었다.
결코 부서질 것 같지 않은 철제 벽이 쩍쩍 갈라져 그 사이로 각종 식물이 뿌리를 뻗고있다. 뿌리가 있으니 역시 지하인 게 확실하다. 그 말인 즉슨, 이 5구역은 상층에 노출되지 않게 하기 위해 일부러 지하에 건조됐다는 뜻일까?
“가연아. 여기부터는 아직 올라가보지 못한 거지?”
“응. 너도 아까 들었잖아. 그 진동……. 그건 절대 자동차 소리가 아니었어. 코끼리가 걸어가는 소리라고 해야 될까? 아무튼 생물의 느낌이 났었잖아. 이런 건물 근처에 코끼리가 있을 리는 없고.”
가연이 공포를 억누르듯 두 손을 꽉 잡고 말했다.
듣고 보니 일리 있는 말이었다. 생물이 지나가는 묘한 흔들림. 이런 장소에 아직 17살밖에 되지 않은 학생들만 남겨두고 사람들이 자취를 감췄다는 건, 좋은 의미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내 머릿속에 처음 떠오른 상황은 전쟁이었다. 전쟁으로 인해 이 지역에 사람들이 살지 않고, 건물 내부까지 덩굴이 자라날 정도로 관리가 부실한 이유도 설명할 수 있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대규모 전쟁이라면, 혹시 핵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이 5구역 보존실이 지하에 건립된 이유도 설명이 가능하다. 예상대로 핵전쟁이라면 밖은 결코 생명이 살아가지 못한다. 그에 비해 방금 들었던 진동은 분명 생명체의 움직임이다.
밖은 아직 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일 수도 있다.
인큐베이터 안에 들어가기 전은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다니던 청운고등학교는 서울에 있다. 실험동 안의 표지판이나 글귀들을 봐서 여기가 타 국가에 있는 비밀 실험장은 아니다. 여기는 한국이고 이런 장소가 건립될 만한 장소는 서울을 제외하고 대도시들 몇 군데 정도다.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비상구 문을 잡아당겼다.
끼익거리며 노후한 문을 힘겹게 열어젖히자, 비상구를 따라 계단에 두껍게 자리 잡은 굵직한 덩굴들과 마주했다. 층계참이 어디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덩굴들이 만연했지만, 사람이 통과할 틈 정도는 있어 보인다.
가연이 내 뒤로 바짝 붙어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순간 푹신푹신한 무언가가 등 뒤를 농락하듯 느껴졌다.
‘아… 이런 상황에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저, 저기 가연아……. 조금만 떨어지면 안 될까? 그렇게 붙어 있으면 걷기가 부, 불편하잖아.”
가연은 내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자세 그대로 유지했다. 바들바들 떠는 느낌이 전신에 퍼져왔다. 이틀 간 어떤 상황인지도 모른 채, 이 5구역 보존실에 혼자 있었다. 심적인 압박이 상당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녀의 지금 행동은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그래도 너무 밀착한 나머지 남자로서의 본능이 한계를 치닫고 있었다.
“가, 가지마. 왠지 기분이 안 좋아……. 되도록 여기에 있자.”
가연이 새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대로 언제까지 있을 수만은 없잖아.”
“그건 모르는 일이야. 곧 구조대가 올지도 몰라. 위험이 도사릴지도 모르는 곳에 무턱대고 나가는 것보단 안전하게 여기에 있는 게……”
“네 말도 충분히 이해는 되지만, 이 상황을 보면 한동안 구조대의 손길은 바라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아. 이 덩굴 굵기 좀 봐. 적어도 수 년 동안 방치되지 않으면 자랄 수 없는 크기야. 이 근방에 사람의 관리가 오래전부터 끊겼다는 증거겠지. 오히려 밖으로 나가야 구조대를 부를 수 있을지도 몰라.”
내 허리를 두르고 있는 가연의 두 손에 살포시 내 손을 포갰다.
“너무 걱정하지 마. 잠깐만 상황을 보러 올라가는 것뿐이야. 네 말대로 위층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 가연이 너는 여기에 있어. 금방 갔다 올게.”
“뭐? 나를 여기 혼자 두겠다는 거야?”
“아니야. 대책을 강구하자는 거야.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면 좋겠지. ……위험하다고 판단하면 바로 돌아올게.”
난 힘을 주며 가연의 손을 떼어냈다. 가연은 여전히 일그러진 얼굴로 나를 말려보려고 했지만, 난 단호하게 굵은 덩굴에 발을 댔다.
“꼭 돌아와야 돼. 여기에 나 혼자 남겨두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
난 가벼운 미소로 가연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덩굴을 타고 올라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내가 지금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비상구에는 명멸하는 전구조차 존재하지 않아 감각에 의존한 채 올라가야 했다.
‘이게 도대체 뭔 일이야. ……아직 다리를 움직이는 게 불편해…… 젠장.’
