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8년 후. 서기 2122년.
“제7회 지구 강하작전 대원이 된 제군들을 믿겠다.”
강단에 선 루스 관리소장의 연설은 점점 고조되어 갔다.
“이번 제군들의 목표는 거점을 잡는 거다.”
그때 무리 안에서 든 손이 루스 관리소장의 말을 끊었다.
“무슨 일이지? 퓨라?”
그녀의 이름에 모두가 놀랐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일었고, 그녀를 멸시하는 듯한 표정을 보인 이들도 많았다.
“우리 임무는 나이트메어 사냥 아닙니까? 이제 와서 거점을 잡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퓨라가 영혼이 없는 듯 차갑게 물었다.
“그동안 나이트메어를 상대로 기존의 전술을 답습하여 전투를 지속한 결과, 우리가 입은 손실은 크다. 그래서 이번 강하작전에선 기존의 작전을 대폭 수정했다. 다른 베나토르들도 마찬가지다. 이번에 강하할 장소는 각자의 강하캡슐이 인위적으로 정해줄 거다. 지구에 착륙한 그대들은 본대가 하강할 때까지 그 지역 나이트메어들을 구축한다. 부가임무는 작전실행 진도에 따라 새롭게 부가될 수 있으니 긴장을 늦추지 마라. 이상. 제군들의 무운을 빈다.”
A701 베나토르 퓨라의 눈은 여전히 강단에 서있는 루스 관리소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곧이어 강하캡슐에 올라타고, 해치가 열릴 때까지 퓨라는 작전지역을 훑어봤다.
“기후는 고온다습. 사계절에 복합한 지형과 산맥으로 이뤄진 반도. 한국…….”
듣도 보도 못한 나라의 이름에 퓨라는 눈을 흘겼다. 조만간 캡슐전체를 휘감은 압력에 해치가 열렸음을 판단하고, 기동 시퀸스에 의한 외부 카메라를 조정했다.
모니터에 나타난 푸르른 광경. 이제부터 퓨라가 하강하게 될 장소이자, 이미 20년 전에 인류가 멸망한 지구다.
그때 캡슐 내부 스피커가 노이즈를 일으켰다.
[루스다. 베나토르 퓨라 들리나?]
“잘 들린다. 무슨 일입니까?”
[이번 강하작전에 참가해줘서 고맙단 말을 하고 싶었다.]
“당신의 그 비열한 목소리는 여전히 토 나올 거 같습니다. 그보다, 전에 약속했던 건?”
[그거라면 걱정마라. 약속대로 이번 강하작전에 성공한다면, 너에게 내 목을 내 놓겠다.]
“흠… 루스 사령관이 그렇게까지 저 지구에 눈독 들이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보물이라도 숨겨 두셨습니까?”
[그건, 굳이 내 입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내려가면 알게 될 거다. 신이 버린 잔혹한 저 세계라면 따분했던 네 일상을 조금은 재밌게 만들어주지 않을까?]
“……신을 믿습니까?”
퓨라가 냉소를 머금고 물었다.
[믿는다.]
“흠. 난 저 세계를 도려낼 생각입니다. 그동안 그 미쳐버린 신에게 목숨이나 구걸하십시오.”
[……행운을 빈다.]
통신이 끊기자마자 캡슐이 강하 시퀸스로 이동했다. 각 해치에서 수많은 캡슐들이 불을 뿜었고, 지구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퓨라는 점점 다가오는 지구를 노려보며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흠. 지루하진 않겠지?”
<1. 5구역 보존실>
[생명유지시스템 종료까지 앞으로 5초 4 3 2 1.]
‘여긴 어디지?’
아주 긴 잠에서 깨어난 듯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뿌예서 잘 보이지 않는 시야를 들어 정면을 주시했다. 눈앞이 울렁거리는 모습에, 내가 물속에 있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생명유지시스템이 종료되었습니다. 개폐 프로시저로 자동 이행합니다. 유압체크. 액체산소배출.]
요란한 사이렌소리와 함께 붉은 경보등이 점멸했다. 곧이어 내 몸을 감싸주던 묘하게 편안한 물이 서서히 빠져나갔다.
[산소주입. 시스템 가동률 올 그린. 해치개방.]
입과 연결되어 있던 인공산소주입기를 붙잡았다. 이상하게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내가 눈을 뜬 곳은 묘하게 생긴 원통의 안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내가 왜 이런 곳에 들어있던 걸까?
손을 뻗어 개폐 된 유리커버를 밀어보려고 했다. 역시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분명 귀에 들린 경보음대로라면 자동적으로 열려야할 커버는 뭔가에 걸려 열리지 않고 있었다. 눈을 비비며 시야 초점을 맞추고 다시 정면을 확인했다.