얼마나 올라왔을까? 차츰 시야가 트이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불빛이 새어 들어온 모양이다. 농밀했던 지하의 쾨쾨한 냄새도 사라져 갔다.
층계참을 오른 끝에 드디어 불빛이 새어 나오는 비상구를 찾아냈다. 난 환희의 미소를 지었다.
“태, 태범아. 거기 있는 거지?”
그때 바로 밑 지하 5구역에서 가연의 갈라지는 음성이 메아리쳤다.
“응. 나 여기에 있어. ……문이 있는데?”
“무, 문이라고? 나가는 곳이야?”
“아니, 그건 아닌 거 같아. 아무래도 우리가 있던 곳은 지하5층에 해당하는 곳이었던 모양이야. 여기 4구역이라고 적혀있어.”
진흙으로 더러워진 표지판을 손으로 닦아 확인했다.
“4구역이라고? 그럼, 방금 그 진동은 4구역에서 발생했다는 거야?”
“음…… 글쎄…… 아무튼 여기를 들어가 보면 알 수 있겠지?”
난 마음을 다잡고 4구역 비상구 문손잡이를 돌렸다. 잠겨있지 않았다. 여기도 지하라면 우리가 있던 보존실이 또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도 있을지 모른다.
문을 열어젖혔다.
“응? 아아악──!”
4구역 비상문을 열자마자 보인 광경에 기절할 뻔했다. 비명이 울리며 층계참 전역으로 확산되어 갔다. 이빨이 탁탁 부딪혔고 눈에 보이는 광경에 저절로 뒷걸음질 쳤다.
“태범아! 태범아! 무슨 일이야?! 태범아!”
그때 지하 5구역으로 연결 덩굴 줄기가 흔들려 감각을 자극했다. 내 비명에 가연이 올라오는 것이리라.
“오지 마!”
난 곧바로 소리쳤다.
“태범아! 무사한 거지? 무슨 일이야.”
“오지 마. 오면 안 돼.”
“……태, 태범아. 그러지 마. 무서워지잖아. 장난치는 거지?”
나도 장난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걸 장난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4구역 문 너머에는 5구역과 비슷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도면상으로 5구역과 같은 설계형식을 쓴 거 같다. 덩굴이 복도 전체를 휘감고 철 냄새 진동하는 물기가 벽면을 타고 흘렀다. 그리고 나를 놀라게 한 붉은 선혈. 4구역 전체는 검붉은 핏자국이 붉은 스프레이처럼 퍼져 있었다. 사방이 붉었다. 이건 인간의 피 일까? 이러니 사람이 없는 게 당연하다. 이미 죽어버린 거다. 이곳을 관리할 사람을 비롯해 관계자 모두 이 잔혹한 사태에 휘말렸을 것이다.
“꺄아악──!”
바로 내 옆에서 들린 비명소리에 고개를 휙 돌렸다. 가연이 찢어질 것 같은 눈으로 비상문이 열린 4구역 내부를 보고 있던 거였다.
“이 바보야! 올라오지 말라고 했잖아.”
가연이 배와 입을 움켜쥐고 당장이라도 토할 기세를 보였다.
난 서둘러 그녀의 얼굴을 끌어안았다.
“보지 마……. 넌 아무것도 못 본거야. 알았지?”
치밀어 오르는 공포와 분노에 입술을 깨물었다.
가연이 내 품으로 파고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 어린 애처럼 훌쩍이기 시작했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 거야. 도대체… 왜…….”
난 죽음이 술렁이는 4구역 비상문을 밀어 닫았다.
“가연아. 네 말이 맞아……. 우선은 내려가자. 아무래도 내가 잘못 생각했어.”
지금은 잔뜩 겁에 질린 가연이를 달래는 게 우선이라 생각했다. 결국 정보를 얻겠다던 야심 찬 계획을 접고 다시 덩굴을 밟아야 했다. 어두운 층계참을 따라 5구역에 도착해서야 얼굴을 훔친 가연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난 그런 가연을 보며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이성이 마비될 뻔했다.
쿵
철제 벽에 주먹질하며 이가 갈렸다.
“젠장!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우린 얼마나 잠들어 있던 거냐고.”
‘생각해. 생각해. 분명 이 상황을 타개할 방도가…….’
그 순간 움찔한 난 고개를 돌려 축 늘어진 가연을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가연이는 어떻게……?’
나도 모르게 거친 행동이 튀어나왔다. 가연의 손목을 붙들고 그녀를 무섭게 노려봤다.
“태, 태범아? 왜 그래? 무, 무서워.”
“가연아. 너 아까, 자기가 깨어난 지 이틀이 지났다고 했지? 여기에는 시계도 없고, 넌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고 했는데, 어떻게 시간 개념이 있는 거지?”
“그, 그건……. 인큐베이터를 보고 알았어.”
“인큐베이터?”
“으응……. 인큐베이터들에는 시간을 나타내는 전자센서가 부착되어 있는 거 같아. 내 생각에는 예약된 생명유지시스템 시간을 알리는 타임리미트 같은데…….”
난 그 말에 복도 끝으로 달렸다. 그리고 보존실 문을 열고 내가 깨어난 인큐베이터를 확인했다. ‘00:00’를 가리키고 있는 내 인큐베이터 시간은 정지되어 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인큐베이터가 들어있는 함은 나와 가연이 것을 제외하고도 수십 개가 더 있었다. 작동중인지 아닌지는 확인이 불가능했다. 만약에 나머지 인큐베이터가 전부 가동 중이라면 곧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깨어날 확률이 있다. 물론 이 인큐베이터들 안에 몇 명이 더 잠들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설마 나와 가연이 끝일 리는 없다.
수십 개의 인큐베이터와 생명유지시스템. 이걸 설계한건 누굴까? 우리를 왜 잠재웠을까? 그리고 왜 이 시간 대에 깨어나도록 예약해 뒀을까?
새로운 의문들이 계속해서 피어올랐다.
“태범아. 뭔가 알아낸 거야?”
가연이 조심스럽게 보존실 안으로 들어왔다.
“가연아. 네 말대로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응? 어째서?”
가연의 얼굴에 안도감이 확 퍼졌다.
“여기 인큐베이터들을 봐. 짧게는 3시간에서 25시간 사이에 전부 열리도록 설정되어 있어. 네 말대로 이 시간이 제로로 향하면 생명유지시스템이 정지하고 자동적으로 개폐되는 매커니즘 같아.”
“그러면 3시간 뒤에 다른 사람도 깨어난다는 말이지?”
“그렇겠지. 우선, 다른 사람들이 전부 깨어날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자. 인원이 많아지면 그만큼 넓은 반경을 조사할 수 있어. 모두의 지혜를 모으면 분명 타개책도 마련할 수 있을 거야. 아까, 식량이 있다고 했지? 그건 ‘대기소’에 있는 거야?”
“응. 이쪽이야.”
가연이 나를 데리고 오른편 대기소로 향했다.
대기소는 보존실만큼은 아니었지만, 상당히 넓었다. 바로 앞에 남녀를 구분하는 탈의실이 있었다. 내가 입고 있는 환자복은 여기서 가져온 모양이다. 탈의실 옆에는 공기가 통하는 환풍기가 설치되어 있었고, 전기가 돌아가고 있는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벽에 부착된 다섯 개의 알루미늄 문이 있었는데, 안에는 통조림과 식수 등이 잔뜩 들어있었다.
밖에 있는 인큐베이터는 총 30개. 나와 가연이를 포함해 30명이었고 대충 30명이 일주일을 버틸 식량이 있었다. 인원수에 비하면 그리 많은 양의 식량이 있다고 볼 수 없었다. 어쩌면 나도 가연이도 이곳에서 몇 달 몇 년을 갇혀있게 될지도 모른다.
남은 28명이 전부 깨어났다고 가정할 때, 그 중에 가연이처럼 안전을 위해 이곳에 남겠다고 하는 인원은 몇 명이나 될까? 적어도 반을 잡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식량이 부족해지게 된다.
난 순간 무서운 결말에 도달하는 묘한 망상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30명 중에 모두를 위해 식량을 배급하겠다는 정의감이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 중에는 비도덕적으로 자신만 살아남겠다는 사람도 분명 존재할 거다.
‘잠깐만……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거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이마를 잡고 대기소를 나왔다.
“태범아? 어디 가는 거야?”
가연이 내 행동에 의문이 들었는지 불안한 목소리를 높였다.
대기소 바로 앞에는 관리구역 문이 있었다. 망설이지 않고 문을 열었다. 몇 개의 모니터가 자리 잡은 관리구역엔 수많은 기계장치와 버튼들이 즐비해있다. 분명 밖에 있는 인큐베이터들의 원격관리를 위한 곳이리라.
난 천천히 메인시스템으로 보이는 책상에 가. 전원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8대의 모니터가 동시에 켜졌고, 인큐베이터들의 상황과 그래프, 도표 등이 2D 스크린을 통해 나타났다.
시선을 돌려 버튼들을 쭉 훑어보다가 수동 잠금장치의 스위치를 찾아냈다. 이 버튼을 누르면 산소공급을 정지시킬 수 있는 수동 시스템으로 이행된다.
그때 내 뒤로 가연의 떨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태범아. 너 무슨 생각하는 거야?”
“가연아. 우린 얼마동안 여기에 갇혀있게 될지 몰라. 구조반이 오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지체될지도 모르고, 몇 달은 필연적으로 갇힐 확률이 높지. 만약에 28명이 전부 깨어난다면 식량을 두고 싸움이 벌어지게 될 거야.”
“태범아. 아니지? 너, 설마…… 그런 거 아니지?”
난 주먹을 움켜쥐었다.
“살려면 어쩔 수 없어.”
“뭐? 너…… 뭐라고……”
나도 모르게 손가락이 수동 잠금장치의 빨간 버튼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