커버를 감싸고 있는 제법 굵직한 덩굴식물이 보였다. 덩굴은 올가미처럼 내가 들어있는 원통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있는 힘을 다해 커버를 발로 걷어찼다. 오랜 시간 힘을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린아이가 들이받는 것 같은 완력조차 낼 수 없었다. 주먹으로 개폐커버를 쳤다.
“사, 살려줘. 여기서 꺼내줘.”
그러나 매정한 덩굴은 끊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살짝 열린 덮개사이로 생겨난 틈에서 차가운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춥다.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두 팔로 아무것도 입지 않은 몸을 감싸 안았다. 보아하니 겨울은 아닌 듯한데, 피부로 와 닿는 감각은 찌릿할 정도로 차다.
그때였다. 고개를 숙여 이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려는 순간, 쿵하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고개를 확 들어 정면을 바라봤다. 내가 들어있는 원통에 손을 대고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 있었다. 그 얼굴이 단번에 불안했던 마음을 가시게 만들었다.
“가, 가연아!”
정돈되지 않은 머리에 경직된 표정. 외국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환자복을 입은 그녀는 나와 같은 청운고등학교 1학년 5반 여학생 홍가연이었다. 현 상황에 상당히 놀랐는지 언제나 보여줬던 절제된 행동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었다. 가연이는 그녀답지 않게 냉정함을 잃고 연신 유리커버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너 태범이지? 정태범이 맞는 거지?”
순간 그녀의 눈가가 가늘게 떨리더니 눈물이 고이는 모습이 보였다. 나를 만난 게 그렇게 기쁜 걸까? 왜 저렇게 안도하는 걸까? 하긴 그녀를 만난 지금의 나도 더할 나위 없이 포근한 안도감에 온몸의 신경이 풀리는 듯한 기분이니까.
아무튼 여기서 나가는 게 우선이다.
“가연아. 감동적인 재회인 건 알겠는데…. 지금은 여기서 나가고 싶거든. 도와줄 수 없겠어? 이 덩굴 때문에 문이 열리지 않아.”
가연이 고개를 돌려 엉망이 된 얼굴로 사방을 훑어봤다.
“자, 잠깐만 기다려. 지금 꺼내줄게.”
그렇게 말한 가연이 잽싸게 왼편으로 사라졌다. 가연이를 만나게 된 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잠시 후, 돌아온 가연이의 손에는 녹이 잔뜩 슬어 날이 전혀 들것 같지 않은 비상용 손도끼가 들려 있었다.
“이, 이걸로 잘리지 않을까?”
“우선 시도해 봐야지. 나도 밀어 볼 테니까.”
가연이 있는 힘을 다해 필사적으로 덩굴을 내리쳤다. 나도 가연의 구령에 맞춰 유리커버를 향해 몸을 던졌다.
“하나 둘 셋!”
쿵!
“다시! 하나 둘 셋!”
평생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유리커버가 예고 없이 열렸다. 발을 디딜 공간을 잃은 난 유리커버가 열리며 중심을 잃어버렸다. 바로 앞에서 가연과 눈이 마주쳤고, 그대로 뒤엉켜 고꾸라졌다.
“꺄악!”
짧은 비명이 묘하게 울리는 공간에서 머리를 문지르며 일어났다. 가연이 바닥에 대자로 누워 거친 숨을 내뱉었다. 땀으로 범벅이 돼 환자복이 그녀의 피부를 슬쩍 내비추고 있었다.
“괜찮아?”
“어? 응……. 나만 남은 게 아니었구나. 정말 다행이야.”
가연이 무슨 말을 하는 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보단 저 원통 안에서 비참하게 굶어죽는 꼴은 면할 수 있게 되었다. 급박했던 상황이 지나고 차츰 이성적인 생각이 자리 잡을 무렵 가연이 달아오른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며 말했다.
“저, 저기 태범아. 너…… 오, 옷 좀 입지 그래?”
“응? 엇!”
누가 봐도 위험한 장면이었다. 홀딱 벗은 남자가 예쁜 여자 위에 올라타 있었으니. 상황이 상황이라 해도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솟구쳤다. 아쉬운 대로 온몸을 배배 꼬며 주위를 둘러봤지만, 눈에 띄는 천 조각은 보이지 않았다.
“가연아. 너, 그 옷은 어디서 난거야?”
가연이 두 눈을 가린 채 손가락으로 오른편을 가리켰다. 오른편에는 조금 떨어진 곳에 ‘대기소’라는 짧은 팻말이 있었다. 저기서 옷을 찾은 걸까? 난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일어섬과 동시에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기, 기다려. 내가 가져올게. 아직 다리에 힘이 없을 거야.”
가연이 고개를 돌린 채 일어나 천천히 ‘대기소’ 쪽으로 향했다.
난 그동안 이 묘한 공간을 훑어봤다. 덩굴을 비롯한 수많은 식물이 바닥, 천장,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식물들을 제외하면 딱 보기에 어느 공장이나 실험소를 연상케 하는 분위기였지만, 한동안 관리가 소홀했는지 전체적으로 어두운 암갈색으로 변색되어 있었다.
여기는 뭐하는 곳일까? 그리고 내가 방금까지 들어있던 통은?
원통 아래에 ‘생명유지인큐베이터’라는 글자와 함께 묘한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생명유지? 생리작용이 제한된 상황에서도 인공적으로 심장과 뇌를 돌게 만드는 일종의 관리캡슐이라 보면 될까? 대충 의미는 이해가 됐는데, 내가 왜 이런데 들어 있던 거지?’
“자, 일단 이거 입어.”
어느새 환자복을 가져온 가연이 내 앞에 내려놓았다.
난 서둘러 환자복을 입었다. 속옷은 애초부터 없는 걸까? 그래도 몸의 중요부위를 가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겨야 할 것 같다. 파자마 같은 환자복을 입고도 한동안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 주저앉은 채로 기다렸다.
마음이 조금 진정되자 점점 긍정적인 사고가 돌아왔다.
“가연아? 아까부터 왜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봐?”
가연은 내가 원통에서 나온 후부터 거의 눈을 때지 않았다. 마치 동물원 원숭이가 된 기분이다.
“아, 아니야. 미안……. 믿겨지지가 않아서……. 설마 태범이 네가 인큐베이터 안에 있을 줄은 몰랐거든.”
“그럼, 너도 저 통 안에 있었던 거야?”
가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이틀 전에 눈을 떴어. 다행히 방금처럼 인큐베이터가 막히지는 않아서 나오는 건 수월했지. 그런데 나오고 나서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닫고는 너무 무서워져서…….”
“그럼, 역시 여기에는 너밖에…….”
가연이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 동안 이 건물 안에 있었어. ……그보다 몸에 이상은 없는 거지? 어디 아픈 곳은 없어?"
"어, 어…… 그런 건 없는 거 같아."
"혹시 배고프면 말해, 저기 대기소에 통조림이 있더라고. 나도 그걸 먹고 있었어."
"응, 고마워."
갑작스럽게 직면한 낯선 환경 탓에 배가 고프기는커녕 오히려 거북하기만 했다. 고개를 들어 덩굴이 만연한 천장을 바라봤다.
“보아하니 이 건물, 지하에 있는 거 같은데……. 밖으로 나가보진 못한 거야?”
“그게…… 나갈 수 있는 곳을 찾아보긴 했지만, 비상구는 덩굴 때문에 가로막혀버렸고, 위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도 정지되어있었어.”
“그럼. 여기가 어딘지는 전혀 모른다는 거네.”
“응. 그래서 말인데……, 우리가 왜 저 인큐베이터 안에 있었는지……. 혹시 기억나는 거 없니?”
가연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결국 매정하게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구나. 너도 기억이 없는 모양이네.”
그때였다. 갑자기 건물 전체에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화들짝 놀란 나와 달리 가연은 이미 알고 있던 것처럼 그리 놀라지 않았다.
“이, 이 진동은 뭐야?”
“모르겠어. 엊그제부터 가끔 이러더라고. 마치 거대한 뭔가가 이 위를 지나가는 느낌이던데. 뭔지는 모르겠어. ……이 진동 때문에 밖으로 나가기가 더 무서워져서…….”
“이 위에 뭔가가 있다는 말이네.”
천장을 올려다보자, 진동에 의해 모래알갱이와 먼지가 낙하하는 게 보였다. 불길한 감각이다. 가연이 말대로 밖에 나가는 건 포기해야 할 것 같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은 고도의 실험실. 사람의 관리가 전혀 이뤄지지 않은 낡은 광경. 그리고 이 안에 얼마나 잠들어 있었는지 가늠할 수 없는 나와 가연이. 난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슬슬 쓰지 못했던 근육이 되살아났고 걷는데도 지장은 없었다.
“이제 움직일 수 있는 거야?”
“응. 그리 걱정할 정도는 아닌 거 같아. 우선 이 상황을 명료하게 알 수 있는 정보가 필요해.”
사방으로 나있는 문들을 살펴봤다. 오른편에 위치한 대기소와 관리구역. 왼편에는 제법 큰 철제 문이 녹슨 채 방치되어 있었다.
“밖은 위험해. 뭐가 있을지 모른다고.”
“그렇다고 여기에 앉아있을 수만은 없잖아. 이런 건물 속에 우리만 있다는 건 말이 안 돼. 분명 다른 사람도 있을 거야.”
난 녹슨 철문으로 다가갔다. 손잡이를 돌리자, 가연이 먼저 드나들었는지 손쉽게 열렸다.
“잠깐만, 같이 가.”
가연이 재빨리 내 뒤로 따라붙었다.